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446화 (1,203/2,000)
  • 1446화. 냉염종(冷焰宗)에서 온 인물

    *

    몇 바퀴쯤 데구루루 구른 뒤 멈춰선 그 정체불명의 물건은 바로 피투성이가 된 사람 머리통들이었는데, 언뜻 보니 아까 도망쳤던 그 흑의인들인 것 같았다.

    머리통들은 하나같이 공포에 질려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정원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다들 깜짝 놀라 머리통을 바라보았다.

    특히 낙아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긴장한 채로 한립의 소매를 꽉 움켜쥐었지만, 한립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하늘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흰빛이 번쩍이며 하얀 신형 하나가 나타나는가 싶다가 다음 순간 바로 옷자락을 날리며 정원에 내려섰다.

    신형의 정체는 몸집이 큰 흰옷 차림의 미부인으로, 나이는 서른 살쯤 되어 보였으며 손에 새까만 장검을 들고 있었다.

    여인은 여자에게서 보기 드문 거친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사존!”

    여칠은 미부인을 보자마자 놀라움과 기쁨이 섞인 얼굴로 소리치며 달려갔다.

    “몽한(夢寒)아, 무사한 걸 보니 이제야 사부의 마음이 놓이는구나.”

    미부인은 여칠, 아니 여몽한의 손을 잡고서 그녀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한결 부드러워진 눈빛으로 말했다.

    그들의 대화에 여씨 가문 사람들은 그제야 상대가 적이 아닌 걸 알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백석진인과 공봉들도 그제야 긴장이 풀린 얼굴로 미부인의 소매를 슬쩍 쳐다보았다.

    소매 끝에는 여몽한이 갖고 있던 영패의 것과 똑같은 화염 무늬가 정교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이들의 얼굴에 곧바로 존경의 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낙아는 그 중년 미부인에게 겁을 먹은 듯 한립 뒤에 숨어서 소매를 더 꽉 붙잡았다.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

    한립이 낙아를 따뜻한 목소리로 달래자 낙아도 겨우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존, 여긴 어떻게 오신 거예요?”

    여몽한이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물었다.

    “천귀종이 여길 습격할 거란 얘기가 들리기에 즉시 달려온 거란다. 그런데 오는 도중 놈들의 방해가 심했던 탓에 이렇게 늦어지고 말았구나. 그래도 네가 무사하니 정말 다행이다.”

    “공봉들께서 목숨 걸고 지켜 주신 덕분이죠. 그리고 이 류석 오라버니도 도와주셨고요. 여러분, 이분은 제 사존이시랍니다. 사존, 이분들은 저희 집안 공봉들이시고 이분은 류석(柳石), 류(柳) 공자예요. 이분이 천귀종의 결단기 수사 두 명을 죽여 저희 목숨을 구해 주셨답니다.”

    여몽한은 미소 지으면 한립에게 다가가 소개했다. 백석진인과 나머지 세 공봉들은 서둘러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소저, ‘류석’은 임시로 쓴 이름이었을 뿐, 사실 내 진짜 이름은 ‘한립(韓立)’이오.”

    “아, 그랬군요. 원래는 한 오라버니셨네요.”

    한립이 빙긋 웃으며 말하자 여몽한도 살짝 놀라다가 곧 미소 지었다.

    “천첩은 냉염종의 고운월(古韻月)입니다. 한 수사께서 제자 일가의 목숨을 구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혹시 수사께서는 어느 문파 분이신지 여쭤도 될는지요?”

    고운월의 눈빛은 그 담담한 표정과 달리 칼끝처럼 날카로웠다. 백석진인은 수천 개의 바늘이 전신을 찌르는 듯한 느낌에 감히 숨도 크게 쉴 수 없었다.

    그 사이에 백석진인, 낙아 등을 빠르게 훑고 지나간 고운월의 시선이 한립에게 멈춘 순간 담담하던 그녀의 얼굴도 천천히 굳어졌다.

    고운월의 의식으로도 한립의 경지를 감지할 수 없자 절로 경계심이 생긴 것이다.

    “전 소속 문파가 없는 산수입니다. 방금 전 출수한 건 여 소저가 제게 베풀었던 인정에 대한 보답이었을 뿐이죠.”

    한립은 덤덤하게 말했다. 그는 고운월보다 강한 의식을 갖고 있었으므로 자연히 상대가 원영 중기임을 한눈에 꿰뚫어 보았다.

    “아, 산수셨군요.”

    고운월은 다소 의외라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결단기 수사 두 명을 단번에 죽일 수 있었다는 건 한립이 상당한 경지의 고수라는 뜻인데, 산수 중에서는 원영기 이상의 수사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립이 자세한 내력을 밝히기를 꺼려하자 그저 가만히 고개만 끄덕이고 다시 여몽한을 보며 말했다.

    “몽한아, 풍국이 천귀종의 손에 넘어간 이상 여기 오래 머물 순 없단다. 지금 바로 떠나도록 하자꾸나.”

    고운월의 말에, 진작부터 서둘러 도망치고 싶어 했던 여씨 가문 사람들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하지만 여몽한은 갑자기 고운월을 제명호 시체 쪽으로 데리고 가며 말했다.

    “사존, 잠깐만요. 아직 더 말씀드려야 할 일이 있어요.”

    “아니, 제명호! 이 자가 왜 여기 있는 것이냐!”

    고운월은 제명호의 시체를 보자마자 안색이 확 변하며 소리쳤다.

    “사존께서도 이 자를 아세요? 이 자의 숙조부가 정말로 천귀종 장로인가요?”

    여몽한은 고운월의 반응을 보고는 순간 가슴이 내려앉아 겨우 진정시키며 물었다.

    “이런……. 정말 큰일이구나. 이 자의 숙조부인 제훤(齊煊)은 진짜 천귀종 장로가 맞다. 그것도 벌써 화신기에 이른 자야. 자기 집안사람 감싸기로는 워낙 유명한 자라 만약 자기 질손이 죽임 당했단 걸 알면 분명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화신기라고요!”

    여몽한이 깜짝 놀라 외쳤다.

    백석진인 등은 여몽한보다도 더 놀란 눈치였다. 화신기의 대수사는 원영기를 훨씬 뛰어넘는 존재로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자신들을 없애 버릴 수 있는 고수였다.

    “누가 제명호를 죽인 것이냐?”

    고운월은 질문하면서도 자연스럽게 한립을 돌아봤다. 그런데 이때, 한립은 놀랍게도 잿빛 옷의 사내의 시체로 걸어가 그의 저물대 속 물건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사실, 한 오라버니가 죽이신 게 맞긴 한데…….”

    여몽한의 말에 고운월의 안색이 확 변했다.

    “사존, 그럼 그 제훤이라는 자가 직접 움직일까요?”

    “제훤은 천귀종에서의 지위도 높은 데다 자손들도 워낙 많으니, 겨우 질손 하나 때문에 직접 나서진 않을 게다. 그래 봤자 아마 종문 제자를 대신 보내겠지.”

    여몽한의 얼굴에 떠올랐던 두려움이 그제야 조금 가라앉으려는데, 고운월이 엄숙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렇긴 해도 방심할 순 없다. 몽한아, 제훤이 보낸 자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서둘러 냉염종으로 돌아가자꾸나.”

    “저, 그럼 사존. 저희 일가의 다른 사람들도 같이 가도 되는 거죠?”

    여몽한이 기대와 걱정이 섞인 목소리로 묻자 여씨 가문 사람들은 물론 백석진인과 다른 공봉들도 일제히 간절한 눈으로 고운월을 바라봤다.

    사실 이 기회에 냉염종에 들어갈 수 있다면 설사 외문에만 머문다 해도 산수보다는 훨씬 낫다. 특히 지금처럼 천귀종에 죄를 지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냉염종 같은 큰 그늘이 필요했다.

    “안 된다. 냉염종에 어찌 범인을 머물게 한단 말이냐. 네 친인들은 공봉들의 호위 하에 계국으로 몸을 피하게 하자꾸나.”

    고운월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계국은 풍국 동북쪽에 있는 또 하나의 범인의 나라로, 지금도 냉염종의 관할 하에 있었다.

    공봉들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고운월 앞에서 감히 싫다고 말할 순 없었다. 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가 곧 애원하는 눈빛으로 여몽한을 바라보았다.

    “천귀종 놈들이 우릴 찾아내면 그날로 우린 죽은 목숨이다. 동생아, 너 혼자 살겠다고 우릴 버리려는 건…….”

    “입 다무세요!”

    여몽한이 매섭게 소리 지르자 그녀의 오라버니인 여씨 가문 둘째 공자도 억지로 다음 말을 삼켰다.

    여몽한은 오라버니에게 소리치긴 했지만 집안사람들이 걱정되는 건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다시 간절하게 말했다.

    “사존, 계국으로 피한다고 정말 다들 무사할 수 있을까요? 천귀종 사람들이라면 금방 은신처를 찾아낼 거예요.”

    “걱정 말거라. 영환계(靈寰界)의 규칙에 따르면, 네가 정식으로 냉염종 내문제자가 되면 천귀종은 네 세속 친인한테 손댈 수 없게 된단다. 만약 그들이 이 금기를 어기고 네 친인들을 죽인다면, 너도 그들의 세속 친인을 죽일 정당한 명분을 얻게 되지.

    처음에 그들이 여부(餘府)를 공격한 것은 네가 본종의 제자가 됐다는 사실을 몰라서였다고 핑계댈 수 있겠지만, 이젠 내가 왔으니 상황이 변했다.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건 네가 무사히 냉염종에 도착하는 거야.”

    고운월의 말에 그제야 여몽한의 얼굴에도 안도의 빛이 떠올랐고 나머지 가솔들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몽한은 백석진인과 공봉들을 돌아보며 일일이 인사 올렸다.

    “진인. 그리고 세 분 공봉. 저희 일가를 잘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소녀가 대성하게 되면 여러분의 은혜에 필히 보답하겠어요.”

    “과분하신 말씀이오. 그간 재상과 소저에게 받은 후의가 있는데, 어려움에 처한 여부 식구들을 우리가 어찌 저버릴 수 있겠소.”

    공봉들은 저마다 여씨 가문 사람들을 잘 호위해 주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했다. 비록 냉염종에 직접 들어가진 못하게 됐지만, 냉염종 내문제자가 될 여몽한과 조금이라도 관계를 잘 맺어 두면 언젠가 큰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석진인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한립을 훔쳐보았다.

    “백석 수사, 수사는 여부에 오래 머물렀으니 저분들을 따라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오.”

    한립은 저물대를 살피다 그런 백석진인의 시선을 느꼈는지 돌아보며 담담히 말했다. 그제야 백석진인도 웃으며 여몽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몽한이 네 분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여몽한은 그런 백석진인의 행동을 못 본 척, 네 사람을 향해 다시 한 번 인사를 올렸다. 얘기가 잘 마무리되자 여씨 가문 사람들은 즉시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한립도 들고 있던 저물대를 품에 집어넣고는 다시 제명호의 시신으로 다가가 그의 저물대를 꺼내 들었다.

    한립이 나머지 흑의인들의 저물대는 신경 쓰지 않자 백석진인은 기쁜 기색으로 흑의인들의 소지품을 챙겼다.

    “한 수사께선 이후로 어쩌실 계획입니까?”

    고운월이 다가와 묻자 한립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천귀종의 문제도 있는 데다 명원성(明遠城)에 달리 남은 볼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 바로 떠날까 합니다.”

    “하지만 수사께선 이미 진흙탕에 발을 들이신 셈입니다. 제명호를 죽인 이상, 이제 와 발을 빼려 해도 쉽지 않을 거예요. 천귀종은 금방 수사의 행방을 찾아낼 겁니다.”

    고운월이 은근한 미소를 띠며 말했지만 한립은 두려운 기색이라곤 없이 되물었다.

    “그래서, 선자께서 하시고 싶은 말이 뭡니까?”

    “한 수사만 괜찮으시다면 우리 냉염종에 들어오시는 게 어떠십니까? 냉염종은 늘 뛰어난 실력을 가진 산수 분들을 모시는 데 적극적이랍니다. 결단기 수사를 쉽게 죽일 정도의 실력이라면 본종의 외문 객경장로가 되시기에 충분하지요.”

    고운월의 말에 여몽한도 거들고 나섰다.

    “사존의 말씀이 맞습니다. 한 오라버니께서 냉염종에 와 주신다면 낙아 동생도 훨씬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거예요.”

    한립은 낙아를 보고는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낙아는 갑작스러운 얘기에 어리둥절한 듯 큰 눈을 깜박였다.

    망설이는 한립을 보며 고운월은 넌지시 말을 덧붙였다.

    “천첩이 보기에 한 수사는 기운이 다소 불안정한 게, 정상은 아닌 것 같더군요. 마침 천첩에게 치료약으로 명성이 자자한 망서단(望犀丹)이 한 알 있으니 수사께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장로의 질손을 포함한 결단기 수사 두 명이 죽었으니 냉염종으로 가는 길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고운월으로서는 어떻게든 이 내력은 불분명하지만 고수임이 분명한 청년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낙아, 넌 어떠냐. 냉염종으로 가고 싶으냐?”

    잠시 고민하던 한립이 갑자기 낙아를 보며 물었다.

    추혼술로 백석진인에게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영환계에서도 인족과 요족 사이가 가까운 건 아니었지만 요족이 몇몇 대 문파나 경지가 높은 수사들 곁에 머무는 건 비교적 흔한 일이었다.

    따라서 낙아를 데리고 냉염종에 간다 해도 큰 문제가 되진 않을 것 같았다.낙아는 고운월과 여몽한을 보더니 좀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전 오라버니 말씀에 따를게요.”

    “걱정 마라. 내가 있는 한 감히 널 괴롭힐 사람은 없을 거란다.”

    한립이 빙긋 미소 지으며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자 낙아는 그제야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활짝 웃었다.

    “네. 오라버니만 같이 계시면 전 아무것도 안 무서워요.”

    한립은 그런 낙아의 머리를 잠시 더 쓰다듬다가 고운월을 보며 말했다.

    “그럼 선자의 말씀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망서단은 지금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야 당연하죠.”

    고운월은 기쁜 기색으로 망설임 없이 하얀 옥병을 꺼내 건넸다.

    옥병을 넘겨받은 한립은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고운월의 얼굴에도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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