1458화. 도주
*
다급히 안쪽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대전 가득 펼쳐져 있는 흑색 장막을 보고 넋을 잃었다.
그러나 토실토실한 승려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는 매서운 얼굴로 원경(圓鏡)을 꺼냈다.
곧이어 원경에서 굵은 회백색 빛이 뿜어져 나와 흑색 장막을 가격하자 귀를 찢을 것 같은 엄청난 굉음이 울렸다.
하지만 흑색 장막은 심하게 출렁거리면서도 깨지지는 않았다.
그와 동시에 수척한 남자, 경도도 청색 비검 네 자루를 날렸는데, 비검은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며 꼭 푸른 연꽃 같은 형태를 이루더니 흑색 장막을 향해 꽃잎 모양 검기들을 방출했다.
퍽! 퍼퍽! 퍽!
수많은 검기가 꽂히자 결국 흑색 장막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찢어졌다. 안쪽 상황을 확인한 영서의 얼굴에 분노와 함께 부끄러움이 스쳤다.
“이 도둑놈! 간도 크구나!”
침입자는 도망치지 않고 남아 있었는데, 보일 듯 말 듯 한 은빛 인영의 기운으로 미뤄 판단했을 때 고작 원영기에 불과했다!
그러나 금빛 보호막 안의 그 침입자는 바깥에 두 연허기 수사가 나타난 것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태연하게 첫 번째 돌 궤짝 안의 옥간을 마저 살피더니, 곧 그 옆의 또 다른 궤짝으로 걸어갔다.
그러곤 다시 미간에서 검은빛을 방출해 궤짝 위 금제를 깨뜨리고는 의식으로 옥간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 괘씸한 놈!”
“감히 본 종의 비급을 훔쳐보다니, 죽여 버리겠다!”
영서와 경도의 노호가 동시에 울렸다. 영서는 곧 황색 옥패를 꺼내더니 원래 대전에 펼쳐져 있던 금빛 보호막을 향해서 노란색 빛줄기를 방출했다.
빛줄기가 보호막에 닿은 순간, 두꺼운 막 가운데가 쩍 갈라지며 통로가 만들어졌다.
그들은 곧장 몸을 날려 침입자 쪽으로 돌진했지만 그 모습을 본 인영이 주문을 외우며 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손가락 끝에서 검은색 빛이 방출돼 백옥 기둥에 꽂혔다.
그러자 기둥의 부적문이 눈부시게 밝아지더니 보호막에서 노을빛 기운이 뿜어져 나와 순식간에 두 수사의 몸을 휘감았다.
영서와 경도는 무서운 늪에 빠진 것처럼, 손을 들어 올리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몸이 무거워졌다. 경도가 놀란 얼굴로 외쳤다.
“젠장! 진법이 바뀌었습니다!”
“넌 대체 누구냐! 어떻게 금제를 통제할 수 있는 거지?”
영서는 얼굴에 노기를 띠고 물었다. 하지만 인영은 그들의 말엔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의식을 펼쳐 빠르게 옥간을 읽으면서, 한편으론 수결을 맺어 백옥 기둥을 자극했다.
그러자 노을빛 기운이 두 수사를 하나씩 둘러싸고 회전하더니 소용돌이를 형성해 그들의 몸을 더욱 더 단단히 얽어맸다.
그들은 힘껏 발버둥 치면서 각자의 법보를 이용해 소용돌이에서 빠져 나가려고 했지만 미친 듯이 공격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초조해 죽을 지경이었다. 외부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금제가 뜻밖에도 자신들의 발목을 잡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바로 그때, 신형 여덟 개가 내각 밖에서 날아왔다. 바로 순찰대 대장인 화신기 수사들이었다.
이들은 상황을 보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영서와 경도를 구하기 위해 법보로 보호막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안 돼! 멈춰라!”
영서가 다급히 소리쳤지만, 때는 이미 늦고 말았다. 순찰대 대장들의 법보 8개는 그대로 금빛 보호막을 강타했고, 결국 보호막은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보호막 한쪽이 불룩해지더니 곧 촉수 같은 빛줄기가 뻗어 나와 대장들을 칭칭 묶고는 두꺼운 보호막 속으로 끌어당겼다.
연허기 수사들도 힘을 못 쓸 정도였으니 순찰대 대장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 역시 보호막에 갇혀 꼼짝도 못하는 신세가 돼 버렸다.
“젠장!”
영서가 욕을 뱉자 경도도 어두운 얼굴로 순찰대 대장들을 보며 물었다.
“물론 종문에 이곳 상황을 알렸겠지?”
“예……. 알렸…….”
순찰대 대장은 입을 여는 것조차 힘들어하며 겨우 대답했다. 영서와 경도는 그 말을 듣고서야 조금 누그러진 표정으로 인영을 돌아봤다.
인영은 이때까지도 돌 궤짝의 금제를 깨뜨리고 옥간들을 읽고 있었는데, 워낙 속도가 빨라 벌써 내각 안 거의 대부분의 옥간을 살펴본 후였다.
두 연허기 수사와 순찰대 대장들 모두 초조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금제에 묶여 있는 한 그저 멍하니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누가 감히 냉염종을 능멸하는가!”
갑자기 뇌성 같은 노호가 밖에서 들려오자 그 소리의 파동으로 인해 대전 안 공기는 물론 보호막까지 심하게 떨렸다.
금빛 보호막 속에 갇혀 있던 영서, 경도와 순찰대 대장들 역시 귀가 멍멍해지고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지만 뜻밖에도 눈에는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반면 돌 궤짝 앞에 서 있던 인영은 흠칫 굳은 채 밖의 상황을 살피고는 곧 미간에서 검은빛을 방출했다.
쿠우웅! 쿵!
여러 갈래로 갈라진 검은빛은 아직 읽지 못한 옥간들이 담겨 있는 궤짝 세 개의 금제를 동시에 깨부쉈다.
쌔애애액!
궤짝의 금제가 깨지던 순간,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거한이 장경각 입구에서 날아왔다.
키가 남들보다 3배나 되는 이 사내는 무척 강인해 보였으며, 그가 입고 있는 선홍색 도포에선 화염이 이글거리고 있어서 대전 안 공기가 순식간에 무서울 정도로 뜨거워졌다.
거한의 몸에서 풍기는 기세를 봤을 때, 그는 합체기 수사임이 분명했다.
“이 추잡한 도둑놈, 각오해라!”
붉은 머리의 거한은 인영을 발견한 순간 한층 더 매섭게 포효하더니 불타고 있는 거검을 뽑아 들었다. 거검은 곧 산까지 가를 정도의 기세로 보호막을 내리쳤다.
보호막의 노을빛 기운이 다시 한 번 솟구쳐 올라 거검을 막아 보려 했지만, 거검과 제대로 부딪치기도 전에 검신 주위에 이글거리는 화염에 의해 불타 버렸다.
쩌쩌쩍.
마침내 검날이 보호막에 닿은 순간, 막 위에 수많은 균열이 생겼다. 하지만 보호막은 완전히 깨지지는 않은 채 일격을 버텨냈다.
그때 인영이 흡인력을 이용해 돌 궤짝 세 개에 담겨 있던 옥간들을 전부 거둬들인 뒤 손바닥 속에 집어넣었다.
이 광경에 붉은 머리 거한은 격분하며 거검을 감싸고 있는 화염을 자신의 키보다도 높이 일으켰다.
그 거센 화염에 금빛 보호막은 결국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고, 덕분에 연허기와 화신기 수사들도 드디어 자유를 되찾았다.
화염을 휘감은 거검은 보호막을 깨뜨린 후 계속해서 인영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자 인영이 휙 고개를 들더니 미간에 난 눈동자에서 굵은 검은빛을 방출해 거검에 맞섰다.
콰콰콰쾅!
검은빛이 폭발한 순간 거검 위의 화염도 절반이 사라져 버렸으며, 그와 동시에 주위 공간에 파문이 일어 거검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파멸법목(破滅法目)!”
거한이 깜짝 놀란 눈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인영의 체표에 갑자기 자색 번갯불이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주위로 퍼져서 뇌전 전송진을 형성했다.
뒤이어 진법의 빛이 확 일어나며 천둥소리가 울린 순간, 인영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감히 어딜 도망치려 하느냐!”
붉은 머리 거한이 포효하자 거검 위의 화염이 다시 치솟았으며, 곧 거검과 비슷한 크기의 검영으로 분리돼 나와 거검보다 몇 배나 빠른 속도로 진법을 내리쳤다.
콰콰콰콰콰쾅!
굉음과 함께 눈부신 붉은빛이 폭죽처럼 터지면서 거친 기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 기세에 연허기 수사들은 휘청거리다 간신히 균형을 잡았지만, 화신기 순찰대 대장들은 그대로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강렬하던 붉은빛이 서서히 옅어지고 나자 바닥에 깊게 패인 검흔이 보였지만 인영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대전에 모여 있던 수사들은 모두 잿빛이 된 얼굴로 붉은 머리 거한을 바라봤다.
거한의 두 눈에는 노기 가득한 불길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 * *
그 무렵, 한립의 동부 밀실.
밀실 바닥에는 가느다란 번갯불이 흐르고 있는 자색 대진이 그려져 있었고, 그 옆엔 한립이 가부좌를 한 채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대진이 갑자기 눈부시게 빛나며 천둥소리 같은 굉음이 울린 순간, 검은 기운으로 둘러싸인 인영이 대진 안에 나타났다.
두 눈을 번쩍 뜬 한립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떠올랐다.
곧이어 한립이 법결을 운용하자 인영을 휘감았던 검은 기운이 흩어지면서 은빛으로 빛나는 병사의 모습이 드러났는데, 이는 물론 진짜 사람이 아니라 부병(符兵)이었다.
병사는 몸에 한가득 검흔이 나 있었으며, 금방이라도 소멸될 것처럼 기운이 미약했다.
한립은 병사에게서 30~40개의 옥간을 전부 거두고는 병사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러자 병사의 미간에서 검은빛이 번쩍이더니 곧 흑색 구슬이 뽑혀 나왔는데, 구슬 안에는 은색 안개 같은 것이 천천히 떠다니고 있었다.
구슬이 빠져나간 순간 병사의 몸이 그대로 무너져 내리는가 싶다가 이내 심하게 훼손된 은색 부적과 자색 부적으로 변해 바닥에 떨어졌다.
이 부적들은 한립이 며칠 전 천부당에서 훔쳐 온 재료로 만든 것으로 은색 부적은 바로 갑원부였고, 자색 부적은 태일화청부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갑원부는 너무 많이 손상된 탓에 다시 사용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한립은 부적들을 회수한 후 다시 가부좌를 하고 흑색 구슬을 자신의 미간에 부착했다. 그러자 구슬 속 은빛 연기가 갑자기 가느다란 형태로 구슬 밖으로 나와 미간을 한 바퀴 맴돌다 다시 구슬로 돌아갔다.
은빛 연기는 사실 모기보다 더 작은 크기의 수많은 글자들이었는데, 바로 갑원부로 만든 인영이 장경각에서 훔쳐본 비급의 내용들이었다.
냉염종이 오랜 세월 축적해 온 것인 만큼 워낙 양이 방대했기 때문에 단번에 흡수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아직 시간이 많았으므로 한립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살펴볼 생각이었다.
이렇게 꼬박 사흘을 그 자리에 앉아 있던 한립은 나흗날 새벽이 되어서야 조용히 눈을 떴지만 표정이 썩 밝지 않았다. 제법 현묘한 내용도 있긴 했지만 지금의 한립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는 것들이었다.
한립은 나직이 한숨을 쉬고는 흑색 구슬을 회수한 뒤, 이번엔 갑원괴뢰가 마지막 순간에 챙겨 왔던 옥간들을 꺼냈다.
옥간을 보는 한립의 표정은 조금 복잡했다.
‘이 중엔 도움이 되는 게 좀 있으면 좋겠는데.’
한립은 옥간을 하나씩 들고 의식으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렇게 또 하루가 지났다.
마지막 옥간에서 의식을 회수한 순간 한립의 눈에 실망의 빛이 스쳤다. 옥간들 속에는 꽤 심오한 공법이 기록돼 있었지만 역시나 지금의 한립에게는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한립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온갖 고생을 하고 냉염종에 큰 소동까지 일으켰는데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간 것이다.
한립은 곧 옥간을 전부 없애기 위해 한데 끌어 모았다.
방금 전 옥간에 추적용 금제가 없는 걸 확인하긴 했지만 영환계에 선천자기라는 특이한 기운이 존재하는 걸 보면 독특한 수법이 펼쳐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에 그는 차라리 깨끗이 파괴해 버리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음?”
한립은 순간 멍해졌다.
30여 개의 옥간을 단번에 가루로 만들어 버렸지만, 그중 겉으론 그저 평범해 보였던 담황색 옥간 하나가 멀쩡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한립은 호기심에 찬 얼굴로 옥간을 들어 자세히 살펴봤다.
방금 전 한립은 옥간을 파괴하기 위해 단단한 무쇠 기둥이라도 부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사용했었는데 뜻밖에도 이 옥간은 흠집 하나 없이 온전했다.
그러나 옥간은 별다른 특징 없이 그저 흔하디흔한 옥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안의 내용 또한 연허기 수련에 적합한 체련(體煉) 공법일 뿐이었다.
한립은 다시 한 번 옥간에 살짝 힘을 주었는데 옥간 표면이 별처럼 은은하게 반짝이더니 그의 힘을 막아 냈다. 그리고 힘주기를 멈추자 별빛 역시 사라졌다.
‘역시 뭔가 있는 게 분명해!’
한립은 방금 전 별빛이 결코 추적용 금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감지하고는 다시 한 번 의식을 옥간 속으로 집어넣었다.
방금 전엔 무심코 넘겼지만, 이렇게 기이한 옥간이라면 그 안에 담겨 있는 공법 역시 평범한 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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