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431화 (1,188/2,000)
  • 1431화. 선계(仙界) 비승

    *

    인족 무애해 무인도에 사내와 여인이 나란히 서있었다.

    하얀 의복을 걸친 빙백 선자가 비범한 기운을 풍기는 호목(虎目)에 구불구불 수염을 지닌 금의(錦衣) 사내와 함께 있었다.

    “호준 수사, 한 형이 이번에 도겁에 성공할 가능성이 상당합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큰 행운이니 절대 눈을 떼지 말고 자세히 봐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한 천존의 실력은 저도 잘 압니다. 저도 청원궁에서 여러 영단을 받아 대승기 경지에 오를 수 있었고요.”

    금의 거한은 동급 수사임에도 빙백 선자에게 깍듯이 답했다. 그는 최근 만 년 내에 인족이 배출한 대승기 수사 호준이었다.

    막간리는 안타깝게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수백 년 전에 대천겁을 치르다 사망했다.

    무인도의 또 다른 곳에는 열댓 명의 다양한 존재들이 검은 선박 뱃머리에 서있었다.

    그중 가장 자태가 고운 세 명의 여자가 섬 중심을 응시했다. 그들은 남궁완, 원요, 은월이었다.

    원요는 한립의 분혼이 인계로 내려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려를 데리고 인족으로 돌아와 원합도 모처의 편전에서 쭉 지내고 있었다.

    은월은 망정결의 후환을 제거하고 수행이 급진전해 천여 년 전에 대승기에 이르렀다.

    세 여인 뒤로 빙봉이 이끄는 기령자, 해대소, 백과아 등 문하의 제자들이 가지런히 서있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 한립의 제자들도 하나둘 합체기 경지에 이르렀고 그들이 대승기에 이를 수 있을지는 그들의 운에 달렸다.

    빙봉은 남궁완, 원요 등과 마찬가지로 오랜 세월 고비를 넘지 못해 대승기를 한 발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특수한 체질과 긴 수명이면 대승기에 이를 가능성이 다른 이들보다 확실히 높았다.

    이들은 한립을 굳게 믿고 있어서 비승 천겁이 강림할 것인데도 걱정하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 * *

    만여 리 밖 허공에 흑의 소녀가 검은 괴조를 타고 복잡한 심경으로 무인도 쪽을 바라보았다. 그 옆에 선 자색 궁장의 부인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대아야, 한 선배님께 작별 인사라도 드리고 싶다면 가보는 게 좋겠구나. 이곳에서 바라보기만 하다 나중에 심마가 될까 걱정이다.”

    “아니에요. 한 형은 줄곧 저를 여동생처럼 대했고, 지금 저곳에는 남궁 언니와 다른 분들이 많은데 저까지 가서 뭐하겠어요? 이곳에서 조용히 비승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으로 충분해요.”

    흑의 소녀가 평온하게 대답했다.

    * * *

    무인도 중앙의 거대 진법 중심.

    한립과 해 도인, 화수자, 마광 등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서 고공을 올려다보았다. 엄청난 영의 영기가 밀려들어 오색구름이 퍼지고 있었다.

    아직은 아주 느렸지만 속도가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만 있으면 비승의 겁이 강림하겠습니다. 하하, 수사의 실력이면 간단히 성공할 거라 봅니다.”

    마광은 고개를 숙이며 한립을 향해 가볍게 말했다.

    “비승을 하려다 천겁을 이겨내지 못해 죽은 대승기 강자들이 허다한데 어찌 만만히 볼 수 있겠습니까.”

    한립도 고개를 돌려 담담히 답했다.

    “다른 수사가 그렇게 말했으면 믿었을지 모르겠지만, 수사야 뭐, 연신술 3성과 오장단원공을 익힌 후로 실력이 평범한 진선보다 낫습니다. 이전에 마주쳤던 마량을 다시 만나면 금방 해치울 수도 있을 겁니다. 허어, 거참 이상하단 말이지요. 분명 자질은 그리 뛰어나지 않은데 선계 신통까지 척척 익혀내고, 이런 신기한 경우는 처음 봅니다.”

    화수자가 신기하다는 듯 턱을 쓸었다.

    “태생적으로 선계의 몇몇 공법들과 잘 맞을지도 모르지요.”

    한립이 대수롭지 않게 미소 지었다.

    “주인님, 선계에 이르면 저와의 약속을 잊지 말고 지켜주셔야 합니다.”

    덤덤하게 옆에 서있던 해 도인이 오랜만에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전과는 확 달라진 말투였다.

    “이전 기억을 회복했고 나를 주인으로 인정했으니 당연히 나도 약속을 지킬 것이다.”

    한립이 해 도인을 향해 진지하게 약조했다.

    “전 주인의 이루지 못한 소망이지만 주인님께서 비승을 하시면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이때 오색구름이 더욱 커지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막대한 중압감이 느껴졌다.

    “일단 다들 물러서시지요. 천겁이 시작되려 합니다.”

    한립의 말에 마광 등은 섬 외곽 쪽으로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한립은 소매를 펄럭여 자금색 민머리 소인을 날려 보냈다.

    서금충왕이 하늘을 갈라 사라지고 그는 차분히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몇 번 번득이며 이동한 마광, 화수자 그리고 해 도인은 섬의 또 다른 방향에 멈춰서 섬 중심을 주시했다.

    멀리서 쿠르릉 거리는 소리와 함께 오색구름에 검은 구멍이 뚫리고 회백색 바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천강풍(天罡風)이 막 시작되었군요. 본격적으로 천겁이 도래할 모양입니다.”

    화수자는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천강풍이 강력해도 미리 대책을 마련해 둔 한 수사가 두려워할 것은 없지요.”

    마광이 옆에서 차분히 답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섬 중심에서 거대한 푸른 연꽃이 피어나 빙글빙글 돌며 푸르스름한 검빛들을 마구 방출했다.

    모래와 돌들을 품고 기세등등하게 불어대는 천강풍을 푸른 연꽃이 꿋꿋하게 막아냈다. 천강풍은 그 후로도 몇 시진을 불어댔다.

    평범한 수사들이면 벌써 체내의 법력을 꽤 소모해 진땀을 빼고 있었겠지만 한립에게는 별것 아니었다.

    쿵!

    오색구름에 뚫린 검은 구멍에서 둔중한 소리가 들리고 바람이 뚝 그쳤다. 그 대신 작열하는 뜨거운 기운이 적홍색 주술문자들을 품고 흘러나왔다.

    손바닥 크기의 주술문자들은 표면이 보석처럼 반짝였고 금색 문양들이 어지럽게 어른거렸다.

    퍼퍼펑!

    주술문자들이 분분히 터져 용암 비가 되어 떨어져 내렸다. 무인도가 굉장히 넓어 용암 비가 내리는 지역과 섬 주변의 수사들이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열기가 느껴졌다.

    놀란 그들은 표정이 달라져 각종 방어용 보물로 몸을 보호해야 했다.

    우웅!

    묵령성주도 두꺼운 검은 보호막을 일으켜 선박의 수사들을 보호했다. 뱃머리에 선 남궁완 등 몇몇이 어쩔 수 없이 걱정스런 눈빛을 보냈다.

    용암 비의 위력이 직접적으로 닿지 않는 이곳도 이렇게 뜨거운 데 그 중심에 서있는 한립은 백배 천배의 열기를 견뎌야 할 것이다.

    게다가 이건 천겁의 시작에 불과했다.

    * * *

    3일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천겁은 종류를 바꾸어 가며 공격했다. 하지만 푸른 연꽃 속의 한립은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때 무인도는 천겁의 파동에 진작 소멸되고 거대한 빛의 진법과 푸른 연꽃만 남아서 반짝였다.

    바다 깊은 곳도 절반은 꽁꽁 얼고 절반은 용암이 들끓고 있었기에 빙백과 은월 등 대승기 수사들도 부득이하게 더 먼 곳으로 자리를 피해야 했다.

    * * *

    검은 구멍이 사라지고 오색구름에서 보랏빛 뇌전이 뭉치기 시작했다. 천겁의 가장 무서운 단계인 뇌겁이었다.

    한립은 진작 준비를 해두었기에 회색 산봉우리를 푸른 연꽃 위로 띄워 만장 거산으로 변하게 했다.

    웅웅웅웅!

    회색빛의 고리가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갔고, 추락하던 자금색 뇌전들은 빛의 고리와 닿으면 크기가 줄어들었다. 빛의 고리는 천뢰를 억제하는 법칙의 힘을 품고 있었다.

    자금색 뇌전들은 얼마 내려오지 못해 연달아 열댓 개의 빛의 고리를 만나 없어졌다. 그러나 남은 뇌전들은 형체가 없는 것처럼 방대한 산봉우리를 통과했다.

    남색빛이 일렁이는 눈으로 그걸 본 한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아아앙!

    포효소리가 하늘을 울리고 삼두육비의 거대 마신이 푸른 연꽃 위에 나타나 암녹색 거검을 불러냈다.

    마신은 기합을 넣고는 금색 보호막을 두르고 거칠 것 없이 여섯 주먹을 뻗었다.

    쿠쿠쿠쿵!

    경천동지할 폭음과 함께 마신의 머리 위로 금빛 소용돌이가 나타나 압도적인 흡입력을 발생시켰다.

    자금색 뇌전들은 대부분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고 요리조리 피한 일부만이 마신의 금색 보호막에 떨어져 부서졌다. 그가 그간 익혀둔 선계 비술 원강조(元罡罩)였다.

    자금색 뇌전이 반 시진 가량 떨어지다 차츰 줄어들고 자금색 뇌전 교룡이 오색구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허상에 불과한 뇌전 교룡들이 입을 쩍 벌려 집채만 한 거대 뇌전 구슬을 뿜어냈다.

    * * *

    콰콰쾅!

    삼두육비 마신의 보호막은 열댓 마리 자금색 뇌전 뱀들이 달려드는 통에 드디어 깨져나갔다.

    고공의 오색구름도 더는 천둥소리가 들려오지 않고 그 속에 어른거리던 무표정한 거대 얼굴도 점점 흐릿해졌다.

    거대 얼굴 뒤로 눈을 찌를 듯한 보랏빛이 반짝이고 하얀 공간균열이 갈라졌다. 안에서 불경소리 비슷한 소리가 들려왔다.

    “선계의 문.”

    법력의 9할을 소모한 마신은 그 광경을 보고 희색을 드러냈다. 한립은 수결을 맺어 사람의 형상으로 돌아와 공간균열을 올라다보았다.

    그런데 이때 거의 사라져 가던 거대 얼굴이 다시 입을 쩍 벌렸다.

    콰릉!

    이전보다 훨씬 굵은 일곱 빛깔 뇌전이 괴이하게 거대 산봉우리와 푸른 연꽃을 지나 한립의 머리로 떨어졌다.

    “이런!”

    깜짝 놀란 한립은 곧장 하늘 높이 두 손을 교차해 연달아 금색 뇌화를 쏘아올리고 들고 있던 암녹색 목검을 휘둘러 검빛을 날렸다.

    콰르릉! 쿠콰콰콰쾅!

    하늘이 쩌렁쩌렁 울리고 거의 바다 전체를 상서로운 빛으로 비추던 오색구름이 번뜩이며 법칙 파동을 일으켰다.

    검빛 속에서 휘청이며 나타난 한립은 얼굴이 더없이 창백했고 들고 있던 목검은 중간이 갈라져 있었다.

    한립은 망가진 목검을 보다 고개를 들어 고공의 거대 얼굴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하하! 축하드립니다, 한 형! 이제 곧 선계로 비승하실 수 있겠습니다.”

    파동이 일고 검은빛의 진법 안에서 마광, 화수자, 해 도인 그리고 금색 소인이 나타났다.

    넉살 좋게 인사를 건넨 것은 마광이었다.

    “그렇군요. 비승의 겁을 무사히 치렀으니 이제 진정한 선인이 될 수 있겠지요.”

    한립은 마치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마광이 웃으며 무어라 더 말하려는데 돌연 균열에서 아름다운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광채는 하얀 빛기둥으로 변해 한립과 나머지 존재들을 휘감았다.

    빛기둥 속에서 무수히 많은 금색 주술문자들이 흘러나와 숨이 막힐 듯한 선계의 법칙파동이 삽시간에 영계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대승기 이상의 강자들은 파동을 감지한 순간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감고 느낀 것을 되뇌느라 분주해졌다.

    마광, 화수자도 크게 기뻐하며 시선을 교환하고 한 명은 검은 기운으로 변해 한립의 몸속으로 다른 한 명은 불구슬로 변해 한립의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서금충과 해 도인은 한립의 영수와 선괴뢰였기에 더더욱 걱정이 없었다. 그들은 한립의 손짓에 영수환 속으로 들어갔다.

    멀리서 열댓 개의 둔광이 빠른 속도로 날아들었지만 늦고 말았다.

    한립은 희미하게 둔광 속에서 다급한 남궁완의 얼굴을 보고 몸이 가벼워져 빛기둥과 함께 고공의 공간균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공간균열에 진입한 순간, 그는 몸이 뻣뻣해지고 머리가 묵직해져 정신을 잃었다.

    * * *

    얼마나 지났을까.

    한립은 시원한 느낌을 받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코앞에 영준하게 생긴 청년의 얼굴이 드리워 있었다.

    청년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저는 고승이라 합니다. 비승을 해 북한선역(北寒仙域)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외전 1

    *

    “저는 영계에서 비승한 한립이라 합니다. 이곳이 말로만 듣던 비승대인 것 같은데, 수사 말고 다른 이들은 없는 것입니까?”

    한립이 연못을 빠져나오자 몸에 푸른빛이 반짝이고 물기가 싹 사라졌다.

    이미 장천병과 원합오극산 등 중요한 보물들은 무사히 몸속에 남아 있고, 마광 등도 영수대 안에 숨어 있는 것을 확인한 후였다.

    그가 있는 곳은 중앙에 연못이 있고 주위에는 쪽빛 보호막이 쳐진 높은 제단으로 보호막 밖으로는 새하얀 눈발이 휘몰아쳤다.

    “아, 한 수사셨군요. 영계에서 오셨다면 조금 골치가 아파지겠는데요? 하계 중에 영계라 불리는 곳이 워낙 많아서요. 일단 저를 따라 가시죠! 어차피 상부에서 세부적인 조사를 할 테니까요.”

    고승은 살짝 곤란해 하다 곧 별일 아니라는 듯 옥으로 만들어진 서책과 은색 거대 붓을 불러내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한립은 뭔가 마음에 걸렸지만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서책과 붓을 치운 고승은 얇은 자금색 옥패를 꺼내 웃는 낯으로 건넸다.

    “이건…….”

    한립은 그것을 바로 받아들지 않고 물었다.

    “수사의 선패(仙牌)입니다. 비승 선인들이 등록을 마치면 얻을 수 있는 물건으로, 어느 성이든 검문 없이 드나들고 일부 특수한 지역도 비용을 치르지 않고 들어갈 수 있게 해주지요. 하하, 이런 혜택은 수사와 같은 비승 선인들에게만 돌아가는 것이니 기쁜 마음으로 받으시면 됩니다.”

    고승은 굉장히 부럽다는 어투로 설명했다.

    “오, 어째서 그런 혜택이 주어지는 것입니까?”

    “진선계는 광활하고 본토 선인들의 수는 헤아릴 수가 없을 만큼 많습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능력으로 비승에 성공해 선인이 된 수사들은 극히 드물지요. 그리고 선역의 고계 선인들 중 비승 선인과 본토 선인의 수는 엇비슷합니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수사도 아시겠지요?”

    “그렇군요. 어느 정도 이해했습니다. 선계의 규정이 그렇다면 잘 받아두겠습니다.”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뻗어 자금색 옥패를 받아 살폈다.

    옥패에는 그의 모습이 생생하게 새겨져 있었고, 그 옆에 이름과 비승이라는 글자가 금전문으로 적혀 있었다.

    “고 형의 말씀을 들으니 선계만의 질서가 있는 듯합니다. 방금 언급하신 상부라 함은…….”

    “이 기억석(記憶石)에 담긴 내용을 숙지하시면 대충 이곳 상황을 파악하실 수 있을 겁니다.”

    미소를 띠고 질문하려는 한립에게 고승은 짙은 남색의 수정돌을 던져주었다.

    “감사합니다.”

    한립은 그것을 받아 곧장 이마에 가져다 댔다. 일다경 후 수정돌에 의식을 불어넣어 살피던 한립은 한숨을 쉬며 돌을 떼어냈다.

    “선계는 무수히 많은 선역으로 나뉘어 있고, 각 선역은 선궁이라는 곳에서 관리하는데 관리는 하지만 지배를 하는 것은 아니란 뜻이군요?”

    “잘 이해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이제 선계의 거대 세력에 대해 간단히 설명 드리려 하는데 관심이 있으십니까?”

    “가르침을 주시면 감사히 듣겠습니다.”

    “선역은 명의상으로는 선궁이 관리하지만 실질적인 상황은 다릅니다. 선궁의 휘하에 있지 않은 적잖은 세력들이 존재하고, 어떤 선역들은 초대형 세력이 선궁보다 더 위세를 부리기도 하지요.

    물론 도조(道祖)들께서 기본적인 질서를 유지해 손쓸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런 상황은 막고 있고, 선궁 자체도 선역에서 손에 꼽히는 거대 세력이기에 모두가 선궁의 관리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습니다.

    선궁의 집권자들도 다른 거대 세력을 함부로 건들이지 않아 선계는 나름 평화롭다고 할 수 있지요. 다들 선계의 규율만 깨지 않는다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비승 선인인 수사는 본토 선인들과는 다릅니다. 비승을 하면서 뇌겁으로 세례를 받아 체내의 진원이 선영력을 받아들일 수 있게 변하고 있다지만, 변화가 끝나려면 몇 백 년은 있어야 하니까요.

    만일 제가 수사라면 의지할 만한 세력을 선택한 다음 진원이 완전히 자리 잡은 다음 다른 일들을 고민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상생활을 하는 데도 적잖은 영석을 소모해야 하거든요.”

    고승은 긴 이야기를 단번에 쏟아냈고, 한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조언 감사드립니다, 고 형. 그런데 듣고 있자니 어쩐지 수사께서는 선궁 분이 아닌 듯합니다.”

    “눈치 채셨군요! 저는 선궁이 아니라 석기전(石嘰殿)사람입니다. 제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선궁이 석기전에 맡긴 업무를 대리하기 위해서고요. 만일 수사께서 본 전에 들어올 생각이 있으시다면 환영입니다.

    석기전은 다른 세력이 제공하는 일체의 혜택을 약속드릴 수 있고, 개인적으로 수사가 전의 등천각(登天閣)에서 고계 선가공법을 택해 익힐 수 있도록 주선해 드릴 수 있습니다.”

    한립의 예리한 지적에도 고승은 밝게 웃으며 숨김없이 답했다.

    *

    외전 2

    *

    “선가공법이요?”

    한립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고승을 바라보았다.

    “선가공법은 선인 이상의 존재들이 수련할 수 있는 법결입니다. 오직 선가공법을 익힌 자만이 선영력을 제대로 연화시켜서 저계 선인에서 한 걸음 한 걸음 고계 선인으로 나아갈 수 있지요.

    그러나 대부분 중, 저계 선가공법은 대성을 해도 경지를 별로 올려주지 못해 또 다른 공법을 구해 수련해야 하지요. 거대 세력이 소장한 고계 선가공법을 익혀야만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답니다. 당연히 바깥에도 고계 선가공법이 돌아다니기는 하지만 그 수준이야 알만하지 않겠습니까?”

    “오, 바로 도조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선가공법도 있는 것입니까?”

    “하하, 도조의 경지요? 그렇게 안 봤는데 아주 높은 곳을 바라보고 계셨군요! 안타깝게도 선계의 유명한 공법들은 익혀도 바로 도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선계에 알려진 수백 명의 도조들도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남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막대한 기연이 따라주어 그런 경지에 이른 것이니까요. 아무리 대단한 선가공법을 익혀도 도조 아래인 대라경(大羅境)까지 밖에는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 위로 올라가는 것은 전부 스스로의 능력에 달렸지요.”

    고승이 묘한 표정을 짓다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도조가 되는 것은 정말 꿈같은 이야기란 소리군요. 그럼 선인들의 다른 경지에 대해 알 수 있습니까?”

    “하계 수사들은 선인들을 통틀어 진선(眞仙)이라 부르지만 그건 진선계 선인중 중, 저계 수사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 위로 금선(金仙), 태을(太乙), 대라(大羅) 등의 대경계(大境界)로 나뉘지요. 각 대경계를 넘어서려면 백만 년 이상의 고된 수련이 필요하고 대경계도 그 안에서 급이 나뉘어서 실력이 천양지차입니다.”

    “고 형께서는요?”

    “부끄럽게도 진선이 된지 수백만 년이 넘었지만 아직 진선 고계에 머물고 있습니다. 특별한 기연을 얻지 못하면 아마 평생 다음 경계에 이르지 못할 테지요.”

    고승은 쓴웃음을 지었고 한립의 안색이 미미하게 달라졌다. 도저히 상대의 수행을 파악할 수 없었는데 진선경에 불과했다는 게 놀라웠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막 비승한 저는 진선경 저계겠습니다.”

    “음……. 그렇게도 말할 수 있겠지만, 아직 선영력을 제대로 연화시킬 수 없으니 ‘위선(僞仙)’이라고 보는 편이 맞겠지요. 수백 년이 지나야 진정으로 저계 진선경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

    고승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흘렸고 그 모습에 한립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선계에는 진선 외에 다른 수사들도 적지 않은가 봅니다.”

    “그렇습니다. 선인들이 능력이 뛰어나다 한들 그 후손까지 선인의 경지에 이르도록 보장할 수는 없으니까요. 선영력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끼리 혼인을 하여 자식을 보고 그게 몇 대에 이르면 얼마나 많은 범인들이 생겨나겠습니까?”

    “그렇군요. 어찌 되었든 고계 선가공법이 우리 진선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지는 알아들었습니다.”

    “우리 석기전은 비승 선인들의 잠재력을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다른 세력들은 이렇게 좋은 조건을 제시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요. 정 부담이 되시면 잠시 외문 객경직을 맡았다가 몇 백 년 후에 본 전에서 받은 공법과 물건들을 반납하고 떠나도 됩니다.”

    고승은 한립이 고민하는 것을 보고 덧붙였다.

    “그래도 된다면 저도 한 번 직접 살펴보고 결정을 내리고 싶군요.”

    한립은 눈을 반짝이며 마음을 정했다. 상대의 말대로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진선의 경지를 공고히 하는 것이었다.

    거대 세력 중 하나를 골라 의탁하며 천천히 선계를 알아가는 것도 좋은 선택이었다. 고승은 퍽 기뻐하며 얼른 소매를 털어 등 뒤로 은색 장포를 입은 또 다른 ‘고승’을 불러냈다.

    “대신해서 당직을 좀 서줘야겠다. 난 한 수사를 데리고 석기전에 다녀와야겠어.”

    “빨리 돌아와야 합니다. 감찰사라도 나타나면 오래 속일 수 없을 테니까요.”

    은색 장포 고승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건 걱정할 것 없다. 이렇게 구석진 곳의 비선대에 감찰사가 뭐 한다고 온단 말이냐. 지난번에 감찰사가 왔던 때가 언제였더라? 거의 몇 백 년은 된 것 같은데. 그리고 한 수사만 모셔다 놓고 바로 돌아올 테니까 늦어도 보름 안에는 돌아올 수 있을 거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괜히 일이 틀어져 나까지 피해보지 않게 해주십시오.”

    은색 장포 고승은 대답도 듣지 않고 연못 옆에 앉아 눈을 감아 버렸다. 그 모습에 한립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민망한 꼴을 보였습니다. 제가 수련한 구토(垢土) 화신인데 실력이 저보다는 못해도 저계 진선을 상대하기에는 충분합니다. 대신 당직을 세워놓으니 마음이 놓이는 군요. 자, 가시죠! 석기전으로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고승은 미소를 지으며 한 손으로 수결을 맺어 제단의 보호막을 가리켰다.

    퐁!

    보호막에 한 사람이 드나들만한 동그란 통로가 만들어졌고 고승과 한립은 그곳을 통해 바깥으로 나섰다.

    보호막을 떠나는 순간, 하늘을 뒤덮은 눈보라와 엄청난 한기가 들이닥쳤다. 강력한 신체를 지닌 한립도 미간이 좁아질 만한 강한 추위였다.

    북한선역은 원래도 춥기로 유명했지만 이렇게 눈보라가 치는 날은 더욱 한기가 왕성해졌다.

    본토의 저계 선인들도 방한용으로 특수 제작된 기물 한두 가지를 지녀야 겨우 눈보라를 지날 수 있었는데 막 비승한 선인이 아무렇지 않게 있는 것을 보고 고승은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고승은 곧장 아래쪽으로 하얀 법결을 날렸고 잠시 후 눈보라 속에서 맑은 새소리가 들려오더니 사납게 몰아치는 눈보라를 뚫고 흰 공작새 두 마리가 날아올랐다.

    “타시죠!”

    고승은 먼저 공작새에 올라타고 다른 한 마리를 가리켰다. 이에 한립도 미소를 짓고 공작새에 올랐다.

    이것이 바로 한립이 선계(仙界)에 발을 들이고 내딛은 첫걸음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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