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0화.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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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내 정체를 알고 있었던 거야?”
낙아는 두려움이 밀려왔지만, 겉으로는 절대 굴하지 않겠다는 듯 꼿꼿하게 외쳤다.
“흥, 이제 와서 그런 걸 궁금해 해봤자 무슨 소용이냐. 뭐……. 사실, 호족(狐族)은 영환계(靈寰界)에서 적잖은 세력을 갖고 있는 데다 넌 일곱째 소저가 데려온 아이이니 나도 원래는 눈감아 주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 있는 보물을 발견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느냐.”
얼음 속 류석을 바라보는 진인의 눈이 뜨겁게 이글거렸다.
“너……. 너 오라버니한테 대체 뭘 할 생각인 거야?”
“걱정 마라. 나도 네 이 바보 오라비를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이 자는 백 년에 한 번 보기도 힘들 정도로 강한 신혼(神魂)을 타고났다. 게다가 마침 의식이 손상을 입어 멍청해진 거지. 여기서 조금만 더 남아 있던 신지(神智)를 지우면 잠재력이 무궁무진한 혼령괴뢰(魂靈傀儡)가 내 손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진인은 기분이 좋은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
낙아는 진인의 말을 듣자 매섭게 그를 노려보다가 뭔가 결심한 듯 눈을 빛냈다.
낙아의 입가에 한 줄기 선혈이 흐르는 듯하더니 두 눈동자에 광기가 번쩍이고 눈동자는 짙은 초록빛으로 빛나면서 몸에 하얀색 털이 자라기 시작했다.
곧 나직한 짐승 울음소리가 들려오며 여우 털들이 수정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성난 고슴도치 털처럼 바짝 서있었고, 특히 꼬리의 흰 털에서는 하얀색 빛이 번쩍였다.
그 단단한 여우 털들 때문에 낙아의 몸을 칭칭 감고 있던 금색 밧줄도 조금 느슨해졌는데, 그 틈에 낙아가 꼬리를 세차게 흔들자 꼬리에 떠올라 있던 흰빛이 한층 크게 빛났다.
쌔쌔쌔쌕!
순간 낙아의 몸에서 무수한 털들이 발출되더니 엄청난 파공음과 함께 일제히 얼음 덩어리를 향해 날아갔다.
“네가 정녕 죽고 싶은 게로군!”
류석을 바라보고 있던 진인은 그제야 상황을 눈치 채고는 손을 흔들어 검은색 타원 형태의 방패를 날려 보냈다. 방패는 한 줄기 검은빛처럼 빠르게 날아가 얼음 앞에 멈춰 서더니, 갑자기 불어나 하얀 여우 털들을 가로막았다.
띵 띵 띵 띵 띵!
잇따라 흰색 털들이 방패를 강타했지만, 결국은 모조리 방패에 막혀 사방으로 튕겨지고 말았다.
이를 본 낙아는 매섭게 눈을 빛내며 다시 출수하려고 했지만, 몸을 묶고 있던 밧줄이 한층 더 강렬한 빛을 번뜩이더니 족히 두 배는 강해진 힘으로 빠르게 낙아의 몸을 조이면서 단단한 여우 털도 뭉개 버렸다.
그와 동시에 밧줄 표면에선 손가락 길이의 날카로운 바늘들이 빼곡히 돋아 나와 낙아의 몸을 깊이 찔렀다.
“아악!”
낙아의 흰색 털이 피로 붉게 물들었지만, 낙아는 다시 이를 악물고 마지막 힘을 다해 꼬리를 흔들었다.
쌔쌔쌔쌔쌕!
또다시 하얀색 털들이 날아올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털들이 산발적으로 흩어지더니 얼음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백석진인의 방패가 대단한 방어력을 갖고 있긴 했지만, 이렇게 사방팔방에서 쏟아지는 공격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이 괘씸한 것이 감히!”
진인은 분노한 얼굴로 입을 쩍 벌려 검은빛을 내뿜었다. 그러자 그 검은빛 안에 숨어 있던 뱀 모양의 비검(飛劍)이 그대로 얼음 덩어리 위를 향해 날아갔다.
휘휘휘휘휙!
비검이 얼음 위를 빙빙 돌면서 검은색 검기를 내뿜자 곧 검영(劍影)이 형성되어 얼음 덩어리를 완전히 감쌌다.
그와 동시에 방패도 다시 빛을 발하더니 아까보다 한층 더 커진 채 얼음 앞을 단단히 지켰다.
깡! 깡! 깡! 깡! 깡!
다시 한 번 금속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잇따라 울리며 털 대부분이 비검과 방패에 의해 막혔지만, 일부분은 다행히 검영을 뚫고 얼음 덩어리를 찔렀다.
털이 꽂히자 얼음 덩어리가 극심하게 흔들리면서 균열이 생겨나는가 싶더니, 그 균열은 곧 빠르게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그때 진인이 순식간에 얼음 옆에 나타나 두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검은색 안개가 그의 소매에서 용솟음쳐 나와 일부는 얼음 덩어리에 녹아들었으며 나머지는 대부분 보호막으로 응결되어 얼음 덩어리를 감쌌다.
그 결과, 급속도로 퍼져 나가던 얼음 위의 균열이 즉시 확산을 멈추더니 곧 빠르게 봉합돼 버렸다.
얼음 덩어리가 다시 원상태로 복구되자 진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성난 얼굴로 낙아를 돌아보았다.
털이 사라진 채 바닥에 쓰러져 있던 낙아는 방금 전 공격으로 인해 원기 대부분을 소진한 듯 숨결마저 미약했다.
“내가 널 얕봤구나!”
사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얼음덩어리는 낙아의 공격에 완전히 깨져버렸을 것이다.
쌔애액!
진인이 낙아에게 검은빛을 날려 보내자 낙아의 몸이 붕 날아올라 밀실 벽에 부딪혀 떨어졌으며 입에선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낙아의 온몸은 완전히 피로 물들었고, 그와 대조적으로 얼굴은 몹시 창백했다. 그나마 낙아가 방금 전 일격으로 목숨을 잃지 않은 건, 순전히 진인이 영석(靈石)과 교환할 생각으로 공격에 힘을 덜 주었기 때문이었다.
“석두 오라버니…….”
낙아는 겨우 고개를 들고는 얼음 속 류석을 가느다란 목소리로 부르다가 곧 경련을 일으키며 기절하고 말았다.
이를 본 진인은 곧장 낙아가 쓰러져 있는 주위 바닥으로 부적 몇 장을 날려 보냈다. 그러자 검은색 빛이 부적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오더니 반구 형태로 응집돼 낙아를 감쌌다.
진인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다시 얼음 덩어리를 돌아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홍포상인(紅袍上人), 계요자(桂妖子)……. 네놈들이 내 혼령괴뢰에 어찌 맞설지 어디 두고 보자꾸나!”
잠시 흐뭇한 얼굴로 얼음 덩어리를 바라보던 진인은 곧 웃음을 거둔 후 얼음 주위의 바닥에 부적 여덟 장을 날려 보냈다.
파아아아!
각각의 부적에서 솟아오른 새까만 빛이 얼음 덩어리를 띄워 올렸다.
이에 진인은 표면에 부적문이 새겨져 있는 검은색 호리병을 꺼내 들었는데, 차가운 빛을 발하고 있는 병 안쪽에서 액체 출렁이는 소리가 울렸다.
뒤이어 진인이 마개를 열고 조심스럽게 호리병을 기울이자 고약한 냄새의 까만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액체는 검은 빛이 살아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꿈틀거렸다.
백석진인은 신중한 표정으로 검은빛을 방출해 기괴한 액체를 감싼 후 조심스럽게 얼음 덩어리 위로 내려 보냈다.
액체가 얼음 덩어리로 스며들자 완전히 새카맣게 변해 버려 그 안에 있던 류석의 모습도 어둠에 덮여 버렸다. 이에 진인은 만족스러운 듯 호리병을 회수하고 다시 가부좌를 틀었다.
방금 전의 액체는 사실 진인이 10여 종의 희귀 재료를 모아서 정성 들여 제련한 ‘흑시부혼수(黑尸腐魂水)’로, 수사(修士)의 의식에 침투하고 그 신혼(神魂)을 상하게 할 수도 있는 그야말로 음독한 독액이었다.
진인이 양손으로 수결을 맺자 얼음 속에 스며들어 있던 검은색 빛점들이 꿈틀대더니 그중 일부가 류석의 머리를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진인은 흑시부혼수를 이용해 아주 조금씩 류석의 신지를 없애 나갈 계획이었다. 그래야 상대방의 무의식의 저항을 최대한 줄여 만에 하나 불상사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딧불 같은 빛점들이 류석의 머리에 닿은 순간, 빛들은 한층 더 강하게 번뜩였지만 결국 머릿속으로 침투하진 못하고 튕겨 나가더니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뿐만 아니라 조심스럽게 통제되고 있던 나머지 빛점들도 미친 듯이 날뛰면서 류석의 몸 곳곳으로 쇄도하더니 역시나 안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잇따라 사라져 갔다.
‘뭔가 잘못됐군!’
안색이 어두워진 진인이 서둘러 다시 수결을 맺으며 빛점들을 통제하려고 해 봤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렇게 얼음 덩어리 속 흑시부혼수가 눈 깜짝할 사이에 모두 사라져 버렸지만 얼음으로 뒤덮여 있는 류석의 몸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방금 전과 똑같았다.
‘어떻게 된 거지? 내 흑시부혼수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진인은 급히 의식을 펼쳐 류석의 몸을 자세히 살펴봤지만, 이상한 점은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한참 동안이나 류석을 노려보던 진인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노여움을 다스리고는 차분히 생각에 잠겼다.
‘이 자 몸에는 어떤 법력 파동도 없었어. 절대 수사는 아니란 얘기지. 그럼 혹시 전에 무슨 영약(靈藥) 같은 걸 복용했던 건가? 아니면 이보(異寶)라도 지니고 있나?’
이런저런 추측을 해보던 진인의 시선이 문득 류석의 가슴으로 향했다. 약간 튀어나와 있는 옷 위로 검푸른 빛이 은은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진인은 봉인을 해제하고 몸을 수색해 봐야 할지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몸수색은 포기했다. 일단 진법이 발동된 이상 함부로 중단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진인은 못마땅한 듯 혀를 차고는 청록색 호리병을 꺼내 법결을 운용했다. 그러자 호리병 입구에 푸른빛이 번쩍거리더니 10여 마리의 진녹색 가느다란 벌레들이 안에서 날아 나왔다.
벌레들의 크기는 한 뼘 정도로 머리카락처럼 가늘었는데 찍찍 거리는 울음소리를 내며 곧장 류석의 머리로 달려들었다.
까드드득 까드득.
얼음 덩어리 속에서 괴성이 들려왔다. 벌레들이 머릿속으로 파고들기 위해 류석의 피부를 갉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벌레들이 집요하게 갉아 대도 마치 류석의 머릿속에 벌레들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어떤 힘이 잠재되어 있는 것처럼 그의 피부에는 옅은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진인은 조금 놀란 듯하다가 다시 사나운 얼굴로 외쳤다.
“흥! 백치 주제에 감히 날 막아 보겠다고?”
진인은 벌레들을 호리병 속으로 회수하고는 이를 악물고 다시 주문을 읊었다.
그러자 자그마한 깃발이 진인의 머리 위에 나타나 순식간에 몇 배로 커졌는데 깃발 위에는 금제 부적들이 빽빽하게 그려져 있었다.
진인이 혀끝을 물어 정혈을 내뿜으면서 동시에 양손으로 결인하자, 깃발에 그려져 있던 부적들이 빛나더니 깃발 주위에 회색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웅.
다시 1장(丈: 약 3미터) 정도 크기로 커진 깃발의 표면에 눈부신 빛이 번뜩였다.
그 순간 흐릿한 해골 환영 일고여덟 개가 갑자기 깃발 안에서 날아 나오더니 가슴까지 오싹해지는 울음소리를 내며 류석을 향해 돌진했다.
밀실 안은 순식간에 백귀(百鬼)들이 날뛰는 듯한 소리로 가득 찼다. 진인은 핏발 선 두 눈을 부릅뜨고 그 해골 환영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땅 위에 희미하게 어려 있던 류석의 그림자가 기이하게 물결치더니 그 속에서 시커먼 인영이 날아올랐다.
그 정체불명의 인영은 팽그르르 회전하다가 순식간에 검푸른 얼굴에 날카로운 송곳니, 두 개의 뿔을 가진 흉악한 형상의 머리통으로 변했다.
커다란 머리통은 허공에 둥둥 떠오른 채 괴상한 웃음을 흘리며 해골 환영을 힐끗 보고는 곧 커다란 입을 쩍 벌려 은색 광휘를 뿜어냈다.
푸화아아압.
해골 환영들은 마치 상극과 마주친 듯 피하지도 못하고 그 은색 광휘에 집어삼켜졌다.
해골 환영을 모조리 삼킨 머리통은 날카로운 이빨이 가득한 입을 헤 벌려 의기양양하게 웃더니, 갑자기 아래쪽으로 푸른 연기를 내뿜고는 허공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푸른색 연기는 곧장 얼음 덩어리 속 류석의 얼굴로 스며들었다.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백석진인이 뭔가를 하기도 전에 상황이 끝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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