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422화 (1,179/2,000)

1422화. 본명패(本命牌)

*

이전보다 훨씬 기운이 약해진 명존은 난색을 표하며 한립과 그 옆의 두 존재를 올려다보았다.

“아아, 명존 수사셨군요. 아까 목숨을 잃은 것은 수사의 화신이었나 봅니다.”

한립은 명존을 보고 놀라는 기색 없이 물었다.

“화신? 화신으로 다른 대승기 수사들을 숨길 수는 없습니다. 이전의 명존도, 지금의 명존도 모두 저입니다. 그런데 제가 공들여 세운 계획으로 한 수사께서 아주 득을 보셨습니다.”

시시각각 안색이 달라지던 명존이 평정을 회복하고 말했다.

천외천에 숨어 진법을 폭파시킨 그는 반서를 당해 중상을 입어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러 내려왔다가 한립이 진선을 참살하는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그가 얼마나 놀랐을지는 하늘만이 알 것이다.

“고명한 분혼술(分魂述)을 사용하셔서 저도 이제까지 이상한 점을 찾아내지 못하였습니다. 허나 진법 폭발로 진선은 죽지 않았고 그 안에 있던 다른 수사들만 죽어나가고 저도 화를 입을 뻔했습니다. 무언가 해명을 하셔야 할 듯합니다.”

명존을 바라보는 한립의 눈빛이 서늘했다.

“무슨 말이 듣고 싶으신 겁니까? 말씀만 하시면 제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무엇이든 들어드리겠습니다. 제가 이런 무리한 계획을 세운 것은 전부 영계를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진법을 폭파시켜 진선의 힘을 약화시켰기에 한 수사도 그를 죽일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명존은 쓴웃음을 지으며 남몰래 체내의 법력을 끌어올리고 소매 속으로 여러 보물들을 쥐었다.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명 형. 제가 불가능한 요구를 할 사람은 아니지요. 그저 조용히 머리만 놓고 가시면 됩니다. 수사가 저를 진법의 제물로 바치려 했으니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당신을 죽이고 당신의 대단한 업적은 영계 모두가 알 수 있도록 공표해드리지요.”

한립의 입가에 조소가 어려 있었다.

이에 대번에 안색이 달라진 명존은 곧장 두 손을 펼쳐 열댓 개의 핏빛 구슬을 쏘아 보내고 발을 굴러 커다란 풍뇌(風雷) 수레바퀴를 불러냈다.

동시에 그의 등 뒤로 눈처럼 새하얀 깃털 날개 한 쌍이 자라났다. 그는 뇌전빛을 번득이며 세차게 날개를 펄럭여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명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는 중이었다.

이에 한립이 코웃음을 치며 무언가를 하려는데 곁의 마광이 돌연 한발 앞으로 나서 손에서 검은 광풍을 뿜었다. 열댓 개의 핏빛 구슬들은 광풍에 휩쓸려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구슬이 폭발해 흘러나온 핏빛 화염은 바람 속에서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한 형, 저놈은 저와 화 수사에게 맡겨주시지요. 이제 막 천마계약도 맺었겠다, 우리의 능력을 보여드릴 때가 아닙니까?”

마광은 손을 내리며 히죽거렸다.

“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자도 상당한 실력자이니 조심하시고요.”

한립은 적홍색 소인과 마광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도 많으십니다. 저 녀석을 죽이는 것은 저 혼자로도 충분합니다!”

화수자가 큰 소리로 웃고는 빙글 돌아 다시 적홍색 괴교로 돌아가 추격을 시작했다. 검은 피부 청년도 낮게 키득거리다 검은 실처럼 변해 쏘아져 나갔다.

순식간에 명존과 두 사람의 모습이 하늘 끝으로 사라졌다. 한립은 잠시 고민하다 소매를 털어 금색 딱정벌레를 불러냈다.

“금동, 네가 몰래 따라가 보거라.”

그의 명에 금색 영충이 고개를 끄덕이고 흐릿하게 허상으로 변해 날아갔다.

그제야 먼 하늘에서 눈길을 돌린 한립은 금빛 저물탁을 꺼내 의식으로 내용물을 살폈다.

그는 암녹색 작은 병과 은백색 호리병박 그리고 망가진 옥패를 확인하자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은색 호리병박을 쥐고 직접 뚜껑을 열자 안에서 금빛으로 반짝이는 단약이 나왔다.

“진혼단! 진선이 삼킨 것 외에 여분이 있었어. 아까 양록이 지닌 것도 이자에게 받은 것이겠지.”

한립의 눈빛이 뜨거웠다. 그는 단약과 호리병박을 치우고 암녹색 작은 병을 만지작거리다 핏빛 금이 가있는 옥패로 시선을 돌렸다.

“본명패? 저 진선의 것이라면 진작 깨져버렸을 텐데. 대체 누구 것이기에 본명패의 주인이 하계에 있어 찾으러 온 것인가?”

옥패를 살피던 한립이 미간을 찌푸렸다.

“한 수사, 본명패의 주인이 하계에 있는지 알고 싶다면 간단합니다. 옥패에 비술을 펼치면 본명패의 주인이 있는지 알려줄 겁니다.”

옆에 있던 해 도인이 말을 걸어왔다.

그 말에 한립은 마음이 움직여 옥패를 일단 넣어 두었다. 금색 저물탁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용도를 모를 법기 여덟 개와 금은색 부적들 그리고 대량의 희미한 금색 수정석들이 함께 들어 있었다. 하지만 아직 동부에 돌아간 것도 아니고 여기서 그것들을 일일이 꺼내 다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쉭!

그가 한식경 쯤 기다렸을 때 인근 허공에 파동이 일고 서금충왕이 변한 금빛이 튀어나와 그의 소매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눈을 반짝인 한립은 전음으로 서금충왕과 몇 마디를 나누고는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 이때 하늘 끝에서 검은 선과 붉은 빛덩이가 날아들었다.

빛이 가시고 나타난 것은 마광과 화수자였다.

“빈손으로 돌아오시지는 않았겠지요?”

한립은 옅은 미소를 띠고 물었다.

“하하, 물론 아닙니다. 제법 솜씨가 있는 녀석이기는 했지만 어찌 우리 둘을 떨치고 달아나겠습니까.”

화수자가 웃음을 지으며 한립에게 두 가지 물건을 던져주었다. 한립은 그것이 바싹 마른 원영 껍데기와 검은 저물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원영은 제가 정기를 쏙 빨아들여 윤회에 들어 환생을 할 자격도 잃었습니다. 나머지 물건들은 손대지 않고 고스란히 들고 왔고요.”

마광은 비굴한 기색 없이 말했다.

“두 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이곳은 오래 머물 곳이 아니니 그만 떠나시죠.”

한립은 바싹 마른 원영의 껍데기가 명존과 똑같이 생겼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물탁은 챙기고 껍데기만 남은 명존의 원영은 붉은 화염을 일으켜 순식간에 재로 만들어버렸다.

마광과 화수자가 그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자 한립은 평범한 검은 비차를 꺼내 그들과 같이 올라섰고, 해 도인은 수결을 맺어 은색 뇌전으로 변해 한립의 품속으로 사라졌다.

웅!

비차는 푸른 빛덩이로 변해 쏜살같이 하늘을 갈랐다.

장장 사흘이 지나서야 분지로 변한 명살의 땅에 상맹의 고계 수사들과 다른 강자들이 보낸 제자들이 머뭇거리며 들어섰다.

다들 긴장한 기색이 가득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땅이 꺼지기라도 한 듯 완전히 지형이 달라진 명살의 땅에는 살아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명존은 진선을 속이기 위해 진법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인원과 대승기 강자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남겨두지 않았었다.

이에 어떻게 됐는지 알아보기 위해 온 이들은 이런 광경을 앞에 두고 급히 조사를 한 뒤 흩어져 각자의 세력으로 돌아갔다.

다시 몇 달이 지나자 각 종족에서 대승기 강자들의 본명패나 본명 보물이 깨져버렸다는 소식이 퍼졌다.

전부 명살의 땅에서 전투를 벌이다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이 소식은 풍원대륙을 요동치게 만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다른 대륙으로도 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강림 진선도 그곳에 뼈를 묻었는지 아니면 유유히 빠져나갔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에 영계의 각 종족들은 간담이 서늘해져 선인이 어디선가 뛰쳐나와 대학살을 벌일까 공포에 떨었다.

그러나 1년이 지나자 강림 선인이 이미 양의멸진대진의 자폭에 당해 죽었다는 소식이 인족에서 퍼져나갔다.

이 소식에는 상맹의 총집사인 명존이 고의로 각 종족의 강자들을 제물로 바쳐 진법의 위력을 증폭해 진선과 동귀어진하게 만들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절반쯤 진실이기도 한 그 소식에 한동안 영계가 들썩였다.

거대 세력들이 앞 다투어 조사한 결과 명살의 땅에서 살아남은 인족 강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에 적잖은 종족의 대승기 수사들이 급한 수련도 제쳐두고 인족으로 달려갔다.

물론 명목상으로는 명살의 땅에서 일어난 전투의 자초지종을 듣기 위해서였지만 사실은 진선이 남긴 보물을 노린 것이었다.

다른 강자들이 전부 죽고 한립만 혼자 무사히 돌아왔으니 선인의 보물이 누구의 수중에 있을지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풍원대륙은 그나마 각 종족의 내로라하는 강자들이 죽어 선인의 물건에 욕심이 나도 어쩔 수 없었지만 다른 두 대륙의 대승기 강자들은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거의 반년간 적잖은 낯선 대승기 수사들이 인족을 찾아와 한립이 머무는 무애해로 향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일은 그런 대승기 강자들이 무애해에 진입하자마자 서금충왕과 해 도인 등이 나타나 그들을 쫓아 보냈다는 것이다.

인족을 주시하던 이종족들은 크게 놀랐다.

순식간에 스무 명이 넘는 이종족 대승기 수사들이 무애해에서 풀이 죽어 물러났고 더는 다른 대승기 수사들도 무턱대로 인족을 찾아가지 않았다.

이제 인족을 찾아드는 이들은 전부 엄청난 실력을 지닌 대승기 강자들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평범한 대승기 수사보다 강하다고는 해도 해 도인과 서금충왕의 협공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 한립은 반년 동안 전혀 얼굴을 내보이지 않았다. 이에 다수의 종족들은 떨리는 마음으로 물러났지만 다른 대륙의 최상급 수사들은 오히려 투지를 다지며 다음 기회를 노렸다.

어느 날, 혈천대륙과 뇌명대륙의 최상급 강자들 8명이 모여 한꺼번에 무애해로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해 도인과 서금충왕도 막아서지 않아 그들은 바로 원합도에 이를 수 있었다.

섬 중앙의 천원궁에서 72번의 청아한 종소리가 울리고 엄청난 기운이 치솟았다. 청원궁 대문에서 한립이 마광, 화수자, 해 도인, 서금충왕을 데리고 그들을 맞이하러 나온 것이다.

8명의 이종족 수사들은 한립 일행이 발산하는 기운을 감지하고 자기도 모르게 흉흉한 기세를 절반은 거두었다. 겁을 먹은 것은 아니었으나 한립의 세력이 강해 함부로 할 수 없겠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립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나누고 그들을 청원궁 안으로 청했다.

궁의 문이 굳게 닫히고 푸른 보호막까지 생기 후 한립과 대승기 수사들은 꼬박 3일간 그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청원궁에서는 수시로 굉음이 들려오고 음산한 파동이 퍼져 푸른 보호막이 불안하게 반짝거렸다.

3일이 지나고 푸른 보호막이 사라지자 여덟 명의 이종족 최상급 수사들은 난색을 표하며 걸어 나왔다. 표정은 물론 다들 기운이 쏙 빠져 있었다.

그러나 무리를 이끌고 담담히 웃으며 배웅 나온 한립은 3일 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저는 분명 진혼단 할 알을 내어 드렸으니 어찌 나눠가지실 지는 알아서 결정하시길 바랍니다. 앞으로 다시 한 번 이종족이 저와 인족을 성가시게 한다면, 제가 어떻게 하든 무정하다 나무라지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우리도 체면이 있지 어찌 약속한 일을 물리겠습니까. 최대한 다른 이들이 수사를 귀찮게 하지 않도록 단단히 이르겠습니다.”

이종족 수사 하나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이종족 수사들은 바로 둔광을 일으켜 날아올랐고 금방 원합도를 벗어났다.

그들이 하늘 끝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 한립은 몸을 돌려 금색 소인의 모습을 한 서금충왕과 해 도인에게 말했다.

“앞으로 누구든 허락 없이 무애해를 침입하면 봐줄 것 없습니다. 붙잡아 와도 좋고 그 자리에서 죽여도 무방합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마광 형과 화수자 수사도 한동안 순찰을 도와주십시오.”

“하하, 그 정도야 우리에게 믿고 맡겨주셔도 됩니다. 단 한 명도 우리를 지나 무애해에 침입할 수 없을 겁니다.”

마광은 미소를 지었고, 화수자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날 이후 과연 약속대로 대승기 수사들이 찾아오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주변을 배회하던 이들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