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6화. 도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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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밀실 안.
한립은 방석 위에 가부좌를 하고 있었고 그의 앞에는 방금 사 온 단약과 운학초가 놓여 있었다.
그가 백자 병에서 오운단 한 알을 꺼내 복용하자 단전에 따뜻한 기운이 샘솟더니 단약이 녹으면서 나온 영력이 점차 법력으로 바뀌었다.
이에 그는 운학초를 집어서 바로 씹어 삼켰다. 일각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한립의 단전 안이 다시 따뜻해졌으며 역시나 약간의 법력이 단전으로 모여들었다.
한립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드디어 선천자기가 법력 회복의 중요한 열쇠라는 걸 확인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꼬박 하루 동안, 통역곡에서 사온 단약과 운학초를 절반 넘게 복용하자 법력이 금세 원영 후기까지 회복되었다.
기쁨에 겨워 남은 단약을 전부 삼키려던 순간, 한립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앞서 복용했던 단약이 완전히 법력으로 전환되지 않아 영력이 막 법력으로 변해 단전으로 모여 들었지만, 단전은 꼭 물이 가득 담긴 독처럼 더 이상 법력을 담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남은 법력은 그저 단전에 잠시 머물다가 이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한립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원영의 이상으로 인한 문제인 듯했지만 구체적인 이유는 육신과 의식이 좀 더 회복된 다음에야 알 수 있을 듯했다.
어쨌든 지금은 단약을 더 복용해봐야 아무 소용없었다.
수련으로도, 단약으로도 더 이상 법력을 높일 수 없으니 이젠 어떻게 육신과 의식을 빨리 회복할 수 있을지를 알아내는 게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한립은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손가락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한립은 문득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객경장로 영패를 꺼내 의식을 주입했고, 곧 금색 빛의 냉염종 지도가 눈앞에 나타났다.
지도 위를 오가던 한립의 시선이 곧 집성봉 위에 표시돼 있는 ‘장경각(藏經閣)’에서 멈췄다.
* * *
흰 구름이 자욱한 출운봉 중턱.
산길을 따라 만들어진 계단을 올라가던 젊은 제자는 눈앞에 뭔가가 번뜩인 순간 의식이 흐릿해진 채 몸이 굳어 버렸다.
이 냉염종 제자 앞에는 어느새 키 큰 청년이 나타나 있었는데, 바로 한립이었다.
“장경각에 대해 자세히 말해 보거라.”
제자를 바라보는 한립의 눈동자엔 푸른빛이 번쩍였고, 한립의 목소리 역시 어딘가 기이한 느낌을 풍겼다.
담청색 도포를 입은 제자는 꼭 반쯤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한 눈으로 대답했다.
“장경각은 집성봉(集聖峰)에 위치해 있으며, 내각(内閣), 외각(外閣)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외각은 모든 제자와 장로에게 개방돼 있는 반면, 내각에는 내문제자와 장로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는 제자의 설명을 들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냉염종은 종문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인 장경각을 무척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제자와 장로들이 장경각에서 서책을 구하기 위해서는 대량의 영석을 지불하는 건 물론이고 그간 쌓은 종문에대한 ‘공헌 점수’도 그만큼 차감해야 했다.
공헌 점수란 말 그대로 냉염종의 제자와 장로가 종문에 공헌한 정도를 나타내는 점수로, 보통은 종문이 내린 임무를 완수함으로써 획득할 수 있었으며 당연히 임무가 어려울수록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다.
한마디로 공헌 점수를 쌓지 못한 자는 절대 고계 비법이나 비술을 구할 수 없었다. 따라서 몇몇 사람들은 위험을 각오하고 다른 방법을 찾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때론 불의한 마음을 품은 산수들이 외문장로가 되어 냉염종에 들어온 뒤 장경각에 잠입하기도 했으나, 다들 예외 없이 발각되어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장경각에는 수많은 강력한 금제가 펼쳐져 있는 데다 연허기 장로가 밤낮 안 가리고 수시로 순찰을 돌아 웬만한 수사는 아예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잠시 뭔가를 고민하던 한립은 곧 냉염종 제자의 미간을 짚었던 손가락을 떼고는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냉염종 제자는 그제야 한참 동안 들고 있던 발을 내려놓을 수 있었는데,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을 정도로 순간 몸이 휘청거렸다.
제자는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방금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 듯 그저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갔다.
잠시 후 한립의 신형이 집성봉에 나타났다.
한립은 높고 짙푸른 측백나무 아래에 서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2층 높이의 전각을 바라보고 있었다.
팔각 형태의 그 전각은 당연히 8개의 벽면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오직 정남쪽 방향의 벽에만 문이 나 있고, 벽면과 지붕에는 낙뢰 및 화재에 대비한 여러 종류의 부적문이 새겨져 있었다.
또한 전각 주위는 두 무리의 순찰 수사가 서로 일정 거리를 두고 돌면서 순찰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전각의 상황을 살펴보던 한립은 별다른 행동 없이 일단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그날 밤, 냉염종 심처의 어느 골짜기 안.
골짜기에는 청석으로 만들어진 대전이 위치해 있었고, 때때로 한 무리의 순찰 제자들이 대전 주위를 지나가곤 했다.
그렇게 순찰하는 제자들은 총 8개 조나 됐는데 그들을 이끄는 순찰대 대장은 모두 화신기였다.
이로써 이 청석 대전이 얼마나 중요한 장소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또다시 순찰대 한 조가 골짜기 입구를 조용히 지나갔다. 제일 앞에서 날아가고 있던 사내가 피곤한지 길게 하품을 하던 순간, 수십 장 떨어진 곳에 또 다른 순찰대가 나타나 사내와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푸른 옷을 입은 이 사내는 그 모습을 보고 입을 삐죽거렸다. ‘천부당(天符堂)’이 아무리 중요한 장소라고는 해도 이렇게까지 많은 순찰 제자를 배치해 둔 건 과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천부당은 은밀한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밖에선 호종대진이 냉염종 전체를 보호해 주고 있는데 누가 이곳에 잠입할 수 있겠는가.
사내는 그저 전음으로 뒤의 제자들에게 주의해서 경계하라고 지시한 뒤 골짜기 안으로 날아갔다.
그런데 대전 근처까지 다가간 순간, 갑자기 자색 번갯불이 번쩍이며 천둥소리 같은 굉음이 크게 울리더니 곧 다시 조용해졌다.
그때 그의 뒤쪽에 있던 순찰 제자들이 먼저 소리쳤다.
“누구냐!”
“천부당에 침입자가 있다!”
푸른 옷을 입은 사내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순식간에 몸을 날려 대전 앞에 도착했다.
“괘씸한 놈! 서둘러 주위를 봉쇄해라!”
사내는 매서운 외침과 함께 법보를 꺼냈으며, 그의 뒤에 있던 제자들은 바로 흩어져서 대전을 둘러쌌다.
곧이어 다른 조의 순찰 제자들 역시 잇따라 날아와, 순식간에 거의 백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대전을 물샐틈없이 포위했다.
하지만 금제 때문에 의식으로 대전 안을 감지하는 건 불가능한 상황이라, 아무리 닫힌 문 안쪽을 향해 귀를 쫑긋 세워 봐도 도저히 적의 동태를 파악할 수 없었다.
바깥을 포위하고 있던 순찰대 대장들은 들어갈지 말지 결정하기가 힘든 듯 난처한 얼굴로 서로 마주 보았다. 겁이 나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대전 안에 발을 들일 자격이 있는지가 걱정됐던 것이다.
“무슨 일이냐?”
하얀빛이 쏜살같이 날아와 대전 앞에 착지하더니 백발노인으로 변했다.
“범(範) 대사님, 방금 전 누군가가 천부당에 침입했습니다! 안에 들어가 수색하려 했지만 규율 때문에 망설이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순찰대의 대장 중 한 명이 재빨리 나서서 말하자 노인이 불같이 화를 냈다.
“뭐라고! 이런 멍청한 것들 같으니! 이런 순간까지 규율을 운운하고 있단 말이냐! 뭘 멍청히 서 있는 게야, 빨리 들어가지 않고!”
말을 마친 노인이 먼저 대전을 향해 날아가자 대장들도 곧장 그 뒤를 따랐다.
대전 입구 바로 앞까지 날아든 백발노인은 순간 멍해졌다. 문에 걸려 있던 금제가 손상된 부분 없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노인은 의아해하면서도 바로 영패 모양의 물건을 꺼내 문 쪽으로 흰빛을 방출했다. 그러자 문이 한 번 번쩍 빛나더니 끼이익 소리를 내며 저절로 열렸다.
순찰대와 함께 곧장 대전 안으로 들어선 백발노인이 법결을 운용하자 대전 곳곳에 흰빛이 피어올라 주위를 훤하게 비추었다.
컴컴하던 대전이 밝아진 순간, 안에 들어왔던 이들의 얼굴이 모두 굳었다.
원래 대전 안은 아주 단순한 구조여서 한눈에 대전 전체를 살필 수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침입자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바닥에 검게 그을린 자국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아무도 없다니? 설마 벌써 도망친 건가?”
순찰하던 제자들은 당황한 듯 마주 보며 수군거렸고, 푸른 옷을 입은 사내도 동그래진 눈으로 몇 번이나 대전 안을 둘러보았다.
처음 대전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을 때부터 단 한 번도 눈을 뗀 적이 없었는데 대체 언제 어떻게 도망쳤단 말인가.
“아! 천영석(天影石)! 관월초(觀月草)가……!”
백발노인이 미친 듯이 백옥 진열대로 달려가더니 창백해진 얼굴로 덜덜 떨며 중얼거렸다.
각 진열대엔 재료가 가득 놓여 있었고, 그 주위에는 금제가 덮여 있었는데 진열대 두 개의 금제가 해제되고 재료도 적잖게 줄어 있었다.
“유란목(流瀾木), 철심우(鐵心羽)까지!”
백발노인은 또 다른 진열대로 달려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외쳤다. 순찰대 대장들의 표정 역시 일그러져 있었다. 노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당장 추적해라! 종내 순찰 제자 전부를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이 도둑놈을 잡아!”
* * *
천부당의 진귀한 부적 재료가 대량으로 도난당하자 냉염종의 순찰 제자들이 모조리 나서서 그 도둑을 찾기 시작했다.
도둑 추적은 한밤중부터 날이 밝을 때까지 계속됐으며, 나중엔 외문제자까지 불려 나와 추적 대열에 합류했다.
하지만 영염산맥 전체를 뒤집어 엎고도 끝내 도둑의 종적을 찾지 못하자 결국 추종술에 능한 연허 후기 장로까지 직접 천부당에 와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는 도둑이 뇌전전송진(雷電傳送陣)을 이용해 도주했으며, 어떤 단서도 남기지 않은 탓에 자신 역시 그를 추적할 방법이 없다는 결론만 내놓았다.
연허 후기 장로조차도 그 도둑을 찾지 못했고, 그렇다고 이런 사소한 일 때문에 합체기 태상장로까지 귀찮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천부당의 범 대사는 어쩔 수 없이 도둑에 대한 추적을 멈췄다.
그러나 표면적인 추적은 끝났지만 냉염종이 이 일을 이렇게 가볍게 넘길 리는 없었다.
영염산맥 주위의 호종대진(護宗大陣)에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걸 봐서는 도둑이 아직 산맥 안에 있는 게 확실했으므로 암암리에 고수를 시켜 추적을 계속하도록 한 것이다.
또한 이번 일로 냉염종 내의 경계는 예전보다 몇 배나 더 삼엄해졌다.
* * *
밤이 내려앉은 냉염종의 장경각.
눈 깜짝할 사이에 사흘이 지났다. 얼마 전 천부당 사건이 있은 후부터 이곳을 순찰하는 사람의 숫자도 예전의 두 배로 늘어나 있었다.
전각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는 숲 속에서 옅은 은빛을 띤 흐릿한 인영이 홀연히 나타났다. 주위에 깔린 어둠 덕분에 인영의 얼굴은 그저 희미하게만 보였다.
인영은 고개를 들어, 왠지 신비해 보이는 팔각 전각을 바라보다가 연자색 부적을 꺼내 몸에 붙였다. 그러자 부적이 저절로 몇 조각으로 찢어지더니 꼭 흐릿한 올챙이 같은 모양의 부적으로 변해 인영을 둘러싸고 녹아들었다.
곧이어 자색 안개가 떠올라 인영을 덮은 순간, 인영은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물론 이것은 인영이 사라진 게 아니라 그저 눈에 보이지 않게 된 것뿐이었는데 투명해진 인영은 곧 장경각 쪽으로 거리낌 없이 날아갔다.
순찰대가 매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감시하고, 심지어 의식으로도 주위 구석구석을 살피고 있었지만 이 인영의 존재를 눈치 채는 이는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영은 장경각 입구에 도착했다.
이미 늦은 밤이라 장경각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는데, 널따란 석문에 은은한 빛이 떠올라 있는 걸 봐서 금제가 걸려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인영은 석문을 향해 주문을 읊조리다 수결을 맺음과 동시에 옅은 푸른 안개를 입에서 내뿜었다.
사실 그 푸른 안개는 아주 작은 크기의 수많은 부적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안개가 석문 표면의 금제에 닿자마자 그 작은 부적들이 곧장 빛의 막으로 녹아들었다.
그러자 금제로 만들어진 빛의 장막엔 커다란 구멍이 생겼고 투명한 인영은 그 구멍 속으로 소리 없이 들어갔다.
금제가 뚫린 석문은 인영의 진입을 막기엔 역부족이었지만, 인영이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구멍 주위의 옅은 빛을 일렁이며 바로 구멍을 매웠다.
이 모든 일은 그야말로 눈 깜짝 할 사이에 이뤄졌으며, 바깥의 순찰 제자들은 아무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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