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4화. 통역곡(通易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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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이 동부 한쪽에 거대한 구덩이를 파고는 들고 온 영전을 내려놓자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지켜보던 낙균이 그제야 저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내쉬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한 수사께선 정말 힘이 장사시군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더니, 듣던 것보다 훨씬 대단하십니다.”
“과찬이십니다. 그럼 이로써 저에 대한 시험이 끝났다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낙균의 칭찬을 듣고도 한립은 덤덤한 표정으로 오히려 질문을 던졌다.
“이런, 낙(駱) 모가 어찌 감히 수사를 시험할 생각을 하겠습니까. 아무튼 수사께선 본종의 객경장로가 되셨으니 앞으로 매년 수련에 쓰실 수 있는 영석 5만 개와 약간의 단약을 받으실 겁니다. 다만 올해는 단약 지급 시기가 지나서 내년까지 기다리셔야 합니다.
아, 그리고 이건 수사의 영패인데 안에는 본종의 지도와 각 봉(峰)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담겨 있습니다. 또 이건 올해 받으실 영석을 담은 저물대로 남궁 봉주께서 작은 성의를 담아 3만 개를 더해 주셔서 총 8만 개가 담겨 있답니다.”
낙균은 멋쩍게 웃더니 바로 반짝이는 금빛 영패와 청색 저물대를 꺼내 한립에게 건넸다.
고운월은 낙균의 말을 듣고는 복잡한 얼굴로 한립을 바라봤다. 이는 냉염종의 화신기 장로나 되어야 누릴 수 있는 대우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곳까지 오는 동안 직접 목격했던 한립의 실력을 생각하면 확실히 그는 이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망서단도 매해 지급받을 수 있는 겁니까? 아니면 다른 경로로 구해야 하는 건가요?”
한립은 영패와 영석을 받자마자 바로 다시 물었다.
“매해 받을 순 없을 겁니다. 망서단은 요상(療傷) 효과야 뛰어나지만 수행 경지를 높이는 덴 별 효용이 없어서 어쩌다 한 번씩만 지급하거든요. 가끔 종문 내 방시(坊市)에서 망서단을 파는 자들이 있긴 한데, 대부분 금방 거래돼서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낙균의 대답에 한립은 뭔가 생각에 잠긴 듯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럼 제 운이 좋기만 바랄 수밖에 없겠군요.”
그 뒤로 낙균은 몇 마디 짧게 이야기를 하고는 고운월과 여몽한을 데리고 떠났다. 한립은 적당한 침소를 골라 낙아가 쉴 수 있도록 해준 뒤 동부를 나섰다.
* * *
잠시 후, 출운봉에서 몇 리 떨어진 어느 골짜기.
한립은 골짜기 입구에 세워져 있는 패방(牌坊)을 흘긋 바라봤다.
백석으로 만들어진 패방 위에는 붉은색으로 ‘통역곡(通易谷)’이라는 글자가 커다랗게 새겨져 있었고 아래쪽으로는 청석이 깔린 널따란 길이 골짜기 모양을 따라 쭉 뻗어 나가 있었다.
패방을 지나 골짜기 쪽으로 몇 걸음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흥정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이 바로 낙균이 말한 냉염종의 방시였던 것이다.
골짜기 입구에 잠시 서있던 한립은 곧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골짜기 안의 상황에 대해서라면 방금 전 이미 한눈에 파악해 두었다.
이곳은 골짜기 안으로 접어들수록 위쪽으로 경사져 있었으며, 길 양쪽에는 점포가 산세에 따라 가지런히 늘어서 있었다. 또 점포 앞에 있는 깃발은 각양각색이라 세속의 번화한 장터 같은 느낌도 들었다.
마침 오후 시간인지 길에는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각각의 점포 안에도 사람들이 꽤 있었다.
한립은 일단 꽤 규모가 큰 단약상으로 들어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다시 나와 다음 점포로 향했다.
하지만 잇따라 큼직한 단약상 대여섯 곳을 들렀는데도 망서단은 그림자조차 구경할 수 없었다.
그중 한 점포에서 들은 바로는 가장 최근에 망서단을 구해서 내놨던 건 무려 두 달 전이며, 그나마도 그날 바로 팔려 나갔다고 했다.
한립은 그 뒤로도 한참을 더 돌아다녔지만 아무런 수확도 얻을 수 없었다.
빈손으로 나온 한립은 길을 벗어나 외진 구석으로 천천히 걸어가다가 갑자기 몸을 돌려서 근처의 큰 나무 쪽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
“제가 통역곡에 들어선 뒤로 내내 제 뒤만 따라오시는군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허허! 부디 노기를 거두시오. 오해입니다, 오해예요.”
어색한 웃음소리가 나무 뒤에서 울리더니 회색 도포를 입은 노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노인은 수염도 눈썹도 모두 하얗게 샜지만 얼굴은 소년 같았으며 정기가 넘쳐 보이는 것이 탈속한 도인으로서의 느낌도 조금은 풍기고 있었다.
한립은 상대가 화신기 경지인 걸 감지했지만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반문했다.
“오해라고요?”
흰 수염 노인은 딱딱한 한립의 태도에도 태연히 대답했다.
“빈도는 인색하지 않다 하여 ‘고불린(高不吝)’이라는 이름을 쓰는데, 낙하봉의 장로랍니다. 방금 전 우연히 수사께서 망서단을 찾으시는 걸 보고는 뒤를 따르게 됐지요.”
“낙하봉? 낙하봉이라면 연단(鍊丹)을 맡고 있는 곳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럼 수사께서 망서단을 갖고 계시다는 겁니까?”
“하하하! 맞습니다. 마침 망서단을 한 알 갖고 있는 데다 기꺼이 거래할 의향도 있지요. 한데 수사께서도 빈도가 필요로 하고 있는 물건을 갖고 계실지 모르겠군요.”
한립의 저물대를 바라보는 고불린의 눈빛이 은근하게 빛났다.
“특별히 원하시는 물건이 있는지요?”
“아, 그건 천천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보다, 빈도는 수사를 뭐라 불러야 할지……?”
고불린은 흥정을 서두르는 대신 느긋하게 질문을 던졌다.
“한립이라 합니다. 출운봉 외문 객경장로지요. 이제 고 장로께서도 뭘 원하시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출운봉의 객경장로란 말씀입니까? 대단하시군요. 그런데도 빈도는 수사의 수행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감지할 수가 없으니 신기한 노릇입니다. 뭐, 이거야 중요한 문제가 아니죠.
음, 한음현수(寒陰玄水), 남정명사(藍晶鳴沙), 천하성석(天河星石), 아니면 3천 년 이상 된 난릉화(蘭陵花)나 묵향초(墨香草)……. 혹시 이 중 갖고 계신 게 있는지요? 이 중에 뭐든 하나라도 주신다면 빈도도 망서단을 내드리겠습니다.”
“농이 지나치시군요. 그건 전부 극히 귀한 천지영재(天地靈材)가 아닙니까? 만약 고 장로께서 그런 재료들을 갖고 계시다면, 망서단과 바꾸시겠습니까?”
한립이 굳은 얼굴로 반문하자 고불린은 멋쩍어하며 아무 말도 못했다.
“거래를 하고 싶으시다면 어느 정도 타협 가능한 요구를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영석과 교환하시겠다면 저 역시 따를 의향이 있습니다.”
한립은 아까 점포들을 돌아다닐 때, 망서단을 찾는 동시에 한편으론 그간 조금씩 모아놓았던 재료 일부를 영석으로 교환했었다.
거기다 낙균이 준 영석도 있었으므로 극품 영석을 제외하고는 주머니가 꽤 든든해져 있었다.
“좋습니다. 그럼 한 수사에 대한 제 우의의 표시로 영석과 교환하도록 하죠. 극품 영석 두 개만 주십시오.”
고불린의 말에 한립은 조금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고 장로, 아무리 망서단이 이곳 통역곡에 잘 나오지 않는 물건이라지만 그건 너무 터무니없는 요구가 아닙니까. 높게 쳐줘도 일반 영석 60만 개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만.”
“터무니없다니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본종 내에서는 보통 그 정도 값에 교환된단 말입니다.”
한립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이렇게 하지요. 고 장로께서 원하신 재료는 없지만 그래도 꽤 괜찮은 물건들을 갖고 있으니, 그중에 한번 골라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다른 물건이요? 한 수사, 흔히 볼 수 있는 법보라면 아예 말씀도 꺼내지 마십시오.”
고불린이 웃으며 말하자 한립은 천천히 이름 몇 개를 나열했다.
“청명정(青冥晶), 만음곤령진(萬陰困靈陣), 진도(陣圖), 백음지(魄陰芝)……. 이런 걸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라 하진 않으시겠지요?”
이는 전부 천귀종의 육애가 갖고 있던 것으로 꽤 귀한 물건들이긴 했지만 한립에게는 별 쓸모가 없는 것들이었다.
고불린은 한참동안 망설이더니 결국 마지못해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백음지는 좀 쓸 만하군요. 하지만 최소한 천 년 이상 된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백음지에다 영석 30만 개도 더 주셔야…….”
한립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몸을 돌려 걸어갔다.
“한 수사, 잠깐!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한립이 갑자기 가 버리자 내내 담담한 척하고 있던 고불린이 다급히 소리쳤다.
물론 한립도 정말 가려던 것은 아니었기에 걸음을 멈추긴 했지만, 제자리에서 몸만 돌려 고불린을 바라보았다.
고불린은 그런 한립에게 냉큼 다가오더니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그리 급하게 가실 건 또 뭡니까. 흥정이야 다시 하면 되는 거지요. 흠흠. 그럼 혹시 그 백음지를 먼저 좀 보여 주실 순 없습니까?”
이번엔 한립도 거절하지 않고 한 뼘 남짓한 목갑을 꺼내 뚜껑을 살짝 열었다.
고불린은 의식을 방출해 목갑 안을 살핀 순간 눈썹이 약간 꿈틀댔지만 곧 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한 수사께서 실로 귀한 보물을 갖고 계셨군요. 이 백음지는 적게 잡아도 이천삼백……. 아니, 이천사백 년은 된 것 같네요. 좋습니다. 기꺼이 망서단이랑 교환해 드리겠습니다.”
고불린이 애써 희색을 감추며 말했지만 한립은 냉정한 눈빛으로 대꾸했다.
“망서단 두 알과 교환해 드리죠.”
“예? 하지만, 빈도도 망서단은 한 알밖에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다른 봉의 장로라면 몰라도 연단을 책임지고 있는 낙하봉의 장로께서 망서단을 한 알밖에 안 갖고 계시다는 말씀은 믿기 어렵군요. 뭐, 고 장로께서 내키지 않으신다면 저도 그냥 다른 분을 통해 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큰 종문에 설마 망서단을 팔고자 하는 이가 한 명도 없겠습니까. 며칠쯤 더 기다려 보지요.”
한립이 느긋한 태도를 보이자 고불린은 이번엔 정말로 망설여지는 듯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
“좋습니다! 두 알로 교환하죠!”
한립은 고불린이 건넨 백색 옥갑을 받아 의식으로 안을 살피고는 그제야 얼굴에 약간의 미소가 떠올랐다.
고불린의 몸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다양한 약재 향을 통해 한립은 그가 연단사라는 걸 이미 눈치 챘었다.
고불린은 한립에게서 받은 목갑을 코 가까이 대고 한껏 냄새를 맡더니 만족한 듯 탄성을 뱉으며 저물대에 집어넣었다.
“나중에 시간이 나시면 낙하봉에도 한번 찾아와 주시지요. 그럼 빈도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고불린은 바삐 자리를 떠났다.
고불린이 떠난 후에도 한립은 통역곡을 천천히 거닐며 수중의 영석으로 망서단과 비슷한 고계 단약을 몇 알쯤 더 산 뒤에야 출운봉으로 향했다.
동부로 돌아가자 낙아가 혼자 대청에 앉아 턱을 괴고 멍하니 있었다. 한립은 낙아에게 다가가 앞에 앉으며 물었다.
“낙아,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있느냐?”
“오라버니……!”
낙아는 그제야 한립이 돌아온 걸 알아차리고는 활짝 웃으며 반겼다.
“왜 혼자 멍하니 있는 것이냐?”
“그냥 오라버니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떠올려 보고 있었어요. 전부 다 꿈만 같아서…….”
낙아의 진지한 말에 한립은 묵묵히 미소만 지어 보였다.
“만약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게 이렇게까지 잘해주신 건 아버지랑 어머니를 빼면 오라버니가 유일한걸요. 낙아는 오라버니가 언제까지나 제 곁에 계시면 좋겠어요.”
낙아는 갑자기 코끝이 찡해진 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립은 그런 낙아를 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갑자기 손가락으로 낙아의 미간을 짚었는데, 낙아는 놀라면서도 피하지는 않았다.
“눈을 감으렴.”
한립이 부드럽게 말하자 낙아는 망설임 없이 눈을 꼭 감았다.
한립은 미소를 짓더니 같이 눈을 감고 뭔가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한립이 조용히 눈을 뜨자 낙아의 얼굴에 땀이 살짝 배어 나와 있었다.
“자, 이제 눈을 떠도 된다.”
낙아는 그제야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려 의아한 얼굴로 한립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 ‘환령선변(幻靈嬋變)’이란 공법을 네 기억 속에 새겨 뒀단다. 이건 내가 예전에 우연히 얻었던 고계 요족 공법인데, 요호(妖狐)인 네가 수련하기에 딱 적합하지.”
한립이 빙긋 웃으며 말했지만 낙아는 여전히 얼떨떨해하는 표정이었다.
“물론 나도 최선을 다해 널 보호하겠지만, 혹시라도 내가 곁에 없을 땐 너 스스로 널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 이 공법을 익히면 적어도 내가 널 구하러 갈 때까지 버틸 순 있을 거다.”
한립의 말에 낙아는 잠시 고민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꼭 열심히 수련할게요. 걱정 마세요, 오라버니.”
낙아의 말에 한립의 얼굴에 비로소 약간의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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