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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430화 (1,187/2,000)

1430화. 북극원정(北極元晶)

*

푸른 둔광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대전에 앉은 능옥령은 옥간 하나를 쥐고 들뜬 표정을 지었다.

이때 한립은 벌써 난성해를 벗어나 능옥령이 들려준 이야기를 묵묵히 곱씹었다.

그와 남궁완이 난성해에 남겨둔 섬은 거대 세력으로 성장해 제자였던 전금아의 후인 몇이 관리하고 있다고 했다.

결단 후기에서 원영 초기 정도의 수행을 지닌 그들은 한립의 제자의 제자 그러니까 손제자(孫弟子) 벌이었고, 그들 중 한 명이 이날 능옥령의 탄신일을 축하하기 위해 원영기 수사 중에 있었다고 한다.

한립은 명의상 손제자인 그가 능옥령의 특별한 돌봄 아래 순조롭게 수행을 쌓고 있고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말을 듣고는 더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전금아는 이천여 년 전에 무리해서 화신기 경지에 도전하다 도겁 중에 재로 변해 사라졌고, 다행히 미리 손을 써놔 혼백은 상하지 않고 무사히 윤회의 길에 들어섰을 거라고 했다.

또한 극서 지역의 천죽교(千竹敎) 교주 자리를 맡긴 석견이란 제자는 원영기 때 강적을 만나 동귀어진했는데 그 문하의 자질이 뛰어난 제자 몇이 대연신군의 공법을 전승해 오히려 세력이 번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인연이 깊은 황풍곡과 낙운종은 수천 년 동안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다.

위기에 처해 있던 황풍곡은 연달아 천부적인 자질을 지닌 제자를 배출해 그들이 원영기 수사가 되고는 천남의 거대 종문 중 하나로 이름을 올렸다.

낙운종은 한립이 기반을 다져놓은 덕에 그가 영계로 비승을 하고도 원영기 장로들이 끊임없이 배출되어 운몽산맥 전체를 좌지우지하며 지역의 패자로 군림했다.

상대적으로 당시 이름을 날리던 고검문이나 백교원과 같은 운몽산맥의 다른 종문들은 세월이 흘러 다른 신흥 종문에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한립은 이 이야기를 듣고 세력의 번영이나 멸망이 얼마나 허망한지 생각했다.

* * *

반년 후, 천남 월국(越國)의 폐허 속에 청포 청년이 부서진 석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폐허는 버려진지 오래되었는지 틈틈이 들풀들이 자라 있었고, 몇 개 남지 않은 벽돌 잔해에도 이끼가 가득했다.

청년은 석벽 어딘가에 희미하게 남은 ‘한(韓)’자를 살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청포 청년 뒤쪽의 작은 길에서 걸음 소리가 들리고 부부가 사내아이를 데리고 웃으며 이쪽으로 들어섰다.

서른쯤 되어 보이는 부부는 사내는 피부가 검고 팔뚝이 굵었고 여인은 예쁘장한 얼굴에 붉은 기가 돌았다.

그들은 대나무 바구니에 향초며 이것저것들을 담아 즐겁게 걸어오다 낯선 사람을 보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귀엽게 생긴 사내아이가 검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낯선 청년을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올려다보았다.

“저……. 공자께서는, 뉘신지요?”

사내가 머뭇거리다 처와 자식을 데리고 다가와 떠듬떠듬 물었다.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차림이나 곧은 자세가 타지에서 학문을 쌓는 이들과 비슷해 보여 농촌 사내인 그가 함부로 말을 걸기 어려웠다.

“안녕하십니까. 제가 한 가라 이곳을 지나는 김에 한 가 사당이 있던 자리에 제사나 올릴까 하여 들렸습니다.”

천천히 몸을 돌린 그의 얼굴이 어딘가 부부와 사내아이를 닮아 있었다.

“공자께서도 한 가 분이십니까?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신 한 가 친척의 자제인가 봅니다. 조부께서, 한 가도 천여 년 전에는 크게 번창해 외지로 나간 사람들이 많다고 하셨지요. 예전에는 사당에 제를 올리러 많이도 왔는데 이제는 거의 없습니다.”

사내가 놀라면서도 반가운 기색을 했다.

“그렇군요. 하긴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 타지로 간 친척들이야 점차 고향을 잊기 마련이지요. 그런데 줄곧 이곳에 남아 사당을 지키시고 고생이 많으십니다.”

“하하, 다 조부님 말씀을 따른 겁니다. 한 씨 가문이 있던 이곳을 떠날 생각을 못하시더라고요. 듣자니 조상 중에 신선이 나온 적도 있다던데 우리마저 떠나 버리면 그 신선 조상님이 돌아왔을 때 후인을 찾지 못할 게 아니냐면서 말입니다.”

한 씨 사내는 순박하게 미소 지었다.

“신선 조상이라. 하하, 저도 그런 소문을 들은 것 같기는 한데 수천 년 전의 일이라니 사실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거야 저도 모릅니다만, 집안 어르신들이 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런가 보다 하는 것이죠. 제사를 지낼 때 조부께서 신선 조상님이 남겨주셨다는 신검의 칼집을 보여주신 적이 있어서 사실인 것 같기도 하고요.”

“신검의 칼집이요?”

청년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가 남겨두었던 서금충으로 만들어낸 검의 칼집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영기를 결집해 둔 것이었다.

검을 세 번 사용하면 자동으로 흩어져 사라지게 되어 있었으니 사내가 보았다는 칼집은 진짜가 아니라 한 씨 가문의 후인이 기억을 떠올려 제작한 모조품일 것이다.

“그렇다니까요. 집안 어르신들 말씀이, 그 신검이 늘 사당에 걸려 있다가 몇 번이나 우리 가문을 멸문의 위험에서 구해주었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쓰임을 마치고는 금빛으로 흩어졌는데 그걸 모아두어도 별다른 쓸모는 없었다지요. 신검을 잃은 가문은 다음번 횡액을 피하지 못하고 쇠락해 많은 이들이 떠나게 되었습니다.”

사내는 왠지 모르게 눈앞의 청년이 친숙하게 느껴져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았다.

“어떤 가문이든 흥망성쇠를 겪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이 아이는 아들인가 봅니다. 똑똑하게 생겼는데 이름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청년은 짧게 탄식하며 사내아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하하, 우리 집 셋째 ‘한명’입니다. 자, 어서 와서 아저씨께 인사드리거라!”

사내는 상대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져 아이를 잡아끌었다. 아이는 부끄럼이 없는지 냉큼 다가와 청년 앞에 엎드려 인사를 했다.

“착하구나. 오늘 만난 것도 인연이니 이렇게 하자! 내 한 가지 물건을 줄 것인데 네가 운이 따른다면 큰 기연이 될 것이고 아니라도 백세까지 무병장수할 것이다.”

청포인은 한눈에 아이가 영근이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평범한 영근이지만 앞으로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손바닥을 뒤집어 옥패를 꺼내 붉은 줄을 걸어 사내아이의 목에 걸어주었다.

스슷!

놀랍게도 옥패는 물론 붉은 줄까지 아이의 목 안으로 사라졌다. 한 씨 사내와 그 부인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을 때는 청포 청년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꺄악! 귀신이야!”

“헉!”

사내와 여인은 너무 놀라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한 가 부부가 대낮에 귀신을 만났다는 이야기로 시골 마을이 한동안 시끄러웠지만 몇 달이 지나서는 누구도 그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한참이 지나 한명이라는 아이는 우연히 옥패의 비밀을 알아내고 집을 떠났다.

그는 몇 년 후 옥패의 힘을 이용해 낙운종 원영기 장로의 문하로 들어갔고 그 덕에 한 가의 부흥이 다시 시작되었다.

* * *

북적이던 추마골 외곽은 수천 년이 흘러 각종 영약과 영물이 거의 멸종이 되어 찾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이날 푸른 그림자가 각종 금제를 무시하고 추마골로 진입했다.

반나절 후 추마골 안에서 굉음이 터져 나오고 눈부신 푸른 빛줄기가 빠져나와 하늘 끝으로 사라졌다. 엄청난 소란에 주변의 몇몇 중소 종문들이 제자들을 파견해 조사를 했다.

추마골 안팎의 산골짜기들이 깨끗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거대한 구덩이만 남아 있었는데 그 아래서 희미하게 은백색 빛이 새어 나왔다.

“북극원광!”

견문이 넓은 종문 수사 몇은 은백색 빛의 정체를 알아보고 서둘러 뛰어들어 북극원정을 캐내려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구덩이를 수백 번 뒤집었지만 겨우 열댓 덩이를 발견했을 뿐이었다. 그 때문에 여러 종문들이 충돌하기까지 했다.

물론 그 일은 월국에서 넘어온 한립이 벌인 일이었다.

추마골 깊은 곳에 매장되어 있던 막대한 수량의 북극원정까지 채취한 그는 더 이상 인계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조용한 산을 찾아 동굴을 판 뒤 복잡한 진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북극원정을 갖고 돌아가야 해서 계간 압력을 뛰어넘기가 올 때 보다 훨씬 어려웠다.

몇 시진에 걸친 사투 끝에 진법이 완성되었고, 그 중간에 앉은 한립은 오색 거대 원반을 꺼내 날려 보냈다.

웅웅!

진법이 미친 듯이 빛을 머금었고 한립은 그 빛에 파묻혔다.

쿠쿠쿵!

동굴이 있던 산에 두꺼운 빛기둥이 치솟아 하늘로 솟구쳤다. 동시에 진법에 가부좌를 틀고 있던 한립은 원래의 남색 장포의 유생으로 돌아가 맥없이 쓰러졌다.

* * *

영계, 무애해, 천원궁 밀실 안.

밀실에 줄곧 앉아 있던 한립은 눈을 번쩍 뜨고 눈앞에 나타난 저물탁을 잡아챘다.

그의 만면에 희색이 가득했다. 북극원정을 얻었으니 드디어 오랜 세월 바라던 원합오극산 제련을 마칠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 진혼단이 있으니 비승의 겁을 무사히 치를 가능성이 더욱 높았다.

물론 연신술 3성도 익히고 광령도체의 힘을 빌려 오장단원공(五藏鍛元功) 등 선계 공법도 수련할 생각이었다.

계획을 검토하는 그의 얼굴에 들뜬 기색이 떠올랐다.

8천 년은 범인에게 어마어마한 시간이었지만 까닥하면 천 년씩 잠을 자버리는 진령의 수명이나 한 계면의 성쇠와 비교하면 순간에 불과했다.

8천 년 후의 어느 날, 풍원대륙의 일류 세력으로 거듭난 인족의 크고 작은 성에서는 수사들이 광장에 모여 흥분한 낯으로 무언가에 대해 떠들어댔다.

거리마다 무장을 한 역사들이 돌아다니고 공중에는 수사들이 순찰을 돌기도 했다. 특히 몇몇 중요 거점인 거대 성들은 금제를 죄다 발동하고 비행 법기들을 띄워 혹시 모를 적의 침입을 경계했다.

거대 성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산 정상에 세 명의 대승기 수사들이 바위를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술을 콸콸 들이붓는 오색 가죽옷을 입은 험상궂은 거한, 한 손에 책을 들고 있는 창백한 백의 소년 그리고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녹의 노인이었다.

“벽 천군, 시간이 거의 다 된 것 아닙니까?”

험상궂은 거한이 큰 소리로 물었다.

“비승 도겁을 하려면 양기가 가장 강한 정오가 좋겠지요. 영계 일인자라 불리는 강자라도 그건 지킬 겁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더 기다려 보세요.”

녹의 노인이 살짝 눈을 뜨고 답했다.

“그건 그렇습니다. 하긴 가까이에 비승 천겁이 강림하면 우리가 느끼지 못할 리 없지요. 이게 얼마만의 비승 천겁입니까! 아주 기대가 돼서 견디질 못하겠어요.”

험상궂은 사내는 남색 단발을 한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영계 수사가 선계 비승을 성공한 것이 언제였는지도 까마득합니다. 그냥 아주 오래전이었다는 것밖에는 모르겠어요. 이번에 인족의 한 천존이 비승 도겁을 할 거란 사실을 거리낌 없이 알린 것이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다른 이들은 쉬쉬하다 못해 결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은밀히 시도를 하는데요.”

백의 소년도 책을 내려놓고 감탄했다.

“그간 갑자기 보이지 않는 늙은이들이 어디 한둘입니까. 다들 그렇게 은밀히 도겁을 하려다 실패해 목숨을 잃은 것이겠지요.”

노인이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나머지 늙은이들은 어떻게든 법력을 억제해 천겁 강림을 피하려고 난리인데 한 천존은 대승기에 이른지 고작 만 년 만에 스스로 비승 천겁을 치른다고 나섰습니다. 하하, 다른 건 몰라도 그 배짱만은 본 좌도 박수를 쳐주고 싶어요. 아, 벽 수사께서 수천 년 전에 한 천존을 만나보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대체 어떤 인물입니까?”

“저도 줄곧 폐관 수련만 해서 한 수사와는 안면이 없습니다.”

험상궂은 사내가 웃음을 흘리다 노인을 돌아보았고, 백의 소년도 흥미를 보였다.

“어느 모임에서 한 수사와 만난 적은 있습니다만, 그 사람을 무어라 표현해야할지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군요.”

노인의 주름이 깊어졌다.

“벽 수사가 보시기에 수행과 신통이 어떻습니까. 대충 보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까?”

“실력만 놓고 보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굉장히 강합니다. 직접 시험해 보지는 않았지만 노부 같은 이가 서넛이 달라붙어도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노인은 얼굴을 꿈틀거리며 이렇게 답했다.

“농이시지요? 벽 천군 같은 수사가 서너 명이 붙어도 상대가 안 된다고요? 오랜 세월 교류를 해왔는데 수사의 실력을 우리가 모르는 줄 아십니까.”

백의 소년이 움찔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곁의 험상궂은 거한도 의심스럽다는 얼굴이었다.

“그럼 이런 일로 농을 할 사람이 아닌 것도 아셔야지요. 두 분도 한 수사를 직접 만나보면 노부의 말뜻을 이해할 겁니다. 그냥 시선만 마주쳐도 왠지 모르게 간담이 서늘해지고 등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란 말입니다. 상대의 의식이 몇 배로 강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노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어쨌든 한 수사의 실력이 강하면 비승 도겁을 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지는 것 아닙니까. 도겁에 성공해 비승하는 순간 선계 통로에서 발산되는 선계 파동 한 줄기만 감응해도 돌아가 법칙의 힘을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소년과 시선을 교환하던 거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하, 맞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제껏 여기서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백의 소년이 빙긋 웃음 지었다. 이런 일이 거대 성 밖의 다른 곳에서도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인족 영역 주변에 몰려든 영계 대승기 수사의 수는 상상을 초월했고, 폐관수련을 하며 조용히 살던 이종족 노괴들까지 비술을 써서 법력을 봉인하고 길을 나섰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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