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9화. 인계(人界)
*
쿠쿠쿠쿵!
몇 달 후.
청원궁 밀실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밀실 안의 적홍색 화로 안에서 새하얀 수정처럼 반짝이는 산봉우리가 은색 화염 속에 떠있었다.
산봉우리는 화로를 벗어나자 하얀 주술문자들을 반짝거리며 희뿌연 한기(寒氣)를 발산했다.
“드디어 호음한백산을 제련해냈어! 이제 남은 것은 북극원산 뿐이야.”
밀실 구석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한립이 조용히 눈을 떴다.
* * *
1년 후, 인계 대진국 변경의 좁다란 길.
인상이 험악하게 생긴 사내들이 불을 피워 작은 짐승을 구우며 떠들고 있었다.
그들이 걸친 의복은 무척 낡아 해졌고, 들고 있는 단도나 창 같은 병기에는 언뜻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불가 구석에는 깡마른 사내가 눈을 감고 엎어져 있었는데, 갓 스무 살을 넘긴 듯한 사내의 얼굴은 아주 창백했다.
남색 유생 복장을 한 그는 밧줄에 꽁꽁 묶여있었고 두 입술은 날카로운 나뭇조각 두 개가 박혀 피가 흐르는 중이었다.
험상궂은 사내들은 청년은 신경 쓰지 않고 고기를 뜯고 떠들기에 바빴다.
“서생 놈 숨이 끊겼는지 누가 좀 보고 오지? 흐흐, 닭 잡을 힘도 없는 약골이 감히 우리 일에 나서니 저런 꼴을 당하지.”
머리를 산발한 사내가 다른 이들을 향해 눈짓했다.
“내가 한 번 가보리다. 거의 반나절 동안 꿈쩍도 안 하는 것을 보면 죽었을 것 같기는 한데, 아니면 칼로 깨끗하게 저승길 보내주고 오겠수다.”
왜소한 사내가 힐끗 밧줄에 묶인 유생을 보고 살기를 번득였다.
“빨리빨리 끝내. 내일이면 우리도 떠나야 한다고. 요즘 세상이 험해서 우리도 살기가 팍팍하다니까.”
머리를 산발한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왜소한 사내가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단도를 들고 성큼성큼 남포 청년에게 걸어가 세게 발길질을 했다.
퍽!
남포 청년은 툭 하고 나가떨어졌는데 머리를 땅에 처박고 움직임이 없었다. 왜소한 사내는 보기와 달리 제법 힘이 센 듯했다.
“퉷! 진짜 죽었네. 운 좋은 줄 알아!”
흥미를 잃었는지 왜소한 사내는 단도를 던졌다 잡았다 하더니 그냥 불가로 돌아왔다.
휘잉!
이때 멀리서 잿빛의 사풍(邪風)이 불어 장작불이 마구 흔들렸다.
“크크큭, 이런 황무지에서 좋은 사냥감을 만났구나. 너희 혼백만 흡수하면 보물을 완성할 수 있겠어!”
바람을 타고 음산한 웃음소리가 전해졌다.
“제길, 인근에 출몰한다던 괴물이다. 달아나!”
산발 사내가 대번에 안색이 달라져 벌떡 일어나더니 던져 놓은 병장기도 챙길 생각을 못하고 미친 듯이 도망쳤다.
다른 이들도 하얗게 얼굴이 질려 쏜살같이 사라져, 엎어진 남포 청년만 남게 되었다.
“크크크큭.”
잿빛 바람은 방향을 틀어 검은 기운 몇 줄기를 내뿜어 달아난 사내들을 쫓았다.
잠시 후 곳곳에서 참혹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웃음소리가 끊기고 검은 기운들이 불가에 모여들어 검은 도포를 입은 도사로 변했다.
뾰족한 눈매를 지닌 음산한 도사가 회백색 구슬을 손에 쥐고 즐거워했다.
“좋았어! 그냥 아무나 잡아 죽인 건데 혼백에 이렇게 많은 살기를 품고 있을 줄이야! 죽기 전에 무수히 많은 이들을 살해했나 보군. 오! 아직 한 명이 더 남아 있잖아?”
막다른 곳으로 가려던 흑포 도사는 불가 옆에 쓰러져 있는 사내를 보고 바로 구슬을 가리켰다.
휙!
검은 기운이 구슬을 빠져나와 남포 유생을 향해 달려들었다.
쾅!
막 유생을 뒤덮으려던 검은 기운이 아무 징조도 없이 터져나가고 그 여파로 흑포 도사가 뒷걸음질 쳤다.
“누구냐! 숨어 있지 말고 나와!”
화들짝 놀란 도사는 허겁지겁 여러 장의 부적을 날려 색색의 보호막을 만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악한 기운으로 보아 졸렬한 마도 공법을 수련한 자로구나.”
담담한 사내의 목소리가 바닥 쪽에서 들려왔다.
“누구냐고!”
기겁한 흑포 도사는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죽은 듯 엎어져 있던 남포 유생이 어느새 앉아서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묶고 있던 밧줄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누, 누구시기에 빈도를 향해 이러십니까? 저를 노리고 온 것입니까.”
“너를 노리고? 하하, 우습구나. 인계 전체를 뒤져도 내가 직접 찾아가 처리를 할 만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주변을 살피던 남포 유생이 입가에 조소를 띠웠다.
“뭐라고요? 인계요?”
“됐다, 겨우 마도 잡졸이 무엇을 알려드느냐.”
표정이 싸늘해진 유생이 도사의 말을 끊고 입에서 푸른 실을 날렸다.
쉬익!
푸른 실은 순식간에 여러 겹의 보호막을 뚫고 그의 미간을 관통했다. 남포 유생은 손짓을 해 도사의 시체를 불러온 다음 머리를 쥐고 눈에서 푸른빛을 반짝였다.
털썩!
얼마 지나지 않아 도사의 시체가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대진의 내란과 정사대전(正邪大戰)? 인계가 이렇게 혼란스러울 줄이야. 겨우 축기기 밖에 안 되는 자라 아는 것이 별로 없는 게 아쉽구나. 천남 쪽은 형세가 어쩔는지.”
남포 유생은 차분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막 인계로 돌아온 한립이었다.
겨우 분혼 한 줄기라 지닌 법력이 많지 않았지만 인계에서는 원영기 최정상도 어찌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한립은 흙투성이가 된 의복을 살피고는 불편한 얼굴을 만져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파앗!
빠르게 수결을 맺은 그의 몸이 푸른빛으로 휩싸여 푸른 장포를 입은 청년으로 변했다. 한립은 비술을 이용해 간단히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후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 * *
대진국 모처의 거대 성.
백만여 명의 병사들이 개미떼처럼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성벽에서는 병사들이 필사적으로 활을 쏘거나 창을 날려 적을 저지했다.
피가 강을 이루고 함성과 병장기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거대 성 고공에서는 수백 명의 정도와 사도 수사들이 두 무리로 나뉘어 서로를 죽여 나갔다.
살기가 그득한 가운데 무수히 많은 악귀들이 날아다니고 여러 작은 진법들을 설치하거나 각종 법기와 보물을 가지고 술법을 날려 뇌전과 불길이 날아다니며 굉음을 냈다.
고공에서 싸우는 이들 중 가장 수행이 높은 결단기 수사 두 명을 제외하면 대부분 수사들은 축기기 수행을 지니고 있었다.
“어느 쪽이 승리하든 대진 황실은 또 한 번 성이 달라지겠구나.”
그보다 훨씬 고공의 구름 위에서 한립이 전쟁터를 내려다보며 한탄했다.
예전에 대진에 왔었던 때가 눈에 선했지만 수천 년 가까이 지난 지금 아는 사람은커녕 익숙한 종문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 * *
대진 남강(南疆)의 금제들로 둘러싸인 금지 안.
다양한 종문의 복장을 한 수사들이 구름을 뚫고 우뚝 솟은 거대한 산 아래를 규칙적으로 순찰했다.
워낙 강력한 금공 금제가 걸려있어 인계의 최상급 수사인 원영기 노조를 제외하면 아무도 직접 비행을 해 산봉우리 속으로 날아들 수 없었다.
이곳은 예전에 굉장한 소란이 있었고 적잖은 고계 수사들이 죽어나가 각종 거대 종문들이 공동으로 봉인을 강화하고 관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천 년이 지난 지금은 보물이 전부 도굴되어서 고계 수사가 관심을 가질만한 것은 없었다. 순찰을 도는 수사들도 그다지 긴장감이 없었고 그저 관례상 해야 할 일을 할 따름이었다.
이때, 흐릿한 그림자가 강력한 금제들을 무시하고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반시진이 흘러 산봉우리 정상에 한립이 떠서 가만히 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금제의 위력도 그의 방대한 의식 앞에서는 소용이 없어서 순식간에 산 구석구석을 살필 수 있었다.
그는 곧 익숙한 장소를 발견하고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강산은 유구하나 인걸은 온데간데없다더니, 곤오산이 그렇구나! 어차피 이렇게 된 것 너도 무(無)로 돌아가거라.”
그는 세월의 무상함을 탄식하며 푸른 빛줄기로 변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거산 정상에 격렬한 파동이 일고 광활한 크기의 푸른 거대 손이 나타나 호되게 내리쳤다.
콰쾅! 쿠콰콰콰쾅!
천지가 흔들리고 무수히 많은 금제들이 강렬한 공간 파동에 출렁였다. 거대한 산 하나가 흐릿하게 사라지고 깊은 구덩이만 남아있었다.
그 모습에 순찰을 돌던 여러 종문 수사들이 하나같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얼마 후, 몇몇 원영기 노조들도 급히 곤오산이 있던 자리로 상황을 파악하러 날아들었다.
하지만 공간의 힘이 존재했던 흔적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어 그저 의문을 품고 돌아가야 했다.
이후 곤오산의 증발은 대진 10대 불가사의로 회자되며 두고두고 수사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시 만 년이 흐르고는 곤오산은 상고 경전에 간혹 언급되는 것 외에는 다시 어떤 주목도 받지 못했다.
* * *
난성해(亂星海), 천성성(天星城)이 위치한 거대 섬이 오늘따라 북적북적했다. 크고 작은 선박들이 섬을 드나들고 수많은 이들이 몰려들었다.
성 안의 결단기, 축기기 수사들은 헤아릴 수없이 많았고 간혹 원영기 노조가 도착하면 성 상공을 휙 지나 바로 성궁으로 날아갔다.
오늘이 바로 ‘능 노조’의 탄신일이어서 난성해의 크고 작은 세력들이 십여 년 전부터 부지런히 준비한 선물을 싸들고 환심을 사기 위해 도착해있었다.
정오가 되자 성궁 대전에 수십 명의 원영기 수사들이 모여 상석에 앉은 백의 궁장의 묘령 여인을 우러러보았다.
백옥 같은 얼굴에 곱게 생긴 여인은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원영기 노조들을 내려다보았다.
난성해 유일의 화신기 수사이자 외부인은 모르는 비밀로 수명이 인계 수사의 한계를 넘어서서 지금까지 정정하다 못해 파릇파릇한 능 궁주였다.
“시간이 되었군. 시작하지.”
시녀들이 과실과 차를 내와 원영기 수사들 앞에 내놓자 난성해 전체를 발아래 둔 능 궁주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다른 수사들이 이구동성으로 답하는데, 그때 대전 밖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한 모가 때를 잘 맞춰 왔습니다. 오랜 벗이 찾아왔으니 능 선자께서는 차 한 잔 대접해 주시지요.”
평범한 얼굴의 청포 사내가 미소를 지으며 걸어 들어왔다.
대전 안의 원영기 수사들이 상대의 수행을 파악해 보려 했지만 영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당신은……. 말도 안 돼, 어찌 아직 이곳에!”
능 궁주가 한립의 목소리를 듣고 눈이 번쩍 뜨이더니 걸어 들어오는 청년의 얼굴을 보고는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처리할 일이 있어 어쩔 수 없이 돌아왔습니다. 선자께서는 못 본 사이 벌써 화신기에 이르시고 축하드릴 일입니다.”
“모두 물러가거라. 내 오랜 벗과 따로 이야기를 나눠야겠다.”
얼굴 표정이 시시각각 달라지던 능옥령이 냉랭히 축객령을 내렸다. 대전의 원영기 수사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모른 채 정체불명의 한립을 힐끔거리다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안간 드넓은 대전 안에 한립과 능옥령만 남게 되었다.
“한 수사, 정말 영계에서 오신 것입니까?”
모두 나가자 능옥령은 바로 대전의 금제를 발동해 내부를 격리하고 기쁜 얼굴로 궁주 자리에서 내려왔다.
“그렇습니다, 이야기가 기니 천천히 말씀 나누시지요. 저도 인계는 오랜만이라 성궁의 주인에게 묻고 싶은 일들이 많습니다.”
“제가 요 근래에는 난성해를 벗어나지 않았지만 인계 곳곳의 사정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한 형. 무엇이든 물어보셔도 됩니다.”
차분한 한립의 대답에 드디어 마음을 가라앉힌 능옥령이 복잡한 감정을 담아 그를 살폈다.
“다행입니다. 하계로 내려와 능 수사 말고 예전에 알고 지내던 이들을 한 명도 만나 볼 수 없어서요. 그들의 근황이 궁금할 따름입니다.”
한립은 탄식하듯 말했다. 그 후 능옥령과 한립은 대전에서 반나절을 머물렀다.
우웅!
대전 금제가 흩어지고 눈부신 푸른 빛줄기가 하늘로 솟아오른 뒤 누군가의 목소리가 유유히 퍼졌다.
“능 수사, 영계에서 다시 만나기를 바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