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8화. 백석진인(白石眞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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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이 정원에 들어서자 마침 불어온 부드러운 바람에 나뭇잎들이 스치는 소리가 정원에 운치를 더해 주었다.
정원 안쪽 방에는 가구나 장식품들이 비교적 간단하게 갖춰져 있었지만 모든 것이 무척이나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또한 방금 청소를 마친 듯 가구들 위에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두 분 모두 피곤하실 테니 우선은 여기서 좀 쉬십시오. 잠시 후, 제가 따로 연회를 열어 두 분을 모시겠습니다.”
여칠의 말에 낙아는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연회는 관두세요. 그보다 제 오라버닌 언제쯤 진맥 받을 수 있는 거죠?”
“정 불편하시다면, 그럼 소무한테 일러 따로 저녁 식사만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선사(仙師)님은 아마 내일은 되어야 모실 수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낙아가 약간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여칠은 다시 류석을 흘긋 보면서 말했다.
“아, 그리고 혹시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얼마든지 소무한테 말씀하십시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전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네…….”
낙아는 여칠이 방을 나간 후에도 한참 동안이나 다른 데 정신이 팔린 듯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 * *
“공자님, 대체 누구예요? 차림새를 봐선 그냥 평범한 백성들 같은데 왜 그렇게 예의를 차리시는 거죠?”
낙아와 류석이 머물고 있는 작은 정원 밖.
소무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요 계집애, 네가 뭘 알겠느냐. 오늘 나랑 둘째 형이 탄 마차가 사고 날 뻔했을 때, 저 류석이란 자가 한 손으로 청풍마(靑風馬)를 제압해서 마차를 세웠다.”
여칠은 소무의 하얀 턱을 가볍게 꼬집으며 방금 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웃었다.
“청풍마! 그것도 한 손으로요? 와, 정말 힘이 장사네요!”
“이제 알겠느냐? 저런 힘센 자를 내 밑에 둘 수만 있다면 언젠가 크게 써먹을 수 있지 않겠느냐. 게다가 낙아라는 계집애는 조금만 더 자라면 절세의 미인이 될 텐데, 그런 아이를 어떻게 밖에서 고생하게 놔둘 수 있겠느냐. 당연히 내 품으로 거둬야지. 자, 아무튼 다른 하인들한테도 단단히 일러 두거라. 저들을 대접하는 데 한 치의 소홀함도 있어선 안 될 거라고 말이다. 알겠느냐?”
“예.”
여칠이 저 멀리 걸음을 옮기면서 분부하자 소무는 무슨 생각을 든 건지 조금 수줍은 얼굴로 대답했다.
* * *
낙아와 류석이 머물고 있는 정원 안.
하루 종일 의원을 찾아 돌아다닌 데다 마지막엔 예기치 않은 사건까지 겪으면서 완전히 지쳐 버린 낙아는 류석과 함께 침상에서 휴식을 취했다.
남녀유별이라고는 하지만 요 몇 년 동안 낙아는 늘 류석과 야외에서 노숙하며 함께 먹고 잤기 때문에, 같이 침상을 쓰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날이 어둑해지자 소무가 풍성한 저녁 식사를 가져다주었다.
탁자에 가득 차려진 음식들을 바라보며 낙아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평생 낙아가 언제 이런 진수성찬을 먹어 봤겠는가.
비록 낯선 환경 때문에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낙아는 도저히 참지 못하겠는지 허겁지겁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류석은 맛있는 음식에도 여전히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 * *
식사가 끝나고 어느새 깊어진 밤.
낙아는 침상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내일 일이 자꾸만 걱정돼서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석두 오라버니, 그 선사(仙師)가 정말 오라버닐 치료할 수 있을까요?”
낙아가 류석 쪽으로 몸을 움직이며 조용히 물었다.
류석은 누워 있는 게 아니라 침상 한쪽에서 가부좌한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지난 몇 해 동안 밤에는 항상 이런 식으로 앉아 있었다.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고, 심지어 눈조차 뜨지 않는 걸 보면 아마 류석은 낙아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한 듯했다.
“오라버니, 걱정 마요. 여기 선사님이 오라버닐 치료 못하면 또 다른 데로 찾아가면 돼요. 여기저기 찾아다니다 보면 분명 오라버닐 치료해 줄 수 있는 사람도 만날 수 있겠죠.”
낙아는 평소처럼 나지막한 목소리로 두어 마디 더 덧붙인 뒤에야 살짝 미소 지으며 천천히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낙아가 잠든 뒤로도 류석은 어둠 속에서 마치 조각상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류석은 굳게 감고 있던 두 눈을 번쩍 뜨더니 벽 너머 어딘가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반사적으로 예의 그 검푸른 색 장신구를 만지작거렸다.
* * *
그 시각, 류석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에 있는 여부(餘府)의 어느 지하 밀실.
밀실의 벽에는 검붉은 부적 문들이 밀실 중앙을 향해 모여드는 형태로 새겨져 있었다.
밀실 중앙에는 강렬한 검은빛을 뿜어내는 단로(丹爐)가 놓여 있었는데, 단로 아래에는 매서운 기세로 화염이 불타올랐다.
단로의 뚜껑은 금방이라도 튀어 날아가 버릴 것처럼 덜거덕 덜거덕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어느 노인 하나가 긴장된 얼굴로 단로르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에 단정하게 연화관을 쓰고 회백색 도복을 걸치고 있는 이 노인은 눈이 움푹 들어가 있고 볼도 좀 여윈 편이었는데 턱 밑에 염소 같은 수염이 나 있었다.
머리카락도 수염도 벌써 하얗게 변해 버린 걸 봐서 족히 일흔은 넘겨 보였지만 그래서인지 어딘가 도골선풍(道骨仙風)의 기운이 느껴지기도 했다.
얼마 후, 단로 안에서 갑자기 폭발음이 들리더니 뒤이어 뭔가 타는 듯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순간 노도사는 낯빛이 확 변하더니 곧장 법결을 운용해 단로 안의 불을 끄고는 단로의 뚜껑을 날려 버렸다.
그러곤 아직도 뜨겁게 달궈져 있는 단로 속으로 망설임 하나 없이 손을 집어넣었는데, 뭔가가 마음에 안 드는지 잔뜩 얼굴을 찡그리면서 거무스름한 가루 한 줌을 꺼냈다.
가루에서는 짙은 약재 냄새와 탄 냄새가 함께 뒤섞여 풍겨 나왔다.
점잖아 보이던 노도사는 타 버린 가루를 보자마자 얼굴이 파랗게 변해서는 발을 구르며 욕을 뱉었다.
“이런 젠장, 젠장, 젠장! 또 실패야!”
* * *
다음 날 아침, 여부(餘府).
서쪽 곁재의 별원과 이어져 있는 붉은색 회랑 너머에서 신형 3개가 느긋한 걸음으로 곁채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앞쪽에서는 연화관(蓮花冠)을 쓰고 회백색 도복을 걸친 노도사와 연노란색 궁장을 입은 여자가 나란히 걷고 있었고, 그들 뒤로는 수수한 차림의 소녀가, 향나무에 붉은 칠을 해 만든 3층짜리 찬합을 들고 뒤따르고 있었다.
노도사는 뒷짐을 진 채 조금 언짢은 일이 있는지 흰 눈썹을 살짝 찡그리고서 걷고 있었는데 정신이 어디로 팔려 있는 것 같았다.
궁장 차림의 여자는 새카만 머리칼과 청아한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었으며, 특히 두 눈은 보기만 해도 속세의 더러움을 잊을 수 있을 만큼 맑게 빛났다.
게다가 맑은 뺨에 약간의 홍조를 더한 옅은 화장은 더욱 여자의 미모를 돋보이게 했다.
노도사와 나란히 걸어가던 여자는 미안한 듯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백석진인(白石眞人)님, 연단(鍊丹)을 방해해 정말 송구합니다.”
“크흠……. 진맥하는 거야 뭐 어려울 거 없지만, 다만 일곱째 소저께서 왜 굳이 백치 범인(凡人)의 치료를 원하시는지가 잘 이해가 안 갈 뿐이오.”
백석진인이 여자의 목소리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진인께서 궁금해 하시는 것도 당연하지요. 실은 그 사람은 어제…….”
여자는 옅게 미소 지으며 어제 일어났던 일을 대충 설명했다.
손가락을 비비며 조용히 얘기를 듣고 있던 백석진인은 류석이 미쳐 날뛰는 청풍마(靑風馬)를 한 팔로 막았다는 말을 듣고 흰 눈썹을 살짝 꿈틀거렸다.
“일곱째 소저께 그런 도움을 준 자라면 노도의 진맥을 받을 자격이 있지.”
백석진인이 비비고 있던 집게손가락과 엄지손가락을 풀며 담담히 말하자 궁장 차림의 여자는 방긋 미소 지으며 살짝 몸을 굽혀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들 뒤에서는 하녀가 잔뜩 긴장한 채로, 감히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하고 따라가고 있었다.
서쪽 곁채에서는 이미 세안을 끝낸 낙아가 침대에 앉아 류석에게 재잘거리며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류 소저, 저희 소저께서 선사(仙師)님을 모시고 오셨습니다.”
백석진인과 궁장 차림 여자를 따르던 하녀가 눈치껏 문을 두드리며 얌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낙아는 문 앞까지 다가갔지만 문을 여는 대신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저희 소저라니, 누굴 말씀하시는 건가요?”
“낙아 동생, 나야.”
문 밖에서 어딘가 익숙한 느낌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낙아는 더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바로 희미한 약재 냄새가 전해져 왔는데 그와 함께 문밖에 서 있는 세 사람의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낙아는 약재 냄새를 풍기고 있는 노도사를 흘긋 보고는 그 옆의 하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하녀는 바로 어제 만났던 여칠(餘七) 공자의 하녀, 소무(小舞)였다.
낙아의 시선은 곧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고 있는 연노란색 궁장 차림의 여자에게로 향했는데, 순간 살짝 고개를 갸웃하던 낙아는 곧 눈이 동그래졌다.
“다, 당신은 설마 여칠 공자님……!”
“그래, 나야. 앞으론 ‘일곱째 소저’라고 부르도록 하렴. 아니면 그냥 ‘언니’라고 불러도 되고.”
궁장 차림의 여자가 다정하게 얘기하자 낙아도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어제의 그 여칠 공자님은 어딘가 좀…….”
“좀, 뭐?”
여칠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좀 남자답지 않았다고 할까요?”
낙아는 잠시 생각한 끝에, 겨우 완곡한 표현을 찾아냈다.
“밖에선 남자 몸으로 다녀야 귀찮은 일들을 피할 수 있으니까. 아마 몇 년쯤 지나면 낙아 너도 이 이치를 자연히 알게 될 거야.”
여칠이 낙아의 곱상한 얼굴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낙아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 그들이 방 안으로 들어오도록 비켜섰다.
“낙아 동생, 이분이 바로 내가 말했던 그 선사님, 백석진인이셔. 진인, 이쪽은 류낙아, 저분은 낙아의 오라버니인 류석입니다.”
여칠의 소개를 들은 낙아는 살짝 몸을 굽히며 백석진인에게 인사 올렸다.
“선사님께 인사 올립니다.”
낙아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도 여전히 긴장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류석은 침상 가장자리에 앉은 채 평소처럼 미동도 없었다.
낙아를 쳐다보던 백석진인은 곧 시선을 돌려 류석을 바라보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더니 류석의 미간을 가만히 응시했다.
잠시 후, 진인은 두 눈을 감고 손바닥을 들어 올리더니 갑자기 손가락 두 개를 모아 류석의 미간을 매섭게 가리켰다.
“아앗!”
이를 지켜보고 있던 낙아는 깜작 놀라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순간 진인은 움직임을 멈추더니 자세를 바로 하며 불쾌한 기색으로 낙아를 힐끗 쳐다봤다.
“낙아 동생, 진인께선 오라버니를 도와주시려는 거야. 놀랄 거 없어.”
여칠이 서둘러 낙아를 끌어당기며 설명하자 낙아도 바로 실수임을 깨닫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선사님. 절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진인은 낙아의 사과를 듣고서야 조금 누그러진 표정으로 다시 눈을 감고서 손가락으로 류석의 미간을 가리켰다.
그러자 곧 류석의 미간 부위에 푸른색 빛이 떠올랐는데, 마치 돌멩이가 떨어진 호수 수면처럼 동그란 파문이 그 안에서 일렁였다.
“이런…….”
진인은 가벼운 탄성과 함께 손가락을 회수하고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어떤가요? 오라버니를 치료해 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낙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진인은 곁눈질로 낙아를 힐끗 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칠은 낙아의 손을 잡더니 조급히 굴지 말라는 듯 손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낙아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지만 그 눈빛은 간절하게 류석에게 향해 있었다. 낙아의 그런 눈빛을 느끼기라도 한 듯 류석은 낙아를 천천히 바라보더니 입술을 살짝 움직여 아주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는 사이 진인이 뭔가를 나직이 읊조리다가 손바닥을 펼치자 허공에 약간 오래돼 보이는 청동 원형 거울이 나타났다.
“거(去).”
진인의 명령이 떨어지자 거울은 푸른빛을 번쩍이더니, 곧바로 류석의 머리 위까지 날아가 멈췄다.
진인은 다시 주문을 외우면서 손가락으로 허공에 부적을 그리듯 기이한 도형을 그렸다.
잠시 후, 진인이 거울을 가리키자 거울이 심하게 흔들리더니 곧 울퉁불퉁한 거울 표면이 흐릿한 푸른빛을 내뿜으며 반질반질하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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