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5화. 역단결(逆丹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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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운봉 내 어느 의사대전(議事大殿).
낙균이 상석에 앉아 있는 유삼 차림 중년인에게 공손히 말했다.
“봉주, 그자는 예상대로 고계 역수였습니다. 다른 자들의 이목을 끌지 않도록 적당한 거처를 마련해 주었지요. 고 사질에게는 봉주께서 명하신 대로 상을 내렸으며, 그자가 화신기 수사를 죽인 일에 대해선 절대 외부에 발설치 말라고 분부해 두었습니다.”
남궁 봉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네. 원영기 경지에서 화신기 수사를 죽일 정도로 육신의 힘이 강한 자라면 이후 큰 쓰임이 있을 것이네. 앞으로 자네가 신경을 좀 써 주게. 그자가 원하는 게 있거든 최대한 들어주고.”
“예!”
“그만 가 봐도 좋네.”
남궁 봉주가 손짓하자 낙균은 인사를 올리고 즉시 물러났다.
“한립이라…….”
남궁 봉주는 눈을 감은 채 잠시 앉아 있다 곧 일어나 대전 뒤쪽으로 향했다.
* * *
그 시각, 한립은 자신의 동부 내 밀실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었으며 탁자 위에는 10여 개의 옥병과 옥갑이 일자로 놓여 있었다.
한립은 붉은색 병에서 새빨간 단약을 꺼내 꿀꺽 집어 삼키고는 눈을 감고 몸속 변화를 지켜봤다.
잠시 후, 눈을 뜬 한립의 표정이 썩 좋지 못했다. 방금 전 단약은 망서단과 비슷했는데도 그의 몸에 아무 변화도 일으키지 못한 것이다.
한립은 어느 정도 예상했었기에 담담하게 두 번째 병에서 샛노란 단약을 꺼내 복용했다.
단약은 곧 뱃속에 들어가 녹아들었지만 여전히 한 올의 법력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한립은 다시 한 번 몸속 상황을 살피다 다시 눈을 뜨고 무표정하게 세 번째 약병을 집어 들었다.
탁자 위에 있던 옥병과 옥갑 중 거의 대부분이 비었지만 안타깝게도 그중 어떤 것도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고, 이제 남은 거라곤 자색 옥갑 하나와 청자 병 하나뿐이었다.
한립 역시 실망스런 마음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얼굴이 어두워져 있었다. 아무래도 그의 몸에 맞는 일이 생각보다 어려운 듯했다.
하지만 어쨌든 자원이 풍부한 냉염종에 들어왔으니 이곳에서라면 괜찮은 수확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한립은 자색 옥갑 속에서 다시 회색 단약을 꺼내 삼켰다.
이번엔 한립의 얼굴에 살짝 희색이 떠올랐다.
회색 단약에서 은은하게 번져 나온 법력이 경맥을 한 바퀴 돌아 단전에 녹아들면서 한립의 법력을 약간 증가시킨 것이다.
이 단약의 효과는 망서단에는 한참 못 미쳤지만, 그래도 유효한 단약을 하나 더 찾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한립은 자색 옥갑에서 단약을 하나 더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 단약의 이름은 ‘오운단(烏雲丹)’으로, 몸의 기초를 단단히 다져 주는 효용이 있었지만 물 속성 공법을 수련하는 수사에게 더 적합한 단약으로 망서단의 약성과는 꽤 큰 차이가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한립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밀실을 나와 낙아의 침소를 지나는 순간 그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멈춰졌다.
방문이 닫혀 있긴 했지만 방 안에서 영기가 용솟음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낙아가 수련에 열중하고 있는 듯했다.
한립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걸음을 옮겨 연단실로 향했다.
연단실은 너비가 4~5장(丈: 약 15미터) 정도로 썩 큰 크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청흑색 바닥 중앙에 지면보다 한 뼘쯤 높게 원형 단이 설치돼 있었는데 그 위엔 진법을 구성하고 있는 암홍색 복잡한 선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진법 가운데에 나있는 검은색 구멍에서는 뜨거운 기운을 내뿜는 불빛이 아른거렸다.
원형 단 위에 놓여 있는 어린애 키만 한 높이의 단로(丹爐)는 비범한 영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진법을 가만히 바라보던 한립은 곧 단로 옆의 방석에 앉아 법결을 운용했다. 그러자 암홍색 진법이 번쩍 빛나더니 검은색 구멍에서 시뻘건 지화(地火)가 솟구쳐 나와 단로를 감쌌다.
한립은 오운단을 꺼내 단로에 넣고서 두 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그러자 지화가 그의 법결에 따라 일렁이다가 갑자기 여덟 줄기로 갈라져 단로 속으로 스며들었다. 단로에서 곧 강한 약 향이 뿜어져 나왔다.
한립이 계속해서 수결을 바꾸자 약 향이 옅게 변했는데, 그 후에도 한립은 반 시진 동안이나 수결을 멈추지 않았다.
* * *
반 시진 후, 단로에서 나던 약 향은 사라졌지만 그 대신 여러 종류의 냄새들이 뒤섞여 풍겨 왔다. 한립이 동작을 멈추고 법결을 운용하자 단로 바닥의 불길이 즉시 사그라들었다.
한립은 곧 손을 흔들어 단로 뚜껑을 열었는데, 단로 안에는 원래 있던 오운단 대신 알록달록한 가루만 남아 있었다.
잠시 가루를 살피던 한립은 조심스럽게 녹색 빛을 방출해 가루들을 들어올렸다.
곧이어 녹색 빛 덩어리가 가볍게 떨리자 빛 속에서 가느다란 실이 무수히 튀어나오더니 마치 수천수만 개의 작은 손처럼 한 줌 가루 속으로 들어갔다.
실들은 곧 가루를 구분해 냈고, 그렇게 10여 종으로 나뉜 가루들은 미리 준비해 뒀던 작은 옥함들에 분리해 넣었다.
방금 전 한립이 펼친 것은 예전에 영계에서 우연히 얻었던 ‘역단결(逆丹訣)’로 이미 만들어져 있는 단약을 역으로 분해해 내는 비술이었다.
원래 이 비술을 창안한 사람은 이를 이용해 다른 사람의 단약 약방을 훔칠 계획이었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다.
역단결에는 한계가 있어서, 이것으로는 자세한 약방을 알아내는 건 불가능했으며 그저 단약에 쓰인 재료를 판별해 내는 게 고작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립은 이를 꽤 재밌는 비술이라고 생각하고 기억해 뒀었는데, 뜻밖에도 오늘 이렇게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었다.
게다가 마침 오운단이 원영기 단약에 불과한 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한립도 역단결을 실제로 펼친 건 오늘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만약 높은 등급의 단약이었다면 단번에 비술을 성공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한립은 각기 다른 색 가루가 담긴 10개의 작은 옥함을 한쪽에 놔둔 뒤, 다시 단로 진법을 격발시켜 이번엔 망서단을 집어넣었다.
또 한 번 역단결을 펼치자 망서단 역시 10여 종의 재료로 분해되었다.
한립은 이 가루들도 옥갑에 나눠 담아 오운단 가루들과 대조해 보기 시작했다.
“아……!”
한립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두 단약의 가루를 비교한 결과, 대부분의 가루는 서로 달랐지만 그중 모래 알갱이 모양의 남색 가루는 그 색깔이며 형태까지 양쪽 모두 똑같았다.
다만 망서단에서 나온 것이 오운단에서 나온 것보다 훨씬 양이 많았다.
한립에게 효과가 있었던 것이 꼭 이 남색 가루 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 가루가 관련돼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한립은 남색 가루를 살짝 집어 냄새를 맡아 보기도 하고, 입에 넣어 맛을 느껴 보기도 했지만 가루의 정체를 알아내려 할수록 그의 얼굴은 점점 굳어져만 갔다.
수련을 시작했을 때부터 한립은 연단과 깊은 인연이 있었으며, 인계는 물론 영계의 각종 연단 재료, 심지어 다른 세계의 재료에 대해서도 두루 알고 있는 편이었지만 이 남색 가루의 정체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혹시 영환계 고유의 재료인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한립은 벌떡 일어나서 동부를 나섰다.
바깥 하늘은 벌써 어두워져 있었지만 한립은 빠르게 몸을 날려 수십 리 떨어진 낙하봉의 어느 동부 입구에 내려섰다.
이 동부는 무척이나 외진 곳에 위치해 있었으며, 주변에 다른 전각 같은 건 하나도 없었다.
한립은 주위를 살피고는 전음부를 꺼내 뭔가를 중얼거린 후 바로 날려 보냈다.
전음부가 흰빛으로 변해 동부에 날아들자, 잠시 후 대문이 벌컥 열렸다.
한립은 문 밖으로 나온 이를 향해 포권을 하며 말했다.
“고(高) 장로, 늦은 시각에 폐를 끼치게 됐습니다.”
“무슨 말씀을요! 이렇게 빨리 다시 만날 줄은 몰랐군요. 자, 어서 들어오시지요.”
고불린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한립과 함께 동부로 들어갔다.
고불린의 동부는 한립의 동부보다 확실히 컸지만 내부 장식은 꽤 소박했다. 게다가 짙은 단약 냄새가 강하게 배어 있었다.
한립은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입을 열었다.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온건 고 장로께 몇 가지 가르침을 청하고 싶어서입니다.”
“그래요? 궁금한 게 있다면 얼마든 말씀해 보십시오.”
고불린이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자 한립은 남색 가루가 담긴 옥갑을 꺼내 건네며 말했다.
“고 장로께선 연단에 조예가 깊으시니 이 가루를 알아보시겠습니까?”
고불린은 옥갑에 담긴 가루를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조금 맛을 보고는 묘한 눈빛으로 한립을 바라봤다.
“가루의 정체를 알아내셨나 봅니다.”
“한 수사께서 물어보실 사람을 제대로 찾아오셨습니다. 다만…….”
한립은 긴말 없이 상품 영석 한 개를 꺼내 건넸다. 고불린은 잽싸게 영석을 받아 챙긴 후에야 대답을 내놓았다.
“사실 이건 운학초(雲鶴草) 가루입니다. 운학초는 본종의 여러 고계 단약에 중히 쓰이는 꽤나 귀한 재료죠. 거기다 이 가루는 어떤 특별한 처리를 거친 걸로 보이는군요. 저도 오랜 세월 연단에 전념하지 않았다면 절대 알아내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군요. 그럼 운학초의 약성에 대해서도 좀 더 가르침을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
고불린은 이번에도 그저 간사한 웃음만 지으며 손을 슬쩍 비볐다. 한립이 상품 영석 한 개를 더 건네자 고불린은 그제야 만족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운학초는 달리 ‘변색초(變色草)’라고도 불린답니다. 생장하며 처음 백 년 동안은 백색을, 천 년 동안은 남색을 띠고 있다가 삼천 년째부터 붉게 물들기 시작합니다. 그 후로 일만 년째엔 진홍색이, 삼만 년이 넘어서면 자홍색이 되죠.
이 영초는 조양지기(朝陽之氣)를 흡수할 수 있는데, 백 년 이상 자란 뒤부턴 선천자기(先天紫氣)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위력적인 공법을 수련하는 데 필수일 뿐만 아니라, 이를 바로 선천영력(先天靈力)으로 전환할 수도 있어 세수역경(洗髓易經)의 효과를 볼 수 있죠. 오래 묵을수록 선천자기는 더 정순해지고, 당연히 효능도 더 대단해진답니다.”
“선천자기라……. 그럼 운학초를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운학초는 워낙 키우기 까다로운 영초라, 사람의 힘으로 생장에 적합한 환경을 갖춰 주는 건 거의 불가능하죠. 한마디로 아예 자랄 수 있는 곳 자체가 드물단 겁니다.
영환계를 다 통틀어 봐도 운학초가 자라는 곳은 규모가 큰 종문뿐입니다. 특히 천 년 이상 묵은 운학초들은 전부 각 종문에 속해 있어서 밖에선 구경도 못합니다.”
고불린의 말에 한립은 법력 회복에 도움을 줬던 것은 십중팔구 선천자기였을 거라 확신했다.
“망서단 외에 운학초가 들어가는 단약이 또 뭐가 있습니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한립이 다시 묻자 고불린은 이번엔 웬일로 영석을 받아 내지 않고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그 외엔 오운단에도 소량 들어가죠. 또 양령단(養靈丹)과 원허단(元虛丹)에도 운학초가 쓰이긴 합니다만 단약에 함유된 선천자기 역시 거의 안 들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한립은 고불린에게 필요한 것들을 알아내고는, 바로 통역곡으로 가서 그가 언급했던 단약들과 백 년쯤 묵은 운학초를 구입하고선 출운봉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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