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0화. 육애(陸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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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귀종의 어느 동부 내 밀실.
밀실 벽에 꽂혀 있는 10여 개의 횃불이 가물거리며 방 안을 어슴푸레 밝히고 있었고, 밀실 한가운데의 원형 식탁 앞에는 백발에 검은 수염을 가진 수척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황갈색 도포를 입은 노인은 한 손은 석탁 위에 둔 채, 다른 한 손으론 무릎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노인의 콧날은 비교적 높은 편이었으나 그로 인해 가뜩이나 꺼져 있는 눈구멍이 더 움푹 들어가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두 눈은 날카롭게 앞쪽을 응시하고 있었고, 주름 가득한 그의 얼굴은 어스름한 불빛 속에서 흐릿하게만 보였다.
노인 바로 앞 허공에는 커다란 청동거울이 떠 있었는데, 거울에는 바로 풍운쌍살 중 운 좋게 살아남은 곱사등이 노인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거울 속 노인은 원래도 구부정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몸이 반으로 접힌 것처럼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너희 둘이 나서 놓고서도 흉수를 잡아오기는커녕 오히려 손해를 봤다 이거냐?”
수척한 노인이 무릎을 두드리던 손가락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상당히 거칠었다. 곱사등이 노인은 몸을 파르르 떨더니 급히 대답했다.
“제 사백께 아룁니다. 이번 일은 제자가 무능해서가 아니오라 그놈이 너무 강했던 탓입니다. 처음에는 놈이 일부러 기운을 숨긴 터라 제자도 놈을 그저 단순한 범인이겠거니 여겼는데, 결정적일 때 갑자기 기습을 가하지 뭡니까. 알고 보니 그놈은 원영 중기였습니다. 제자는 놈의 동작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제 뼈 갈퀴들을 죄다 거둬 가더니, 그다음엔…….”
곱사등이 노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척한 노인, 제훤이 말을 잘랐다.
“너보다 수행 경지도 낮은 자한테 법보까지 뺏겼단 말이냐?”
“그, 그게……. 예,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놈은 몸뚱이까지 매우 단단해 사질의 백귀도(百鬼圖) 속 음매귀물(陰魅鬼物)들조차 가루로 만들어 버렸고, 심지어 서골음침(噬骨陰針)까지도 와작와작 씹어 먹을 정도였으니 제자로서도 어쩔 도리가…….”
곱사등이 노인이 여전히 몸을 떨며 아뢰자 제훤은 손가락으로 무릎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곱사등이 노인은 한참 동안이나 머리를 들 엄두도 내지 못했고, 제훤이 계속해서 말이 없자 점점 커지는 두려움을 참지 못하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 사백님, 제자가 아뢴 말씀은 전부 사실입니다. 조금도 과장한 것 없이 있는 그대로만 아뢴 것입니다!”
“…….”
제훤은 여전히 말이 없다가 다시 한참이 더 지난 후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말을 들어 보니 그놈은 꽤나 희귀한 고계 역수(力修)인 게 분명한 것 같군. 그렇다면 확실히 네가 상대하긴 힘들겠지. 알았다. 넌 더 이상 나서지 말거라.”
말을 마친 제훤이 소매를 휘두르자 청동거울 속 곱사등이 노인의 모습이 사라지더니 거울이 바로 어두워졌다.
“감히 우리 호아를 죽이다니……! 네깟 놈이 고계 역수인 게 뭐 대수란 말이냐. 노부가 반드시 네놈의 껍질을 벗기고 뼈를 잘라 우리 호아의 넋을 달래 줄 것이다.”
제훤은 이를 갈며 으르렁대더니 잠시 후 다시 청동거울을 향해 주문을 읊조리면서 수결을 맺었다. 그러자 거울 표면에 잔잔하게 파문이 일더니 꽤 건장한 체격의 중년 사내가 나타났다.
푸른 숲 위의 허공에 서 있는 그 사내는 짧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제 형, 지난번에 헤어진 뒤로 한참 동안이나 연락이 없으시더니 갑자기 웬일이십니까?”
“육애(陸崖) 노제, 오늘은 한가하게 인사나 나누려고 연락한 게 아닐세. 긴히 부탁할 일이 있단 말이네.”
제훤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자 육애도 웃음을 거두고 다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제훤은 긴 한숨을 내쉬고는 제명호와 풍운쌍살의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
“이런 쳐 죽일 놈! 감히 제 형의 집안사람을 건드리다니요!”
“아무튼 우형은 지금 종파에 묶인 몸이니 한동안은 직접 나서기가 힘드네. 그러니 육 노제가 마침 변경 근처에 있는 김에 우형 대신 손을 좀 써 줬으면 싶은데.”
“그야 소제도 그러고 싶긴 하지만, 역수는 육신 수련을 위주로 한 덕분에 평범한 수사를 상대로야 쉽게 우위를 점할 수 있지만, 그 대신 경지가 높아질수록 다음 단계로의 고비를 넘어서는 게 극히 어렵죠. 그런데도 그자가 고계까지 이르렀다는 건 평범한 인물은 아니란 뜻 같습니다만…….”
“제자 놈 말에 따르면 그자는 냉염종이 새로 맞아들이려는 외문장로, 아직 정식으로 입문한 건 아니라고 하네. 그러니 육 노제도 다른 건 걱정할 필요 없이 그자 하나에만 신경 써 주면 되네. 노제가 그놈을 죽여준다면 원영단으로 사례함세.”
제훤의 말에 육애의 눈에 한 가닥 희색이 비쳤지만 그는 곧 눈빛을 감추며 말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소제가 제 형을 위해 애써 보겠습니다.”
“참. 그 여 씨 성을 가진 계집애는 일단 살려서 데려오도록 하게.”
육애는 제훤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풍국 변경에서 수만 리 떨어진 사막 상공에서는 흰빛으로 뒤덮인 영선이 어딘가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가고 있었다.
맑디맑은 하늘과 솜뭉치 같은 흰 구름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영선 위의 네 사람 중에선 누구도 그런 경치를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한립은 선미에 가부좌한 채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피부 위로 은은하게 금빛이 흐르고 있었다.
낙아는 그런 한립 옆에 바짝 붙어 앉아 있었으며, 전신에 녹색 빛이 감돌고 있는 걸 봐서 그녀 역시 수련 중인 듯했다.
고운월과 여몽한은 둘 다 뱃머리에 서 있었지만 여몽한이 이따금 복잡한 표정으로 선미를 돌아보고 있는 것과 달리 영선을 조종하고 있는 고운월의 입가에는 꽤 밝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지난번 습격을 당한 후 벌써 이틀이 지났지만 그 이후로 더 이상의 추적자는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밤낮없이 영선을 몰아 비행한 덕분에 냉염종에도 꽤 가까워져 있어서, 그만큼 이들이 안전해질 가능성도 커진 상태였다.
얼마 후 한립이 살짝 찌푸린 얼굴로 눈을 뜨자 체표에 흐르고 있던 금빛이 반짝거리더니 곧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지난 이틀 동안 한립은 원영에 걸려 있는 봉인을 뚫기 위해 여러 방법을 시도해 봤지만 그 어떤 것도 소용이 없었고 오히려 적잖은 법력만 소모됐을 뿐이었다.
심지어는 풍운쌍살 청년이 갖고 있던 저물대에서 망서단과 비슷한 수준의 단약 두 알을 찾아 복용해봤지만 아무런 효과도 볼 수 없었다.
아무래도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한 듯했다.
한립은 잠시 어두운 생각을 떨치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옆에 앉아 있는 낙아를 돌아봤다.
낙아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의 파동을 봐서는 곧 축기 후기를 돌파할 듯싶었다. 이는 역시나 그 풍운쌍살 청년의 저물대에서 구한 단약 덕분이었다.
낙아의 수련에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일어난 한립은 배 한쪽으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그때 고운월이 여몽한과 함께 선미 쪽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한 수사, 이제 여기서부터 쭉 서쪽으로 보름 정도만 더 가면 냉염종에 도착합니다. 그럼 수사께서 몸을 회복하시는 데 도움이 되도록 좋은 거처를 마련해드리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자 고운월도 뭔가 더 얘기하려 했지만, 앞쪽에서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이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자, 갑자기 시커멓게 변한 저 먼 지평선 위로 하늘까지 닿을 듯 높이 치솟은 용권풍(龍捲風) 기둥들이 보였다.
용권풍은 무서운 기세로 이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는데, 천둥소리 같은 굉음이 시시각각 울렸으며 용권풍이 해를 가린 탓에 주위도 금세 어두워져 버렸다.
고운월은 곧 영선을 멈췄고 낙아도 수련에서 깨어나 놀란 표정으로 한립에게 다가왔다.
“평범한 모래 폭풍인 것 같은데, 뭐 문제 될 거라도 있는 겁니까?”
한립이 담담하게 묻자 고운월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건 한 수사께서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사막의 이름은 ‘황란(黄瀾) 사막’으로, 좀처럼 모래 폭풍이 일어나지 않는 곳이긴 하지만 일단 한번 폭풍이 시작되면 저런 용권풍이 만들어져서 한 달이 넘도록 사방을 휩쓸고 다닌답니다.”
“흠……. 하지만 아무리 모래 폭풍의 위력이 대단하다 해도 고 수사의 영선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할 텐데요.”
“물론 모래 폭풍이야 그다지 걱정할 필요가 없지요. 하지만 이곳엔 상고의 기충인 ‘음얼비의(陰孽飛蟻)’가 살고 있어요. 평소엔 사막 아래에서 긴 잠에 빠져 있지만, 모래 폭풍이 일어나면 음얼비의 역시 잠에서 깨어나 날뛰죠. 한 마리 정도야 당연히 문제 될 게 없지만, 음얼비의는 수천수만 마리가 한꺼번에 나타나기도 한답니다.
게다가 비행 속도도 무척이나 빨라서, 일단 한번 음얼비의에 따라잡히게 되면 마도의 비법으로 제련된 법보가 아닌 한 평범한 법보는 벌레들이 뿜어내는 안개 때문에 영성이 크게 떨어지게 돼요. 그래서 음얼비의는 웬만한 고계 수사에게도 꽤나 골치 아픈 존재죠.”
고운월이 어두운 얼굴로 설명하자 한립이 잠시 침묵하다 물었다.
“길을 우회하는 건 안 되는 겁니까?”
한립은 지금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법력이 계속해서 소모되고 있어서 이런 곳에서까지 법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원래 예정보다 한 달 이상은 늦어질 거예요.”
고운월의 말에 한립은 다시 침묵했고, 고운월 역시 말없이 조용히 그의 결정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한립의 머릿속에 마광의 목소리가 울렸다.
“한 수사, 음얼비의에 대해서라면 크게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제가 처리하죠.”
“혹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음얼비의는 땅속 음살의 힘과 망령원얼(亡靈怨孽)의 기운이 뒤섞여 만들어진 상고의 기충인데, 저 같은 천외마두와는 꽤 비슷한 점이 많지요. 이 영환계에도 음얼비의가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만……. 어쨌든 음얼비의는 섭혼마음(攝魂魔音) 같은 공격에 무척 약하기 때문에 비록 제가 힘을 잃어버리긴 했어도 큰 문제없이 상대할 수 있을 겁니다.”
마광의 말에 한립은 잠시 더 생각해 보다 결국 그의 얘기를 받아들였다.
“좋습니다. 그럼 음얼비의가 나타날 경우엔 수사의 신세를 좀 지겠습니다.”
“우리야 지금 한 배를 탄 상황 아닙니까.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은 마땅히 도와야지요.”
마광의 목소리가 점점 옅어지다 사라지자 한립은 곧 고운월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회하면 시간이 너무 많이 지체되니 그냥 모래 폭풍을 가로질러 가기로 합시다. 만약 음얼비의와 마주치게 되면 그땐 빈도가 막도록 하겠습니다.”
“한 수사, 정말 자신 있으신 겁니까?”
“고 수사께선 빈도를 믿지 못하시는가 보군요.”
“그럴 리가요! 절대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그래요. 이렇게 자신하시는 걸 보면 당연히 뭔가 생각이 있으신 거겠죠. 그럼 전 한 수사만 믿겠습니다.”
한립이 빙긋 웃으며 말하자 고운월은 다급히 손을 내저으며 변명하고는 바로 수결을 맺어 주위에 흰색 보호막을 만들고는 영선을 빠르게 몰았다.
잠시 후, 주위 공간이 한층 더 어두워지나 싶더니 사방에서 광풍이 몰려왔다.
바람에 휩쓸린 모래가 영선을 감싼 보호막을 거칠게 때리기 시작했다. 그 탓에 영선 역시 조금씩 흔들리자 고운월은 흰빛을 방출해 뱃머리 어딘가로 주입시켰다.
파아앗.
선체에 새겨져 있던 영문(靈紋)들이 번쩍 빛난 순간, 보호막의 빛이 몇 배나 더 밝아졌다. 그 덕분에 안정을 찾은 영선은 다시 앞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처음에는 모래 폭풍을 두려워했던 낙아와 여몽한도 바람이 보호막을 전혀 뚫지 못하는 걸 보고는, 긴장이 풀린 얼굴로 보호막 너머의 광경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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