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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445화 (1,202/2,000)

1445화. 부탁

*

혈운 속 귀영들은 피에 대한 갈망으로 당장이라도 한립의 몸을 찢어 먹으려는 듯 으르렁거리며 달려들었다. 그 모습에 흑의 청년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 귀영들은 모두 특수한 비법으로 제련된 것으로, 영체와 실체의 중간 형태라 죽이기가 극히 어려웠으며 일단 귀영에게 덮쳐지면 생기가 빨려 산 채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네놈이 누구든, 감히 우리 천귀종(天鬼宗)에 맞서려 한 이상 그 대가는 네놈 목숨으로 갚아야 할 것이다!”

잿빛 옷의 사내가 차갑게 외치고 혈운에 파묻혀 있는 한립의 위쪽 허공으로 뛰어오르던 순간 그의 두 손에 커다란 검은색 귀조(鬼爪)가 나타났는데, 그 끝에는 극독을 품고 있음이 분명해 보이는 초록색 광휘가 악취를 풍기며 맺혀 있었다.

사내는 날렵한 몸짓으로 한립을 향해 귀조를 내리꽂았다.

“오라버니!”

이 광경에 낙아가 한립에게 달려가려 하자 백석진인이 놀라 낙아를 잡아당겼다.

“가면 안 된다! 선배님께 뭔가 방법이 있을 테니 얌전히 기다리거라!”

말은 이렇게 했지만 진인의 마음도 조마조마하긴 마찬가지였다.

상대하기 까다로운 강적이 더 늘어나 버렸으니 그가 정말 저들을 물리쳐 낼 수 있을지 걱정됐던 것이다.

멀찍이 서있던 여칠과 세 명의 공봉들 역시 목이 타는 듯 침을 꿀꺽 삼키며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한립을 바라보았다.

그때 한립의 체내에서 갑자기 꽉 막힌 폭발음 비슷한 소리가 울리더니 몸집이 급격하게 팽창하면서 피부에 금색 비늘들이 떠올랐다.

투투툭.

한립이 가볍게 어깨를 흔들자 몸을 휘감았던 검은색 사슬이 힘없이 끊어져 바닥에 떨어졌다. 이어 한립은 사방을 향해 흐릿한 잔영만 남을 만큼 엄청난 속도로 금빛 주먹을 휘둘러 댔다.

카아앙! 퍼억! 퍽! 퍽!

검은색 귀조는 금빛 주먹에 닿는 순간 마치 돌에 부딪힌 도자기처럼 힘없이 깨져 버렸고, 잿빛 옷의 사내 역시 허공을 넘어 날아오는 주먹에 연이어 강타당하자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털썩.

결국 피범벅이 된 채 그대로 땅에 떨어진 사내의 몸은 육신과 신혼(神魂)이 동시에 박살난 채 더 이상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혈운 안의 귀영들 역시 금빛 주먹에 의해 순식간에 소멸해버려 그 안에 숨어 있던 흑의 청년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청년은 잠시 멍해져 있다 한립의 차가운 눈빛을 보고는 몸을 움찔하며 곧장 거대한 검은 새 구름을 만들어 저 멀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한립은 가슴이 부풀어 오를 정도로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입을 쩍 벌려 후- 내뱉었다.

쐐애애액!

한립의 입에서 방출된 흰색 빛줄기 하나가 순식간에 검은색 구름 속으로 스며들었다.

“끄아아아아악!”

처참한 비명과 함께 검은 구름이 흩어지더니, 머리에 구멍이 뻥 뚫린 시체 하나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바로 그 흑의 청년의 시체였다.

정적만이 가득한 정원에, 누구의 것인지 모를 가느다란 목소리가 울렸다.

“검수(劍修)……!”

잿빛 옷의 사내가 나타나 흑의 청년과 함께 한립을 공격하고, 한립이 그들을 처치한 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자신만만해하던 결단기(結丹期) 수사(修士) 두 명이 허무하게 죽어 버리자 여씨 가문 사람들과 주위에 모여 있던 흑의인들은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특히 마지막에 한립의 입에서 방출된 흰빛이 벌써 저만큼 도망치고 있던 청년의 머리를 순식간에 꿰뚫은 것과, 누군가가 외친 ‘검수(劍修)’라는 말에 흑의인들은 간담이 서늘해져서 저마다 서둘러 법기를 꺼내 달아나려 했다.

일반적으로 영환계(靈寰界)에서 수사들은 검수의 상대가 못됐다. 거기다 비검의 엄청난 속도까지 생각해 본다면,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지체했다간 도망치는 것마저 불가능해질 것이다.

순식간에 여부(餘府) 곳곳에 빛이 번뜩이더니 10여 개의 신형이 일제히 하늘로 치솟아 저 멀리 날아가기 시작했다.

한립은 도망치는 흑의인들은 신경 안 쓰고 미간을 찌푸리며 그저 그들의 수장 격이었던 흑의 청년의 시체만 쳐다봤다.

한립이 흑의 청년을 보며 뭔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자 주위 사람들은 감히 그를 방해할까 싶어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하고 눈치만 살폈다.

하지만 백석진인은 한립을 슬쩍 보고는 조금 주저하다가 도망치고 있는 흑의인들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진인의 소매 속에서 금색 밧줄이 마치 독사처럼 튀어 나가 허공을 한 바퀴 감고는 다시 진인에게로 돌아왔다.

쿵!

얼굴을 찌푸리고 서 있는 한립 앞에, 진인의 밧줄에 꽁꽁 묶인 호리호리한 체격의 흑의인이 내동댕이쳐졌다.

“사, 살려 주십시오……!”

흑의인은 한립에게 애원했지만 한립은 그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백석진인을 바라보았다.

“천귀종(天鬼宗)을 아시오?”

백석진인은 여칠을 흘긋 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천귀종은 냉염종(冷焰宗)과 함께 영환계에서 손꼽히는 큰 종문입니다.”

그러자 한립은 이번에는 흑의인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명원성(明遠城)에 천귀종 제자가 몇이나 왔느냐?”

“그, 그게 선배님, 아마, 아마 여기 여부(餘府)에 온 제자가 전부일 겁니다.”

흑의인은 허둥지둥 겨우 몸을 일으키면서 대답했는데, 말을 마치자마자 무서운 한기가 온몸에 퍼졌다.

무심코 바라본 한립의 눈빛은 더없이 차가웠고, 그 칠흑 같은 눈동자는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어 검은 소용돌이로 변할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감히 조금이라도 거짓말을 했다간 그대로 저 소용돌이 속에 삼켜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 느낌은 금세 사라졌지만, 흑의인의 전신은 이미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선배님, 살려 주십시오! 소인의 말은 전부 사실입니다! 소인은 고작 외문제자고, 이곳을 습격한 것도 명령을 받아서 온 것일 뿐입니다. 성안에 다른 제자들이 더 있는지는 정말 잘 모릅니다.”

흑의인은 당장 절이라도 올릴 기세였지만 포박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연이어 힘껏 고개만 푹 숙였다.

“명령이라? 저자의 명령을 받은 것이냐?”

한립이 너부러진 흑의 청년의 시체를 보며 담담하게 물었다.

“예, 예! 저, 저자의 이름은 ‘제명호(齊冥浩)’라고 하는데 저희 종문의 내문제자로, 자질이 뛰어나 사부의 신임을 받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종문 장로 중 한 분이 제명호의 숙조부(叔祖父)이기도 하고요. 그러니 소인이 어떻게 저자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었겠습니까. 만약 선배님께서 이곳에 계신 줄 진작 알았다면 소인, 절대 여부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을 겁니다!”

흑의인이 얘기하고 있는 사이, 여칠이 붉어진 눈을 하고 다가와 추궁했다.

“아까 제명호가 한 말이 전부 사실이냐? 내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이 설마 정말로…….”

“소인 같은 외문제자는 풍국에서 일어나는 일까지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만, 아마 제명호의 말이 사실일 겁니다.”

여칠은 흑의인의 말에 두 눈을 꼭 감았다. 감은 눈 아래로는 어느새 눈물이 맺혔다 빠르게 떨어졌으며, 여씨 가문의 다른 이들도 낮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잠시 그렇게 눈물을 흘리던 여칠이 가만히 눈을 뜨고 괴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천귀종이 풍국 황실을 손에 넣었으면 그만이지. 어째서 우리 집안까지 멸하려 한 것이냐?”

“그, 그건 저희 천귀종의 관례입니다. 완벽한 정복을 위해, 냉염종과 깊은 관계였던 황실 종친이나 충신 집안은 모두 멸문시켜 버리는 거죠. 저, 송구합니다만 천귀종 제(齊) 장로는 자기 집안사람을 아끼기로 아주 유명합니다. 자기 질손(姪孫)이 죽어 버렸으니 그 흉수를 끝까지 추적하는 건 물론일 것이고, 아마……. 아마 제명호와 함께 출행에 나섰던 저희 외문제자들까지 모조리 죽이려고 들 겁니다.”

흑의인은 완전히 겁에 질린 듯 목소리까지 벌벌 떨리고 있었다. 여씨 가문 사람들과 공봉들도 겁먹긴 마찬가지였다.

“이제 와서 이것저것 물어봤자 뭘 할 수 있겠느냐. 이럴 시간에 빨리 도망이나 치자! 냉염종에 찾아가면 네 사부께서 우릴 지켜 주지 않겠느냐.”

당당하던 여부의 둘째 공자가 이젠 눈물 자국이 가득한 얼굴로 애원했다.

하지만 여칠은 아무 대답 없이 눈물을 닦고는 한립, 낙아, 백석진인이 서 있는 곳으로 가 몸을 굽히며 말했다.

“세 분의 구명지은에 감사드립니다.”

한립은 아무 말 없이 담담하게 인사를 받았고, 백석진인도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언니…….”

똑같이 가족을 잃은 적 있던 낙아는 여칠의 슬픔이 더 절절하게 느껴져서 뭔가 위로하고 싶었지만 결국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여칠은 그런 낙아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며 간신히 미소를 보였다.

그 후, 천천히 미소를 거둔 여칠은 어느새 슬픈 기색은 완전히 지우고 결연한 표정으로 아까 자신을 찌르려던 비수를 들어 망설임 없이 흑의인의 가슴을 찔렀다.

“사, 살려……!”

푸욱!

짧은 비명과 함께, 비수가 흑의인의 몸에 깔끔하게 박혔다. 흑의인은 피가 흥건한 바닥에 쓰러져 몇 번이나 경련을 일으키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여씨 가문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는데, 여칠이 그들에게 의연하게 말했다.

“지금으로선 설사 냉염종이 뒤를 받쳐 준다 해도 하루 이틀 만에 가세를 회복하는 건 불가능할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 모두 저를 따라 냉염종으로 가되, 만약 함께 가고 싶지 않은 분들은 보고(寶庫)에서 은전을 챙겨 각자 떠나도록 하세요.”

극도의 두려움과 슬픔에 젖어 있던 부인들과 아이들은 꼿꼿한 여칠을 보며 그제야 마음을 가라앉히고 울음을 멈추었다.

한립 역시 그런 여칠을 한참 동안이나 응시하고 있었다.

“공봉들께서는 오늘 목숨을 걸고 저희 일가를 지켜 주셨으니 이미 그 은혜가 하늘에 닿을 만큼 크다 할 것입니다. 만약 떠나시겠다면 이곳 보물들 중 원하시는 걸 마음껏 골라 갖고 가십시오. 하지만 만약 저희가 냉염종으로 가는 동안 계속해서 저희를 보호해 주신다면, 더 큰 사례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여칠의 말에 세 명의 공봉은 서로 눈치를 보며 주저하다가 슬쩍 한립과 백석진인을 쳐다봤다.

그 모습에 여칠은 자연히 한립에게로 시선을 돌렸다가 문득 뭔가 생각이 났는지 그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 공손히 말했다.

“오라버니, 저는 오라버니의 내력은 잘 모르지만 오라버니께서 뛰어난 고인이신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평범한 보물 정도는 안중에도 두지 않으시겠지요. 대신, 저희 집안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교원주(蛟元珠)를 사례로 바치겠으니 저희를 냉염종까지 보호해 주실 수는 없으시겠는지요.”

‘교원주!’

백석진인의 눈동자에 순간 탐욕의 빛이 떠올랐지만, 한립을 힐끗 보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미쳤느냐? 교원주를 바치겠다니!”

둘째 오라버니가 깜짝 놀라 소리치는데도 여칠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대꾸했다.

“집안이 멸문당하기 직전인데 그깟 교원주가 무슨 대수입니까. 오라버니, 오라버니께서 허락만 해 주신다면 소매가 지금 즉시 비고(祕庫)에서 교원주를 가져오겠습니다. 어떠십니까?”

“교원주(蛟元珠)가 결단기 수사의 수련에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나, 내겐 별로 필요가 없으니 굳이 그렇게 애쓸 필요 없소.”

한립이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여칠은 살짝 안색이 어두워졌지만 포기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만약 달리 원하시는 게 있으시다면 뭐든지 말씀해 보십시오. 소매가 감당할 수 있는 거라면 무조건 들어드리겠습니다.”

“사실 내가 정신을 회복할 수 있었던 건 확실히 소저의 도움 덕분이었소. 하지만 이곳을 침입했던 천귀종의 결단기 수사 둘을 대신 죽여 줬으니 그에 대한 대가는 치른 셈이오. 그리고 지금은 나도 따로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 소저를 도울 여유가 없을 것 같소.”

한립의 말에 여칠은 완전히 절망했지만 마지막 한 가닥 희망을 품고서 애원하는 눈빛으로 한립 옆의 낙아를 바라보았다.

낙아는 그런 여칠을 보고는 안타까운 얼굴로 한립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입을 살짝 열었다. 그러자 한립은 낙아의 마음을 안다는 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흘긋 하늘 너머 어딘가를 보며 담담히 말했다.

“걱정 마라. 내가 돕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도울 거란다.”

여칠이 한립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멍하니 있을 때, 멀리서 파공음이 들려왔다.

그녀를 포함한 여씨 가문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그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백석진인과 공봉들은 즉시 법기(法器)를 꺼내 들었다.

그 순간, 새까만 물건이 밤하늘을 가르며 날아오더니 땅에 쿵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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