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2화. 요호(妖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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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런 흙으로 뒤덮인 광활한 황무지, 인가는(人家)커녕 지나다니는 들짐승 한 마리 찾아보기 힘든 땅에는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인 회백색 돌과 잡초뿐이었다.
그런 황량한 황무지에 가냘픈 신형이 뿌연 먼지를 가르며 빠르게 달려 나왔다.
신형의 정체는 예닐곱 살쯤 된 여자아이였는데, 분홍색 매화가 수놓아진 연노랑 비단 옷 위로 새까만 머리카락이 아이의 움직임에 맞춰 발랄하게 흔들렸다.
아이는 커다란 두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고 앙증맞은 코 아래에 빨간 앵두 입술이 자리하고 있어 무척 청아해 보였다.
아이의 오른손에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놀이용 소고(小鼓)가 꽉 쥐어져 있었는데 끝부분에는 구슬이 달린 줄이 북의 몸통에 매어 있었다. 북면 가죽은 이 소고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말해주듯 누렇게 변색돼 있었다.
아이가 움직일 때마다 구슬이 튀어 올라 북면을 내리치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아이는 아직 어린데도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달려오더니, 사람 키만 한 높이의 풀숲 앞에 다다르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급히 달려서인지 이마는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고, 동그란 뺨은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이가 땀을 닦고 숨을 고르며 다시 걸음을 떼려는 순간, 갑자기 뒤에서 매서운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요호(妖狐), 거기 서라!”
순간 아이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몸을 떨다가, 소고를 잡고 있던 손을 흔들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자 북면에 갑자기 옅은 푸른빛이 아른거리더니 구슬이 북면을 때리며 튀어나와 잡초 앞에 떨어졌다.
푸른빛은 잡초 위에서 기세를 높여 반짝였지만 금세 다시 사그라들었고 잡초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원래대로 돌아갔다.
하지만 아이가 오른손을 계속 흔들자 소고의 양쪽 가죽에서 푸른빛이 연이어 잡초 앞으로 떨어졌고, 풀숲 곳곳에서도 쉼 없이 빛이 일어났다가 곧 원래대로 돌아갔다.
아이의 얼굴은 조금 힘겨운 듯 창백해졌지만 잠시도 쉬지 못하고 풀숲으로 뛰어들었다. 아이가 잡초들 사이로 사라지고 얼마 안 돼 10여 장 밖에서 먼지가 휘날리며 또 다른 신형 하나가 금세 풀숲 앞에 나타났다.
그 신형의 주인은 40세 나이에 건장한 체구의 남자였는데 덥수룩한 수염과 손에 쥔 박도(朴刀) 때문에 꽤나 흉악해 보였다.
그가 풀숲 앞에 남겨진 작은 발자국을 보고 쫓아가려고 움직인 순간, 갑자기 풀숲에서 푸른빛이 번쩍이더니 아가리를 쩍 벌린 뱀들이 튀어나와 거한에게 달려들었다.
쉬쉬쉬쉭! 쉬쉭!
푸른 뱀의 공격에 거한은 잠시 흠칫했지만, 곧 부적 한 장을 꺼내 몸에 붙였다. 그러자 전신에 하얀색의 빛이 장막이 떠올랐고 그와 동시에 오른손에 쥔 박도가 웅웅거리며 묘한 울음소리를 냈다.
촤악!
박도에서 빛이 뿜어져 나온 순간, 거한에게 달려들던 뱀들이 단번에 두 동강이 나거나 튕겨져 나갔다.
타앙! 탕!
얼마 버티지 못하고 오히려 거한의 손에 죽어 버린 뱀들은 곧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는데 그 정체는 다름 아닌 기다란 녹색 풀들이었다.
“흥.”
거한은 힘없이 허공에 흩날리는 풀잎을 보고 곧장 풀숲으로 뛰어 들려다 걸음을 멈추었다.
타타타탓.
뒤에서 들려오는 가벼운 발소리에 거한이 고개를 돌린 순간, 사내 두 명이 어느새 거한 바로 뒤까지 다다라 걸음을 멈췄다.
그들은 큰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을 지닌 젊은 도사와 체구가 작고 말상의 얼굴을 지닌 도사로 그들이 입고 있는 회색 도복은 완전히 누더기가 돼 있었고, 머리카락도 산발이 되어 엉망이었다.
“두 분 모두 괜찮으시오?”
거한이 두 사람을 보고 묻자 말상 사내가 먼저 나서서 답했다.
“괘씸한 것 같으니……. 꼬마 계집 주제에, 요호(妖狐)답게 정말 교활하기 그지없더이다. 아까는 저와 제(齊) 도우가 잠시 방심한 사이 그만 계집의 함정에 걸려들고 말았지 뭡니까. 그래도 크게 다치진 않았으니 걱정 마시오. 그보다, 연(燕) 도우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요? 설마 그 계집을 놓친 것이요?”
거한은 대답 대신 잡초들과 땅바닥에 선명하게 남은 발자국을 차례로 가리켰다.
“행적을 찾았으면 더 이상 시간 낭비할 것 없소. 빨리 쫓읍시다.”
말상 사내가 성급하게 풀숲으로 뛰어 들려는 순간, 제씨 성을 지닌 도사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잠깐, 이 계집이 풀숲에 들어간 이상 우리도 경솔히 행동해선 안 됩니다. 그 계집은 나무 속성의 환술에 능하니 이제 물 만난 물고기나 다름없어요.”
“설마 저 계집, 이 풀숲을 염두에 두고 이리로 도망친 건가? 이런……! 그 어린 나이에도 이렇게 교활하다니, 성체가 되면 분명 큰 화근이 되겠구려.”
말상의 도사는 결국 풀숲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못마땅한 듯 말했다.
“무릇 정도(正道)를 추구하는 자에게 있어 악을 제거하는 건 마땅한 의무요. 여기까지 쫓아온 이상, 결코 화근을 남겨둔 채 돌아갈 수는 없소.”
거한의 위엄 있는 말에 호리호리한 체격의 제씨 성의 도사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연 도우의 말을 들으니, 이미 좋은 방법을 생각해 두신 것 같구려?”
“그렇소. 이 풀숲은 면적이 꽤 넓어서 우리 셋이 무작정 들어갔다가는 계집을 잡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요. 듣자니 얼마 전 풍(馮) 도우께서 화운부(火雲符)를 구입하셨다지요?
그리고 제 도우의 인풍술(引風術)은 노화순청(爐火純靑)의 경지에 이르렀다 들었소. 이 두 가지가 합쳐진다면 이깟 풀숲 따위야 순식간에 없앨 수 있을 테니 계집을 찾는 일도 훨씬 수월해질 것이요.”
말상의 풍씨 성 도사가 잠시 고민하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화운부라……. 뭐, 안 될 것도 없겠지. 하지만 계집을 잡게 되면 다른 건 맘대로 하셔도 좋지만 가죽은 내게 양보하셔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아니, 계집은 반드시 생포해야 하오.”
풍 씨 도사의 제안에 거한 연 씨가 단박에 거절하자 돌연 차가워진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연 도우, 지금 화운부가 얼마나 귀한 부적인지 몰라서 이러시는 겁니까?”
“풍 도우, 잠시 기다려 보십시오. 연 도우는 혈도회(血刀会) 외당 제자가 아니오. 들리는 말로는 얼마 전 혈도회에서 연 도우에게 요호를 생포해 오는 대가로 내당 제자 자리와 질혈단(叱血丹) 한 알, 영석(靈石) 일천 개를 약속했다는 것 같았소만.”
제 씨 도사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연 씨 도사를 보며 말했다.
“제 도우가 그렇게 소식에 밝을 줄은 몰랐구려. 우리 혈도회의 일에 대해서도 그리 많이 알고 계시다니……. 좋소. 사내는 여러 말 하지 않는 법. 만약 두 도우께서 요호를 생포하는 데 도움을 주신다면, 영석을 두 분께 똑같이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연 씨 도사가 싫은 기색 하나 없이 얘기하자 제 씨 도사도 옅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연 도우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는데 빈도(貧道)에게 불만이 있을 리 없지요.”
“자, 자. 얘기 다 끝났으면 빨리 움직이도록 하십시다.”
말을 마치자마자 풍 도사는 품에서 부적을 꺼내더니 조금 아까운 듯한 표정으로 앞쪽을 향해 던졌다.
풍 도사가 주문을 외우자 부적에서 떠오른 붉은빛이 곧 사방으로 커지더니 마침내 시뻘건 화염 같은 구름으로 바뀌어 아래쪽 풀숲을 덮었다.
화라라라락!
아래쪽에 있던 기다란 잡초들은 그 구름에 닿자마자 세차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 같은 광경에 제 씨 도사는 입으로는 주문을 외면서 갑자기 손에 들었던 총채를 강하게 흔들었다.
휘이이이이이!
그 순간 삽시간에 거센 바람이 일면서 하늘로 솟구쳐 오른 광풍이 부채꼴 모양으로 앞쪽을 향해 퍼져 나갔다.
바람이 불길을 돕자 불은 그 힘을 빌려서 마치 거친 파도처럼 풀숲을 따라 빠르게 번져 나갔다. 이에 시커먼 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타 버린 풀잎들이 회색 재가 되어 어지럽게 흩날렸다.
세 도사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앞쪽의 불바다를 응시했다.
“저기 있소!”
제 도사가 고함을 치며 화살처럼 몸을 날려 다시 한 번 총채를 흔들자, 총채 표면에 푸른빛이 떠올랐다.
제 도사의 말에 다른 두 도사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즉시 그 뒤를 따라 돌진했다.
불과 20~30장 앞, 이미 불길에 침식당한 풀숲에서 작은 신형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아까 풀숲으로 숨어들었던 어린 여자아이였다.
다만 아까의 곱던 모습은 사라지고 옷이 누더기가 되어 있었고, 달걀 같은 얼굴은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아이는 풀숲에 몸을 숨긴 채 조심스럽게 도망치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추격자들이 불을 지른 것이다.
이에 아이는 미친 듯이 앞을 향해 달려갔지만 빠르게 퍼지는 매운 연기로 인해 쉴 새 없이 기침을 해댔다.
결국 얼마 달아나지 못했을 때 뒤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나 싶더니 파란색 끈들이 아이의 바로 뒤까지 접근해 왔다.
그와 동시에 아이의 머리 위에 제법 넓은 크기의 새까만 그물이 나타나 빠르게 아이의 몸 위로 내려앉았다.
아이는 절망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순간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작은 나무를 발견하고는 눈을 반짝이며 혀끝을 깨물었다.
“잡았다!”
풍 도사는 앞서 가던 두 도사가 아이를 붙잡자 흥분한 얼굴로 소리쳤다. 푸른 끈들은 그새 아이의 몸을 칭칭 휘감았고, 그 위로는 검은색 그물이 덮여 있었다.
하지만 그때 아이의 온몸에 푸른빛이 번쩍이더니 아이는 곧 작은 나무로 변해 버렸다.
“목둔술(木遁術)!”
연 도사와 제 도사가 어두워진 얼굴로 탄성을 내뱉자 풍 도사가 서둘러 주위를 살피더니 멀지 않은 곳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기 있소!”
풍 도사가 가리킨 곳에 서있던 작은 나무는 어느새 모습이 흐릿해지면서 소고를 들고 있는 여자아이로 뒤바뀌어 있었다.
아이는 도사들을 흘긋 쳐다보고는 다급히 몸을 돌려 다시 달아나기 시작했다.
“쫓으시오!”
목둔술을 편 탓에 아이는 얼굴에 핏기라고는 하나도 없었고, 발걸음도 상당히 느려졌다. 휘청거리며 달리는 아이와 뒤쪽 세 도사와의 거리가 점점 더 빠르게 좁혀져 갔다.
“아야!”
힘겹게 달리던 아이는 갑자기 돌멩이에 걸려 앞쪽으로 고꾸라져 결국 커다란 회백색 바위에 그대로 부딪혀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어디 계속 도망가 보거라.”
그 모습에 도사들은 발걸음을 늦추고 아이를 둘러쌌고, 특히 풍 도사는 아이를 약을 올리며 더욱 음험한 얼굴을 했다.
그들은 꼬박 하루동안 아이를 추격하면서 함정에 빠져 적잖은 고초를 겪었기 때문에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던 것이다.
아이는 도사들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자 가녀린 몸을 최대한 바위에 붙인 채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도사들을 바라봤다.
물론 아이의 그런 표정에도 도사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중에서도 풍 도사는 화운부까지 소모해야 했으므로 잔뜩 이를 갈아 제일 먼저 나나서 매서운 기세로 손을 들어 올렸다.
“널 죽이진 못하지만, 따끔한 맛을 보여주는 정돈 괜찮겠지!”
그런데 그때 아이가 바짝 붙어 있던 커다란 바위에 균열이 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돌가루들이 아이의 머리카락과 몸으로 굴러 떨어졌다.
“뭐지……?”
풍 도사는 당황해 들어 올렸던 손을 그대로 허공에 멈춘 채 바위를 바라보았고, 다른 두 도사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바위로 향했다.
쩌쩌쩌쩌쩍!
바위의 균열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그와 함께 점점 더 많은 돌가루가 땅에 떨어졌다.
“아앗!”
바위의 변화에 아이도 깜짝 놀라 눈을 감은 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콰콰콰콰콰쾅!
바위의 균열이 마침내 맹렬히 터져 나가자 돌 조각이 사방으로 떨어져 흙먼지가 일었다.
도사들은 놀란 얼굴로 몇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눈으로는 여전히 바위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저……, 저게 대체 뭐지?”
풍 도사가 어두워진 안색으로 중얼거렸다.
뿌연 흙먼지가 가라앉고 나자, 거대한 바위가 있던 자리에 젊은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색 장포를 입은 청년은 방금 전까지 바위 속에 파묻혀 있었던 것처럼 머리카락과 얼굴에 온통 희뿌연 돌가루로 뒤덮여 있었다. 게다가 피부는 약간 어두웠고 앞쪽을 바라보는 두 눈은 어딘가 멍하고 둔해 보였다.
하지만 키만 봤을 때는 세 도사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갑작스런 상황에 아이와 세 도사는 모두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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