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7화. 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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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달 후, 거대 호수 위의 황금 선박.
거대 선박의 화려한 대청 안에서 한립은 금색 장포를 걸친 노인과 마주 앉아 있었다.
노인 뒤에선 은색 장삼을 입은 소년이 창백한 얼굴로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바로 한립을 이곳으로 초청한 번포자였다.
“그러니까 노부가 교환할 물건을 보여주어야 거래를 할지 말지 결정하겠단 말씀이시군요.”
금포 노인은 머리에 번포자와 비슷하게 생긴 한 쌍의 보라색 뿔을 지니고 있었다. 각진 얼굴에 쭉 뻗은 눈썹이 상당히 위엄 있는 인상을 만들어주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지난 몇 달간 진룡도를 돌아다니며 여러 동급 수사들과 진귀한 재료와 보물을 거래해 수확이 상당했어도 진혼단에 걸맞은 물건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금 수사가 제시하실 물건이 무엇인지 더욱 기대가 됩니다.”
“허허,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사실 노부가 진혼단을 구하는 것은 우리 진룡족 때문이 아니라 이전에 크게 신세를 진 친구를 위해서입니다. 준비한 물건이 한 형의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군요. 번포자, 물건을 보이거라.”
금 장로의 말에 번포자는 씨익 웃으며 손바닥 크기의 옥함을 꺼내 들었다. 겉에 금색 부적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어 옥함을 대부분 가렸다.
옥함은 바로 한립을 향해 날아들었다. 한립이 덤덤하게 옥함을 받아들고는 부적을 떼어내자 뚜껑이 소리 없이 열렸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각기 다른 색깔의 비늘 7개였다.
“이것은…….”
한립도 크게 놀라 입을 벌렸다.
“살펴보시지요.”
번포자는 손을 뻗어 마음대로 하라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약간 의심스러웠지만 별다른 수작을 부려 놓은 것 같지 않아 한립이 남색 비늘을 꺼내 손바닥에 올려보았다.
피부에 비늘이 닿는 순간 그는 바로 그것을 들어 이마에 붙이고 눈을 감았다. 시간이 흐르자 한립의 표정은 시시각각 달라졌는데 놀라기도 하고 약간의 두려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장장 일다경이 지나서야 비늘을 이마에서 떼어낸 그가 눈을 떴다.
“그럼 이 비늘 조각들이 전부…….”
“잘 아셨으면 되었습니다. 평범한 수사들에게는 무용지물이라도 비승을 하려는 소망을 지녔다면 가치를 따질 수 없는 보물이지요. 누구나 비승의 겁을 치르는 느낌이 어떤지 경험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금 장로가 평온히 말했다.
“허나 귀 족의 비승의 겁과 다른 생령들의 겁은 다를 텐데요.”
“약간 다르기는 해도 근본적으로는 차이가 없습니다. 노부가 알기로 다른 종족들은 도겁을 하는 동안 다른 이들을 근처에 남겨두지도 않고, 이 진린류영술(眞鱗流影術)은 진룡족의 천부적인 신통이라 따라하려고 해도 쉽지 않지요.
경험이나 기록을 남기려 해도 천겁의 힘에 의해 실패할 테니까요. 이 비늘 조각들 중에는 도겁에 성공한 기록도 있고, 천겁을 이겨내지 못해 목숨을 잃은 것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진혼단 못지않게 귀한 물건이라는 것은 잘 아실 거라 믿습니다.”
금 장로는 수염을 쓸어내리며 자신만만했다.
“이건 소모성 보물이고 복제도 불가능할 거라 예상됩니다. 안 그랬으면 이리 쉽게 내주실 리 없겠지요.”
비늘 조각을 만져보던 한립이 이제야 알겠다는 듯 말했다.
“허허, 선인을 참살했다는 강자답습니다. 맞습니다, 확실히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없고 비늘 조각 하나당 딱 세 번만 쓸 수 있습니다. 복제 방법은 본족에서도 오직 노부만 알고 있고요. 그렇지 않았으면 이런 물건을 다른 종족의 손에 넘길 수는 없지요.”
노인은 솔직담백하게 털어놓았다.
“단 세 번밖에 사용할 수 없으면 실용성이 너무 떨어집니다. 진혼단을 바꾸기에는 부족한 듯싶습니다.”
“그러시다면 만년 금상액(金桑液) 한 병을 얹어드리겠습니다. 금상액 자체도 효과가 뛰어나지만 여러 전설 속의 단약을 제련하는데 필수 재료라 진룡도에도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재료입니다.”
“만년 금상액까지 주신다면 그럭저럭 손해는 아니겠습니다. 거래를 하지요.”
이번에는 한립도 오래 고민하지 않고 답했다.
솔직히 진혼단이 의식의 힘을 증가시키고 정신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주어 다른 이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어도 그에게는 효과가 떨어졌다.
그에 비해 역대 용족의 비승 경험이 담긴 비늘 조각들이 훨씬 실용성이 있었다. 각각 세 번씩 사용할 수 있어 남겨두면 그와 가까운 이들도 득을 볼 수 있었다.
물론 그의 수중에 진혼단이 두 알이나 남아 있었기에 거래한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금 장로는 한립이 흔쾌히 거래에 응하는 것에 잠시 멈칫했지만 그 역시 곧 유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성격이 참 호쾌하십니다. 그래서 번포자가 첫 만남에 초청장을 줄 생각을 한 것이겠지요. 도과대회에서도 좋은 결과가 있으시길 바라겠습니다.”
말을 마친 노인은 금색 작은 병을 꺼내 건네주었다. 한립은 뚜껑을 열고 의식으로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잘 넣어 두었다.
그도 바로 손바닥 크기의 목함을 쏘아 보냈는데 금 장로도 목함 안에든 금색 단약을 보고 희색이 만연했다.
“허허허, 과연 진혼단이 맞습니다. 이제 그 친구에게 면이 서겠어요.”
한립은 진룡족 대장로와 그리 오래 대화를 나누지 않고 대청에서 물러났다. 번포자가 그를 배웅하러 따라 나왔다.
“처음 봤을 때부터 한 수사가 비범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잠깐 사이에 엄청난 명성을 날리게 될 줄은 예상치 못했습니다. 그 유명한 명충모를 참살하고 선계에서 강림한 진선까지 죽이다니요. 하아, 저는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어 부끄럽습니다.”
번포자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웃으며 떠들었다.
“다른 수사들의 도움이 있어서 가능했던 일들입니다. 다시 그들을 상대하라면 그때처럼 운이 따라줄지도 알 수 없고요. 그보다 도과대회 같은 명망 높은 모임에 초대해주신 은혜는 잊지 않고 기억해 두겠습니다.”
한립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하, 은혜는요 무슨! 한눈에 한 형이 마음에 들어 마음 가는 대로 한 겁니다.”
번포자는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손을 내저었다.
“어찌 되었든 이번에 진룡도에 와서 얻은 수확이 적지 않습니다. 도과를 얻지 못해도 헛걸음을 한 것은 아니겠어요.”
“이거 왜 이러십니까! 한 형께서 승산이 높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많은 강자들이 모여들었지만 진정으로 수사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실력자는 몇 안 되고요. 듣자니 전비아 그 녀석이 이전에 신세 진 일이 있다면서요? 이번에 그 녀석이 도과대회의 집사를 맡았습니다.”
번포자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큼, 번 형께서 저를 너무 띄워주십니다. 이렇게 많은 강자들이 모여 있는데 누가 도과를 얻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지요. 전 선자는 딱 두 번 만난 사이고요.”
한립은 헛기침을 하며 두루뭉술하게 답했다. 그러나 번포자는 전혀 못믿겠다는 얼굴을 했지만 더는 묻지 않았고, 바로 신이 나서 명충모와 진선 마량의 일로 화제를 돌렸다.
그다지 숨길 일이 아니라 한립은 질문에 성실히 대답해 주었고, 번포자는 거의 넋을 놓고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반 시진 후 번포자가 홀로 금색 선박으로 돌아왔을 때 한립은 종적을 감춘 후였다.
* * *
보름 뒤, 으슥한 동굴 안에서 한립이 하얀 옥간을 머리에 대고 무어라 중얼거렸다.
“봉월진군, 대승기에 이른지 오만 년, 염도계(閻都界) 출신, 오악현공(五岳玄功)에 능했고…….”
“천작자, 대승기에 이른지 삼만 년, 현미계(玄未界) 출신, 서른여섯 종류의 독공에 능해 아무 흔적도 없이 백 장 내의 인물을 죽일 수…….”
“반약산인, 대승기에 이른지 육만 년, 영라계(靈羅界) 출신…….”
수사들의 정보가 그의 뇌리 속을 스치고 있었다.
* * *
세 달 뒤, 광령도과대회가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진룡족의 장엄한 개최의식 후에 진룡족 독문의 금제로 제작된 거대 공간 안에서 도과를 두고 쟁투가 벌어졌다.
나무가 빼곡하게 자라난 밀림 위에서 한립은 저공비행을 하며 전진했다. 돌연 아래쪽 나무 몇 그루가 흐릿하게 수백 장 크기의 흉악한 거인으로 변해 주먹을 날렸다.
주먹 허상과 청록색 뇌화들이 튀어나와 하늘을 뒤덮었다.
“와라!”
한립이 냉소를 흘리며 허공을 딛고 빙글 굴렀다.
쿠쿠쿵!
수많은 푸른 검기들이 주먹 허상들과 뇌화를 소탕하고 금빛 속에서 삼두육비의 마신이 밀림으로 뛰어들었다.
“헉!”
삼두육비는 누군가의 숨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중간 머리의 입을 벌렸다. 작은 병이 든 암녹색 빛구슬이 쉭 하고 튀어 나갔다.
작은 병이 데구루루 구르며 갑자기 사라졌고, 밀림 위로 광풍이 불며 오색구름이 몰려들었다.
콰르릉!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하늘을 가릴 정도로 거대한 병이 구름 속에서 나타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암녹색 주술문자를 퍼트렸다.
주술문자들은 병의 입구를 빠져나와 푸른 기운 덩어리로 뭉쳐 폭발했다.
쿠콰콰콰쾅!
방대한 법칙의 힘이 일대를 휩쓸었다.
공기가 잘게 떨리고 수많은 나무들이 뽑혀 흙과 함께 솟구쳤다. 병을 중심으로 천여 장 내에 있던 물건은 전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주변 땅은 풀 한포기 살아남지 못하고 평지가 되어있었다. 아주 멀리서 허공이 왜곡되고 흐릿한 푸른 보호막이 드러났다.
“크아아악!”
누군가가 노호성을 터트리며 그 속에서 솟아올라 거산 크기의 흉흉한 조각상으로 변했다. 새하얀 몸에 자홍색 불꽃으로 이뤄진 날개 달린 조각상이 한립을 향해 쇄도했다.
“천상존자셨군요. 어쩐지 나무 속성 신통이 뛰어나다 했습니다.”
한립은 하얀 조각상을 보고 동공을 수축하며 고공의 거대 병을 가리키며 소리 없이 술법을 펼쳤다.
펑!
푸른빛을 반짝인 거대 병 입구에서 희미하게 무언가가 빠져나왔다. 하얀 조각상은 애달픈 비명을 지르며 느닷없이 암녹색 사슬에 묶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날개를 펄럭이고 전신에 하얀 수정 빛을 흘려보내도 사슬은 꼭 달라붙어 더욱 세게 조각상을 옥죄였다.
크악!
하얀 거대 조각상이 쩡! 하고 갈라지더니 안에서 하얀 가사를 걸친 중년 승려가 나타났다. 청수한 얼굴의 승려는 사슬이 수축하는 것을 보고 이를 악물고 핏빛 괴도를 날렸다.
채챙!
진한 피비린내가 풍기고 허공에 진한 핏빛의 꽃이 피어나 승려를 감쌌다. 하지만 암녹색 사슬은 핏빛 꽃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승려를 꽁꽁 묶었다.
휘우웅!
동시에 인근에 녹색 빛이 모여들어 돌풍으로 변한 다음 강력한 힘으로 핏빛 꽃을 조각냈다.
돌풍이 흩어진 자리에는 무수히 많은 녹색 칼날들이 나타나 승려를 베려 했다. 녹색 칼날 표면에는 암녹색 문양이 가득했고 희미하게 법칙의 기운을 내뿜었다.
승려가 의식으로 칼날들을 살피고 기함해 괴성을 질렀다.
“머, 멈추시오! 빈승이 패배를 인정하고 도패(道牌)를 내어드리리다.”
그가 서둘러 입을 벌려 은색 팻말을 내뿜었다. 한립은 주문을 멈추고 팻말을 살폈다.
“다른 것들은 어디 있습니까? 전부 포기하지 않는다면 제가 무정하게 행동해도 원망하지 마셔야 합니다.”
“아, 알겠습니다. 수사 같은 실력자를 만난 빈승이 운이 없는 것이겠지요. 아예 쟁투를 포기하겠습니다.”
한립의 말에 얼굴을 찡그린 승려는 쓴웃음을 지으며 은색 팻말을 두 개 더 뱉어냈다.
승려나 팻말을 모두 꺼내자 아래쪽에서 오색 빛의 진법이 나타나 그를 다른 곳으로 전송시켜 버렸다.
이제 허공에는 은색 팻말 세 개와 암녹색 사슬만 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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