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2화. 압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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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한이 주문을 읊으며 남은 법력을 끌어모아 부적을 격발시키려던 순간, 그의 머리 위가 또다시 어두워지면서 귓가에 예의 그 귀를 찢을 듯한 파공음이 울렸다.
그리고 이번엔 앞선 3개의 산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또 다른 산이 그를 덮쳐 왔다.
부적을 제대로 격발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더 필요했기에 거한은 서둘러 법결을 운용해 진법을 만들었다.
진법에서 파동이 일어나자, 허공에 서 있던 거귀 다섯 마리가 순식간에 거한의 주위에 나타나 그를 에워쌌다.
오귀는 핏빛으로 빛나는 두 눈을 번쩍이며 매섭게 울부짖더니 산을 향해 손끝에서 검은색 빛줄기를 방출했다.
퍼어억! 퍼억!
오귀가 방출한 빛은 산에 닿자마자 산산이 부서져 버렸고, 산은 추락하는 속도가 아주 약간 느려지긴 했지만 여전히 빠른 속도로 오귀들이 계속해 방출하는 빛을 깔아뭉개며 내려왔다.
“크아아아아!”
오귀들은 길게 포효하면서 몸집을 더 키웠는데, 그들의 근육은 순간적으로 암석처럼 단단하게 변했으며 특히 손발은 더욱 딴딴해졌다.
열 개의 굵은 팔이 산을 향해 기세 좋게 뻗어 나갔다. 그러나 산에 닿는 순간, 열 개의 팔은 그 엄청난 압력에 의해 조각조각 부서져 버렸다.
그래도 다섯 거귀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몸으로 산을 막았지만 거산이 오귀의 몸을 그대로 짓눌러 버려 사방에 거귀의 피와 살점이 튀어 나갔다.
하지만 그 덕에 마침내 거산도 추락을 멈추었다.
오귀의 상반신은 거의 다 으깨져 있었지만 남은 하반신은 여전히 꼿꼿하게 서 있었고, 발은 사막 깊숙이 박혀 있었다. 마치 열 개의 굵은 기둥이 거산을 떠받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오귀가 형성한 기둥 가운데에 있던 거한은 그제야 한숨을 돌리고는 남은 법력을 백색 부적에 주입했다.
부적 표면에 서서히 흰빛이 떠오르자 거한의 얼굴에 이젠 살았다는 기쁨의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그때 다시 한번 파공음이 울리면서 엄청난 압력이 느껴지더니 마지막 남은 산이 맹렬하게 추락하며 방금 전의 네 번째 산 위에 떨어졌다.
그 엄청난 압력에 오귀의 남은 몸뚱이는 ‘펑’ 하고 터져서 가루가 돼 버렸고, 거한 역시 바짝 긴장된 공기 속에서 감히 몸을 움직일 엄두조차 못 내고 있었다.
결국 탑처럼 겹쳐진 두 개의 산이 완전히 지면을 덮치자, 그사이에 낀 거한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으깨진 고깃덩이가 되고 말았다.
쌔애액.
산 아래쪽으로 자욱하게 퍼져 있던 먼지 속에서 갑자기 한 줄기 금빛이 튀어나오더니 순식간에 저 멀리까지 날아가 버렸다.
그 금빛의 정체는 금색을 띤 3촌(寸: 약 10센티미터) 크기의 자그마한 사람이었는데, 거한을 꼭 닮은 이 금색 소인은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품에 은색 저물대를 꼭 껴안고선 북서쪽으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이 소인은 바로 검은 옷을 입은 거한의 원영이었다.
“거(去).”
한립은 거한의 원영을 향해 검은빛 한 줄기를 방출했다.
그 무렵 멀지 않은 곳에서는 영선을 안정시키고 있던 고운월이 고개를 들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저 화살이 날아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만 들었을 뿐 눈으로는 도저히 그 검은빛의 궤적을 쫓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먼 하늘에서 굉음이 울리더니 결국 폭발해 버린 거한의 원영이 빛의 파편으로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반짝이는 모래처럼 흩날리는 폭발의 잔해 속에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시커먼 물체가 떨어져 내렸는데, 거한의 원영을 파괴한 건 그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철정(鐵精)이었다.
거한의 원영이 갖고 있던 은색 저물탁은 한립이 바로 거뒀고, 뒤이어 사방에 박혀 있던 다섯 개의 거산까지 축소해 챙겨 담은 후 태연하게 영선으로 돌아왔다.
고운월은 그런 한립을 마치 낯선 사람 보듯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는 너무 당황했던 탓에 그 거한의 정체까진 신경 쓰지 못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추적자의 말이나 그가 시전 했던 공법 비술로 봤을 때 그는 화신 초기의 천귀종 장로, 육애가 분명했다.
육애는 구귀술(驅鬼術)에 능했으며, 10여 년 전 경원관의 동급 수사 두 명과의 싸움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는 일화로 꽤나 유명해진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명성이 자자한 화신기 수사가 한립에 의해 맥없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으니 이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고운월은 마침내 자신과 한립의 실력 격차가 자신의 짐작을 뛰어넘어 천양지차 수준이라는 걸 깨달았다.
“한……, 한 수사. 정말 원영기 수사가 맞나요?”
고운월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심이 드러나 있었다.
“빈도가 원영기인지 아닌지는 수사께서 충분히 감지하실 수 있을 텐데요.”
한립은 직접적인 긍정이나 부정 대신 모호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야 수사의 기운이 지금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러 있는지는 천첩도 또렷이 감지할 수 있습니다만, 실제 전투에서 보이는 한 도우의 실력은 그 이상으로 너무 신비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본 종의 화신기 장로 중에서도 동급의 적을 이리 쉽게 격살할 수 있는 분은 몇 되지 않으니까요.”
“전 그저 남들보다 육신 수련에 좀 더 공을 들였을 뿐입니다. 어찌 냉염종의 고수들과 견줄 수 있겠습니까.”
한립은 담담히 대꾸하고는 아직도 선상에 쓰러져 있는 낙아와 여몽한을 바라보다가 푸른색 영광을 방출해 그들의 몸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그들은 작은 신음과 함께 눈을 번쩍 떴는데 눈빛이 아직 좀 흐릿했다.
그래도 낙아는 축기기 수사답게 좀 더 빨리 정신을 차리고는 놀란 얼굴로 벌떡 일어나 앉아 한립을 바라보았다.
“석두 오라버니! 아까 그 적은…….”
“걱정 마라. 별일 없이 다 끝났단다.”
그 대단한 전투를 치르고도 한립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 *
냉염종 내 어느 산에 위치한 의사대전 안.
“봉주(峰主), 고 사질이 전해 온 소식에 의하면 그 한씨 성을 가진 산수의 실력이 평범한 원영기 수사 수준은 아닌 가 봅니다. 고 사질이 이런 뜻밖의 수확까지 거둘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군요.”
호방하게 생긴 사내가 문인 차림을 한 중년인에게 말했다.
중년인은 수염 없는 얼굴에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있었으며, 청색 유삼을 차려입어서 영락없이 점잖은 문사처럼 보였다.
“단순히 육신의 힘만으로 자신보다 높은 경지의 화신 초기 수사를 꺾었다니. 고계 역수인 게 분명해 보이는군.”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 앞의 사내가 기분 좋은 듯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어찌됐든 이로써 천귀종의 화신기 장로 한 명이 줄어든 셈 아닙니까. 정말 통쾌한 일입니다. 그 산수한테 갑자기 엄청나게 흥미가 생기는군요.”
사내의 말에 중년인 역시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렇다면 자네가 직접 그자를 대접하도록 하게.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알 테지?”
“예, 그야 물론이죠.”
* * *
냉염종에서 문인 차림 중년인과 사내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시각, 멀리 떨어진 어느 동부의 대청 안.
상석에 앉아 있는 황갈색 도포 차림의 수척한 얼굴의 제휜이 자신의 찻잔에 찻잎을 넣는 동안, 그 앞에선 중년인이 공손한 태도로 노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육애가 일을 끝냈을 테지.”
제훤이 찻잔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하자 중년인이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육 장로가 직접 나섰으니 실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실 웬만해선 남의 일에 수고하는 법이 없는 육 장로가 움직인 것도 모두 어르신께서 도와주신 덕분이지요.”
“쯧……. 후인들 중엔 도대체 쓸 만한 녀석이 없단 말이야. 그나마 어린 녀석들 중엔 호아가 제일 마음에 들었는데. 흥, 감히 호아를 죽이다니. 그 한 가 놈은 백 번을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아!”
제훤이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언성을 높이자 중년인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다급히 말했다.
“그, 그만 노기를 거두시지요. 그래도 여몽한만 무사히 손에 넣으면 어르신께서도 신공을 대성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흠……. 사실 그 계집도 호아의 죽음에 책임이 없진 않지. 영체만 아니었어도 당장 죽여 없애는…….”
제훤은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들어 동부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얼마 후,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 젊은 시녀가 나타나 문밖에서 몸을 굽히며 말했다.
“제 장로님, 묵 장로님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하지만 제훤이 대답하기도 전에, 멀찍이에서 딱딱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장로는 정말 운치를 아는 분이시군. 이런 때에 차나 음미하고 계시다니 말이오.”
문 바로 너머에, 검은색 도포 차림에다 머리에는 높은 관모를 쓴 무표정한 얼굴의 중년 남자가 나타났다.
그를 본 제훤은 눈썹을 살짝 꿈틀댔지만 곧 눈짓으로 시녀를 내보내고는 자리에 앉은 채로 입을 열었다.
“묵진(墨辰). 나와 묵 장로의 집법전은 본래 강물과 우물물처럼 서로 침범하지 않는 사이건만, 왜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오?”
“얼마 전 육애 장로의 혼패가 갑자기 깨져 버렸지 뭐요. 이에 대해 제 장로께서 뭔가 하실 말씀이 있으실 텐데?”
제훤은 그제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파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지금 뭐라 했소?”
“흥. 육 장로와 같이 있던 사람 말에 의하면 육 장로는 제 장로의 부탁을 받고 누굴 죽이러 갔다던데. 그런데 오히려 육 장로가 목숨을 잃고 말았소. 제 장로, 대체 누굴 죽이라고 시킨 거요?”
“그건 절대 불가능하오! 고작 원영기 수사 두 명이 어찌 육애의 적수가 된단 말이오!”
제훤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반박하자 묵진이 냉소하며 대꾸했다.
“하하. 화신 초기의 수사를, 심지어 원영조차 도망치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죽일 정도라면 상대가 어느 정도의 고수일지 충분히 짐작하시겠지요. 사적인 원한 때문에 본 문까지 귀찮은 적과 얽히게 만들지 말란 말이오. 어쨌든 제 장로 일단은 같이 집법전에 동행해 줘야겠소.”
* * *
며칠 후, 한립 일행이 타고 있는 영선이 마침내 황란(黄瀾) 사막을 무사히 통과해 나왔다.
지난 며칠 동안 음얼비의와 몇 차례 마주친 걸 빼면 천귀종의 추적자가 더 나타난다거나 하는 등의 별다른 위험은 없었는데, 음얼비의야 마광의 도움을 빌려 한립이 쉽게 해결했다.
고운월은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고, 앞서 한립이 화신기 수사를 물리친 걸 봤었기 때문인지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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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하게 비행하고 있는 영선 안.
한동안 계속된 여정에 지친 여몽한과 낙아는 서로 기댄 채 깊이 잠들어 있었고, 한립은 홀로 선미 쪽에 가부좌를 한 채 미간을 살짝 찡그리고 있었다.
한립 앞에는 안이 텅텅 빈 청색 옥병과 흰색 도자기 병 7~8개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한 수사, 어떻습니까?”
한립의 머릿속에 마광의 목소리가 울렸다.
“화신기 수사가 갖고 있던 단약들이라 꽤 기대를 했었는데, 역시나 별 효과는 없군요.”
한립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앞선 전투에서 한립은 육신과 오악의 힘을 빌려 적을 상대했던 덕분에 법력이 크게 소모되는 건 막았었지만, 그래도 계속 이런 식으로 법력을 늘리진 못하고 계속 소모하기만 한다면 길게 버티기 힘들 것이다.
“극품 영석은 어땠습니까?”
“마찬가집니다. 전혀 흡수할 수가 없었어요.”
한립이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펼치자 잿빛으로 변한 영석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마 몇몇 특수한 단약만 효과가 있나 보군요.”
마광의 말에 한립은 품속의 작은 병을 만지작거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도 망서단과 제명호란 자가 갖고 있던 그 이름 모를 금색 단약만 효험이 있었으니까요. 뭐, 어쨌든 냉염종에 가서 망서단을 다시 구해 연구해 보면 아마 좀 더 정확히 알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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