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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443화 (1,200/2,000)

1443화. 접인(接引) 영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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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이 시작되고 벌써 꽤 시간이 지난 탓인지, 여부(餘府) 곳곳에는 호위 무사며 하인, 하녀들의 시체가 가득 널려 있었다.

이렇게까지 무참하게 학살을 저지르는 걸 봐선 그 흑의인들이 여부를 완전히 멸문시키려고 작정한 게 분명했다.

낙아는 지나가는 길마다 너부러져 있는 시체들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인족의 잔인함에 대해서는 진작 알고 있었지만 오늘 본 이 광경으로 인간들에 대한 인식이 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안 좋게 바뀌었다.

본채로 가는 길에 시체 외에도 가끔 흑의인들과 마주치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백석진인이 나서서 그들을 일격에 죽여 없애곤 했다.

흑의인 중엔 종종 무리의 대장 격인 수사도 보였지만 대부분 축기기에 불과해 백석진인의 적수가 되지 않았다.

한립 일행은 그렇게 최대한 속도를 내 불타고 있는 회랑과 정원 등을 지나 계속해서 달려갔다.

* * *

여부(*餘府: 여씨 가문의 저택)의 본채.

향기로운 꽃이 만발해 있던 정원은 피비린내만 가득한 폐허가 되어 있었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보이는 거라곤 오직 피에 젖은 시체뿐이었다.

아직까지 살아남은 여씨 가문 사람들은 다들 본채에 딸린 이 정원에 모여 있었는데, 다 합쳐 봐야 고작 스무 명 남짓이었고 그 속에 여칠(餘七)과 그녀의 둘째 오라버니도 있었다.

부인들을 포함해 가솔들 대부분이 겁먹은 표정으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고, 여칠을 비롯한 극소수는 아직 의연한 태도로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 주위로 무려 서른 명 가까이 되는 흑의인들이 서너 명씩 작게 무리 지어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손에 각종 법기(法器)를 들고 있는 걸 봐서 다들 수사(修士)인 게 분명해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씨 가문 사람들 옆에 공봉(供奉) 몇 명이 아직 남아 그들을 보호해 주고 있었다.

이곳은 명색이 풍국(豊國) 재상의 집이었으므로 공봉들의 실력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특히 지금 여씨 가문 사람들 앞에 서 있는 붉은색 도포 차림의 중년 수사는 얼굴 전체가 곰보 자국 투성이었으며 체구가 왜소해 언뜻 보면 그다지 대단한 인물 같아 보이지 않았다.

허나 실제로는 전신에 붉은빛을 휘감고서 결단기(結丹期) 수사로서의 엄청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또한 그의 머리 위에는 붉은색 구슬 형태의 법보(法寶)가 떠 있었는데, 수많은 화염 덩어리가 그 주위를 빙빙 돌며 날고 있어 보기만 해도 제법 큰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를 제외한 나머지 공봉은 남자 둘에 여자 하나로, 앞선 결단기 수사에 비하면 경지가 떨어졌지만 그래도 꽤 비범해 보였다.

그중 청초한 얼굴 한쪽에 흉터가 나 있는 젊은 여자와 큰 키에 마른 체구의 중년 남자는 홍포(*紅袍: 붉은 빛깔의 도포) 수사의 양쪽에 나누어 서 있었다.

그리고 시골 농부처럼 손발이 거칠고 피부가 거무스름한 노인은 홍포 수사의 뒤쪽에 서 있었다.

결단기 수사가 한 명 있긴 했지만 워낙 전체 인원이 적었던 데다 여씨 가문 사람들도 보호해야 했기 때문에 감히 먼저 공격을 펼치지 못하고 주위의 흑의인들과 대치만 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버티다간 결국 놈들 손에 죽고 말 것이오. 여러분께선 기회를 보다가 일곱째 소저를 모시고 먼저 도망치시오!”

매섭게 흑의인들을 노려보던 홍포 수사는 다른 세 공봉에게 지시한 후 서둘러 두 손으로 수결을 맺으며 입에서 붉은빛을 내뿜었다.

그 붉은빛은 곧장 머리 위의 구슬로 스며들었는데, 그 순간 구슬은 형태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구슬 주위를 맴돌던 화염 덩어리 역시 구슬과 함께 미친 듯이 빙빙 돌더니 곧 서로 뭉쳐져서 길이가 족히 십여 장(丈: 약 30미터)에 이르는 굵은 화룡(火龍)으로 변했다.

붉은색 비늘로 뒤덮인 화룡은 곧 매서운 노호와 함께 입을 쩍 벌리고 흑의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화르륵.

흑의인 무리에 화룡이 달려들자 그들은 피하지 못한 채 화룡의 몸에 닿자마자 회색 재로 변해 버렸다.

뒤이어 화룡이 꼬리까지 맹렬하게 휘둘러 화염의 파도를 일으키자 흑의인들은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 중 한 수사가 갑자기 화룡을 향해 법기들을 날리고 동시에 온갖 술법을 미친 듯이 쏟아 부었다.

순간적으로 화룡의 몸을 감싼 화염이 위태롭게 일렁거렸지만, 아직 중상을 입은 건 아니었기 때문에 화룡은 여전히 사방으로 몸을 날리면서 순식간에 흑의인 절반 가까이를 쓰러뜨렸다.

“가시오!”

쌔애액!

홍포 수사가 다른 공봉들에게 외치던 순간, 한 줄기 검은 빛이 마치 번개처럼 매섭게 날아가 기세 좋게 날뛰고 있던 화룡의 복부에 정확히 꽂혔다.

푸욱!

화룡의 몸에 깊이 박힌 그 검은빛은 다름 아닌 검은색 긴 화살로 살대에는 부적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콰콰콰콰쾅!

살대의 부적이 눈부신 빛을 내뿜는 순간, 갑자기 화살이 거대한 검붉은 색 버섯구름까지 일으키면서 강하게 폭발해 근처 지면까지 떨렸다.

결국 복부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화룡은 폭발의 여파로 전신에 불꽃이 미친 듯이 번득였다. 그러나 홍포 수사와 나머지 세 공봉은 경악한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멀지 않은 곳의 정원 앞에는 또 다른 흑의인이 서 있었는데, 새카만 활을 쥐고 있는 그의 전신에 감돌고 있는 검은빛을 봐서는 분명 축기기(筑基期) 최고봉의 수행을 지니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거기다 그의 주변 공기가 떨리면서 그 뒤쪽에 역시나 축기기 최고봉으로 보이는 또 다른 흑의인 네 명이 나타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화룡을 향해 활시위를 팽팽히 당겼다 놓았다.

쌕! 쌕! 쌕! 쌕!

네 대의 새카만 화살이 차가운 곡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홍포 수사는 다시 수결을 바꿔 화룡을 피신시켰지만, 화룡의 몸집이 너무 컸던 탓에 결국 나머지 세 대의 화살이 그대로 화룡에 적중하고 말았다.

콰아앙! 콰콰콰콰쾅!

화살 세 대가 일제히 폭발하면서 몸에 커다란 구멍이 생긴 화룡은 결국 더 이상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여러 덩어리의 희미한 화염으로 흩어지다 완전히 소멸해 버렸다.

그 광경에 홍포 수사가 굳은 얼굴로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귀곡성 같은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한 줄기 빛이 방금 전의 화살들보다 더 빠른 속도로 홍포 수사 바로 앞까지 날아갔다.

홍포 수사는 깜짝 놀라 뒤쪽으로 몸을 날리며 자신의 머리 위에 떠올라 있던 화염 구슬과 함께 푸른색 단검과 붉은색 비차(*飛叉: 투척용으로 만들어진 칼끝이 2~3갈래인 병기)를 한꺼번에 방출했다.

그 순간 흑의인이 날린 흰빛 역시 주위에 음산한 바람을 휘감고 있는 3척(尺) 길이의 골도(骨刀)로 변했는데, 뒤이어 골도 위로 갑자기 검은색 기운이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화염 구슬과 단검, 비차를 휘감았다.

그러자 홍포 수사의 법보들은 표면의 영광(靈光)이 금세 희미해지더니 속도까지 급격하게 느려져, 금방이라도 아래로 떨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골도는 법보를 뚫고서 순식간에 홍포 수사의 머리 근처에 나타나 한 줄기 섬뜩한 불빛을 그렸다.

“…….”

그 순간 홍포 수사의 머리가 갸우뚱하다가 힘없이 목에서 떨어졌다.

잘린 부위에서는 피가 솟구쳤고, 머리 잃은 몸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다 그대로 쓰러졌다.

“홍포상인(紅袍上人)!”

여씨 가문 사람들이 놀라움과 두려움 섞인 얼굴로 소리쳤다.

남은 세 공봉들도 놀라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던 그때, 얼굴에 사기(邪氣)가 가득한 청년이 흑의인들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는 바로 요전에 명원성(明遠城) 골목에서 여칠 일행을 엿보던 그 청년으로 함께 있던 잿빛 옷의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앞서 정원에 있던 흑의인들은 청년이 나타나자 살짝 몸을 굽혀 인사를 올렸다.

청년은 골도와 함께 홍포 수사의 법보들도 덤덤하게 거둬들이고는 여씨 가문 사람들을 흘긋 보며 차갑게 말했다.

“다 죽여라. 한 놈도 살려 둬선 안 된다.”

“예!”

흑의인들이 우렁차게 대답하며 나섰지만, 여부(餘府)의 공봉들은 감히 나서서 막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공봉들마저 무력한 모습을 보이자 여씨 가문 사람들은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거나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심지어 개중에는 극도의 두려움에 오줌을 지리는 아이도 있었다.

“잠깐!”

두려움에 질린 사람들 속에서 여칠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여칠은 이번에도 남장을 했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감춰지지 않았다.

“오호, 소저였군.”

골도를 방출했던 그 흑의 청년이 눈을 번쩍이며 여칠의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여칠은 상대의 눈알을 파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으며 품에서 자금색 영패를 꺼냈다.

영패 위에는 화염 형상의 무늬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새겨져 있었다.

“대체 누구기에 감히 우리 집안에 이런 참혹한 짓을 저지르는 것이냐? 냉염종(冷焰宗)이 두렵지도 않은 것이냐!”

“냉염종(冷焰宗)의 접인(接引) 영패로군. 하지만 그보다도 여부(餘府:여씨 가문) 칠 소저의 미모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과연 그 소문이 과장이 아님을 알겠소. 실로 대단한 미인이오.”

사기(邪氣) 가득한 청년은 영패를 흘긋 보더니 시선을 돌려 다시 여칠을 이리저리 뜯어보면서 음흉한 눈으로 말했다.

“네놈들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라. 그렇지 않으면 냉염종의 무서움을 맛보게 될 것이다!”

여칠은 상대가 영패를 알아보자 좀 더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일곱째 소저, 드디어 냉염종에서 입문 허락을 받으신 것이오?”

은근슬쩍 몸을 빼려던 공봉들이 다시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가솔들의 눈에도 한 가닥 희망이 떠올랐다.

“하하하하! 냉염종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이 난리들이지?”

“감히 냉염종을 능멸하다니!”

청년이 갑자기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며 비웃자 여칠이 매섭게 외쳤다.

“능멸? 소저, 소저는 그래 봐야 아직 접인 영패만 갖고 있을 뿐 아니오. 그리고 설사 냉염종의 정식 제자라 한들 그게 뭐 대수란 말이오?”

청년은 냉소하며 검은색 영패를 꺼내 보였다.

여칠의 영패와 비슷한 크기의 그 영패 윗면에는 은색으로 빛나는 해골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천귀종(天鬼宗) 내문 제자의 영패……! 네놈들, 천귀종 사람이었더냐?”

여칠의 안색이 급변했다.

천귀종이라면 냉염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력한 문파였다. 세 공봉들 역시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서로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네가 아무리 천귀종 제자라 해도 엄연히 냉염종(冷焰宗)의 관할 하에 있는 풍국(豊國)에 함부로 침입하다니. 설마 전쟁이라도 일으킬 생각인 것이냐!”

여칠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다시 날카롭게 물었다.

“하하하! 역시 소문대로 똑똑하시군. 하지만 소저가 모르는 게 한 가지 있소.”

“……?”

“사실 냉염종은 얼마 전 본 종과의 전쟁에서 대패해, 풍국에 대한 권리를 우리한테 바쳤다오. 즉 지금 풍국은 이미 우리 천귀종 손아귀에 들어왔다 이 말이오.”

청년의 말에 여칠은 마치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그리고 여씨 가문의 사람들도 안색이 창백해져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여칠과 흑의 청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비록 수도계의 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들의 대화에서 어느 정도는 대강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세 명의 공봉들은 잠시 충격 받은 얼굴로 서 있다가 그런 여씨 집안사람들에게서 슬글슬금 멀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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