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434화 (1,191/2,000)
  • 1434화. 길을 떠나다

    *

    휘둥그레진 눈으로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여자아이는 상황이 끝난 후에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이는 한참 동안 멍하니 세 도사의 시체들을 바라보다 결국 온몸에 힘이 풀려 털썩 땅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은 소리로 흐느끼다가 나중에는 슬픈 일이라도 있는 듯 대성통곡했다.

    제방이 무너진 것처럼 터져 나온 통곡 소리가 황무지의 고요함을 깨트렸다. 마치 하늘에게 세상의 불공평함을 하소연하는 듯했다.

    얼마 후, 아이는 울음을 뚝 그치더니 씩씩하게 일어나 주먹을 불끈 쥐었다. 커다란 눈동자에는 전보다 더 많은 무언가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입술을 깨물며 사방을 살피던 아이는 갑자기 어느 바위로 달려갔다. 그곳은 바로 피범벅이 된 연승의 시체가 있는 곳이었는데 그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에는 흐물흐물해진 풍 도사가 쓰러져 있었다.

    그러나 가장 처참한 것은 제 도사의 시체였다. 그의 몸은 자잘한 살점들로 변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아이가 시체에 다가가 양손을 들어 올리자, 열 손가락 끝에서 갑자기 푸른색 손톱이 자라났다. 소녀가 연승의 시체를 향해 맹렬하게 손톱을 휘두르자 연이은 파공음과 함께 피가 사방으로 튀었는데, 원래도 심하게 손상돼 있던 시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완전히 다진 고기처럼 돼 버렸다.

    그러고도 아이는 아직 한이 풀리지 않은 듯 입을 쩍 벌려 청록색 화염을 뿜어내 그것들을 아예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뒤이어 풍 도사의 시체에도 똑같이 분풀이를 하고서야 땅바닥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그나마 조금 회복됐던 법력이 다시 소진된 것이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마음을 가라앉힌 아이는, 저 먼 어딘가를 향해 단정히 무릎을 꿇고 중얼거렸다.

    “어머니, 아버지. 오라버니, 둘째 언니……. 혈도회의 원수 하나가 드디어 죽었어요. 비록 제가 직접 죽인 건 아니지만, 이걸로 조금은 원한을 갚은 셈이에요. 걱정 마세요. 언젠간 꼭 혈도회를 완전히 없애 버리고 말 테니까요.”

    말을 마친 아이는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겨우 울음을 참았다.

    “울지 않을 거예요. 아버지가 늘 말씀하셨잖아요. 자주 울면 어른이 못 된다고요. 전 빨리 어른이 될 거예요!”

    아이는 한참 후에야 완전히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땅에 떨어져 있는 세 도사의 저물대(儲物袋)를 주워들었다.

    하늘에 걸려 있던 해가 서쪽으로 기울면서, 하늘도 조금씩 어두워지고 불어오는 바람도 점차 서늘해졌다.

    아이는 사방에 펼쳐진 벌판을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조금 두려워졌는지 무의식적으로 키 큰 청년에게 다가갔다.

    청년은 마지막 공격을 날린 후 다시 예전의 멍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는데,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발만 내려다볼 뿐 아이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나저나 이분은 대체 누구실까……?”

    청년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아이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청년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저기, 석두 오라버니, 내 이름은 류낙아(柳樂兒)예요. 방금 전엔 도와줘서 고마워요. 오라버닌 인족이긴 하지만, 아버지는 인족에도 좋은 사람이 있다고 하셨어요.”

    아이가 쭈뼛거리며 말하자 청년은 고개를 살짝 들어 낙아를 바라보았다.

    청년의 눈동자에 낙아의 모습이 담기는 순간 멍하던 눈빛이 언뜻 반짝이는 것 같았지만 그 반짝임은 금세 수그러들었다.

    청년은 낙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다시 흐리멍덩한 상태로 돌아갔다. 처음 보는 반응에 깜짝 놀랐던 낙아도 그제야 조금 안도하며 천천히 청년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청년은 큰 키만큼 기다란 손가락을 갖고 있었으며 몸이 우락부락한 근육질인 건 아니었지만 왠지 무궁한 힘이 그 안에 함축돼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눈동자는 멍해 보이긴 해도 칠흑같이 새까매 오래 바라보고 있다 보니 왠지 영혼까지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피부는 약간 어둡고 반질반질한 느낌이었는데 막 전투를 치렀는데도 작은 상처조차 보이지 않았다.

    청년이 걸치고 있는 푸른색 옷은 언뜻 아주 평범해 보였지만, 아까 번개를 맞았는데도 전혀 손상된 부분이 없었다.

    이런 신비한 모습들에 방금 전 청년이 한입에 그 심상치 않던 핏빛 안개를 빨아들였던 일까지 더하면, 이 청년은 절대 평범한 범인은 아니었다.

    범인이 어떻게 법기(法器)를 갖고 있는 도사 세 명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겠는가?

    낙아는 청년이 계속해서 얌전히 있자, 호기심 어린 눈으로 청년의 몸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청년의 눈은 낙아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낙아 역시 눈앞의 청년이 보면 볼수록 친근하게 느껴졌다.

    “어머!”

    낙아가 가벼운 탄성을 질렀다. 청년의 가슴팍에서 희미하게 검푸른 색을 내뿜고 있는 장신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무척이나 맑고 깨끗해 보였지만 그게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었다. 낙아는 청년의 옷을 젖히고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용기까지는 나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바람이 갑자기 더 거세지나 싶다가 하늘에 시꺼먼 구름이 몰려오면서 주위가 한층 더 어두워졌다.

    쿠르릉!

    구름 속에서 굵은 번개 줄기들이 번쩍이며 하늘을 밝히더니, 곧 거대한 천둥소리와 함께 엄청난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엄마야!”

    낙아는 저도 모르게 소리 지르면서 무의식적으로 청년의 다리를 꼭 껴안았다. 청년에게 기댔지만 낙아의 작은 몸은 계속해서 오들오들 떨렸다. 요호(妖狐)의 몸이었기 때문에 번개에 대해 알 수 없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청년의 눈동자에도 또 한 번 옅은 빛이 반짝였지만 금세 다시 사라졌다. 그리고 갑자기 몸을 굽혀 자신의 커다란 몸으로 낙아에게 쏟아지는 비를 막아 주었다.

    덕분에 낙아는 마치 예전에 부모님 품에 안겼을 때처럼 더없이 따뜻하고 편안해졌다.

    낙아가 안심하고 청년에게 기대어 있는 동안, 매섭게 퍼붓던 빗줄기가 갑작스럽게 뚝 그쳤다. 그렇게 하늘에 있던 비구름이 걷히면서 풋풋한 흙냄새와 나뭇잎 냄새가 은은하게 피어올랐다.

    낙아는 몸을 부르르 떨어 빗물을 털어 내고는, 헤실헤실 웃으며 청년의 손을 잡아 청년의 옷에 떨어졌던 물방울도 튕겨 냈다.

    청년의 옷이 어떤 재료로 만들어진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신기하게도 빗물들은 옷 안으로 스며들지 않고 표면에 동글동글 맺혀 있었다.

    청년은 여전히 고맙다는 인사도, 싫은 내색도 없이 낙아가 마음대로 하게 놔두었다.

    “참, 석두 오라버니. 그러고 보니 낙아는 아직도 오라버니의 진짜 이름이 뭔지 모르고 있네요.”

    낙아는 청년을 자리에 앉히려는 듯 끌어당기면서 말했다. 청년은 순순히 자리에 앉았지만, 별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다.

    “오라버니, 왜 여기에 계셨던 거예요?”

    “…….”

    “석두 오라버니, 아까 마지막에 날렸던 주먹 정말 엄청나더라고요. 낙아한테도 가르쳐 주시면 안 돼요?”

    “…….”

    “오라버니, 있잖아요.”

    낙아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대화를 시도했지만 무슨 말을 해도 청년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음……. 오라버니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혈도회 사람을 죽였으니 오라버니도 이제 위험해요. 그러니까 여기 있지 말고 나랑 같이 가요. 자, 빨리요.”

    잠시 고민에 빠졌던 낙아는 결심을 굳히고는 청년의 넓은 손바닥을 잡아당기며 애원하듯 말했다.

    청년은 낙아가 계속해서 반복해 말하며 손을 잡아끌자 드디어 말뜻을 알아들은 듯 눈을 깜빡이더니 낙아를 따라 천천히 길을 떠났다.

    태양은 어느새 붉은색으로 바뀌어 황무지도 어두운 금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작은 그림자 하나와 커다란 그림자 하나가 해가 지고 있는 방향으로 점점 멀어졌지만, 바람결에 낙아의 들뜬 목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석두 오라버니, 나도 오라버니가 대단하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혈도회에는 정말 무서운 사람들이 엄청 많다고요!”

    “…….”

    “벌써 해가 다 저물고 있네요. 오라버니, 배 많이 고프죠?”

    “…….”

    “어느 정도 멀리 도망치고 나면, 낙아가 참새를 잡아서 구워 줄게요. 이래봬도 요리 솜씨가 제법이거든요!”

    “…….”

    “석두 오라버니, 이제부터 오라버닌 낙아의 친오라버니예요!”

    * * *

    황량한 벌판 끝의 어느 산 속.

    눈보라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휘몰아치고,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이 끊임없이 불어왔다. 태양은 아직도 땅의 끝자락에 남아 있었지만 온 하늘을 뒤덮은 눈 때문에 산속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본래부터 뚜렷하지 않았던 산길은 두껍게 덮인 눈으로 인해 더욱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는데 다행히 산길의 끝에서 은은한 불빛이 아른거려 이 차가운 세계에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고 있었다.

    불빛이 반짝이고 있는 곳은 바로 산 속 유일한 산신묘(山神廟)였다. 이 근방은 워낙 인적이 드문 곳이었기 때문에 이곳 산신묘 역시 진작부터 향객의 발길이 끊긴 채 폐허가 되어 있었다.

    바깥 담장은 허물어진 지 오래였지만 그래도 대전만은 허름하게나마 원래의 자리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물론 대전의 문은 일찌감치 사라지고 대신 거적자리가 문틀에 걸린 채 외풍을 막고 있었다.

    거적자리에 군데군데 뚫려 있는 구멍 너머로는 텅 빈 대전 안이 잘 보였는데, 건초 더미와 함께 어지럽게 쌓여 있는 벽돌들 옆으로는 어느 청년 하나가 가부좌를하고 있었다.

    푸른 장포을 입은 이 청년은, 비록 바닥에 앉아 있었지만 머리가 웬만한 소년의 키보다도 더 높게 우뚝 솟아 있었다. 하지만 멍한 그의 얼굴에서는 표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작은 몸집의 여자아이 요호(妖狐) 류낙아가 누워 있었다.

    “으음…….”

    청년의 품에서 갑자기 낮은 신음이 울리더니 그에게 바싹 안겨 있던 낙아가 몸을 뒤척이면서 바깥쪽으로 돌아누웠다.

    낙아는 뭔가 무서운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처럼 맑고 하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곱던 눈썹도 잔뜩 찌푸린 채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아니……. 안 돼……. 안 돼……!”

    낙아는 잠꼬대를 하며 잠결에도 청년의 팔을 꽉 움켜쥐었다. 한참동안 불안하게 움찔대던 낙아는 몇 번씩 몸을 뒤척이다가 결국 다시 청년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계속된 낙아의 움직임에, 정면을 응시하고 있던 청년도 고개를 숙여 품속의 낙아를 내려다보았다.

    순간 청년의 굳어 있던 눈동자가 약간의 감정을 띠는 듯 했지만 결국 다시 멍한 상태로 돌아갔다.

    “석두…… 오라버니…….”

    웅얼거리는 잠꼬대가 다시 청년의 품에서 희미하게 울려 나왔다.

    그 순간, 불빛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돌처럼 딱딱하던 청년의 모습이 조금 부드러워졌으며 공허하던 눈동자에도 약간의 빛이 반짝였다.

    청년은 앉은 채로 몸의 방향만 바꿔,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찬바람을 자신의 몸으로 막아주며 팔을 살짝 움직여 밖으로 나와 있던 낙아의 다리를 품 안으로 끌어왔다.

    그러자 낙아는 잠시 움찔거리는가 싶더니 곧 편안해진 얼굴로 청년의 품에 파고 들었고, 그와 함께 호흡도 점점 더 안정되어 갔다.

    그러는 사이 대전 밖에서 매섭게 몰아치던 눈보라의 기세도 상당히 수그러졌다.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