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3화. 영계의 1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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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지나지 않아 한립이 홀로 8명의 최상급 수사들을 물러나게 했다는 이야기가 이대륙 수도자들의 입을 통해 전해져 수많은 영계 종족들을 놀라게 했다.
게다가 한립이 그들에게 진혼단 한 알을 내주었다는 소리에 횡재를 노리던 고계 수사들도 마음을 접어야 했다.
세월이 흘러 이종족 수련자들은 한립을 풍원대륙 제1의 강자라 칭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한립을 추앙하는 일부 무리는 그를 영계 제1의 수사라 찬사하기도 했다.
* * *
2년 후, 청원궁 심처의 밀실 안.
한립은 구석에 앉아 손가락을 튕기며 오색찬란한 법결들을 쏘아 보내고 있었다.
밀실 중앙에는 커다란 금색 진법이 펼쳐져 있었고 그 안에 크기가 다른 두 개의 녹색 병이 떠있었다.
위쪽에 떠있는 작은 병은 뒤집어져 깜빡깜빡 거리는 신비로운 빛을 냈고, 아래쪽 진법 중심에 놓인 커다란 병은 진법에서 방출되는 오색 빛의 실에 휩싸여 빛을 고공의 작은 병으로 올려보내고 있었다.
큰 병은 위쪽의 작은 병으로 빛을 올려보낼 때마다 크기가 줄어들고 색도 어둑해졌다.
반나절이 지나자 아래쪽 병의 크기가 위쪽의 작은 병과 같아지고 색깔이 거의 투명해졌을 때 펑! 하고 빛이 치솟아 작은 병으로 흡수되었다.
“가라.”
구석에 앉아 술법을 펼치던 한립은 희색을 드러내고 손을 들어 진법을 가리켰다. 이에 낮게 진동하던 진법이 갑자기 멈추고 모든 기운을 거두어 허공에 뜬 작은 병 속으로 스며들었다.
쉭!
작은 병을 끌어온 한립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번에 얻은 옥간에 적힌 육원선술(融元仙術)이 통했어! 모조품을 장천병에 녹여낼 수 있다니 공들인 보람이 있구나. 이렇게 되면 영약이나 키우던 이전과 달리 옥간에 적힌 방법을 이용해 보물을 직접 부릴 수 있게 되겠지.”
그는 보물을 넣어두고 생각에 잠겼다.
“대단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선계의 도조와 같은 존재가 보물로 여길 정도의 물건이었다니……. 어쩌다 이런 물건이 인계로 흘러들었고, 병령이라는 것은 또 어디에 있는 것일까? 설마 병령도 인계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가 지금의 경지에 이른 것은 이 보물의 덕이 컸는데 병령까지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었다.
한립은 마음을 편히 갖기로 했다.
지금은 얌전히 폐관 수련을 하며 다른 신통들을 철저하게 익히고 원합오극산 등 중요한 보물의 제련을 마쳐 비승의 겁에 대비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허나 그 전에 처리해 둘 일이 몇 가지 있는데…….”
그는 파손된 옥패를 꺼내 만지작거리다 영족이라는 두 글자를 내뱉었다. 그는 무애해로 돌아온 그날 해 도인에게 본명패 주인이 영계내에 있는지 알아보는 술법을 펼치도록 부탁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파손된 본명패는 주인이 이곳 계면에 있고 대략 영족 영역 안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놀란 한립의 뇌리에 영왕의 모습이 스쳤다.
본명패 주인의 신분은 알 수 없었지만 십중팔구 신비한 영왕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는 바로 조사를 해보고 싶었지만 명살의 땅에서 벌어진 전투의 여파로 대승기 수사들이 몰려드는 탓에 한동안 청원궁을 떠날 수 없었다.
“지난 2년간 더 이상 나를 찾아오는 이종족 대승기 수사는 없었다. 이제 움직일 때로군.”
한립은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 * *
몇 달 후, 영족 성지 복령산 상공.
강렬한 파동과 함께 먹처럼 새까만 거대 선박이 소리 소문도 없이 나타났다. 뱃머리에 푸른 장포를 입은 청년이 서서 거대 선박이 향하는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웅웅웅!
복령산 금제들이 겹겹이 나타나 요동치고 수많은 둔광들이 날아올랐으나 청년은 개의치 않고 담담히 입을 열었다.
“영왕 수사, 한 모가 뵙기를 원하니 나와 보시지요.”
그의 담담한 목소리가 복령산을 쩌렁쩌렁 울렸고 그 안에 함유된 막대한 힘에 영족 병사들은 힘이 빠져 추락했다.
아직 날아오르지 않은 영족 병사들도 영력을 전혀 끌어올릴 수 없어 어안이 벙벙해 서로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에 바로 복령산에서 노쇠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한 수사께서 친히 찾아와 주시고 노부가 멀리 나가 맞이하지 못해 실례를 범했습니다. 어서 들어오시지요.”
노인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복령산 금제가 갈라져 통로를 만들어 냈다. 이에 한립은 미소를 지으며 신형을 날려 푸른 빛줄기로 변했다.
복령산 정상의 대전 앞에 백포 노인이 서서 고공을 올려다보았다.
푸른빛이 번득이고 한립이 귀신처럼 노인 앞에 나타났다. 노인은 미세하게 동공을 수축했지만 겉으로는 미소를 머금고 공수했다.
“영계에 위명이 자자한 수사께서 어인 일로 노부의 거처를 찾아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영왕 형, 그런 말씀 마십시오. 운이 좋아 허명을 얻었지만 그게 어디 좋은 일이겠습니까? 오늘은 여쭐 것이 있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노부에게요?”
“혹시 이 물건의 주인을 아십니까?”
미간을 좁히는 영왕을 보고 한립은 곧바로 무언가를 던져주었다. 영왕은 물건을 끌어와 그것이 파손된 본명패인 것을 보고는 안색이 달라졌다.
“이걸 그 죽은 선인이 갖고 있었단 말입니까?”
눈빛이 흔들리던 노인은 한참만에야 씁쓸하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보아하니 제가 제대로 찾아왔군요.”
“하아, 일단 저를 따라 들어가시죠.”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자 백포 노인이 길게 한숨을 쉬고는 본명패를 돌려주었다. 무슨 결심을 한 것인지 노인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려 대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일다경쯤 걸어가자 그들은 신비한 지하 공간 속에 다다랐다. 수정 빙산 앞에 도착한 한립은 그곳에 봉인된 청년을 보고 놀란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팟!
옆에선 백포 노인이 수결을 맺어 법결을 던져 넣었고 빙산 안에서 무수히 많은 하얀 빛 알갱이들이 흘러나와 백포 노인과 똑같이 생긴 하얀 소인으로 변했다. 소인은 한립을 훑고 쓴웃음을 지었다.
“수사께서 찾아올 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영계를 시끄럽게 만들었던 강림 진선이 정말 제가 제압해둔 선인을 찾아온 것이었군요. 봉인된 선인이 영계에서 오랜 세월 숨어 지낸 만큼 엄청난 비밀을 지니고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선계에서 직접 사람을 보내 찾다니요.”
“선인을 다 봉인해 두시고, 떠돌던 소문이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노부의 내력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술법을 거둔 다음 천천히 이야기하시지요.”
소인은 하얀빛으로 변해 백포 노인의 몸으로 뛰어들어 사라졌다. 평범한 대승기 수사의 기운을 풍기던 노인이 몸을 꼿꼿이 세우고 강대한 힘을 드러냈다.
한립이 그간 봐왔던 어떤 영계의 강자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기운이었다.이게 진정한 영왕의 모습일 것이다.
기운을 거둔 영왕은 진지하게 한립을 쳐다보았다.
“한 형께서 본명패를 지니고 이곳에 온 연유를 알고 싶습니다.”
“이 자와 제가 죽인 선인이 어떤 관계이든 후환을 남겨둘 수 없어 찾아왔습니다.”
“봉인된 선인을 죽이려는 생각이시면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 간단하게 죽일 수 있었으면 노부가 뭐 하러 상대를 봉인해 두고 본명 진화로 고생스럽게 진선의 육체를 녹이고 있었겠습니까.”
“그게 무슨 뜻이십니까? 다른 강림 선인의 육체를 제거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던데요.”
한립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것과는 다릅니다. 수사께서 참살한 선인은 영계 법칙의 힘에 제약을 받고 있어 법력은 물론 육체도 시시각각 일계의 힘을 이겨내느라 제힘을 발휘할 수 없었지요. 허나 제가 봉인해 둔 진선은 이미 영계에서 진선의 육체를 새것으로 갈고 선계의 비술을 이용해 법력과 원신을 육체에 묶어 두었습니다. 그 육체의 강도는 선계의 평범한 진선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고, 아니 오히려 더 뛰어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현천의 보물로도 상처를 내기 어렵다는뜻입니다.”
백포 노인은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놀랍게도 그런 일이 가능했군요. 그래도 한번 시도는 해보고 싶습니다. 아, 그 전에 추혼술도 써보려 하는데 영왕 형은 이견이 있으십니까?”
한립이 빙산 안의 아름다운 청년을 아래위로 훑다 가볍게 웃음 지었다. 영왕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수사께서 저자를 죽일 능력이 된다면 저도 큰 골칫덩이를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추혼술은 수사의 의식이 상대보다 강대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을 텐데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시도를 해보고 싶습니다.”
한립의 말에 이번에는 영왕의 안색도 크게 달라졌다.
“좋습니다, 그리 원하신다니 저도 막지 않지요. 허나 이 선인을 제압해 지금까지 봉인해 둔 저를 설득하셔야 할 겁니다.”
“어찌 말입니까?”
“바깥에서 공공연히 한 형께서 영계 제일의 대승기 수사란 이야기가 돌더군요. 저도 꽤 오랜 세월 살아 실력에 자신이 있어서요. 제 공격을 피하지 않고 세 번만 막아낸다면 수사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해드리겠습니다.”
“하하, 아주 흡족한 제안이십니다. 수도계가 원래 약자는 강자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제가 겨우 수사의 공격 두세 번도 막아내지 못한다면 당연히 조용히 돌아가야지요. 그리고 다시는 성가시게 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야겠습니다. 괜히 봉인에 영향을 미쳐 좋을 것은 없으니까요.”
“수사의 뜻대로 하지요.”
영왕과 한립은 태연하게 몇 마디를 주고받고 어딘가로 날아갔다.
일다경 후, 봉령산 영족 병사들은 두 번의 굉음을 들었다. 산 전체가 흔들릴 만큼 엄청난 진동이 뒤따랐고, 영족인들은 깜짝 놀라 서로 눈치를 살폈다.
그들은 영왕과 한립이 이 굉음과 관련이 있을 거라 추측했지만 안에서 도무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 * *
복령산 산속의 대청 안.
쨍강!
대청을 뒤덮고 있던 빛의 장막이 깨져 빛 알갱이로 흩날렸다. 대청 양쪽에는 한립과 노인이 대치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표정은 확연히 달랐다.
담담한 얼굴의 한립은 뒷짐을 쥐고 서있었고, 맞은편의 영왕은 굳은 얼굴로 등 뒤에 요목(妖目)이 가득 달린 은색 불상이 떠 있었고 주위에는 수정 단도들이 날아다녔다.
그리고 중앙에는 새까만 칼날이 떠 있었다. 무언가에 예리하게 베인 것처럼 절반만 남은 칼날이!
“두 번째 공격을 하셨습니다. 마지막 공격도 하시지요.”
한립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됐습니다. 한 수사의 실력이 소문보다 더욱 뛰어나시니 괜히 더 공격을 해봐야 스스로 굴욕을 자초하는 꼴이지요.”
영왕이 쓴웃음을 지으며 얼굴을 풀었다. 그러자 중앙의 잘려나간 검은 칼날과 노인 주위를 돌던 단도들, 등 뒤의 은색 불상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하하, 겸손하신 말씀입니다. 수사께서 가장 강력한 신통은 보여주지 않으셨다는 것을 잘 압니다.”
“저도 쓸 만한 신통들을 아껴두기는 했지만 수사도 진정한 실력을 보이지 않은 것은 매한가지 아닙니까? 어찌 되었든 이제 노부도 수사의 실력을 인정하겠습니다. 봉인된 진선은 알아서 처리하시지요. 유일한 조건은 노부가 보는 앞에서 진선을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심할 수 없을 것 같아서요.”
“문제없습니다. 제가 새로 제련한 보물이 하나 있는데 이번에 잘 써먹을 수 있을 듯싶군요.”
한립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영왕은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으나 자신의 조건을 수락한 것에 만족해하며 함께 대청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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