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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436화 (1,193/2,000)

1436화. 분마수(奔馬獸)

*

성의 북쪽, 야국재(野菊齋) 앞.

두 개의 신형이 안쪽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바로 류낙아와 류석이었다. 낙아는 무척이나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옷자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야국재는 명원성에서 규모가 큰 의관은 아니었지만 이곳 의원이 어려운 병도 곧잘 고쳤다는 소문이 있어 낙아도 꽤 기대했었다. 그런데 결국은 이곳 의원 역시 류석의 병의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다.

“어린 소저, 잠시 멈춰 보시오.”

갑자기 쇠로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와 돌아보자,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유(劉) 의원님.”

낙아는 살짝 놀란 얼굴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낙아를 불러 세운 노인은 바로 방금 전 류석을 진맥했던 의원이었다.

“혹시 저희 오라버니를 치료해 주실 방도가 생각나신 건가요?”

“바로 그렇소. 방금 전 소저가 가고 나서 후당에 가 의서를 뒤지다가 우연히 옛 기록 하나를 찾게 됐다오. 살펴보니 분명 비슷한 병증이었소.”

“정말이세요? 의서에 뭐라고 적혀 있었나요?”

낙아가 기뻐하며 재촉하듯 묻자 노인은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의 병증은 일반적인 실혼증과 크게 다르다고 하오. 즉, 저주를 받았거나 누군가에 의해 금제에 걸려 혼이 상한 것이라더군. 이런 병은 우리 같은 평범한 의원들이 아니라 선사(仙師)들이나 치료할 수 있다오. 다만 그의 입과 혀에는 아무 이상이 없으니, 혼만 온전히 돌아온다면 말은 자연히 다시 할 수 있게 될 게요.”

노인의 말에 낙아는 한참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간신히 귀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의원님,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별 말씀을. 병자를 긍휼히 여기는 것은 모든 의원들의 마땅한 도리요.”

노인은 빙긋 웃고는 곧 뒤돌아 사라졌다. 류석을 데리고 야국재를 나서는 낙아의 표정은 상당히 어두웠다.

‘휴우우……. 역시 오라버니는 신혼(神魂)이 상했던 거였구나.’

낙아는 비록 아직 어리긴 했지만 요호(妖狐)였기 때문에, 수도에 대해서라면 조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난 몇 해 동안 류석을 보며 그가 누군가에 의해 신혼을 다친 것이리라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류석의 병을 치료하려면 실력 있는 수도자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 텐데, 그런 자에게 고작 인기부(引氣符) 하나로 자신의 정체를 속일 자신이 없었다.

낙아가 명원성에서 의원을 찾아다닌 것도 사실은 자신의 추측이 틀렸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랬던 거였지만, 결국은 상황이 우려했던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낙아의 가슴속엔 어쩔 수 없이 주저하는 마음이 생겼다. 낙아가 수심에 잠겨 있는 사이, 앞쪽 거리가 갑자기 술렁거리면서 사람들이 마구 뒤엉켜 달리기 시작했다.

“분마수(奔馬獸)가 발작했다!”

“빨리 비켜!”

고함 소리가 쉼 없이 들려오며 길을 가던 행인들이 허둥지둥 길 양쪽으로 몸을 피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은색 마차 한 대가 전신이 비늘로 뒤덮여 있는 괴상한 파란색 말에게 끌려 미친 듯이 질주해 오고 있었는데, 마차가 향하고 있는 방향이 하필 낙아와 류석이 있는 쪽이었다.

“이히히히히힝!”

파란색 말이 길게 울부짖으며 날뛰는 통에 말이 끌고 있는 마차 역시 뒤쪽에서 좌우로 요동치고 있었다. 마부가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려서 필사적으로 고삐를 당겼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낙아도 깜짝 놀라 류석을 끌고 피하려고 했지만 그러기엔 말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

바람이 휙 불어오면서 말이 그들의 근처까지 다다르자, 낙아는 말의 입속에 허연 거품이 이글거리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보고는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아앗!”

원래 법술을 펼쳐 말을 막으려던 낙아는 말의 포악한 모습에 순간 마음이 흔들려 체내의 법력을 제때 운용할 수 없게 되자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위기일발의 순간, 낙아의 눈앞이 갑자기 새카매졌다. 류석이 갑자기 튀어나와 그 큰 몸으로 낙아를 보호해 준 것이다.

류석은 번개같이 한쪽 팔을 뻗어 말의 목을 꽉 죄더니 자신의 몸으로 말을 막아 세웠다.

쿠우웅!

말은 류석의 몸과 부딪힌 순간 고통스럽게 울부짖더니, 마치 거대한 벽에 부딪힌 것처럼 드디어 제자리에 멈춰 섰다.

하지만 원래 달려오던 기세가 너무 맹렬했기 때문에 말이 지나온 길 위의 석판은 모두 말발굽에 짓밟혀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게다가 말이 워낙 갑작스럽게 멈춰 선 탓에 뒤쪽의 은색 마차도 그대로 말의 엉덩이에 부딪혀 서책을 비롯한 온갖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튀어나와 사방에 떨어졌다.

다행히 전복되지는 않았지만 결국 마차의 몸체는 크게 찌그러졌고, 마부는 하마터면 그대로 굴러 떨어질 뻔해 아까보다 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멍하니 앞만 보고 서 있었다.

류석은 그때까지만 해도 석상처럼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근처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모두 입이 떡 벌어졌는데 어디선가 ‘신력(神力)’이라고 감탄하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낙아 역시 자신 앞에 서 있는 류석을 올려다보며 금세 마음이 평온해졌다. 지난 몇 해 동안 낙아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그는 늘 이렇게 그녀를 지켜주곤 했다.

이제 그들은 이미 진짜 가족보다도 더 가족 같은 사이가 되어 있었다.

파란색 말은 류석에게 가로막히자 더욱 거칠게 날뛰며 그 큰 머리를 황소처럼 류석의 가슴 쪽으로 들이받았다.

“조심해요!”

낙아가 놀라서 외쳤지만 류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의 목을 조르고 있던 팔에 힘을 가해 말을 제압했다.

쿠웅!

류석의 엄청난 힘에 거대한 말이 결국 무릎을 꿇으면서 바닥의 석판이 산산조각으로 깨져 버렸다.

마치 태산에 짓눌린 것처럼 전신의 뼈가 금방이라도 으스러질 듯 거칠게 빛나던 말의 눈동자에도 그제야 두려움이 떠올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말은 도저히 자신이 이길 수 없는 힘이라고 여겼는지 결국 얌전히 바닥에 엎드려 더 이상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엄청난 힘이로군! 저 분마수가 들이받는 힘은 족히 사오천 근은 넘는다던데 그걸 막다니!”

“그러게 말이네! 대체 누구지?”

“그보다 저건 누구 마차인데 이런 큰길을 함부로 달린단 말인가. 저 장사가 막아 주지 않았으면 엄청난 참사가 벌어질 뻔하지 않았나!”

길 양쪽으로 흩어져 있던 사람들은 그제야 놀란 가슴이 진정됐는지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류석 역시 그제야 천천히 팔에서 힘을 뺐지만, 딱히 걸음을 옮기지 않고 그대로 제자리에 서 있었다. 말은 조였던 목이 풀린 후에도 여전히 숨을 헐떡이며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오라버니, 괜찮아요?”

다급히 류석의 몸을 살피던 낙아는 그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걸 보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부는 아직도 하얗게 질린 얼굴로 멍하니 말을 바라보고 뒤늦게 전신의 긴장이 풀려 털썩 마부석에 주저앉았다.

그때 마차 문이 열리면서 창백하게 질린 청년 두 명이 내려섰다. 그 중 한 명은 스무 살 남짓으로 보이는 준수한 외모에, 담청색 유복(儒服: 유생들이 입는 의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이제 막 예닐곱살 쯤으로 보였는데, 옥 같은 얼굴에 두 눈동자는 까맣고 선명한 붉은 입술을 갖고 있었다.

몸에는 눈처럼 하얀색 도포를 걸치고 허리에는 옥으로 만들어진 요대를 두르고 있었다. 또한 머리에 쓴 옥관(玉冠)에 커다란 명주가 박혀 있는 것이 전체적인 풍모가 옆의 유복 차림 청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화려했다.

“이 천한 놈아, 대체 마차를 어떻게 모는 것이냐! 하마터면 본 공자께서 큰일을 당할 뻔하지 않았느냐!”

유복 차림 청년은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마부의 손에서 채찍을 뺏더니 그의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마부는 몸에 상처가 늘어 가는데도 그저 공손히 무릎을 꿇고 앉아 연신 절을 하면서 용서를 구했다. 그 모습을 보고도 청년은 화가 풀리지 않는지 점점 더 세게 채찍을 휘둘렀다.

그러자 소란스럽게 떠들던 행인들은 두 청년을 보고 갑자기 목소리를 확 낮춰 수군거렸다.

“쉿. 보니까 여부(餘府) 사람이었구먼. 그만 입들 다무세.”

“그래, 맞아. 괜히 입을 잘못 놀렸다간 저 말에 치이는 것보다 더 무서운 꼴을 당할 걸세.”

행인들이 단번에 그들의 정체를 알아보는 걸로 봐서는 두 청년은 확실히 평범한 인물은 아닌 듯했다.

그때 갑자기 고운 손이 뻗어 나와 유복 차림 청년의 손목을 가볍게 쳤다.

“둘째 형, 관두십시오. 이번 일은 꼭 마부의 잘못이라고 볼 수만은 없잖습니까. 이 청풍마(靑風馬)는 저계 요수라서 야성을 길들이기가 어려워요.”

그는 백포(白袍) 차림의 소년이었는데 소년의 목소리가 마치 흐르는 샘물처럼 맑았다. 유복 청년은 백포 소년을 흘긋 보고 입을 실룩거리더니 결국 채찍을 던져 버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일곱째 공자님!”

마부는 백포 소년에게 허리가 끊어질 듯 연신 절을 올렸다.

“어서 일어나거라. 그리고 일단은 이 은자를 갖고 가서 마차 때문에 다친 사람들과 기물이 파손된 점포 주인장들에게 배상해 주도록 해라. 이 일을 잘 처리한다면, 네 죄도 감해 주마.”

“예, 예. 한 치의 틀림도 없이 명 받들겠습니다, 공자님.”

마부는 황송해 어쩔 줄 모르겠단 얼굴로 은자 주머니를 받아 들고는 마차 때문에 다친 사람들을 향해 걸어갔다.

“형장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우리 형제가 다치는 거야 괜찮지만, 만약 누가 죽기라도 했다면 우리 형제의 목숨으로도 그 죄를 씻지 못했겠지요.”

백포 소년이 류석을 돌아보며 미소 짓자 유복을 입은 청년도 힐끗 쳐다보았다. 하지만 류석의 평범한 외모와 어두운 피부, 초라한 옷차림을 보고는 표정이 조금 떨떠름해지더니, 마지못해 공수(拱手)로 인사를 대신했다.

류석은 청년의 인사를 받고도 그저 돌처럼 굳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한 번도 남한테 이런 식으로 무시당해 본 적이 없던 유복 차림 청년이 순간 발끈해서 화를 내려 하자 백포 소년이 서둘러 손을 내밀어 저지했다.

뒤이어 류석을 유심히 살펴보던 소년은 그의 눈빛에서 묘한 기세를 느끼고 왠지 모를 긴장감에 얼굴이 굳어졌다.

그때 점점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자 불안해진 낙아가 류석의 손을 잡아끌며 나직이 말했다.

“석두 오라버니, 이만 가요.”

백포 소년은 그제야 낙아의 존재를 눈치 채고는 급히 낙아의 앞을 막아섰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무슨 일이죠?”

낙아가 눈살을 찌푸리며 조금 사나운 태도로 물었다.

“저는 ‘여칠(餘七)’이라고 합니다. 방금 전 저희 마차가 하마터면 두 분을 칠 뻔 했으니 다시 한 번 사과드리고 싶어서요.”

백포 소년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낙아는 여전히 냉담하게 대꾸했다.

“우린 괜찮으니, 이만 비켜 주세요.”

“아니죠. 오늘 이분께 받은 도움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이 큰 도움에 아무 보답도 해 드리지 않고 그냥 보내 드린다면 내내 마음이 편치 않을 거예요. 우리 여부(餘府)까지 그리 멀지 않으니, 부디 그리로 걸음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백포 소년, 여칠의 간절한 청에도 낙아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됐습니다. 방금 전 일은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었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그리고 우리 남매는 급히 볼 일도 좀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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