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8화. 인족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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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괴상한 붉은 모래사막.
삼두육비의 금색 거원이 거대 곤충을 맨손으로 뜯어 체내에 있던 은색 팻말을 꺼냈다.
거원의 중간 머리가 은색 팻말을 삼킨 다음 다시 사람의 형상으로 돌아와 발길을 돌렸다.
* * *
보름 뒤, 한립, 노란 장포 노인 그리고 붉은 장포 부인이 삼각 구도로 서서 망망대해 위에서 대치했다.
나머지 둘은 표정이 심각했는데 한립만이 유유자적했다. 그들 사이에는 거대한 금색 고래가 겨우 숨만 붙어 바다에 둥둥 떠 있었다.
“영수의 수행으로 보아 체내에 도패가 두 개 이상일 듯합니다. 두 분이 물러서지 않으시겠다면 차라리 그냥 쭉 남으시지요. 두 분이 지닌 도패와 함께요.”
한립의 목소리가 서늘하기 짝이 없었다.
“실력이 뛰어나다고 너무 자만하시는 것 아닙니까. 홀로 저와 화용부인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황포 노인은 흠칫 놀랐지만 콧바람을 씩씩대며 따졌다. 동시에 그의 두 손에서 시커먼 거대 검과 녹색 보탑이 떠올랐다.
“어디 붙어 봅시다, 그럼.”
한립은 작게 한마디를 하고는 앞으로 각기 다른 색의 산봉우리 세 개를 불러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작은 녹색 병이 들려있었다.
* * *
한 달 뒤, 진룡족 장로 몇 명이 높은 제단 위에서 서서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잠시 후 푸른 빛줄기가 날아들어 그들 앞에 섰다. 그는 바로 한립이었다.
그는 진룡족 장로들을 훑고는 금포 장로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하하, 한 수사께서 가장 먼저 도패를 모아 돌아오셨습니다.”
“요행이 도패들을 모으게 되었는데, 수량이 맞는지 확인해 주시지요.”
금 장로의 말에 한립은 백여 개의 팻말을 불러내 장로들 앞에 띄워두었다.
“음, 총 108개로 광령도과 한 알과 교환하기 충분합니다. 풍 장로, 어서 한 수사에게 드리세요.”
금 장로가 의식으로 수량을 확인하고는 바로 곁에 선 백포 중년인에게 명을 내렸다. 백포 중년인은 웃는 낯으로 주먹 크기의 자홍색 과실이 담긴 옥함을 꺼내 들었다.
알 수 없는 맑은 향기가 피어오르는 매우 싱싱한 과실이었다. 거리를 두고 있지만 그 향기를 맡자 머리가 맑아지고 귀가 다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천계(千界) 제일의 과실이라 불릴만한 보물입니다.”
옥함을 받은 한립은 칭찬이 절로 나왔다.
“허허, 과실의 효과야 두말할 것이 없지요. 아쉬운 점은 평생 한 알밖에 복용할 수 없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광령도과는 오랜 시간 외부에 노출되면 좋지 않으니 어서 잘 챙겨두시기 바랍니다.”
금 장로가 뿌듯한 얼굴로 선의의 충고를 했다.
“가르침 감사합니다만, 챙겨둘 필요는 없겠습니다.”
한립은 그런 노인에게 씩 웃어주고는 냉큼 옥함 안의 과실을 입에 집어넣었다. 그는 몇 번 우물거리다 과실을 그대로 삼켰는데 그 모습에 진룡족 장로들이 다 어안이 벙벙해졌다.
“성격이 이리 급하셨습니까? 도과를 얻자마자 바로 복용하시고요.”
금 장로가 정신을 차리고 당황해하며 물었다.
“이런 천지영물은 가능한 빨리 뱃속에 넣어 두는 것이 마음이 편한 법입니다. 괜히 다른 이들의 욕심을 부추길 필요는 없으니까요.”
“이미 복용을 하셨으니 더는 말씀드리지 않겠지만 광령도과는 다른 몇 가지 영물과 같이 복용하면 효과가 더욱 좋아 아까워 그럽니다.”
“만년 광령도과 자체로 충분합니다. 이런 영과의 도움을 얻고도 더 높은 수행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다 제 복이 부족한 탓이지요. 이번에 귀 족에게 신세를 지었으니 나중에 기회가 되면 갚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이들이 오고 있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한립은 고개를 저으며 진룡족 장로들에게 포권을 해보이고 미련 없이 둔광을 일으켜 날아갔다. 그의 둔광은 장로들이 대답하기도 전에 하늘 끝으로 사라졌다.
“하아, 선인을 참살한 강자답습니다. 이후 선계로 비승하게 되어도 얕볼 수 없는 지위에 이를 재목입니다.”
백포 중년인이 칭찬의 말을 꺼냈다.
“그것도 선계로 비승을 해야 알 수 있는 일이지요.”
금 장로는 한립이 사라진 방향을 묘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저 실력에 광령도과까지 복용했으면 비승의 겁을 이겨낼 가능성이 꽤 높아졌을 겁니다.”
또 다른 녹색 장포를 걸친 소녀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물었다. 다른 장로들도 이상하다는 얼굴이었다.
“다들 저자의 의식이 어떻다고 느끼셨습니까?”
금 장로는 수염을 쓸어내리며 직접적으로 답하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강대하더군요. 도과대회에 참가한 이들 중 손에 꼽힐 정도였습니다.”
백포 중년인이 곰곰이 생각해 답을 내놓았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아마 저자는 의식의 일부밖에 노출하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게 사실이면 이미 의식의 힘으로는 하계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는 것 아닙니까! 금 장로께서 직접 조사를 해보셨습니까?”
또 다른 장로가 놀라 소리를 높였다.
“조사를 해보았으니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허나, 저 강대한 의식이 비승의 겁을 이겨내는데 도움이 될지 방해가 될지는 모르지요. 타고난 비술로 은밀히 살펴보니, 강대한 의식에 숨겨진 후환이 엄청납니다. 대책을 찾지 못하면 몇 백 년 내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금 장로는 유유히 대답했다.
“어찌 그런 일이!”
“본인은 의식의 힘에 그런 후환이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지금은 몰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겠지요. 아마 그때 가서 대책을 강구하면 늦을 지도요.”
“의식의 힘에 깃든 후환이라는 것이 우리 진룡족도 어찌할 수 없는 종류일까요?”
“그러니까 금 장로께서도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놀란 진룡족 장로들이 한마디씩 하며 웅성거렸다. 그때 하늘 끝에서 파공음과 함께 구불구불한 하얀 빛줄기가 제단으로 날아들었다.
쿵!
제단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태가 고운 미소년이 머리에 금관을 쓰고 허리에는 옥대를 차고 나타났다.
“헌원족(軒轅族), 헌원걸이 여러 용족 장로들을 뵙습니다.”
“뭐라고요? 상고 헌원족 인물!”
진룡족 장로들은 대경실색해 미소년을 아래위로 훑느라 한립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 * *
1년 후.
순조롭게 인족 무애해로 돌아온 한립은 청원궁으로 돌아가 남궁완, 빙봉 등과 이야기를 나누고 몇 가지 중요한 일들을 처리한 뒤 금제로 겹겹이 둘러싸인 밀실로 들어가 폐관수련을 시작했다.
시간이 유수와 같이 흘러 이백 년이 흘러갔다. 그동안 인족은 거의 하늘과 땅이 뒤집힌 것 같은 변화를 겪었다.
우선, 빙백 선자가 몇 년 후에 대승기 노조의 신분으로 인족으로 돌아와 한동안 주변 종족들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목족 등 인근의 약소 종족들은 인족을 위주로 의사결정을 하겠다는 내용의 전갈을 보내왔고, 야차족 등 인족과 사이가 좋지 않던 종족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영토를 버리고 만황의 땅으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다른 곳으로 제 살길을 찾아 떠났다.
인족은 굴러들어 온 호박을 거절하지 않고 그들이 남기고 간 영토를 차지했다. 이어서 풍원대륙의 적잖은 이종족들이 인족을 향해 우호적인 연락을 취해왔다.
비령족 등 일부는 인족과 동맹을 맺고 싶다는 의사를 표하기도 했다. 백 년이 채 되지 않아 인족은 풍원대륙에서 내로라하는 강대 종족 중 하나가 되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인족 내부에서 언제부터인지 최상급 공법과 위력적인 신통들이 전수되었고 전설 속에나 듣던 천지영약들이 인족 영역에서 빈번하게 발견되었다.
수련의 고비에 막혀 있던 인족 고계 수련자들은 이런 행운을 통해 분분히 수행을 높이는 데 성공했다.
새롭게 발굴된 저계 수사들도 특수한 체질을 지니거나 자질이 뛰어난 이들이 많았다.
인족과 줄곧 동맹 관계였던 요족도 인족만큼은 아니지만 세력을 키워나갔다. 인족이 살필 여유가 없는 영토를 야금야금 쓸어 담아 이전보다 영역이 배로 넓어졌다.
인족에서 발견된 최상급 공법과 단약, 보물 등이 적잖이 요족으로 흘러 들어가기도 했다. 머리가 비상한 자들은 상황을 주시해 모든 변화가 한 곳에서 시작되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청원궁!’
청원궁 제자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이런 수련 자원들을 다른 인족 구역에 가져다 놓거나 전수해 인족이 단시간에 환골탈태(換骨奪胎)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 * *
흉명이 자자한 마계 시인의 땅 변두리.
마족 병사들이 검은 비차를 타고 저공을 순찰하고 있었다.
팟.
병사들이 지나간 자리에 흐릿하게 파동이 일고 푸른 인영이 나타났다. 그는 병사들이 사라진 방향을 힐끔 보다 시인의 땅으로 눈길을 돌렸다.
“연신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이렇게 골치 아플 줄이야. 마광과 화수자도 속수무책이고. 그때 봉인된 선인의 기억을 자세히 살필 수 있었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아도 됐을 텐데.”
푸른 인영이 혼잣말을 하며 감쪽같이 사라졌다. 하루가 지나 그는 시인의 땅 깊은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높다란 핏빛 제단 위에 검은 발우가 놓여 있었고 주위로 8개의 청동 기둥이 서있는 신비로운 장소였다.
“한 수사, 약속대로 다시 찾아와주었구만. 연신술의 폐해가 적지 않다는 것을 이제는 의심하지 않겠지?”
푸른 인영이 제단으로 다가가자 검은 발우가 미세하게 흔들리며 사내의 목소리를 냈다.
2백 년간 폐관수련을 하며 결국 의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한립은 어쩔 수 없이 청원궁을 떠나 다시 마계 시인의 땅으로 돌아왔다.
“약속은 이전과 다름없겠지요?”
제단 위 발우를 본 한립이 무표정하게 물었다.
“빈도의 신분에 어찌 실언을 하겠는가.”
“그렇다면 조건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연신술 제3성의 수련법을 알려주시지요.”
“하하, 현명한 판단일세. 어쨌든 3성까지는 익혀야 선계로 비승할 시간을 벌 수 있을 테니까.”
가벼운 웃음소리에 숨길 수 없는 흥분이 느껴졌다.
웅웅!
발우가 강하게 진동하자 그 속에서 하얀빛에 휩싸인 부적이 튀어나왔다. 금은색 주술문자가 새겨진 손바닥만 한 옥부(玉符)는 오색 빛 알갱이를 흩날렸다.
“이게 선계로 통하는 부적일세. 어떻게 발동해야 하냐면…….”
사내의 목소리가 점점 나지막해졌다.
반나절 후.
시인의 땅 중심의 호수 아래에서 솟아오른 한립은 어딘가로 쏘아져나갔다. 푸른 둔광 속 그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 * *
3백 년 후, 청원궁 대전 안.
하얀 의복을 입은 아리따운 여인이 한립 앞에 서서 보고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허리를 굽히며 바친 것은 하얀 저물탁이었다.
“백과아, 네가 잘해주었구나. 한백 신통을 더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면서 이렇게 많은 호음석(昊陰石)을 찾아오다니, 장하다.”
한립은 의식으로 저물탁 안을 살피며 대견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자, 뇌명대륙의 서천(西天)의 땅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숨겨진 현옥(玄玉)광맥을 찾아 그 광맥 깊은 곳에서 호음석을 발견하였습니다.”
백과아는 공손히 대답했다.
“네가 한백 신통을 부지런히 수련하지 않았으면 호음석의 존재를 감응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번에 큰 공을 세웠으니 가서 쉬거라. 내 상을 내릴 것이야.”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며 온화하게 분부했다.
“예, 물러가 보겠습니다.”
백과아가 얌전히 예를 올리고 대전을 떠나자 한립은 생각이 많아졌다. 원합오극산 중에 호음한백산(昊陰寒魄山)을 드디어 제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북극원산의 재료만 손에 없는 셈이었다.
인계 추마골에서 놀라운 수량의 북극원광을 직접 보았으니, 그곳에 가면 북극원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지금 그의 수행으로 인계로 본체 강림을 하면 무시무시한 계면의 압력에 고생할 거란 점이었다.
막대한 대가를 들이더라도 파계용 성반(聖盤)을 구해 분혼 한 줄기를 인계로 내려보내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가 원혼정(元魂灯)에 오랜 세월 고이 모셔둔 특수 분혼을 쓸 날이 드디어 온 것이다.
한립은 인계로 돌아갈 생각을 하자 칠현문, 황풍곡, 낙운종 같은 몇 개의 단어가 떠올랐다.
동시에 부모님과 어린 누이, 려비우, 대연신군 등의 모습이 생각나 더욱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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