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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444화 (1,201/2,000)
  • 1444화. 절망

    *

    “참, 한 가지 더 말해줄 것이 있소만. 소저도 분명 관심 있어 할 얘기라오.”

    청년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게 대체 무어냐?”

    청년의 거만한 태도에 여칠은 그가 하려는 얘기가 결코 좋은 내용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풍국의 몇몇 신하들이 감히 우리 천귀종의 명령에 불복했다지 뭐요. 그러다 결국은 대역죄를 저지른 죄인으로서 어제 막 참수됐다오. 그중엔 여(餘) 재상과 그의 문관 아들 둘도 포함돼 있었다지 아마?”

    “아, 아버지……! 오라버니들!”

    여칠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느낌에 털썩 주저앉았고,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던 영패 역시 힘없이 땅에 떨어졌다.

    여씨 가문의 다른 가솔들은 이제 완전히 체념한 표정이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인들의 존경을 받던 귀한 재상 집안이 눈 깜짝할 사이에 횡액을 당해 재상은 참수되고 남은 가솔들 역시 도마 위의 물고기 신세가 된 것이다.

    “하하하! 아하하하하!”

    청년은 좌절한 여칠을 보며 두 뺨에 홍조까지 띠면서 미친 듯이 웃어댔다.

    사람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고 그 비통해하는 모습을 감상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다.

    한바탕 시원하게 웃어젖힌 청년은 곧 웃음기를 거두고 차갑게 명령했다.

    “이 계집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죽여라.”

    “예!”

    그의 명령에 주위의 흑의인들은 기세 좋게 대답하고는 여씨 가문 사람들을 향해 다가갔다.

    세 명의 공봉은 기회를 봐서 몸을 빼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슬쩍 한쪽으로 물러났는데, 청년은 그 모습을 보고 의기양양하게 웃기만 할 뿐 딱히 막지는 않았다.

    “후훗. 역시 안목이 높으십니다요. 저 여자는 아직 수련을 시작한 건 아니지만 냉염종의 접인 영패를 받을 정도라면 자질이 상당하다는 뜻일 테지요. 보양하기 딱 좋은 상대입니다.”

    흑의인 하나가 다가와 알랑거리며 말하자 청년은 또다시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몸을 떨던 여칠의 눈빛이 맑아지더니 얼굴에 한 가닥 결연함이 번득였다. 그리고 허리춤에서 밝게 빛나는 비수를 꺼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가슴을 찌르려고 했다.

    이에 의기양양해하던 청년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여칠의 성격이 이렇게 강직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하고 아무 방비도 안했기 때문이다.

    휘이익!

    그런데 그때 파공음이 들리며 단단하게 응집된 바람 한 줄기가 불어와 여칠의 손에 들려 있던 비수에 꽂혔다.

    땡그렁.

    바람에 맞은 비수가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또 다른 파공음이 들리며 돌보다 단단한 여러 줄기의 바람이 흑의인들을 향해 날아갔다.

    퍽! 퍼퍼퍽! 퍼억!

    그 강력한 바람에 맞은 흑의인들은 연이어 비명을 지르고 입에서 피를 토하며 멀찍이 나가떨어졌다. 나머지 흑의인들은 깜짝 놀라서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누구냐!”

    청년은 날카롭게 외치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정원 입구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몇 개의 신형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한립, 백석진인, 낙아, 소무였다.

    청년이 매섭게 그들을 노려봤지만 그의 시선은 한립이 아니라 백석진인에게 머물러 있었다.

    “백석진인!”

    “진인, 살려 주십시오!”

    절망에 빠져 죽음만 기다리고 있던 여씨 가문 사람들은 백석진인을 보자 순식간에 다시 작은 희망이 생긴 듯 너도나도 앞 다퉈 애원했다.

    “소저!”

    소무는 용감하게 흑의인들 사이를 뚫고 달려가 여칠을 부축했다.

    “소무야…….”

    소무의 부축으로 몸을 일으킨 여칠은 복잡한 눈으로 백석진인을 쳐다보았다.

    백석진인이 결단기(結丹期) 고수이긴 했지만, 방금 전 허무하게 죽은 홍포상인도 역시나 결단기 경지였으므로 백석진인 역시 흑의인들을 당해 내지 못할 거라 여긴 것이다.

    그러다 문득 여칠의 시선이 한립에게 향했다. 한립의 겉모습은 예전에 비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눈빛은 전과 달리 더없이 맑았으며 전신에 여유로움이 가득했다.

    “네가 바로 백석진인이냐? 흥! 충고 한마디 하마. 목숨이 아깝다면 쓸데없는 참견 말고 썩 꺼지거라!”

    백석진인을 노려보며 위협하는 청년의 몸에서 순간 검은색 빛이 크게 일어나, 보는 이들에게 엄청난 위압감을 주었다.

    사실 청년은 스스로 식견이 넓은 편이라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방금 전 마치 실체를 갖추고 있는 것처럼 흑의인들을 날려 버린 바람에 대해서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이에 약간 찜찜한 기분을 느낀 청년은 상대가 알아서 물러나게끔 강한 기세로 상대를 누를 생각이었다.

    그런 청년을 보는 백석진인의 눈에도 약간의 두려움이 일었다.

    청년이 뿜어내는 기세는 결단 중기에 이르러 있었는데, 진인 자신은 결단 초기에 불과했으므로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진인은 자신도 모르게 슬쩍 한립을 쳐다보았다.

    그는 물론 방금 전의 바람이 단지 이 ‘한 선배’가 가볍게 방출한 격공지풍(隔空指風)일 뿐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흑의 청년이 그렇게까지 두렵지는 않았다.

    한립은 웃는 듯 마는 듯한 묘한 표정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왠지 가슴이 서늘해진 진인은 결국 단단히 결심하고 엄숙하게 외쳤다.

    “흥! 노도는 명색이 여부(餘府)의 공봉이거늘 어찌 이들의 불행을 그냥 모른 척할 수 있겠느냐! 더러운 욕심을 위해 감히 이런 천인공노할 살육을 저지르다니, 실로 용서하기 어렵구나!”

    백석진인의 말에 흑의 청년은 아까보다 한층 더 흉악해진 얼굴로 노호했다.

    “좋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인데, 그럼 이놈들과 같이 죽여주마!”

    청년은 곧장 진인을 향해 하얀색 골도(骨刀)를 날리고는 수결을 맺었다.

    그 순간, 골도 위에 엄청난 기세의 흰빛이 폭발하듯 솟아오르더니 눈처럼 새하얀 해골 환영들이 나타나 귀곡성 같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진인, 조심하세요! 홍포상인도 그 골도에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여칠이 다급하게 외치자 골도의 위력에 놀랐던 백석진인은 한층 더 굳은 얼굴로 뱀 모양의 비검을 내뱉고서 빠르게 수결을 맺었다.

    파아아앗!

    순간적으로 검신(劍身)에 솟아오른 검은빛이 마치 검은 구렁이처럼 골도(骨刀)를 휘감았다.

    하지만 흑의 청년은 여전히 냉소를 머금은 채 차례로 여러 개의 수결을 맺었다.

    골도에 도광(刀光)이 맹렬하게 번뜩인 순간 골도를 감싸고 있던 비검의 검광(劍光)이 산산이 부서지면서 뱀 모양 비검 역시 여러 동강으로 깨져 허무하게 땅에 떨어졌다.

    비검을 이용한 방어가 실패하자 백석진인은 다급히 청색 원형 방패를 방출해 골도를 가로막았다.

    도광이 미세하게 흐릿해지기는 했지만 골도는 여전히 매서운 위세로 방패를 베었다.

    카카칵!

    골도는 방패를 반으로 쪼개 버리고는, 잠시 그대로 멈춰 다시 한번 도광을 크게 일으키더니 계속해서 백석진인에게 날아갔다.

    하지만 진인은 방패가 처음 쪼개지기 시작한 순간 이미 한립의 뒤로 피한 상태였다.

    사실 원래의 백석진인이었다면 비록 청년의 적수는 못 되더라도 지금보다는 더 오래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원래 갖고 있던 법보들이 한립과 싸우면서 심하게 훼손되었기 때문에 골도를 막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도광이 백석진인은 물론 그가 기대어 있는 한립까지 함께 두 동강 내려는 듯 그들의 허리 부근에서 번쩍였다.

    “선배님……!”

    진인이 초조한 듯 불렀지만 한립은 담담한 표정으로 한 손을 들어 올리더니 금세 금빛 비늘이 돋아난 손으로 골도를 콱 움켜잡았다.

    푸쉬쉬쉭.

    이에 눈부시게 빛나던 도광과 귀곡성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회백색 단도는 마치 작은 물고기처럼 무기력하게 그의 손에 잡혀 있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청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골도와 한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청년의 골도는 보기에는 평범한 듯했지만 실제로는 그의 집안 어른이 귀한 재료들을 사용해 종문의 보물 천귀도(天鬼刀)를 모방해 만든 것이었다.

    설사 결단 후기의 고수라도 만만히 여길 수 없을 만큼 위력이 큰 무기였는데 난데없이 나타난 남자의 손에 힘없이 잡혀 버린 것이다.

    청년뿐만 아니라 이곳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 모두 넋 나간 얼굴로 한립을 바라보았다.

    “류 공자…….”

    놀라기는 백석진인도 마찬가지였다.

    한립이 골도를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이렇게 맨손으로 골도를 막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엄청난 그의 실력에 진인은 놀라면서도 한편으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자신의 밀실에서 한립이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꼼짝없이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낙아는 조금 흥분한 듯했지만 놀란 기색은 아니었다. ‘석두 오라버니’의 신비한 능력이야 그간 함께 지내면서 충분히 봐왔기 때문이다.

    “이런 하찮은 저계 무기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군.”

    한립은 골도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한마디 하고는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퍼어어엉!

    골도가 순식간에 폭발해 재가 되어 흩날리는 순간, 흑의 청년의 얼굴도 하얗게 질렸다.

    “푸으읍……!”

    청년의 입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자신의 본명법보(本命法寶)였던 골도가 훼손되자 마치 팔한 쪽을 잃은 것 같은 충격이 밀려왔던 것이다.

    “감히 내 법보를……! 목숨으로 갚아라!”

    청년은 매섭게 으르렁거리면서 양손으로 수결을 맺어 검은색 기운을 만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구름처럼 풍성하게 피어오른 그 검은색 기운 안에는 수많은 귀영(鬼影)이 희미하게 아른거리고 있었다.

    뒤이어 청년은 자신의 가슴팍을 세 번 두드렸는데, 그때마다 입에선 정혈이 분출됐으며 그와 동시에 그의 얼굴은 점점 더 하얗게 질려갔다.

    청년이 내뿜은 정혈은 순식간에 짙은 핏빛 안개로 변해 검은색 구름 속으로 녹아들었다.

    검은 구름은 순식간에 핏빛으로 변해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몇 배로 커졌고, 구름 안에 있던 흐릿한 귀영들도 단번에 또렷해지더니 날카롭게 포효했다.

    이와 거의 동시에 청년마저 몸집을 줄여 바로 혈운 속으로 들어가 버렸는데, 그렇게 혈운이 완벽하게 만들어진 순간 주위의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백석진인 같은 고수도 그런 기괴한 광경 앞에선 급히 호신 보옥을 이용해 후퇴하는 게 고작이었으며, 다른 흑의인들과 여씨 가문 사람들, 세 명의 공봉들은 추위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낙아 역시 처음엔 몸을 웅크리고 덜덜 떨었지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백석진인이 보옥에서 따뜻한 기운을 방출해 그녀를 감싸주었다.

    낙아의 의아한 시선에 진인은 아첨하듯 빙긋 웃고는 그녀를 감싼 채 단숨에 10여 장(丈) 밖으로 물러섰다.

    그러는 사이 한립은 혈운을 조금 이상하다는 듯 흘긋 쳐다보고는 갑자기 허공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퍼어어억!

    허공에 퍼진 강한 타격에, 귀영 하나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저 뒤로 나가떨어져 몸이 터져 회색 안개로 변해 버렸다.

    촤촤촤촥.

    그런데 그때 한립이 서 있던 땅 밑에서 검은색 사슬들이 독사처럼 솟구쳐 나와 순식간에 한립의 온몸을 꽁꽁 묶어버렸다.

    곧이어 근처 바닥에서는 양손으로 수결을 맺고 있는 잿빛 옷의 사내도 튀어나왔는데, 바로 요전에 명원성(明遠城) 골목에서 흑의 청년과 함께 있던 그의 사형이었다.

    사내의 몸에서 발산되는 기운은 흑의 청년과 비슷했지만 그의 온몸에는 검은색 귀영이 마치 그와 합체된 것처럼 뒤덮여 있어, 전신이 언제라도 허공에 녹아 사라질 것처럼 반투명 상태로 변해 있었다.

    “하하! 범(範) 사형, 마침 잘 오셨습니다. 우리 사형제의 무서움을 저놈한테 똑똑히 보여 주자고요!”

    혈운 속에서 흑의 청년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더니, 곧바로 섬뜩한 주문 소리도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비릿한 바람이 일었고 혈운도 거센 파도처럼 한립에게 밀어닥쳤다.

    그러나 한립은 무표정한 얼굴로 제자리에서 미동조차 않은 채 혈운이 자신을 완전히 덮치도록 놔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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