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1화, 나는 한립(韓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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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게 대체…….”
진인은 스스로 꽤 견식이 넓은 편이라고 자부해 왔었는데 이런 괴상한 일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이에 그저 눈만 휘둥그레 뜬 채 모든 일들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쩌어억.
그때 검은색 얼음 덩어리에 갑자기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얼음 속 류석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갔다. 눈꺼풀 아래의 두 눈동자는 더 이상 예전의 흐릿한 느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무척이나 맑고 또렷했다.
잠시 주위를 살펴보던 류석은 미간을 찌푸리다가 가볍게 어깨를 털었다.
콰콰콰콰콰쾅!
류석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강력한 힘에 얼음 덩어리가 터져 나가면서 얼음 조각들이 온 사방으로 날아갔다.
류석은 백석진인을 보며 뭔가 말을 하려는 듯 눈을 번뜩였지만, 몸을 떨더니 갑자기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면서 비명을 질렀다.
류석의 몸에서 뚜두둑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으며, 손발이 마치 공기라도 불어넣은 듯 급격하게 팽창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몸 전체가 두 배로 커졌다.
그와 동시에 피부에는 금색 비늘들이 떠올랐는데 볼, 목덜미, 옷섶 너머 등 보이는 모든 곳에 가득했다.
이 비늘들은 마치 순금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서늘한 빛을 띠고 있어 도검으로도 그 비늘을 깨트릴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진인은 일이 단단히 틀어졌다는 생각에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하지만 당황하는 것도 잠시, 곧 흉악한 얼굴로 깃발을 향해 선혈을 뱉어냈다.
깃발 위 부적들이 빛을 번쩍이며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더니 깃발이 투두둑 소리와 함께 5~6장(丈) 길이의 회색 지네로 변했다.
곧이어 진인이 다시 허리춤의 저물대(儲物袋)를 두드리자 주먹만 한 크기의 새까만 구슬 일고여덟 개가 날아 나왔는데, 구슬 표면에 지독한 비린내를 풍기는 검은색 기운이 감돌았다.
회색 지네는 기쁜 듯 울부짖으며 입을 쩍 벌려 그 구슬들을 한입에 삼켰다. 그러자 지네 몸통 곳곳에 검은빛이 떠오르더니 전신으로 빠르게 퍼져 나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네 몸 전체가 새까맣게 변했다.
마치 오금(烏金)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새까만 지네의 몸은 금속 같이 반질반질 빛났는데, 무척 섬뜩한 느낌이었다.
지네가 흥분해 울부짖으며 붉은 빛을 띠고 밀실 벽을 기어오르자, 단단하기 그지없던 벽에 깊은 자국이 나기 시작했다.
거기다 지네가 지나간 자리마다 검게 물들고 코를 찌르는 비린내를 풍기는 걸로 봐서 발톱에 극독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때 진인이 류석을 가리키며 외쳤다.
“가라! 저놈을 죽여!”
지네는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류석을 향해 날아갔다. 쩍 벌어진 입 속에서 비수 같은 이빨들이 보기만 해도 두려울 정도로 크고 날카로웠다.
지네가 입을 벌리고 달려드는 데도 류석은 다른 것에는 신경 쓸 여유가 없는 듯 여전히 머리를 감싸고 괴로워했다.
콰직!
결국 지네가 류석의 어깨를 물자 백석진인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번졌다.
이 지네는 평범한 법기(法器) 따위는 능히 한입에 부술 수 있으며, 전신이 극독으로 가득 차 있어서 순식간에 상대의 영성(靈性)을 부식시키고 전신을 마비시켜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진인의 얼굴에 걸려 있던 웃음이 사라졌다.
지네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류석에게서 입을 떼고 물러난 것이다. 지네의 입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고, 비수처럼 날카로운 이빨들도 모조리 부러져 있었다.
반면 류석의 어깨에는 단 한 개의 이빨 자국도 없었다.
지네는 중상을 입자 오히려 더 흉악한 본성을 드러내며 몸을 말아 류석을 칭칭 감고는 예리한 발들로 그의 몸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까아앙! 카캉!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류석의 몸을 감싸고 있는 비늘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진인이 금방이라도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놀란 얼굴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때, 갑자기 류석이 머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내리며 외쳤다.
“그래, 이제 생각났다! 나……, 나는 한립(韓立), 인족(人族) 제일 수사(修士) 한립이다!”
청년은 당당하게 외쳤고, 그의 눈은 더없이 맑았다.
그는 바로 천신만고 끝에 영계(靈界)에서 선계(仙界)로 비승(飛昇)한 한립이었던 것이다.
한립은 자신의 몸을 휘감고 있는 지네를 보고는 지네의 등딱지 속에 갈고리 모양으로 구부린 손을 박아 넣고서 휙 잡아당겼다.
지네는 울부짖으며 필사적으로 몸을 꿈틀거렸지만 아무리 버둥거려도 한립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한립이 다섯 손가락을 움직이자 무형의 거대한 힘이 지네의 몸속을 뒤흔들었다.
결국 지네는 애처로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부르르 떨더니, 마침내 모든 힘이 빠져 버린 듯 더 이상 미동조차 하지 못하고 축 늘어졌다.
촤아악!
한립은 다른 한 손도 들어 올려 거대한 지네를 단숨에 두 토막으로 찢은 후 휙 내던졌다.
지네는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심하게 일그러지더니, 곧 무참히 찢긴 깃발 두 조각으로 변했다.
깃발에서 반짝이던 빛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이 놀라운 광경에, 백석진인의 입은 한동안 닫힐 줄을 몰랐다.
지네를 없앤 한립은 천천히 진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한립의 차가운 눈빛을 받은 진인은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가슴이 서늘해졌다.
“곤(困)!”
진인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고함을 지르며 양손으로 수결을 맺자 밀실의 진법이 갑자기 빛을 발하더니 흑색 안개가 피어올라 맹렬히 한립에게 쇄도했다.
이와 동시에 진인은 다급히 백색 비사(飛梭)를 방출해 그 위에 타고는 허둥지둥 도망치기 시작했다.
“도망치겠다고?”
한립은 냉소하며 주먹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콰아아앙!
밀실 전체의 바닥 석판이 깨져 나가 그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고, 그 탓에 진법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흑색 안개까지 함께 사라졌다.
진인은 뒤에서 들려오는 굉음에 움찔했지만 그래도 이미 밀실 문 바로 앞까지 다다랐기 때문에 서둘러 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런데 바로 그때 진인 앞에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리더니 곧이어 강한 타격 소리가 울렸다.
퍼어억!
진인의 몸은 모래주머니처럼 무기력하게 날아갔다가 한쪽 석벽에 세게 부딪히며 떨어졌다.
“푸으읍……!”
진인의 입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밀실 문에서는 한립이 왼쪽 주먹을 천천히 회수하면서 진인을 싸늘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선배님, 살려 주십시오! 소인이 눈이 멀어 태산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부디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소인, 제 모든 보물들을 선배님께 바치겠습니다!”
진인은 바들바들 떨면서 겨우 몸을 일으키고는 허리춤에서 저물대를 풀어 한립 발 앞에 놓고는 쿵쿵 소리가 날 만큼 강하게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애원했다.
하지만 한립은 무표정한 얼굴로 진인을 바라볼 뿐, 그 저물대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모습에 진인은 더욱 초초해져 연신 절을 올리며 간절히 말했다.
“이, 이거 말고도 다른 보물도 많습니다! 소인, 그간 여부(餘府)에 꽤 오래 객경(客卿)으로 머문 덕에 장보각(藏寶閣)이 있는 장소도 잘 알고 있습니다. 선배님께서 명령만 하시면 소인이 지금 바로 장보각 보물 전부를 가져다가 바치겠습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방법을 전부 동원해야했다.
진인의 말에 한립의 마음이 약간 움직였는지 얼굴 표정이 조금 변했으며 전신에 어려 있던 금색 빛도 천천히 가라앉았다.
이에 진인이 기쁜 기색으로 뭔가 말하려는 순간, 한립이 갑자기 허공을 향해 살짝 주먹을 쥐자 그림자 속에서 검은색 기운이 뽑혀 나오더니 한립의 손짓에 따라 그대로 진인의 얼굴 속으로 스며들었다.
“선배님, 살려 주십시오!”
진인은 급히 자신의 몸을 살폈지만 이상한 점이라고는 발견할 할 수 없자 오히려 더 겁에 질린 얼굴로 애원했다.
“당장 널 어떻게 하겠다는 건 아니니 걱정 마라. 이건 다만 너 같은 자한테 적합한 방법으로 널 다스리려는 것일 뿐. 앞으로 내가 마음을 살짝 바꾸기만 해도 아까의 그 검은 기운이 네 몸 안에서 폭발할 것이니 알아서 잘 처신하거라. 또한 난 모든 기억을 되찾았다. 명심해두거라! 내 성은 ‘류(柳)’가 아니라 ‘한(韓)’이다.”
한립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지는 동안 거대해졌던 그의 몸은 정상으로 돌아왔으며 몸에 돋았던 비늘들도 빠르게 사라졌다.
진인은 얼굴이 흙빛이 됐지만, 한립이 당장 자신을 죽이지는 않을 거라는 말에 안심하며 연신 몸을 굽히고 감사 인사를 올렸다.
“크읏…….”
그런데 그 순간 한립이 그런 진인을 휙 잡아 일으키더니 오른손 검지로 그의 미간을 쿡 눌렀다. 그러자 손가락 끝에서 새까만 빛이 뿜어져 나와 미간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선배님, 살려……!”
진인은 한립이 말을 바꾼 줄 알고 다급히 애원하려 했지만, 말을 마치기도 전에 눈빛이 흐릿해졌다.
그러나 한립의 이마에도 작은 땀방울들이 송골송골 맺혔고 얼굴빛 역시 점점 하얗게 변해 갔다.
잠시 후, 한립은 작게 숨을 내쉬며 손가락을 떼고는 이미 눈이 뒤집힌 채 정신을 잃은 진인을 바닥에 팽개쳤다.
방금 전 한립이 펼친 것은 바로 추혼술로 이미 백석진인에게서 알아내려던 건 전부 알아내었지만 한립의 미간은 여전히 찌푸려져 있었다.
그러나 문득 눈을 돌려 아직도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있는 낙아를 본 순간 한립의 눈빛이 조금 부드럽게 변했다.
낙아의 몸을 감고 있던 금색 밧줄은 저절로 느슨해져 있었지만 부적으로 형성된 검은색 빛은 여전히 낙아를 뒤덮고 있었다.
한립은 곧바로 무형의 힘을 방출해 검은색 빛을 산산이 깨뜨려 버렸다. 그리고 상처투성이인 낙아를 보며 잠시 주저하다 결국 다시 수결을 맺어 입으로 옅은 푸른색 기운을 내뿜었다.
푸른색 기운이 몸에 스며들자 낙아의 창백하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으며 몸에 난 상처들도 빠르게 회복되어 갔다.
“녀석, 그간 나 때문에 고생 많았다. 하지만……. 덕분에 내 법력은 더 줄어들어 버렸구나.”
낙아를 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리던 한립은 곧 백석진인에게 다가가 그의 저물대를 북 찢었다.
저물대에서 나온 건 거의 대부분 약재들뿐이었지만, 단약도 간간이 보이긴 했다.
한립은 세심히 살핀 후, 푸른색 단약 한 알과 붉은색 단약 한 알을 꺼내 낙아에게 복용시켰다.
낙아의 호흡이 안정되자 한립은 그제야 다시 한쪽 옆에 가부좌를 하고는 그간 낙아가 기이한 장신구라고 여겼던 연녹색 작은 병을 꺼내 들었다.
병목이 가늘고 긴 형태의 그 작은 병에는 검푸른 색 잎사귀 무늬가 곳곳에 나 있었는데, 무척이나 정교하고 아름다웠으며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한립은 손가락으로 병을 살짝 문질러 보더니 손끝에 와 닿는 미세한 요철의 익숙한 느낌에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한참이나 그렇게 침묵하고 있던 한립은 결국 어두워진 얼굴로 병을 거두고는 낮게 중얼거렸다.
“마광(魔光).”
고요한 밀실 안에는 오직 한립의 목소리만 메아리칠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후, 한립 앞에 늘어져 있던 그림자가 갑자기 꿈틀거리더니 조금씩 더 앞쪽으로 길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검은색 신형이 그림자에서 분리돼 조용히 한립 앞에 섰다. 그 신형은 검은색 도포를 입고 있었는데 피부는 먹처럼 까맣고 외모는 뜻밖에도 한립과 다소 비슷했다.
검은 머리카락은 묶지 않고 자연스럽게 풀고 있었는데, 전신에서 형용하기 힘든 쇠락한 기운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한 수사, 오랜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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