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5화. 진룡도(眞龍島)의 사자
*
펑!
청록색 병에 암녹색 문양이 떠올라 뜻밖에도 노란 병을 튕겨냈다.
빙글빙글 돌며 한참을 튕겨나가던 노란 병에 괴이하게도 콩알 크기의 눈 두 개가 나타나 놀란 눈빛을 드러냈다.
노란 병은 다시 청록색 병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암녹색 문양에 가로막혀 접근할 수가 없었다.
형형하게 빛나는 노란 병의 두 눈에 초조한 기색이 어렸다.
머지않은 곳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한립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조품을 장천병 껍데기에 융합해 조종하는 선계 술법이 썩 잘 통하고 있었다. 마량에게 이 보물을 하사한 구원 도조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한립은 무표정하게 몸을 일으켜 직접 두 개의 병을 향해 다가갔다. 뒤쪽에서 따라온 원염 성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와 다른 두 시조가 돌아가며 고령도를 지킨 세월이 몇만 년인데, 섬 안에 이런 이상한 존재가 숨어 있는 줄은 눈치도 채지 못하고 있었다.
노란 병은 진정으로 화형을 하지는 못했어도 이미 영성이 충만했고 그 가치는 현천의 보물에 못지않았다.
한립이 어떻게 알고 고령도를 찾아왔는지, 또 다른 보물과 노란 병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그가 알 바 아니었지만 일단은 욕심이 생겨 급히 그를 뒤쫓아 온 것이다.
그런데 이때 인근에서 천둥소리가 울리고 해 도인이 순식간에 그의 앞을 막아서서 냉랭한 시선을 보냈다. 이에 원염은 가슴이 철렁해 한립과 해 도인의 무표정한 얼굴을 번갈아 보며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대승기에 이른 한립과 겨뤄본 적은 없지만 합체기 때에 보여준 실력으로 보아 지금은 더욱 만만치 않아졌을 것이다. 하물며 실력이 대단한 위선뢰까지 옆에서 호시탐탐 그를 감시하고 있는데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원염은 오만한 성격이었지만 그가 확실히 한립을 죽이고 보물을 차지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는 한 괜한 일을 벌여 원수를 만들 정도로 지능이 낮지는 않았다.
그는 이해관계를 따져보고는 욕심을 억누르고 서서 한립의 거동을 관찰했다.
그러나 그는 눈앞에 있는 보물이 선계 도조도 중시하는 보물 중의 보물이라는 것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그걸 알았다면 만분의 1의 확률이라도 도전을 해봤겠지만 그것이 무었인지 모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한립은 조심스럽게 두 개의 병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노란 병은 실체가 없는 병령에 불과했지만 그의 공격을 손쉽게 깨트렸다.
강력한 영물로 생각하고 신중하게 상대함이 옳았다. 노란 병도 연달아 열댓 번의 시도가 실패하자 움직임을 멈추고 시선을 한립에게 옮겼다.
의혹과 경계심이 가득한 시선이었지만 한립은 남몰래 한숨을 돌렸다. 그를 보자마자 공격을 하거나 달아나지 않으면 처리하기 훨씬 수월했다.
팟.
그의 소매 속에서 금색 부적 한 장이 소리 없이 터져 짙은 푸른 안개로 변했다.
푸른 안개는 금방 퍼져나가 한립과 두 병을 가려주었다.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원염이 의식으로 내부를 엿보려 해도 불가능했다.
마족 시조인 원염은 미미하게 표정이 변해 무턱대고 나서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여겼다.
다른 건 몰라도 푸른 운해가 그의 의식을 차단하는 효과는 기가 막혔다. 시간이 흘러도 푸른 운해 속에서는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원염이 어찌 안심하고 한립을 두고 떠나겠는가! 그는 다시 삼두 흑교를 불러 그 위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기다렸다.
그 기다림이 7일 동안이나 이어졌다.
원염이 기다리다 지쳐 엉덩이를 들썩일 무렵 푸른 운해 속에서 기다란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요동치는 안개 속에서 빠져나온 푸른 둔광이 원염 앞에 멈추었다.
한립이 기운 넘치는 얼굴로 원염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까지 여기 계셨습니까? 오래 기다리셨겠습니다.”
“마원해에 위치한 섬에 어찌 이종족 수사를 홀로 두겠습니까!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으면 어서 떠나시지요.”
삼두 흑교 위에서 일어난 원염이 불퉁거리며 말했다.
“안 그래도 떠나려던 참이었습니다. 하하하,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한립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인사를 하고 해 도인과 같이 날아갔다.
멀어지는 두 둔광을 보는 원염의 표정이 구겨졌다.
* * *
검은 거대 선박의 선실 안.
한립은 비취색 기운을 머금은 작은 병을 들고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을 거둔 그는 조용히 명상에 잠겼다.
운해 속에 들어가 있던 7일 동안 그가 어떻게 병령을 굴복시켰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었다. 인족으로 돌아가 선계로 비승해 선계의 지존(至尊)이 되어서도 다른 이에게 언급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그의 벗들과 문하 제자들이 정답이 아닌 갖가지 추측을 내놓았을 뿐이었다.
* * *
몇 달 후.
마계의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협곡 위에 검은 선박이 나타났다. 그 위에는 한립과 해 도인이 나란히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곳에서 계면을 뚫고 나가면 진룡도에서 가장 가까운 마가계(摩柯界)에 이를 수 있단 것인가. 번포자가 그곳에 이르면 사자가 찾아와 안내해 줄 거란 말 밖에는 하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한립이 쓴웃음을 지으며 한 손으로 수결을 맺은 채 선박을 가리켰다. 그러자 묵령성주가 작게 줄어들어 그의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팔뚝의 푸른 검 문양이 번득인 후 그의 손에 암녹색 목검이 들렸다.
쿠콰콰쾅!
목검이 암녹색 검빛을 뿜고 깊은 협곡에 경천동지할 폭음이 울렸다. 격렬한 파동이 나타나 하얀 공간균열로 바뀌었다.
“가자.”
거대 선박이 웅웅 울며 작은 공처럼 수축해 공간균열 속으로 사라졌다. 공간균열마저 서서히 닫혀 협곡이 원래 모습을 되찾았을 때, 희미한 파동이 일고 금빛 거대 연꽃이 떠올랐다.
그 안에는 금빛 얼굴의 사내와 하얀 장포를 걸친 여인이 서있었다.
“이렇게 가버리다니, 원염 말대로 정말 그저 보물을 찾기 위해 왔었나 봅니다. 그런데 공간균열이 영계로 통해있는 것 같지 않고 마가계로 향하던데요? 우리 성계보다 훨씬 강자들이 많은 계면으로 가서 무엇을 하려는 겐지.”
사내는 공간 균열이 사라진 곳을 내려다보며 탁한 음성으로 말했다. 중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힘이 없어보였다.
“열반 수사, 무슨 걱정을 그리 하십니까. 저 자가 성계에만 머물지 않는다면 다른 계면에 가서 무엇을 하든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요. 이대로 가버리지 않고 성계에 머물렀다면 어디 불안해서 안심하고 수련에 매진할 수 있었겠습니까.”
백의 여인, 보화가 담담히 답했다. 금색 장포를 걸친 사내는 마족 삼대시조 중 가장 신비한 열반 시조였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염의 소식을 듣자마자 이리 몰래 따라 붙은 것 아닙니까. 그나저나 영계에서 입수한 정보가 사실인지 모르겠습니다. 대승기에 이른지 얼마 되지도 않은 자가 진선을 격살하다니요. 아무리 계면의 압력을 받아 수행이 떨어졌다고 해도 믿기지 않습니다.”
“아마 사실일 겁니다. 듣기로는 영계의 다른 강자들이 포위해 공격을 퍼부어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한 수사에게 당했다더군요.”
“그래도 대단한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우리 같은 존재만 해도 목숨을 부지할 필살기가 부지기수 인데 진선이야 감히 상상할 수도 없지요. 그런 진선을 죽이고 진혼단도 얻었다던데……. 허허, 우리가 성족의 몸이라 단약이 쓸모가 없지 않았으면 당장 열일 제쳐두고 영계로 달려갈 뻔했습니다.”
열반은 혀를 쯧쯧 찼다.
“진혼단이 아니라 진마단(眞魔丹)이었으면 확실히 쉽게 포기하지 않았겠지요. 말이 나와 말인데 열반 수사께서 비승의 겁이 얼마 남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비승을 해 상계에 이를 가능성이 얼마나 된다고 보십니까?”
보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휴, 명충모 일로 중상을 입지만 않았어도 열반성체를 대성한 덕에 1, 2할은되었을 것인데 지금은 진원을 크게 상해 실낱같은 희망에 기대고 있습니다.”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지 마세요. 열반성체는 여러 계면에서도 손에 꼽히는 연체술입니다. 천겁을 이겨내고 비승을 할지 말지는 아직 모른다는 것이지요. 아, 한립 수사도 조금 다르기는 해도 열반성체를 익혔더군요.”
“열반성체는 본래 성족의 가장 기초적인 마공에서 출발했으니 다른 종족이 널리 퍼진 마공을 통해 열반성체 비슷한 것을 만들어냈어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허나 제가 놀란 것은 열반성체를 대성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입니다. 저도 예전에 여러 공법을 수련하다 기연을 얻지 않았다면 오늘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에요. 그런데 이종족이 열반성체를 극성으로 익혔다는 것이 기이하지 않습니까.”
보화의 말에 열반은 쓴웃음을 지으며 설명했다.
“저도 예전에 그 자가 열반성체를 펼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어찌 보아도 대단한 운을 타고난 것은 틀림없더군요. 자, 인족 수사도 떠났고 우리도 돌아가 수련에 매진할까요? 하루 빨리 진마계로 비승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좋습니다, 바깥의 일은 전부 원염에게 맡기지요. 허허, 솔직히 원염과 수사 중 저는 수사의 전망이 더 밝다고 봅니다. 수사께서는 큰 고난을 겪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수행이 크게 늘었고 영역이라는 상계의 강력한 신통까지 지니게 되었으니까요.”
“하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저는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열반의 말에 보화가 살짝 웃어주고 금색 연꽃을 살포시 밟았다. 그러자 부드럽게 열반을 밖으로 밀어낸 연꽃이 그녀를 품고 빙글빙글 돌아 금빛으로 변해 날아갔다.
열반은 그것을 보고 고개를 젓다가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 * *
한 달 후, 붉게 물든 단풍나무가 자라난 언덕길.
“마족 대승기 수사 두 명이 따라 붙은 걸 진작 알고 계셨지요?”
해 도인이 단풍나무 아래 가부좌를 튼 한립을 향해 물었다.
“알고 있었습니다. 허나 그들이 먼저 길을 막거나 공격을 해오지 않아 놔두었을 따름입니다.”
한립은 이상하다는 듯 답했다. 위선뢰가 먼저 말을 거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인 해 도인이 멍하니 입을 다물었다. 한립이 턱을 긁적이다 눈을 빛냈다.
“제 기억이 맞다면 마량은 분명 수사를 진정한 선괴뢰라 칭했습니다, 위선뢰가 아니라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제게 숨기는 것이 있으신 듯합니다.”
“그 자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저도 모릅니다. 숨기는 것도 없고요.”
해 도인은 무표정하게 답했다.
“믿기 어려운 말씀을 하시는 군요.”
“저는 누군가에 의해 기억 일부가 봉인된 상태입니다. 이전에 말씀드린 재료들을 수사가 모아와 금제를 풀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원하는 정보를 드릴 수 없을 겁니다.”
“좋습니다, 줄곧 저를 도와주셨으니 그 말을 믿지요. 제가 재료를 모아오는 대로 사실대로 털어놔 주세요.”
한립은 빙긋 미소 지었고 해 도인은 고개만 끄덕였다.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보던 한립이 손바닥을 뒤집어 은빛의 비늘을 불러냈다.
그 위로 몇 개의 문자가 떠올랐다.
“우리가 이곳 계면에 도착하자마자 진룡도 사자가 이 비늘을 이용해 한 달 내로 맞이하러 오겠다는 내용을 전달했지요. 한 번에 말하면 될 것을 굳이 몇 번이나 힘을 쓰고 능력이 남아도는 모양입니다. 그래도 얼추 한 달이 다 되어가는 듯합니다.”
“모든 것이 다 도과대회를 성황리에 마치기 위함입니다. 우리 진룡족은 거의 족인 절반을 파견해 여러 계면의 귀빈강자들을 모시기 위해 나섰고요.”
한립이 몇 마디를 중얼거리자 갑자기 듣기 좋은 목소리가 위쪽에서 들려왔다.
파동이 일고 비취색 오조 진룡이 나타나 새하얀 피부의 머리에 짧은 뿔이 난 녹의 여인으로 변신했다.
“전 선자, 저를 데리러 온 사자가 수사셨습니까?”
한립은 녹의 여인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그와 거래를 했던 전비아였다.
“왜요, 제가 와서 실망하셨나요?”
전비아는 허공에서 싱긋 웃음 지었다.
“하하, 그럴 리가요. 도과대회의 집사 중 한 분이라 들었지만 이렇게 직접 마중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한립이 헛기침을 하며 공수를 해보였다.
“듣기 좋게 직함만 집사이지 하는 일은 시종과 다름이 없답니다. 진룡족은 원래 족인이 몇 되지 않아 귀찮은 일도 전부 집사들이 해야 하거든요.”
전비아는 입을 비죽이며 한립 옆으로 이동해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전 선자께서는 제가 본인이 아닐까 의심스러우십니까?”
상대의 눈빛에 한립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게 아니라 겉보기에는 그리 강해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강림 진선을 죽였는지 신기해서요. 미리 충고하자면 수사가 진혼단을 지니고 있다는 소문이 벌써 쫙 퍼졌습니다. 적잖은 강자들이 진혼단을 노릴지 모른다고요.”
전비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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