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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435화 (1,192/2,000)

1435화. 서로에게 기대어

*

산 중턱에 위치한 널찍한 동굴 어귀.

푸른 옷을 입은 키 큰 청년이 동굴 바깥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고, 낙아는 동굴 안쪽에서 청년의 옷자락을 꽉 잡고 긴장한 얼굴로 동굴 밖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동굴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는 사내 둘을 합친 것 같은 엄청난 크기의 회색곰이 뒷발로 땅을 짚고 낙아와 청년을 노려보고 있었다.

곰의 머리에는 흉악해 보이는 뿔이 돋아 있었고, 쩍 벌어진 주둥이 안에서는 한기가 감도는 날카로운 이빨이 군침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키 큰 청년도 이 거대한 곰 앞에서는 어린아이처럼 보였지만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곰을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던 거대한 곰은 무슨 이유에선지 갑자기 엄청나게 겁에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치더니 곧 앞발까지 내려서 네 발로 미친 듯이 도망쳤다.

“휴우우. 정말 큰일 나는 줄 알았네.”

낙아는 그제야 밝아진 얼굴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청년의 앞으로 돌아가 얼굴을 올려다봤다.

한참동안 청년의 딱딱한 얼굴을 관찰하던 낙아는 평소와 다름없이 멍한 눈빛과 표정을 보고는 조금 실망한 어조로 말했다.

“석두 오라버니, 낙아도 오라버니가 대단한 사람인 건 잘 알겠어요. 그런데 왜 말은 못하는 거예요? 낙아랑 같이 얘기도 하고 그러면 얼마나 좋아요. 어휴…….”

낙아는 한숨을 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청년의 손을 잡고서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청년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지만, 시선만은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는 낙아에게 둔 채 낙아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 * *

이름 모를 어느 광활한 초원 위.

겨울이 지나고 봄이 성큼 다가와 풀이 무성히 자라고 새들이 지저귀며 초원 정체에 싱그러운 풀 향기가 가득했다.

여덟아홉 살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는 손에 연노란 꽃을 든 채, 청년의 어깨에 올라앉아 느긋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두 해전과 비교해도 청년은 변한 것 하나도 없었지만 여전히 푸른색 옷을 입고 있었고, 낙아는 꽤 키가 자라 있었다.

낙아의 작은 얼굴에 어려 있던 앳된 기운은 어느새 많이 사라지고, 대신 남다른 아름다움이 벌써부터 얼굴 전체에 느껴졌다. 좀 더 나이가 들면 능히 경국지색의 미녀가 될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낙아는 손가락을 움직여 등나무 덩굴을 엮으면서 입으로는 경쾌하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낙아의 목소리가 마치 꾀꼬리가 지저귀는 것처럼 맑고 아름다웠다.

“다 됐다!”

낙아의 빠른 손놀림 덕분에, 노래 한 곡이 채 끝나기도 전에 꽃송이가 가득한 예쁜 화환이 완성되었다.

낙아는 두 손으로 화환을 한 바퀴 빙 돌려 보더니,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화환을 청년의 머리에 곱게 씌워 주었다.

화환은 청년의 머리에 작지도 크지도 않게 딱 맞았다. 이에 청년은 뭔가 묘한 느낌이 들었는지 손으로 화환을 살짝 만져 보더니 천천히 팔을 내렸다.

낙아는 이제 청년의 행동에 꽤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문득 그의 목에 걸려 있는 녹색 끈을 발견하고는 짓궂은 미소와 함께 그 끈을 들어 올리려는 동작을 취했다.

그러자 청년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녹색 끈에 매달려 있는 검푸른 장신구를 움켜쥐더니 오랫동안 그대로 멈춰 있었다.

“정말 치사해. 매번 이런 식이라니까. 난 그냥 잠깐 보려고 한 것뿐인데…….”

낙아는 볼을 부풀리며 투덜댔지만, 정말 화난 기색은 아니었다. 사실 청년이 다른 것에는 무관심하면서도 유독 장신구에만 반응을 보였기 때문에 재미로 종종 장난을 쳐 본 것이다.

* * *

세월의 흐름 속에 다시 또 다시 몇 년의 시간이 지나갔다.

하얀색 옷을 입은 열서넛 살의 예쁜 소녀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채, 뒷짐을 지고서 경쾌한 발걸음으로 관도 위를 걷고 있었다.

그리고 소녀의 뒤로는 푸른 옷을 입은 키 큰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느릿느릿 따라오고 있었다.

소녀의 걸음은 빨랐지만 보폭이 좁았고, 청년은 걸음은 느렸지만 보폭이 컸기 때문에 둘 사이의 거리는 절묘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앞쪽에서 걷고 있던 낙아는 길 끝에 있는 짙푸른 색의 성과, 성문 어귀에서 오가는 수많은 행인들을 발견하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걸음을 멈췄다.

“명…… 원성…….”

낙아는 멀리 떨어져 있는 성을 유심히 바라보다 성문 편액에 적힌 성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천천히 중얼거렸다.

그 사이 낙아의 옆까지 다다른 청년은 그대로 멈춰 서서 낙아를 따라 그 웅장한 성을 바라보았다.

“인족(人族)의 성 같은데…….”

낙아의 얼굴이 긴장감으로 조금 굳어졌다.

지난 다섯 해 동안, 청년의 상태를 호전시킬 수 있을까 해서 몇몇 인족 성에 들어간 적이 있었지만 저곳처럼 규모가 큰 성에는 가본 적이 없었다.

“석두 오라버니, 만약 오라버니의 정신이 완전히 돌아오면 낙아가 복수하는 것도 도와줄 수 있을까요?”

낙아는 청년을 보며 조심스레 물었지만, 이것이 청년에게 하는 질문인지 자신에게 하는 질문인지 알 수 없었다.

청년은 먼 곳을 내다보다 천천히 시선을 옮겨 낙아를 바라봤지만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내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무리 석두 오라버니가 대단해도 어떻게 혈도회의 그 많은 사람들을 이길 수 있겠어.”

낙아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자, 눈물방울이 힘없이 떨어져 누런 모래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낙아의 머리 위로 기분 좋은 무게감과 따뜻한 감촉이 전해졌다.

낙아가 살짝 고개를 들자 청년이 유달리 부드러운 눈빛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이에 소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용기가 가득 차올랐는데 그 어떤 어려움에도 이젠 당당히 맞설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낙아는 결연한 표정으로 눈물을 닦아 내고는, 곧 청년의 커다란 손을 움켜쥐고 저 먼 성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명원성(明遠城)은 풍국(豊國)에서 세 번째로 큰 성이었다.

평야에 위치해 있는 이 성의 면적은 무려 백 리에 달했으며, 성 남쪽으로는 큰 강도 지나고 있었는데 그 덕분에 수로와 육로가 함께 발달해 성이 빠르게 번영할 수 있었다.

성문에는 성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서서 시끌시끌했다.

낙아는 청년의 손을 잡아끌며 사람들 속에 섞여 다소 불안한 눈빛으로 자꾸만 성문위를 힐끔거렸다.

성문 위에는 팔각형 모양의 거울이 성문 바깥쪽을 향해 걸려 있었는데 벌써 정오 무렵이라, 거울에 그려진 팔괘 무늬가 햇빛 아래 반짝이면서 강한 서기(瑞氣)를 발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수문병에게 통행료만 주고 바로바로 성문 안으로 사라지는 걸 봐서는 신분 검사가 그리 엄하진 않은 듯했다. 빠르게 줄이 줄어들면서 금세 낙아와 청년 차례가 되었다.

그들은 성문 아래에까지 걸어가 위쪽에 걸려 있는 거울을 마주하고 섰는데, 그 순간 알 수 없는 힘이 둘의 몸을 뒤덮었다.

낙아는 조금 긴장한 채 고개를 숙였으며, 청년은 흐리멍덩한 눈으로 거울을 똑바로 쳐다봤다. 하지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청년의 눈동자에서 한 줄기 푸른빛이 번쩍였다 사라졌다.

다행히 거울에는 별다른 이상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너흰 어디서 왔느냐? 성에 무슨 일로 들어가려는 거지?”

중년의 수문병이 그들을 보며 귀찮다는 듯 물었다.

“네, 오라버니들. 저희 남매는 여기서 북서쪽으로 삼백 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류씨(柳氏) 마을에서 왔습니다. 제 이름은 ‘류낙아(柳樂兒)’라고 하고요. 여기 제 오라버니는 ‘류석(柳石)’입니다. 여기엔 잠시 친척한테 몸을 의탁해 오라버니 병을 고치려고 왔습니다.”

낙아는 환한 미소를 머금고 술술 대답했다. 요 몇 년 동안 서로만 의지하며 살긴 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아주 피할 순 없었기 때문에 일찌감치 청년에게 ‘석두 오라버니’ 대신 ‘류석’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말을 마친 낙아는 재빨리 일반 통행료보다 좀 더 많은 돈을 꺼내 수문병에게 건넸다.

수문병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돈을 슬쩍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더니 흐리멍덩해 보이는 청년 류석을 흘긋 보고는 시원스럽게 손짓했다.

“너희 같은 녀석들이 나쁜 짓을 저지를 리 없지. 들어가도 좋다.”

“감사합니다!”

낙아는 방긋 웃으며 인사하고는 서둘러 류석의 손을 잡고 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나서도 낙아는 한참을 걸어 성문에서 완전히 떨어져 있는 모퉁이를 돌고 나서야 겨우 걸음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께서 주셨던 인기부(引氣符)가 있어서 다행이었어. 이거면 내 요기(妖氣)를 가려서 요경(妖鏡) 검사도 피할 수 있으니까.’

낙아는 주위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품에서 푸른색 옥부(玉符) 하나를 꺼냈다.

길이는 2촌에 폭은 손가락 두 개를 합친 옥부에는 파란색 무늬가 가득 새겨져 있었는데, 복잡한 진법 위로 부드러운 푸른빛이 마치 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낙아는 조금 쓸쓸한 눈으로 옥부를 바라보다가 곧 조심스럽게 다시 품에 넣었다. 뒤이어 낙아가 류석의 손을 잡고 골목 몇 개를 더 지나가자 드디어 명원성의 중심 거리가 나타났다.

이 거리는 마차 3대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만큼 넓었으며, 거리 양쪽에는 꽤 높고 널찍한 점포 건물들이 빼곡하게 길 끝까지 늘어서 있었다.

이곳 건물들은 벽돌과 기와 대신 목재로 지어져 있어서 10장이 넘는 높은 건물은 아주 드문 편이었다. 그러나 그 정교함만큼은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낙아는 엄청난 규모의 인파에 조금 겁을 먹었는지 류석의 몸에 바짝 붙었다. 하지만 북적대는 사람들 모두 각자의 일에만 전념할 뿐 그들에게 신경 쓰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이에 낙아는 금세 긴장이 풀려 거리 곳곳을 구경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석두 오라버니, 저기 좀 봐요! 난 저거 말로만 들어 봤어요. 진짜 듣던 대로 엄청 맛있게 생겼네요.”

낙아는 멀지 않는 곳의 사탕 장수를 가리키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류석은 여전히 아무런 감흥이 없는지 무표정한 모습이었다.

낙아는 류석을 끌고 가려다 그런 류석의 표정을 보고 금세 실망했지만 곧 이 성에 온 목적을 떠올리고는 그의 손을 꽉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

“석두 오라버니, 걱정 마요. 성이 이렇게나 크잖아요. 여기선 분명 오라버니를 치료해 줄 의원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순간 류석의 눈이 미세하게 반짝였다.

낙아는 바로 류석을 끌고 길가의 만두를 사 먹으며 길을 물었다. 덕분에 근처에 있다는 의관 두 곳의 위치를 자세히 알아낼 수 있었다.

* * *

성의 서쪽에 위치한, 이씨의관(李氏醫館).

이씨의관은 이곳에 세워진 지 벌써 100년이 된, 제법 역사 있는 의관이었다. 푸른색 장삼을 입은 중년 남자가 손가락을 류석의 손목에 대고 집중해 진맥을 살펴보고 있었다.

이 중년 남자의 이름은 이장청(李長靑)으로, 의술을 행한 지 이미 20여 년이나 되었고 이곳 당대 주인이었다. 이 일대에서는 꽤 유명한 행림이었다.

한참 동안 맥을 짚어 보던 이장청은 결국 손을 거두면서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낙아에게 물었다.

“육맥(六脈)이 안정되어 있어 힘이 가득하고, 기혈도 왕성한 것이 전체적으로 몸 상태가 지극히 좋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실혼증(失魂症) 같은 것에 걸리게 된 거지? 아이야, 오라비 병증은 대체 언제부터 나타난 것이냐? 혹시 병증이 처음 나타났을 무렵에 뭔가 좀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거나 하진 않았느냐?”

“저도 오라버니랑 여러 해 떨어져 있다가 요 근래 다시 만난 거라 병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어요.”

낙아가 고개를 흔들자 이장청은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미안한 듯 말했다.

“그럼 더 곤란하게 됐구나. 병의 원인을 모르면 치료의 실마리도 찾기 어렵단다. 내 의술이 부족해 도움이 되지 못했구나.”

“정말 시도해 볼 만한 치료법이 아무것도 없단 말씀인가요?”

“미안하구나. 다 내가 실력이 모자란 탓이다.”

결국 낙아는 무척이나 실망한 얼굴로 이장청에게 인사하고는 의관을 나섰다.

“명원성엔 의관도 많이 있을 테니까 한 곳씩 다 들르다 보면 분명 오라버니 병을 고칠 수 있는 의원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잠시 풀이 죽어 있던 낙아는 다시 씩씩한 얼굴로 류석에게 말했다.

그러자 류석의 입술이 마치 웃는 듯 약간 움직였지만 정말 낙아의 말을 알아들은 건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은 곧 골목 두 개를 지나 또 다른 의관 앞에 다다랐다. 회색 외벽을 가진 이 의관 건물은 꽤 높이가 높았으며, 지붕엔 검은색 기와가 깔려 있었다.

거기다 대문 너머로 언뜻 보이는 정원만 해도 무척 널찍한 것이 이씨의관에 비해 상당히 규모가 큰 듯했다. 물론 의관 안으로 들어가는 병자의 수도 적지 않았다.

‘이 정도로 큰 의관이라면 의원님 실력도 당연히 더 좋겠지.’

낙아는 잔뜩 기대감에 부푼 채 류석의 손을 잡고 들어갔다. 하지만 반 시진후, 안에서 걸어 나오는 낙아의 얼굴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침울한 표정으로 몇 걸음쯤 걷던 낙아는 곧 정신을 차리고는 스스로를 위로하듯 중얼거렸다.

“괜찮아, 괜찮아. 아직 의관은 많아.”

이후로도 반나절 내내 골목을 누비며 명원성에 있는 의관 대부분을 돌아다녔지만, 의원들은 하나같이 류석 같은 병자는 처음 본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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