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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453화 (1,210/2,000)

1453화. 밭을 들다

*

보름 후.

푸른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진 거대한 산맥 상공 위에 초승달처럼 생긴 기이한 영선이 나타났는데, 그 위엔 바로 한립과 고운월, 여몽한, 낙아가 서있었다.

“한 수사. 이 영염산맥이 바로 우리 냉염종의 산문이 있는 곳이랍니다.”

고운월이 미소를 띠며 말하자 한립도 아래쪽 산을 내려다보면서 빙긋 웃었다.

“영맥이 안정적이고 영기가 충만한 것이 과연 동천복지(洞天福地)라 할 만하군요.”

여몽한은 기쁜 얼굴로 주변 경치를 구경했지만, 곧 의아함을 담은 눈으로 고운월을 바라봤다.

낙아는 배의 난간을 짚고 몸을 내밀어 사방을 바라보다가 울창한 산림밖엔 보이는 게 없자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오라버니, 왜 전각 같은 건 하나도 없는 거죠?”

“규모가 큰 문파들은 대부분 호종대진(護宗大陣)의 보호 아래 가려져 있단다. 우린 아직 진법 밖에 있기 때문에 꼭 높은 담장 밖에 있는 것처럼 안쪽 풍경을 볼 수 없는 거지.”

한립의 설명을 들은 낙아와 여몽한은 그제야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 수사,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곧 안쪽에 연락을 넣겠습니다.”

고운월은 말을 마친 후 바로 화염 무늬가 새겨져 있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금빛 영패를 꺼냈다.

영패가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가 싶은 순간 그 위의 화염 무늬가 정말로 불타오르는 것처럼 흔들리더니, 곧이어 영패에서 빛 한 줄기가 방출돼 아래쪽 산맥 속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영선 아래쪽 허공에 갑자기 파문이 일더니 봉긋 솟은 반달 모양 금빛 장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거대한 장막은 수백 리나 이어져 있는 영염산맥 거의 전부를 덮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한립은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역시 일대 대 종파다운 위세군요.”

낙아와 여몽한은 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에 난간을 붙잡고 연신 사방을 둘러보았다.

금빛 장막 아래로 보이는 산림 속에는 전각과 정자, 누각 등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었다.

어떤 건물은 높은 산 절벽 위에 외롭게 서 있는가 하면, 또 다른 건물들은 여러 채가 가까이 붙어 군락을 이루고 있기도 했다.

또한 건물들이 위치해 있는 장소도 협곡과 산허리 등 다양해서 전체적으로 무척이나 독특하면서도 운치 있는 모습을 이루었다.

전체 산맥의 중간 지점에는 주위의 다른 산봉우리보다 훨씬 높게 우뚝 솟아 있는 십여 동의 산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그 주위에는 안개가 상서로운 기운을 띠고서 자욱이 깔려 있었다.

산봉우리 사이에는 무지개마저 걸려 있어 그야말로 선가복지(仙家福地)의 절경이라 할 만했다.

“정말 아름다워…….”

여몽한이 감탄을 금치 못하며 중얼거리자 낙아도 동의하는 듯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히 종문으로 돌아온 고운월은 기쁨이 고스란히 드러난 얼굴로 한립을 보며 말했다.

“한 수사, 낙 장로께서 출운봉에서 우릴 기다리고 계시니 어서 가시지요.”

영선은 곧바로 그 빛의 장막을 통과했는데, 순간 한립은 누군가가 자신을 의식으로 살펴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그 낙 장로라는 인물인 듯했다.

마침내 정식으로 냉염종에 도착한 낙아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산맥을 감싸고 있던 빛의 장막은 어느새 모습을 감추었으며, 눈에 보이는 거라곤 그저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뿐이었다.

영선은 산맥의 중심부 쪽으로 날아가다가 구름을 뚫고 솟아있는 어느 푸른 산을 향해 천천히 내려앉았다.

산기슭에서는 웬 거한이 영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굵직한 이목구비의 거한은 황토색 도포를 입고 허리엔 검은색 요대를 매고 있었고, 옷 밖으로도 가슴 근육의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나 보였다. 전신에서 발산되는 기운으로 봤을 때 화신기 수사임이 분명해 보였다.

“낙 사백께 인사 올립니다.”

영선을 회수한 고운월이 앞쪽으로 몇 걸음 나아가 굵은 이목구비의 거한을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

“고 사질, 고생했다. 그리고……. 귀하께서 바로 그 한 수사시겠군요?”

고운월의 인사를 받은 거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한립에게 향했다.

“한립이라 합니다.”

한립이 담담히 대답하자 거한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원래는 남궁봉주께서 직접 마중 나오시려 했지만, 갑자기 본 종에 급한 일이 생겨서 몸을 빼기 힘들게 됐지 뭡니까. 그래서 저 낙균이 대신 나오게 됐으니 한 수사께서 모쪼록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별말씀을요. 그리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립과 인사를 마친 낙균은 여몽한을 돌아보고는 눈을 살짝 빛내며 말했다.

“이 아이가 바로 고 사질이 새로 거둔 제자로군. 확실히 자질이 나쁘지 않군그래.”

“후배 여몽한이 낙 장로님께 인사 올립니다.”

여몽한이 급히 앞으로 나서서 공손히 인사 올리자 고운월도 웃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앞으로 수련만 열심히 한다면, 분명 소질까지 넘어서는 성취를 이룰 겁니다.”

뒤이어 낙균은 낙아와도 인사를 나눴는데, 낙아가 한립과 서로 오누이처럼 지낸다는 걸 알고는 얼굴에 잠깐 묘한 표정이 스치긴 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낙아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한립의 실력을 충분히 봤기 때문에 낯선 인족 수사와 마주하고도 예전처럼 긴장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았다. 자신의 ‘석두 오라버니’가 있는 한 아무도 자신을 괴롭힐 수 없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낙균은 다시 한립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 수사께선 화신기 수사를 꺾고서 고 사질과 그 제자까지 무사히 본 종에 도착하도록 지켜주셨지요. 우리 출운봉 외문장로가 되시기에 차고 넘칠 정도의 실력과 공로입니다.

자, 장로께서 마음에 들어 하실 만한 동부가 마침 산 위쪽에 10여 곳이 있긴 합니다만, 혹시 특별히 원하시는 바가 있는지요? 그럼 그에 맞는 동부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전 아직 부상이 낫지 않은 몸이라 좀 외진 곳의 조용한 거처를 얻어 회복에 힘쓰고 싶습니다. 아, 그리고 연단술도 좀 알고 있으니 기왕이면 약초 재배에 쓰이는 영전(靈田)이 근처에 있는 동부라면 더 좋겠군요.”

한립의 말에 낙균은 조금 곤란해하며 대답했다.

“이거 참 공교롭게 됐군요. 지금 남아 있는 동부들 중에는 수사가 원하신 것처럼 외지고 조용한 곳은 몇 군데 있습니다만, 아쉽게도 영전이 딸려 있는 곳은 없답니다. 사실 출운봉의 영전은 대부분 어린 제자들이 관리하고 있는 데다 기본적으로 산 중턱 아래의 양지바른 곳에 위치해 있어서, 아마 그런 데서 머물게 되면 조용히 지내시긴 힘드실 겁니다.”

한립은 고민에 빠진 듯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한립이 한동안 아무 말이 없자 낙균은 다시 나서서 조언했다.

“그럼, 이러면 어떻겠습니까? 한 수사께서 영전이 있는 장소 중 마음에 드는 곳을 고르시면 제가 즉시 수사가 편히 머물 만한 새 동부를 지으라고 명하겠습니다.”

“하하!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보단 그냥 영전을 동부 근처로 통째로 옮겨 오는 게 훨씬 간단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혹시 이게 규율을 어기는 일은 아닐지 모르겠군요.”

상상치도 못한 한립의 말에 고운월과 여몽한은 표정이 멍해졌다. 하지만 낙아는 한립에게 기댄 채, 그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주변 풍경을 구경하기 바빴다.

“하하하! 내가 산에 가는 게 아니라 산이 내게 오게 한다. 정말 대단한 기백이십니다! 안 될 게 뭐 있겠습니까. 절 따라오시지요.”

낙균 역시 한립이 이렇게 대답할 줄은 몰랐는지 흥미로운 표정으로 한립을 안내했다.

뒤이어 일행은 낙균의 안내를 받아 출운봉 산 중턱에 위치한 어느 양지바른 골짜기에 도착했는데, 골짜기 안에는 여러 구역으로 구획된 영전이 펼쳐져 있었다. 1묘(畝: 666제곱미터)쯤 되는 영전에는 몇몇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한 수사, 이 영전은 원래 어느 외문장로에게 속해 있었지만, 수년 전에 그 장로가 변을 당하면서부터는 임시로 제가 관리해 오고 있었답니다. 만약 마음에 드시면 마음껏 취하도록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럼 사양 않고 받겠습니다.”

한립이 골짜기를 한 바퀴 훑어보고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말하자 낙균은 왠지 모를 찜찜한 기분에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

한립은 몇 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주먹을 한껏 들어 올렸다가 지면을 향해 매섭게 내리쳤다.

쿠우우우웅!

골짜기 전체가 맹렬하게 뒤흔들렸고, 주먹이 박힌 땅에는 깊게 구멍까지 패였다. 그 구멍의 크기는 아주 크지는 않았지만, 깊이만은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었다.

방금 전 일격으로 여몽한은 고운월이 때맞춰 부축해주지 않았다면 땅에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 낙아는 몸이 좀 흔들리긴 했어도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영전에서 일하고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연기기의 수사들이었으므로, 영문도 모른 채 그저 비명을 지르며 허둥지둥 골짜기 밖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러나 낙균은 가만히 눈을 번쩍이며 한립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한립은 영전 가장자리를 따라 골짜기 안으로 얼마쯤 들어가더니, 다시 몸을 숙여 또 한 번 주먹을 내리쳤다.

짧은 시간 동안 골짜기 곳곳에서는 계속해서 굉음이 울렸는데, 마침내 영전 한 바퀴를 다 돌자 한립은 자연스럽게 낙균 등이 있는 자리로 돌아왔다.

한립의 태연한 모습을 지켜보던 낙균은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 듯 침을 꿀꺽 삼켰다.

한립은 아무 말 없이 몸을 살짝 굽혀 손바닥을 비비다가 갑자기 땅속으로 양손을 푹 꽂아 넣었다.

“기(起)!”

한립이 기합과 함께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자, 엄청난 굉음이 울리면서 땅바닥이 쩍쩍 갈라지더니 균열이 한립의 손에서부터 양옆으로 쫙 뻗어 나갔다.

균열은 곧 한립이 냈던 구멍들을 차례로 연결시켜 나가다가 마침내 골짜기의 영전 전체를 완전히 한 바퀴 에워쌌다.

낙아는 그제야 한립이 정확히 뭘 하려는지 눈치채고는 숭배하는 눈빛으로 자신의 오라버니를 바라봤다.

“이, 이게 대체…….”

고운월은 감탄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할 정도로 놀란 모습이었다.

드드드 드드득 쩌어억!

한립이 두 손을 번쩍 들자, 골짜기 속 영전이 통째로 뽑혀 나왔다. 꼭 널찍한 땅이 공중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에 여몽한은 완전히 넋을 잃고 입을 턱 벌렸다.

“자, 그럼 낙 장로님. 이제 제가 머물 거처로 안내해 주시죠.”

한립이 만족한 얼굴로 낙균을 돌아보자 낙균은 통째로 도려내진 영전과 만신창이가 된 골짜기를 보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낙균은 한립이 구획된 영전들 중 기껏해야 한 구역을 골라서 법보 같은 걸 이용해 옮길 거라고만 생각했을 뿐, 그가 육신의 힘으로 영전 전체를 송두리째 뽑아 버릴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본인 입으로 분명 마음껏 가져가라고 한 이상, 이제 와 말을 번복할 순 없었다.

낙균은 그저 묵묵히 한립을 안내해 가기 시작했다.

한립은 그렇게 영전을 무슨 서책처럼 가볍게 들고서 출운봉을 반 시진이나 돌아다닌 끝에 겨우 산 정상 가까이에 있는 어느 외진 동부를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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