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7화. 여부(餘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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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아가 류석의 손을 잡고 사람들을 헤치고 나가려 하자 여칠은 다시 빠른 몸놀림으로 둘을 가로막더니 류석을 흘긋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잠시만요. 혹시 그 급한 일이라는 게, 이분을 치료해 줄 의원을 찾는 일입니까?”
“그, 그걸 어떻게 안 거예요?”
낙아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저는 원래부터 코가 좀 예민해서, 두 분께 나는 약초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답니다. 그래서 분명 근방의 야국재(野菊齋)에서 나오신 것이겠거니 추측한 거죠. 거기다, 보아하니 이 형장께선 힘은 대단하지만 머리가 맑지 못하신 것 같더군요. 그래서 형장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의원을 찾아다니시는 게 아닌가 생각한 겁니다.”
활짝 웃는 여칠은 분명 사내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어디선가 묘하게 여성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그 모습에 낙아마저도 잠시 홀린 듯 여칠을 쳐다보다 곧 정신을 차리고 류석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청년의 무표정한 표정을 확인하고는 어쩐지 마음이 놓여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여칠이 그 눈부신 미소를 살짝 거두며 말을 이었다.
“소저, 우리 여씨(餘氏) 일가는 명원성에서 제법 힘이 있는 집안입니다. 당연히 실력 좋은 의원도 많이 알고 있죠. 분명 두 분께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겁니다.”
낙아는 아주 잠깐 고민하긴 했지만 결국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래요. 우린 의원님을 찾는 중이에요. 하지만 오라버니 병은 평범한 의원이 치료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낙아의 말에 여칠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류석과 낙아를 훑어보더니 다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제가 봐도 영형의 병증이 평범해 보이진 않는군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저희 집안엔 의술에도 뛰어난 선사(仙師)님이 한 분 계시거든요. 그저 그런 속세의 의원들과는 비교조차 안 되는 분이시죠. 그분께 한번 진맥해 달라고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선사님이라고요?”
낙아가 드디어 마음이 흔들리는 듯하자 여칠은 눈을 반짝이며 계속해서 설득했다.
“부디 사양하지 마십시오. 이건 그냥 제 자랑이 아니라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명원성에 물론 다른 선사님들도 계시긴 하지만 의술로만 보자면 우리 여부(餘府)에 계신 선사님이 최고일 겁니다.”
여칠의 말에 결국 낙아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공자님을 따라갈게요. 하지만 그 선사님이 오라버니를 치료하지 못하신다면 저흰 바로 떠나겠어요.”
“그야 당연히 마음대로 하셔도 됩니다. 혹시 두 분의 성함을 여쭤 봐도 될까요?”
여칠이 낙아의 승낙을 받자 기쁜 얼굴로 다시 물었다. 낙아는 잠시 망설이다결국 자신과 류석의 이름을 밝혔다.
“낙아 소저와 류석 형이셨군요.”
여칠이 고개를 끄덕이던 순간 유복 차림 청년이 결국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칠제(七弟), 이 두 사람은 내력도 불분명한데 어찌 함부로 집에 들인단 말이냐. 거기다 진인(眞人)께 치료까지 받게 해 주겠다고?”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할 테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여칠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자 유복 차림 청년은 뭔가 더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결국 더는 반대하지 못했다. 이 안하무인인 청년도 왠지 여칠의 말에는 함부로 거역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때 검을 찬 호위 무사 몇 명이 길 저 너머에서부터 급히 달려왔다.
근처에 모여 있던 구경꾼들은 그들의 모습을 보자마자 겁에 질린 얼굴로 서둘러 흩어졌고, 무사들 역시 곧장 여칠 형제에게 몸을 굽히며 인사를 올렸다.
“일곱째 공자님, 둘째 공자님, 늦게 도착해 송구합니다. 부디 죄를 물어 주십시오.”
그러자 여칠이 형 대신 나서서 담담하게 말했다.
“우린 괜찮으니 그렇게 호들갑 떨지 마라. 그보다도 난 손님과 조용히 돌아가고 싶으니 너흰 먼저 마차를 끌고 돌아가되 이 일에 대해선 크게 떠벌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 공자님!”
무사들은 깍듯하게 대답하고는 곧장 청풍마를 몰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자, 그럼 저를 따라오시지요.”
무사들이 떠나자 여칠은 다시 낙아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한 발짝 앞서 길을 안내하며 걷기 시작했다.
낙아는 다시 류석을 올려다보고는 그의 손을 꼭 잡고 여칠의 뒤를 따라갔다.
유복을 입은 청년은 그들의 뒷모습을 험악한 얼굴로 노려보다가 결국 못마땅한 듯 혀를 차며 마지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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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이거 참 재밌군요! 저건 바로 자질이 뛰어나다며 풍국(豊國) 재상이 애써 냉염종(冷焰宗)에 들여보내려고 했던 그 계집이 아닙니까.”
멀지 않은 어느 어두운 골목에서 갑자기 검은색 옷을 입은 청년이 쓱 걸어 나오더니 여칠 일행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음산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청년 뒤쪽으로 또 다른 남자가 따라 나오며 당부했다.
“그래도 사제, 조심해야 된다. 여부에는 산수(散修)도 머물고 있다지 않느냐. 방심하면 안 된다.”
청년 뒤에 나타난 남자는 마른 나뭇가지처럼 수척한 체격에 잿빛 옷을 입고 허리춤에는 불룩한 주머니들을 여러 개 달고 있었다.
“범(範) 사형, 그 정도야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제 첫 임무이고 사형은 그저 절 보조해 주시기 위해 오신 거잖아요. 모든 건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할 겁니다.”
검은 옷의 청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자 잿빛 옷을 입은 남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제의 성격을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검은 옷의 사제는 수행 경지는 높지 않으면서 사문 장로 중 하나가 그의 집안사람이라는 이유로 줄곧 다른 사형제들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검은 옷 청년의 말이 끝나는 순간, 그들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여칠(餘七)은 길을 안내하면서 낙아에게 성에 관련된 재미난 얘기들을 들려줬지만 낙아는 마음이 완전히 다른 데 가 있는 듯 그저 건성으로 대답했다.
여칠 일행은 큰길 몇 개를 지나자 금세 명원성(明遠城) 중심부에 다다랐다.
성의 세도가들이 모여 살고 있는 이곳의 길은 무척이나 깨끗하게 손질돼 있었으며, 길 양쪽에는 점포 대신 큰 규모의 저택들이 줄지어 있어서 상당히 조용했으며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곳에서 다시 또 얼마쯤 더 걸어가자 선명한 붉은색이 눈에 확 띄는 장원이 나타났다.
이 장원은 담장 길이만 해도 방금 전 지나쳐 온 세도가들의 저택보다 훨씬 더 길었고, 높이가 대략 2장에 달하는 붉은색 대문에서는 엄청난 기세가 느껴졌다.
문 양쪽에는 거대한 돌사자가 서 있었고, 대문 문틀에 가득 박혀 있는 매끄러운 못들은 햇빛을 반사해 눈부시게 반짝였다.
돌사자뿐만 아니라 방금 전의 호위 무사들과 똑같은 갑옷을 입은 위사도 각 한 명씩 서 있었는데, 손에는 도검 대신 기다란 창을 들고 있었다.
이 외에도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장원 주인의 권세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특히 대문 위의 ‘여부(餘府)’라고 새겨진 커다란 황금 편액은 그야말로 화려함의 극치였다.
류석은 편액을 흘긋 올려다봤지만 금세 시선을 거둬들였다. 하지만 비교적 담담한 류석과 달리 낙아는 장원을 본 순간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눈에도 이곳은 위세 높은 집안의 장원인 게 확실해 보였고, 이 정도 집안이라면 풍국(豊國) 조정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을 것이다.
“류 소저, 왜 그러십니까?”
여칠이 이상하다는 듯 부드럽게 물었다.
“아뇨. 그냥 규모에 좀 놀라서……. 저렇게 위사가 대문 앞에서 경계까지 설 정도면 분명 평범한 가문은 아니겠군요?”
낙아가 간신히 미소 지으며 묻자 여칠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솔직히 평범하다곤 할 수 없겠죠. 제 가친께선 바로 풍국 재상이시라, 집에도 위사들이 좀 있는 편입니다. 사실 평범한 집이었다면 어떻게 선사(仙師)님을 청해 집에 모실 수 있었겠습니까.”
여칠의 대답을 듣자 낙아의 눈이 저도 모르게 동그래졌다. 그런 낙아의 모습에 유복 차림의 청년은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일곱째 공자님, 둘째 공자님 오셨습니까!”
여칠 일행이 다가오는 것을 본 위사들은 재빨리 몸을 굽혀 인사를 올렸다. 여칠은 그들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낙아와 함께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칠제(七弟), 네가 고집을 부려 저들을 데려온 거니 나중에 아버지께서 노발대발하시더라도 내 원망할 생각은 말아야 할 게다.”
유복 차림 청년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못마땅한 듯 한마디 하고는 휭하니 가 버렸다.
“형님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자, 이리로 따라오시죠.”
여칠은 태연하게 미소 지으며 낙아와 류석을 데리고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장원에는 정자와 누각, 정원, 회랑이 끊임없이 나타났고, 바닥에는 질 좋은 백옥, 청옥 등이 깔려 있어 거울처럼 반질거렸다.
걷다가 만나는 하인들은 여칠을 보자마자 공손히 몸을 굽혔으며, 몇몇은 무릎까지 꿇고 인사를 올리기도 했다.
뒤에서 그런 여칠을 바라보고 있는 낙아의 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묘하게 반짝였다. 여칠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낙아와 류석의 모습은 자연히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특히 류석의 모습에 사람들은 더욱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훔쳐보면서도 여칠의 분노를 살까 두려운 듯 감히 대놓고 쳐다보지는 못했다.
잠시 후 그들이 어느 긴 회랑 앞에 이르자, 녹색 치마를 입은 늘씬한 하녀가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어머, 공자님. 드디어 오셨네요!”
“소무(小舞), 귀한 손님이 계시니 행동을 조심하도록 해라.”
여칠이 엄한 말투로 나무랐지만 소무는 다른 하인들과 달리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혀만 살짝 내밀었다.
여칠은 소무를 잠깐 노려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당부했다.
“아무튼 마침 잘 왔다. 이 두 분은 내가 직접 청한 손님으로, 류낙아 소저와 류석 형이시다. 서쪽 곁채에 이분들이 머물 곳을 마련해 놓도록 하거라.”
소무는 그제야 여칠 뒤에 있는 류석을 쳐다봤는데 그의 기이한 모습에 살짝 놀라다가 옆의 있는 낙아를 발견하고는 다시 방긋 웃었다.
“어머나, 정말 엄청 예쁜 꼬마 아가씨네요!”
“류 소저는 내 귀한 손님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더 이상 방자하게 굴면 용서하지 않겠다!”
여칠은 매섭게 호통치고는 낙아와 류석에게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소무는 제 하녀인데, 아무래도 하녀이다 보니 예의를 잘 모른답니다. 부디 두 분께서 양해해 주십시오.”
“알았어요, 알았어. 얌전히 있으면 되잖아요.”
소무는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여칠이 잠깐 몸을 돌린 사이 낙아를 향해 바보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소무의 장난에 낙아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지만, 덕분에 긴장이 꽤 많이 풀어졌다.
“참, 내가 며칠 자릴 비운 사이에 혹시…….”
여칠은 주위를 둘러보다 소무에게 가까이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뭔가를 소곤거렸다.
바짝 붙어 있는 둘의 모습은 무척이나 다정해 보였는데, 낙아는 그 모습을 보고는 여칠에게 조금이나마 생겼던 호감이 갑자기 확 사라져 버린 듯했다.
소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 갔고 여칠도 다시 낙아와 류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두 분은 이쪽으로 오시죠.”
여칠의 안내로 다시 얼마쯤 더 걸어가자 작은 정원이 나왔는데, 어느 샌가 소무가 먼저 그곳에 도착해 그들 일행을 맞아 주었다.
정원은 곁채에 딸린 것치곤 제법 컸으며, 조약돌로 만들어진 길 왼편에는 푸른 소나무 한 그루가, 오른편에는 청죽 10여 그루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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