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9화. 묘한 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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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의 푸른빛에 약간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뭔가 희미한 그림 같은 것이 떠오르려 하자 낙아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숨죽이고 거울을 쳐다봤다.
그러나 좀 더 기다려 봐도 여전히 흐릿하기만 할 뿐, 또렷하게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류석은 자신의 머리 위에 떠올라 있는 그 거울이 좀 신경 쓰이는 듯, 꼭 모기 쫓는 것처럼 손을 휘둘렀다. 비록 류석의 손이 거울에 닿진 않았지만, 그 때문에 거울 위의 푸른빛이 크게 흔들려 조금 전보다도 더 어지럽게 뒤섞여 버렸다.
“말도 안 돼. 이건……!”
그 광경에 진인은 안색이 확 변해 다시 한 번 손가락으로 거울을 가리키자 거울은 허공을 한 바퀴 돌아 진인의 손으로 빨려 들어 사라졌다.
기대에 찬 얼굴로 진인을 바라보고 있는 낙아 옆에서 여칠이 궁금함을 못 참고 물었다.
“진인, 혹시 치료 방법을 찾아내신 건가요?”
“가능성은 반반이오.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다만…….”
진인은 조금 흐려진 얼굴로 주저하듯 말을 흐렸다.
“정말이신가요? 선사님, 그럼 제발 저희 오라버니를 치료해 주세요.”
낙아는 단번에 환해진 얼굴로 애원했다.
“만약 진인께 좋은 방도가 있다면 그대로 치료해 주세요. 필요한 비용은 모두 제가 부담하겠어요.”
여칠까지 거들고 나서자, 낙아는 저도 모르게 감격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진인은 류석을 한참 동안 쳐다본 후에야 겨우 결심을 내린 듯 천천히 얘기했다.
“일곱째 소저가 그렇게까지 얘기한다면 노도도 최선을 다해야겠지. 하지만 미리 얘기해 두는데, 이 자가 무슨 연고로 이런 상태가 됐는지 모르면 치료는 무척 어렵소. 결국 환령진법(唤靈陣法)을 펼쳐야만 그나마 좀 가능성이 있을 텐데, 그것도 이 자와 노부 단 둘만 조용한 방에 들어가 시전해야 하오.”
“저……. 그럼 선사님께서 치료하실 때 저만이라도 옆에 있으면 안 될까요?”
잠시 머뭇거리던 낙아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네가 옆에 있어서 무슨 도움이 된다는 게냐? 너 같은 건 방해만 될 뿐이다! 왜, 설마 노도를 못 믿겠단 뜻이냐?”
진인이 갑자기 언성을 높이자 낙아는 깜짝 놀라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전 다만 오라버니께 힘이 돼 주고 싶어서……. 그냥 옆에 얌전히 서 있기만 할게요. 절대 선사님을 방해 안 할 테니까 저도 같이 있으면 안 될까요? 제발요.”
“흥, 마음대로 해라. 아무튼 일곱째 소저, 환령진법은 평범한 진법이 아닌 만큼 준비할 게 좀 많으니 노도는 이만 먼저 가 보겠소이다.”
진인의 말에 여칠은 살짝 몸을 굽혀 인사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진인.”
낙아도 서둘러 인사를 올렸지만 진인은 그녀가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진인이 가고 난 후에는 여칠 역시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낙아를 위로하고는 곧 소무를 데리고 떠났다.
* * *
사흘이 흐르고 오후가 되자 소무가 서쪽 곁채로 와 백석진인의 준비가 다 끝났다고 알렸다.
낙아는 바로 류석의 손을 끌고서 소무의 뒤를 따라 나섰는데, 몇 개의 회랑과 정원을 지나 어느 반달문까지 넘고 나서야 여부(餘府)의 후원에 이를 수 있었다.
후원은 엄청난 길이로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고 청록색 연잎 가득한 작은 호수까지 딸려 있었는데 그 모습에 낙아는 입을 떡 벌리며 감탄했다.
작은 호수라고는 해도 큰 강에 비해 작다는 것일 뿐, 실제 이 호수의 너비는 적게 잡아도 3, 4백장에 달했으므로 웬만한 부잣집의 연못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크기였다.
낙아가 동그래진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소무가 호수 가운데에 있는 작은 섬을 가리키며 말했다.
“류 소저, 저기가 바로 백석진인께서 머무는 곳이에요.”
소무가 가리키고 있는 섬은 우거진 숲과 자욱한 안개 때문에 무척이나 신비해 보였다. 섬을 본 순간 ‘석두 오라버니’가 치료될 수 있을 거란 낙아의 기대는 더욱 커졌다.
“진인께서 머무는 곳엔 저 같은 하인들은 갈 수 없답니다. 류 소저, 여기서부턴 두 분이서만 가셔야 해요.”
소무가 완전히 넋을 잃고 있는 낙아를 보며 실실 웃으며 말했다.
“소무 언니, 고마워요.”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낙아가 서둘러 인사하자, 소무는 저 ‘언니’라는 말이 무척이나 맘에 들었는지 활짝 웃어 보이고는 곧 손을 흔들며 저 멀리 사라졌다.
섬은 호수 가장자리까지 한백옥(漢白玉)으로 만들어진 다리가 수면을 가득 덮은 연잎 위로 이어져 있었다. 낙아는 안개 자욱한 섬을 바라보며 한 손으로 다리 난간을 조심스럽게 잡아 보았다.
그때 낙아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 하나가 스쳤다.
‘병이 다 치료되면 오라버닌 날 떠날까?’
낙아의 표정이 저도 모르게 약간 어두워졌지만, 류석의 익숙한 얼굴을 올려다보고는 다시 방긋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 가요.”
낙아는 먼저 다리 위에 올라선 후 류석의 손을 이끌고 섬으로 향했다. 긴장한 낙아와 달리 류석은 평온한 표정으로 이따금 연잎 사이로 고개를 내미는 비단잉어를 쳐다보곤 했다.
드디어 섬에 도착한 후 낙아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봤다.
섬을 뒤덮은 안개는 멀리서 봤던 것만큼 진하지는 않았으며 사방이 무척 고요했다. 돌다리 끝에는 청석이 깔린 길이 연결돼 있었는데, 그 길은 굽이굽이 섬의 깊숙한 곳으로 이어져 있었다.
낙아는 계속해서 류석을 데리고 그 길을 따라 걸어갔다. 다행히 중간에 갈림길이 없어 그들은 곧장 어느 흰색 벽에 검은색 기와로 이뤄진 고풍스러운 도관(道觀) 앞에 이를 수 있었다.
“들어와라.”
도관 문 앞에 서 있던 백석진인은 그들을 보고서 무표정한 얼굴로 딱 한 마디를 던지고는 도관 뒤쪽 후원으로 향했다.
후원에는 거대한 석가산(石假山)이 있었는데, 낙아와 류석을 이끌고 온 진인이 가산을 손바닥으로 누르자 커다란 석문이 천천히 열리며 동굴 입구가 나타났다.
진인이 먼저 들어가고 뒤어어 낙아와 류석까지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 석문이 저절로 닫혔다.
그곳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동굴로 안쪽 공간은 낙아가 머물렀던 서쪽 곁채 방보다는 약간 컸다. 사방에는 등불이 몇 개나 켜져 있었는데, 어떤 기름을 태우고 있는지 연기가 전혀 나지 않았다.
바닥 가운데에는 팔괘(八卦) 비슷한 팔각형 무늬가 뚜렷이 새겨져 있었는데 팔괘와는 확연히 달랐다.
무늬 안에는 기이한 새와 짐승의 그림에다 괴상한 선으로 이뤄진 도형이 깊게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낙아는 그 무늬를 보자마자 왠지 예전에 본 적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팔각형 무늬의 각진 부분에는 검붉은 색 삼각기가 꽂혀 있었고, 깃발마다 똑같이 금색 선으로 기이한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백석진인은 진법을 살펴보고 있던 낙아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뭘 하느냐? 빨리 진법 가운데 앉히거라.”
“아, 네!”
낙아는 그제야 얼른 류석을 끌어 진법 한가운데의 동그란 형태 무늬 위에 앉히고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석두 오라버니, 꼭 나을 수 있을 거예요. 낙아가 저쪽에서 지켜보고 있을게요.”
낙아는 간절한 바람을 담아 차마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 벽 쪽으로 옮긴 후 긴장된 얼굴로 진인을 바라봤다.
“이제부터 넌 그 자리에 꼼짝 말고 있어야 된다. 절대 소리를 내거나 한 걸음이라도 움직인다거나 해선 안 돼. 알아들었느냐?”
진인이 엄숙히 분부하자 낙아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인은 그제야 진법 앞으로 걸어가 진법 주위를 한 바퀴 돌며 알아듣기 힘든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그의 소리에, 여덟 개의 삼각기 위 금색 선들이 동시에 밝게 빛나더니 곧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와 류석의 몸을 덮었다.
류석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금빛이 몸을 덮는 순간 번개에라도 맞은 것처럼 흠칫 몸을 떨며 자세를 꼿꼿이 했다.
그 광경에 낙아의 가슴에는 걱정과 기대가 함께 생겨났다.
류석의 전신을 감싸고 흐르던 금빛은 점차 기이한 무늬들을 이루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그의 눈에까지 금빛이 모여들었다.
그때 주문 읊조리던 소리가 뚝 멈추는가 싶더니 진인이 수결 맺고 있던 손을 갑자기 바꿔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키면서 크게 외쳤다.
“진(鎮)!”
그러자 류석의 몸 주위를 맴돌고 있던 금빛이 순식간에 금색 종이처럼 응결되어 류석을 감쌌다. 그 응결된 빛 너머로 고통스러운 듯 찡그리고 있는 류석의 얼굴이 보이자 낙아는 가슴이 조마조마해졌다.
츠츠츠츠츠!
그때 여덟 개의 삼각기에 붉은빛이 일제히 폭발하듯 일어났으며, 곧이어 회흑색 안개가 그 속에서 흘러나와 진법 가운데로 몰려들었다.
순간 낙아의 얼굴빛이 조금 변했다. 안개를 본 순간 왠지 모르게 본능적인 불편함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때 갑자기 류석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오더니 그의 얼굴의 근육까지 경련을 일으켰다.
“아!”
낙아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지만, 다급히 손으로 입을 막았다.
“입 다물어! 대법을 망칠 셈이냐?”
진인의 매서운 호통에 낙아는 감히 한 마디도 더 할 수 없었지만, 여전히 걱정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류석을 지켜봤다.
안개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촉수를 만들더니 제멋대로 뒤엉켜 곧바로 류석을 삼켜 버렸다. 이어 진인은 한 손으로 결인(結印)하면서 나지막이 주문을 읊었다.
이에 회흑색 안개는 점점 더 늘어났고 농도도 훨씬 더 짙어졌다. 안개 속 류석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곧 천천히 두 눈을 감고 잠들어 버렸다.
진인은 다소 기쁜 기색으로 손동작을 바꾸면서 입을 쩍 벌려 정혈을 방출했다.
정혈은 곧 붉은색 빛으로 변해 안개 속으로 스며들었는데, 어딘가 섬뜩한 기분이 들던 안개에서 이젠 짙은 피비린내가 풍기더니 핏빛 부적문들이 거세게 회오리쳤다.
‘아무래도 이상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낙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가슴은 분명 눈앞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경고하고 있었지만, 절대 방해해선 안 된다는 경고 때문에 낙아도 차마 바로 움직이진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그때 진인의 나지막한 외침이 울리자 안개의 온도가 급격하게 내려가더니 결국 안개 전체가 거대한 검은색 얼음 덩어리로 변했고 류석은 그 얼음 속에서 그대로 함께 얼어붙고 말았다.
“멈춰! 지금 뭐 하는 거야?”
이쯤 되자 낙아도 당연히 백석진인의 악의를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낙아는 매섭게 소리치면서 진법으로 달려가 손바닥만 한 소고(小鼓)를 꺼내 들었다. 지금은 앞뒤 가릴 것 없이 어떻게든 얼음을 부수고 류석을 구해야만 했다!
낙아가 손에 든 법기(法器)를 흔들기도 전에 백석진인이 날카롭게 외쳤다.
“질(疾)!”
그러자 한 줄기 빛이 번개처럼 튀어나오더니, 순식간에 황금색 밧줄로 변해 낙아의 몸을 칭칭 묶어 버렸다.
쿵!
결국 낙아는 균형을 잃고 그대로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이 교활한 늙은이! 대체 뭘 하려는 거야!”
낙아가 진인을 노려보며 힘껏 몸을 비틀었지만, 몸을 묶고 있던 밧줄은 낙아의 저항을 감지하기라도 한 것처럼 표면에 금빛을 번쩍이더니 한층 더 그녀의 몸을 조였다.
“으읍…….”
고통스러움에 얼굴이 일그러지고 눈에서 절로 눈물이 흘렀지만 낙아는 이를 악물고 비명을 참았다.
그때 낙아의 얼굴에 붙어 있던 귀가 갑자기 사라지면서 정수리 쪽의 검은색 머리칼 위로 뾰족한 삼각형 모양의 여우 귀 두 개가 솟아올랐다.
밧줄의 강력한 힘이 낙아의 법력을 완전히 봉쇄해 버린 것이다.
“클클클클. 한심한 여우 같으니……. 고작 법기 하나로 진인의 눈을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느냐?”
진인이 땅에 쓰러져 있는 낙아를 힐끗 쳐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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