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2화. 마광(魔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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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수사, 오랜만입니다.”
검은색 도포 차림의 남자가 한립을 보며 담담하게 말하자 한립은 미간을 찌푸리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마광,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모습이 된 겁니까?”
“저도 모릅니다. 저 역시 그래 봐야 한 수사보다 몇 년 먼저 깨어났을 뿐이거든요. 깨어났을 때 전 이미 영성(靈性)이 거의 사라지고 잔혼(残魂) 한 가닥만 남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천마계약(天魔契約) 때문에 그간 수사의 그림자 속에서만 숨어 있을 수 있었을 뿐, 수사가 절 소환하거나 위험해지지 않는 한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검은색 도포를 입은 마광의 목소리가 기복 하나 없이 울렸다. 잠시 침묵하던 한립이 다시 물었다.
“그럼 잠들기 전에 가장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뭡니까?”
“수사가 비승(飛昇)하기 전 일은 다 기억나지만, 그 뒤로는 그저 수사와 그 고승(高昇)이란 선인이 함께 비선대(飛仙臺)를 떠났다는 것만 기억날 뿐 그 외엔 아무 기억도 없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우리 기억은 모두 비선대를 떠났던 그때에 멈춰져 있군요.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려면 먼저 고승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썩 좋지 않아요.
추혼술로 알아낸 바에 의하면 우린 지금 북명선역(北冥仙域) 직속의 ‘영환계(靈寰界)’라는 하계(下界)에 있더군요. 거기다 우리가 비선대를 떠났던 때부터 벌써 3백 년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우리 둘 다 무려 3백 년 동안의 기억을 잃어버린 겁니다.”
한립의 말에 마광은 여전히 기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큰일이군요. 그럼 수사는 앞으로 어쩌실 생각입니까?”
“아무리 잔혼 한 올만 남아 있다지만, 당신은 원래 천외마두(天外魔頭)였으니 조금은 신통이 남아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한립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반문하자 마광도 곤란한 듯 대답했다.
“지금 전 법력이 아주 미약하게만 남아 있는 데다 신통 역시 열에 여덟아홉은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일부 저계 비술밖에 펼칠 수 없지요.”
마광의 대답에 한립은 오히려 조금 누그러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도 제 예상보단 괜찮군요. 사실 제 상황도 썩 좋진 않습니다. 방금 전 살펴보니 원래 지니고 있던 모든 법보와 단약이 없어진 건 물론이고 법력 역시 얼마 남아 있지 않더군요. 신혼(神魂)과 육신도 큰 타격을 받았었는지 지금 수준은 원래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상태입니다. 그래도 이제라도 정신이 돌아왔으니 적절한 영약을 찾아 운공하면 금방 회복되겠죠.
아, 그리고 해(蟹) 도인과 서금충왕(噬金蟲王)은 혼계(魂契) 덕분에 그 존재를 느낄 순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나중에 다시 방법을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마광은 한립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정말 곤란하게 됐습니다. 고승을 찾으려면 우선 북명선역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비록 선계 직속 하계에서 비승하는 게 다른 곳에서보다 훨씬 쉽다고 하지만 그래도 비선대의 도움이 필요한 건 똑같지 않습니까. 거기다 몸을 보호할 강력한 법력까지 갖춰야 겨우 계면(界面)을 뚫을 수 있을 텐데요.”
“선계로 돌아가는 건 그리 급하지 않으니 방법이야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생각해 보면 될 겁니다. 다만 누군가의 음모로 제가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라면, 나중에 그 자와 제대로 대화를 나눠 봐야겠지요.”
한립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서늘함이 담겨 있었다. 마광이 한동안 아무 말이 없자 한립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마광 수사, 계속 저를 따르시겠습니까? 보시다시피 지금 제 처지가 이러니 만약 수사께서 떠나길 원하신다면 저도 억지로 잡지는 않겠습니다.”
“그렇게 떠볼 필요 없습니다. 비록 제 영성이 불완전한 상태이긴 하지만 천마계약은 여전히 유효하니까요. 아니, 지금은 오히려 더더욱 계약을 거스를 방법이 없지요. 지금 같은 상황에서 만약 한 수사를 떠난다면 전 더 위험해질 뿐입니다.”
마광의 덤덤한 대답에 한립의 얼굴에도 그제야 한 가닥 미소가 떠올랐다.
“좋습니다. 수사께서 그런 생각을 갖고 계시다면 저도 절대 수사를 푸대접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예전의 법력을 회복하게 되면 반드시 수사도 영성을 되찾도록 해 드리죠. 이제부터 우리는, 하루라도 빨리 원래 법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그 어떤 일보다도 우선해서 이곳 정보와 자원을 수집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일은 한 수사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럼 전 바깥에 오래 현신(現身)해 있을 상황이 못 되니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마광은 조용히 검은색 안개로 변하더니 바닥에 어려 있는 한립의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에 한립은 긴 한숨을 내쉬었고 아직도 깊게 잠들어 있는 낙아를 흘긋 보고는 천천히 눈을 감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그렇게 족히 반나절의 시간이 지난 후.
겨우 정신을 차린 낙아의 눈에 ‘석두 오라버니’가 근처에서 가부좌하고 있는 모습과 노도사가 한쪽 옆에 공손하게 서 있는 모습이 함께 들어왔다.
낙아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한립도 동시에 눈을 뜨고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일어났구나.”
“……!”
낙아는 흠칫 놀라 복잡한 표정으로 한립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석두 오라버니……. 오라버니 병이……, 나은 거로군요…….”
“낙아, 내 이름은 ‘한립(韓立)’이란다. 앞으론 ‘한(韓) 오라버니’라고 부르도록 하렴.”
한립이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낙아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낙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간신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한……, 한 오라버니…….”
낙아는 가족 같던 한립이 갑자기 조금 낯설게 느껴져 여전히 얼굴이 굳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한립은 그런 낙아의 마음을 안다는 듯 빙긋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말거라. 정신이 돌아오긴 했지만 너랑 함께했던 시간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단다. 난 앞으로도 변함없이 네 석두 오라버니이다.”
순간 낙아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석두 오라버니……!”
한립은 자신의 품으로 달려든 낙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타일렀다.
“아마 궁금한 점이 많겠지만, 지금은 설명하기 좀 그렇구나. 나중에 적당한 때가 오면 그때 다 말해 주마.”
낙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캐묻지 않았지만 그 옆에 잔뜩 긴장한 채 서 있는 백석진인을 보자 어쩔 수 없이 두려움과 의아함이 떠올랐다.
“백석 수사는 이제 우리 사람이다. 앞으론 간담이 열 개가 있어도 감히 너한테 손대지 못할 것이다.”
한립이 몸을 일으키며 무심히 백석진인을 힐끗 쳐다보자 진인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덜덜 떨면서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낙아는 그제야 두려움이 좀 가시는지 한립을 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자, 그럼 이만 나가자꾸나.”
한립은 낙아의 작은 손을 잡고 석가산 석문 앞까지 걸어가 문에다 손바닥을 가볍게 댔다.
하지만 문을 밀려던 순간 한립이 동작을 멈추더니 그의 미간도 덩달아 찡그려졌다.
이에 낙아가 의아한 눈으로 한립을 올려다보는데 한립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하필이면……. 일이 참 공교롭게 됐군.”
한립은 나지막이 중얼거리더니 석문을 열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바깥은 이미 어두컴컴해져 있었지만, 호수 너머로 보이는 여부(餘府)는 곳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불길 때문에 마치 대낮처럼 훤했다.
게다가 섬뜩한 비명이 쉼 없이 들려오고, 건물들 사이에서 폭음이 연이어 울리면서 그 위로 짙게 피어오른 연기가 마치 커다란 용처럼 밤하늘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한립 일행이 서있는 호수 속 섬은 불길에 휩싸인 곳과 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곳까지 강렬한 피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낙아가 사방에서 불길이 일고 있는 여부(餘府)를 바라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한립이 다시 백석진인을 향해 담담하게 물었다.
“백석 수사,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 가는 게 있소?”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원한을 갖고 있던 자가 복수라도 하러 온 거 아니겠습니까.”
진인은 머뭇거리며 대답하고는 공손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낙아 역시 어쩌면 좋겠냐는 얼굴로 바라보자 한립은 잠시 망설이다 결국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쨌든 내가 정신을 차린 데에는 이곳 소저의 도움도 있었으니,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걸 보고 그대로 갈 순 없겠지.”
말을 마친 한립은 낙아, 백석진인과 함께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다리 끝에 가까워질수록 살벌한 함성과 비명이 더욱 또렷해졌다.
마침내 어느 정원으로 통하는 반달문 앞에 이르자 문 너머로 처참한 광경이 그대로 보였다.
문 뒤의 정원에는 피범벅이 된 시신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는데 그중 대부분이 여부 호위 무사 복장이었고, 나머지는 검은색 야행복 차림의 시신이었다.
불길이 일고 있는 정원의 한쪽 구석에는 반구 형태의 하얀색 빛의 장막이 펼쳐져 있었고, 검은색 야행복을 입은 자들 10여 명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굵은 송곳 형태의 화추(火錐)가 검은 옷을 입은 자들 속에서 쏜살같이 튀어나오더니 빠르게 회전하면서 빛의 장막을 향해 날아갔다.
콰콰콰콰콰콱!
어마어마한 속도로 회전하며 파고드는 화추의 공격에 빛의 장막이 힘없이 진동하기 시작하더니, 결국 얼마 버티지 못하고 깨져 버렸다.
“성공이군. 자, 마저 해치우세!”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리자 흑의인들이 즉시 검을 휘두르며 장막이 펼쳐져 있던 곳으로 돌진했다.
“가서 도우시오.”
한립은 미동조차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말에 옆에 서 있던 백석진인은 성큼성큼 정원 안으로 들어가 갑자기 한 줄기 검은색 빛을 토해냈다.
그러자 그 빛이 뱀 모양의 비검으로 변해 허공에서 번쩍이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흑의인들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지이잉!
묵직한 검명과 함께 허공에서 비검이 진동한 순간, 뱀처럼 생긴 검은색 검기 수십 가닥이 검신에서 방출돼 흑의인들에게 쇄도했다.
정원 안에는 살이 베이는 소리와 함께 고통에 찬 비명 소리가 잇달아 울렸고, 재빨리 몸을 날려 목숨을 구한 짧은 수염의 사내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흑의인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죽어 버렸다.
“누구냐!”
살아남은 사내가 매섭게 소리쳤지만 백석진인은 대답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묵묵히 다시 비검을 사내의 가슴 쪽으로 날려 보냈다.
사내는 굳은 얼굴로 서둘러 푸른색이 감도는 작은 방패를 꺼냈는데, 방패는 소매 속에서 나오자마자 몇 배로 커지더니 사내와 비검 사이를 가로막았다.
뒤이어 사내는 화추에 거센 화염을 일으켜 검은색 비검을 향해 방출했다.
퍼어엉!
화추와 비검이 충돌한 순간, 허공에서 불길이 확 폭발하더니 화추가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 지면으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검은색 비검은 짧은 수염 사내가 불러낸 방패를 단숨에 뚫고 들어가 사내의 가슴에 꽂혔다. 단단해 보이던 방패도 백석진인의 비검 앞에선 아무 소용도 없었다.
“네놈, 결단기(結丹期) 수사(修士)였군……!”
사내가 입과 코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힘겹게 소리치자 백석진인은 비검을 회수하면서 다소 오만한 말투로 대꾸했다.
“이제 겨우 축기기(筑基期)인 놈이 감히 이 어르신께 맞서다니, 한심…….”
하지만 진인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다급히 입을 다물고는 두려운 눈빛으로 뒤쪽의 한립을 슬쩍 돌아보았다.
다행히 한립은 그의 말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듯 그저 낙아와 함께 정원 구석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곳에는 두 사람이 웅크리고 있었는데 젊은 남자로 보이는 사내는 옷이 온통 피에 젖어 온몸에 힘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게 법력을 전부 소진해 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청년 뒤에는 하녀 복장을 한 여자가 역시나 피에 젖어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앉아 있었다.
“소무 언니?”
낙아가 여자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흠칫 놀라 혹시나 하며 상대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그러자 여자는 청년 뒤에서 천천히 머리를 내밀어 낙아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순간 와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으흐으윽……. 류 소저……! 흐어어엉……!”
낙아가 급히 소무에게 달려가 그녀를 부축해주자, 멍해 있던 청년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백석진인에게 말했다.
“진인……. 빠, 빨리, 빨리 일곱째 소저를 구해 주십시오!”
“…….”
진인이 차마 나서서 대답을 하지 못하자 한립이 대신 담담하게 물었다.
“소저는 지금 어디 있소?”
한립을 처음 보는 청년은 순간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저랑 소무가 진인께 도움을 청하기 위해 빠져나왔을 때만 해도 일곱째 소저랑 다른 분들은 공봉(供奉)님들의 호위를 받으며 본채에 남아 계셨습니다. 허나 적의 기세가 워낙 대단해서 지금은 어떻게 되셨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알겠소. 그럼 수사께선 여기 남아서 운기요상하고 계시오. 그리고 소무, 넌 이곳 구조를 잘 알 테니 우릴 안내해 줘야겠다.”
한립이 차분히 분부하자, 낙아의 위로에 겨우 울음을 그친 소무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신이 나가 있던 남자가 어떻게 갑자기 모두한테 명령을 내리는 입장이 됐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소무를 지켜 주던 청년 역시 의문투성이인 눈으로 한립을 바라봤다.
원래 여부(餘府)에서 손가락에 꼽힐 만큼 높은 지위를 갖고 있던 백석진인이 지금은 완전히 한립의 말에 복종하고 있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어서 따라오세요.”
소무는 서둘러 본채 쪽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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