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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447화 (1,204/2,000)
  • 1447화. 기이한 원영

    *

    어느새 짐을 다 챙긴 여씨 가문 사람들이 마차를 끌고 다시 나타났고, 백석진인과 공봉들도 멀찍이서 걸어왔다.

    “한 선배님, 저기…….”

    백석진인이 한립에게 다가와 머뭇거리자 한립이 눈치 빠르게 말했다.

    “아무 걱정 말고 저들을 지키는 데에만 신경 쓰도록 하시오. 그리고 수사가 해 줘야 할 일이 한 가지 더 있는데…….”

    한립이 뒤이어 전음으로 몇 마디 덧붙이자 백석진인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무렵,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여몽한은 고운월을 보며 나지막이 청했다.

    “사존, 성문이 벌써 닫혀 있을 테니 사존께서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고운월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하자 갑자기 흰 안개가 뭉게뭉게 나타나더니 순식간에 커다란 구름으로 응집되어 그녀를 포함한 모두를 태우고 하늘로 솟아올랐다.

    이런 신기한 일은 처음 겪어 보는 여씨 가문 사람들은 당황한 얼굴로 자신 옆의 마차를 잡고 기댔으며, 몇몇은 짧은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구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성을 벗어나서 성 밖 관도 위에 천천히 내려앉았다.

    “어머니, 숙모…….”

    이미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여몽한은 슬픔을 감추지 못하며 친인들과 꼭 껴안았고, 그녀의 모친을 비롯한 일가 사람들도 다들 눈물을 글썽이며 여몽한에게 잘 지내라고 당부했다.

    그렇게 한참이나 인사를 주고받은 후에야 일가 사람들은 걸음을 옮겼고, 백석진인을 포함한 공봉들도 그들을 호위하며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한동안 친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여몽한이 시선을 거두자 고운월도 그제야 재촉하며 말했다.

    “우리도 서두르는 게 좋겠구나.”

    고운월은 곧바로 달처럼 흰 영선(*靈船: 배) 한 척을 꺼냈다.

    영선은 길이가 5장(丈: 약 15미터) 정도로 초승달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선체에 빙 둘러 새겨진 푸른색 문양에서 잔잔하게 영력(靈力) 파동이 일고 있었다.

    한립은 낙아를 데리고 곧장 영선(靈船)에 올랐으며, 여몽한도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추스르고는 뒤이어 배에 올라탔다.

    이어서 고운월이 수결을 맺자 영선은 순식간에 하얀 빛을 발하며 하늘 높이 솟아오르더니 저 멀리 날아가기 시작했다.

    * * *

    영선(靈船) 안.

    한립은 배 한쪽에 기대어 가부좌를 하고 있었고, 낙아는 얌전히 그 옆에 앉아 호기심에 찬 눈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운월은 영선을 조종하면서 옆에 있는 여몽한에게 뭔가를 말하는 중이었다.

    잠시 후, 한립은 가볍게 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눈을 떴는데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옛 기억을 되찾고 얼마 후 한립은 자신이 더 이상 천지원기를 체내로 흡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방금 전 다시 시도해 봐도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법력을 회복하는 일이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한립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백색 옥병을 꺼내 마개를 열었다. 마개가 열리는 순간 정신이 맑아지는 짙은 약 향이 물씬 풍겨 나왔다.

    한립은 옥병에 들어 있던 청색 단약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망서단(望犀丹)이라고 했나? 도움이 좀 되면 좋겠는데.’

    한립은 단약을 삼키고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낙아는 마침 고운월과 이야기를 마치고 걸어오는 여몽한을 보고, 서둘러 몸을 일으켜 배의 다른 쪽으로 가서 작은 목소리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얼마 후, 약효가 점차 몸 곳곳에 퍼지자 찌푸려졌던 한립의 미간도 조금 펴졌다. 단전에 생겨난 따스한 기운은 전신의 맥을 따라 몸 곳곳으로 흐르고 있었다.

    일주천이 끝난 뒤 한립은 몸이 상당히 편안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텅 비어 있던 단전에도 약간의 법력이 생겨 아주 미약한 수준이었지만 이로써 어느 정도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는 천천히 눈을 뜨고 손바닥 위에 단약 10개를 불러냈다.

    백석인진과 제명호, 그리고 그의 사형에게서 챙긴 것들이었다.

    모두 법력을 회복하는데 쓰이는 단약으로 개중엔 질이 괜찮은 것도 섞여 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망서단에는 훨씬 못 미치는 단약들이었다.

    한립은 그중 한 알을 삼킨 후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립은 갑자기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뜨고 단약 한 알을 더 삼켰다.

    잠시 후, 한립은 또다시 눈을 떴다.

    방금 전 단약을 두 알이나 복용했는데도 약효라고는 조금도 느낄 수 없었고, 법력 역시 단 하나도 생성되지 않았다.

    한립은 굳은 얼굴로 남아 있던 단약들을 연이어 삼켰다.

    그렇게 단약들이 한 알씩 빠르게 없어지면서 그의 손바닥 위에는 금세 엄지손가락만 한 황금색 단약 한 알만 남게 되었다.

    이 단약에서는 망서단에도 크게 뒤지지 않을 정도의 맑은 향이 느껴졌는데, 아마도 제명호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대비해 갖고 있던 단약인 듯했다.

    한립은 무표정한 얼굴로 황금색 단약을 바라보다 곧 그 단약마저 삼켰다.

    이번엔 다행히도 효과가 있었는지 단약이 서서히 녹아 영력으로 변하더니 곧 한립의 단전에 스며들어 법력을 조금 증가시켰다.

    어두웠던 한립의 얼굴이 그제야 조금 밝아졌다.

    이렇게 단약으로 효과를 볼 수만 있다면 법력을 회복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적어도 망서단 정도의 단약은 구해야 할 것 같았다.

    그때 한립의 머릿속에 갑자기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한 수사, 법력을 회복할 수 있는 희망이 생겼군요. 축하합니다.”

    한립은 쓴웃음을 지으며 의식을 이용해 대답했다.

    “그래 봐야 뿌리 없는 나무일 뿐입니다…….”

    “그래도 이 정도가 어딥니까. 한 수사가 법력을 회복할수록 우리가 선계로 돌아갈 희망도 커질 겁니다.”

    마광의 말에 한립이 담담히 말했다.

    “맞는 말이지만, 다만……. 아마 그게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겁니다.”

    “어째서요? 단약이 효과가 있었다면 영석으로 법력을 회복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하하. 안 그래도 저 역시 시도해 보려던 참이긴 합니다만, 직접 해보기 전엔 모르는 거니까요.”

    말을 마친 한립이 크기가 다양한 청색 영석 몇 개를 꺼낸 후 두 손으로 감싸자 영석이 푸른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멀찍이서 얘길 나누고 있던 낙아와 여몽한은 호기심에 슬쩍슬쩍 한립을 쳐다봤지만 뱃머리에 서 있는 고운월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영석에서 방출된 푸른색 영력이 한립의 손 안에서 빙글빙글 회전하는가 싶더니 점차 희미해지다가 곧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빛을 잃어버린 영석을 바라보며 한립은 무거운 얼굴로 생각에 잠겼고, 마광의 목소리가 또다시 그의 머릿속에 울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왜 영석도 흡수할 수 없는 걸까요?”

    잠시 침묵하고 있던 한립이 천천히 대답했다.

    “아마 단약이 그랬던 것처럼 이 영석들도 등급이 너무 낮아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안에 담겨 있는 영력이 충분히 정순하지 못해서 말입니다.”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이라면 고계 단약과 극품 영석만 충분히 구한다면 한 수사가 원래의 법력을 회복하는 것도 얼마든 가능하겠군요.”

    마광의 말에 한립은 한숨을 쉬며 나직이 말했다.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극품 영석이 정말 쓸모가 있는지 역시 직접 시험해 보기 전엔 모르는 거니까요. 그래도 다행히 육신과 의식의 기초가 그럭저럭 단단한 덕분에, 천지원기를 흡수하지 못하더라도 자연스럽게 회복되긴 할 겁니다. 물론 시간이야 좀 더 걸리겠지만요.”

    “너무 겸손한 말씀이군요. 한 수사의 기초가 그럭저럭 단단한 수준이라면 이 세상에 어느 누가 감히 기초를 공고히 쌓았노라 자랑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어쨌든 방향이 잡혔으니 이젠 수사가 하루빨리 실력을 회복하시기만 바라고 있겠습니다.”

    건조하게 말을 마친 마광은 다시 침묵했다.

    한립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앞서 거둬들였던 저물대들 속에 극품 영석은 하나도 없어 지금으로서는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시험해볼 수조차 없었다.

    체내의 법력을 살펴본 결과 지금 그의 수준은 원영 중기 수사쯤 됐는데, 극품 영석이 효과가 있는지 확신할 수 없으므로 확실히 법력을 키우기 위해선 천지원기를 다시 흡수할 수 있게 되지 않는 한 고계 단약을 구해야 했다.

    한립은 미간을 찡그리며 의식을 단전으로 보내 몸속을 직접 살펴보았다.

    단전은 끝없이 짙은 안개에 뒤덮여 있었으며 그 안개 사이로 꼭 밤중의 등불처럼 옅은 금빛이 비치고 있었다.

    이에 한립이 의식을 안개 속까지 더 깊이 들여보내자 전신에서 금빛을 발하고 있는 작은 신형이 가부좌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한립과 똑같이 생긴 그의 원영이었다.

    원영은 평온한 얼굴로 눈을 감은 채, 마치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처럼 손을 몸 옆으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한립이 천지원기를 흡수하지 못하는 건 원영의 상태와 관계있는 듯했다.

    한립은 정신을 되찾았을 때부터 의식을 원영 안으로 들여보내려고 했지만 매번 실패했고, 원영을 깨우는 것 역시 당연히 불가능했다.

    그래도 한립의 마음과 원영이 아직 미약하게나마 한 가닥 신혼(神魂)으로 연결되어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한립이 머릿속으로 빠르게 주문을 읊고 마지막에 한 손으로 수결을 맺자, 단전 속 법력이 격하게 떨리다가 옅은 은색 부적으로 변하여 천천히 원영에게로 향했다.

    퍼어엉! 푸스스스.

    부적들은 원영의 몸에 닿자마자 폭발해 은빛 안개처럼 흩어졌다. 이에 한립의 안색이 어두워졌지만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일이라 곧 다시 법결을 바꿔 시도해 보았다.

    그러자 원영 주위에 여러 가닥의 유백색 빛줄기들이 나타나 천천히 원영의 몸을 감았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마침내 눈을 뜬 한립은 거친 숨을 들이마시며 목구멍으로 올라오던 뜨거운 피를 겨우 삼켰다.

    방금 전, 법력 소모를 감수해 가면서까지 연신술(煉神術)이라는 선계 비술을 동원해 원영에 강제로 침투하려 해봤지만 원영에서 발생한 무서운 힘에 의식이 튕겨지고 법력도 역류해 버린 것이다.

    그나마 한립의 육체와 의식이 강했던 덕분에 이 정도 내상으로 그쳤지만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 즉시 경맥이 끊어지는 건 물론, 심할 경우 백치가 될 수도 있었다.

    이 소동 탓에 그나마 원영 중기 정도였던 법력이 이젠 원영 초기 수준에 가깝게 줄어들었다.

    한립은 답답함에 또 한 번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립이 해결책을 고심하고 있을 때, 뱃머리에 앉아 있던 고운월은 방금 전 공법의 역행으로 인해 미처 한립이 숨기지 못한 법력 파동을 감지하고는 내심 깜짝 놀랐다.

    ‘역시 원영 중기였어!’

    고운월이 조금 머뭇거리다가 다가오자 한립 역시 마음을 가다듬고 몸을 일으켰다.

    “보아하니 망서단이 조금은 도움이 된 모양입니다. 몸이 많이 회복되신 것 같군요.”

    항상 차가운 표정을 짓던 고운월이 보기 드물게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다.

    “예. 모두 수사께서 주신 영단 덕분입니다.”

    “그리 예의 차리실 것 없습니다. 어차피 본 종에 도착하시면 다른 영단들도 더 받으실 수 있을 테니까요.”

    고운월은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저으며 인사를 받고는 끝없이 적당한 얘깃거리를 찾아내 말을 건네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히려 했다.

    덕분에 한립도 그녀의 얘기를 통해 영환계(靈寰界)의 상황을 좀 더 잘 파악할 수 있었다.

    그 전까지 한립이 영환계에 대해 알고 있던 것들은 결단기 수사에 불과한 백석진인을 통해 알게 된 게 전부였으므로, 원영 중기인 고운월에게서 알아낼 수 있는 정보들에는 미치지 못했다.

    또한 한립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묻는 고운월의 질문에 모두 모호한 대답으로 넘겨 버렸고, 고운월 역시 그런 그의 태도를 보고는 눈치껏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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