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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421화 (1,178/2,000)

1421화. 천마계약

*

다섯 개의 병장기가 웅! 하고 날카롭게 울고 깨지자 범성마신 복부에 새까만 구멍이 뚫려 검은 화염이 넘실거렸다.

그 모습에 마량은 박장대소를 했다.

바로 그 순간, 허공에서 담담한 목소리로 ‘동선금강’이라는 네 글자가 들려왔다.

‘뭐, 뭐야!’

그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자 마량은 머리를 송곳에 찔린 것처럼 격한 두통을 느꼈고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삼두육비 허상이 마량의 머리 위에 나타나 다섯 개의 손에서 금색 빛구슬을 쏘아 올려 금빛 거대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쿠쿵!

마량은 소용돌이의 강력한 파동에 휩싸여 일시적으로 꼼짝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삼두육비 허상은 목검을 든 손을 가볍게 털었다.

천지원기가 윙윙! 요동치고 암녹색 가느다란 실이 빠져나가 마량의 보호막을 산산조각내고 목을 잘랐다!

머리가 데구르르 굴러 떨어지고 마량의 시신이 고꾸라졌다.

삼두육비 허상은 또렷해지고 이전보다 훨씬 작아진 범성마신이 등장했다. 이때 마염 속에서 활활 타오르던 또 다른 삼두육비 마신은 푸른 연기가 되어 피어올랐다.

사라진 것은 범성법상으로 응결해낸 또 다른 껍데기에 불과했고 진짜 한립은 미리 빠져나가 마량의 위쪽에 잠복해 있다 적시에 현천의 보물로 진선을 참살한 것이다.

마량의 몸속에 있던 원영은 놀랍도록 강대했지만 현천참령검의 훼멸의 힘에 가루가 되고 말았다.

이 진선의 원래 실력이었으면 육체를 잃었어도 원영은 빠져나갈 수 있었겠지만 영계에서는 원영이 계면의 압력에 구속되어 목숨을 보전할 비술을 사용할 수 없었다.

평범한 싸움이라면 몰라도 생사를 건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에는 제약이 많았다.

“허, 감히 마량을 죽이다니! 저 자가 구원관 문하에 있던 구원도조의 직계 제자라는 것을 알고나 있습니까.”

검은 피부 청년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저 진선을 죽이지 않았으면 제가 죽었을 겁니다. 어떤 배경을 갖고 있든 일단 죽이고 봐야지요. 또 구원도조가 어떤 분인지는 모르나 어차피 선계에 있을 것 아닙니까? 선계로 비승하기 전까지는 후환을 걱정할 이유가 없지요.”

한립은 덤덤하게 답했다.

“호오, 현명한 답변입니다. 수사처럼 아무렇지 않게 구원관 사람을 죽이는 사람은 또 오랜만에 보는군요. 하하하, 구원도조가 그 말을 들었으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모르겠어요.”

“별 말씀을 다 하시고 아주 한가로워 보이십니다. 계속 싸우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마량의 시체에서 저물탁을 끌어온 한립이 차분히 물었다.

“계약 상대가 죽었는데 왜 싸워야 합니까? 게다가 마량이 없는데 저 멍청한 교룡과 힘을 합쳐 수사를 죽일 수 있다는 확신도 들지 않는군요. 힘만 들고 결과는 좋지 않을 일을 왜 사서 하겠습니까.

안심하십시오. 어차피 난 한동안 선계로 돌아갈 수 없으니 수사의 일을 선계에 퍼트릴 수도 없습니다. 구원도조는 늘 폐관수련을 하고, 구원관에서 점술에 능한 자가 있더라도 계면의 압력에 방해를 받아 하계의 일을 점치기란 쉽지 않으니 더더욱 걱정할 필요가 없고요.”

검은 피부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글쎄요, 천외마두가 어째서 진선을 쫓아다녔는지는 모르겠으나 원래 죽은 자의 입이 가장 믿을 만하겠지요.”

한립의 얼굴이 굳어지며 어투가 서늘해졌다.

“하하, 마량 저 녀석만큼 의심이 많은 분이군요. 그럼 이렇게 하지요. 안심이 되지 않으면 차라리 나를 데리고 다니십시오.”

청년은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긁적였다.

“저를 따라 다니겠다고요?”

이번에는 한립이 움찔했다.

“나와 수사가 천마계약을 맺는 것입니다. 내가 앞으로 일정 기간 동안 그림자처럼 수사를 따라다니며 수사의 부림을 받는 것이지요. 평범한 선인조차 못 해낼 일들을 해준단 말입니다! 그 대신 앞으로 일정 기간마다 반드시 내게 정혈을 바쳐야 하고, 수사가 의외의 사고를 당해 죽으면 혼백의 힘을 내게 흡수당해 윤회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렇지, 저 구원관 녀석처럼 말입니다!”

말을 마친 청년은 한 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그의 등 뒤로 검은 기운이 치솟아 사악하게 생긴 거대 악귀 얼굴로 변해 마량의 잔해를 향해 입을 벌렸다.

휙!

기이한 기운이 잔해에서 빠져나가 악귀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악귀 얼굴이 사라지고도 까만 피부 청년은 눈을 감고 맛을 음미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음, 좋아. 구원 문하의 제자답게 혼백의 맛이 일품이구만! 수만 년의 고된 수련보다 보양이 되었어. 어떻습니까? 나와 계약을 하면 저 멍청한 교룡도 설득해 자네의 영복이 되게 해주겠습니다.”

청년은 눈을 뜨고 한립을 유혹했다. 그러나 한립은 서령불새와 대치중인 괴교를 보다 입을 다물었다.

아니, 천마계약이란 말을 처음 듣는데 어찌 무턱대고 대답할 수가 있겠는가!

이때 고공에서 주인을 잃은 핏빛 인장이 손바닥 크기로 줄어들어 떨어졌다. 세 산봉우리들도 크기를 줄여 인장을 가둔 뒤 한립 쪽으로 날아들었다.

8마리 혈룡과 거대 핏빛 인장이 사라지자 진한 피비린내만 남았다.

적이 사라지자 황금 게는 빙글 돌아 도인의 모습으로 변해 한립에게 돌아왔고, 청반검진도 무수히 많은 푸른 검빛으로 돌아가 흩어졌다.

소매를 펄럭여 산봉우리 세 개와 핏빛 인장을 거둔 한립은 72개의 푸른 비검들을 흡수했다.

“해 형, 천마계약에 대해 아십니까? 천외마두와 그 계약을 맺으면 어떻겠습니까?”

“천마계약은 천외마조(天外魔祖)가 개발한 독문 계약으로 선계에서 공인된 가장 영험하다는 3대 계약 중 하나입니다. 신통이 천외마조를 초월하지 않으면 선인과 마인을 막론하고 누구도 계약을 어길 수 없지요. 그러나 선계에 떠도는 소문으로는 천외마두와 계약을 맺은 선인들이 적잖이 행방불명이 되었다더군요.”

해 도인은 힐끗 검은 피부 청년을 보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설명했다. 그는 한 번에 청년의 정체가 천외마두인 것을 알아보았다.

“하하, 그런 오해를 하시면 우리 천외마족은 아주 억울합니다! 우리와 계약을 맺은 자들의 성격이 대부분 위험을 감수하길 좋아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사고를 당하는 것을 어쩌란 말입니까. 그리고 그 소문에 천외마족이 천마계약을 위반했다는 이야기도 있던가요? 아마 한 번도 그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우리 천외마두들은 다른 존재들보다 더 강한 계약의 구속을 당하니까요.”

청년은 한숨을 쉬며 해명했다.

“확실히 천외마족이 천마계약을 어겼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해 도인이 무뚝뚝하게 답했다.

“해 형의 말씀을 들으니 천마계약이 그리 못 믿을 것은 아니군요. 좋습니다, 계약을 하지요. 당신의 어투로 보아 선계의 경험이 풍부한 것 같은데 선계로 비승하게 되면 도움이 될 거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천마계약 외에 제가 따로 금제를 심어둬야 안심이 될 듯합니다.”

“하하, 금제를 심고 싶으면 계약에 그것도 적으면 그만입니다! 심지어 아주 종류대로 금제를 심어 두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렇다면 우선 저 화령부터 멈춰주시지요.”

한립이 괴교를 가리키자 검은 피부 청년은 곧바로 입술을 달싹여 전음을 보냈다.

크앙!

붉은 구슬이 포효하며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가 적홍색 소인으로 변했다. 서령불새도 은색 화염을 거두고 작아져 한립의 몸속으로 돌아갔다.

“하계에서 정염화를 제련해 내고 영성을 개발해 정염불새로 진화시키다니 수사가 복이 많습니다. 선계에서도 정염화를 지닌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그러니 화중성수인 화수자가 제 실력을 내지 못할 만합니다.”

검은 피부 청년은 고개를 돌려 한립을 보고 시시덕거렸다.

“정염화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제가 서령진염(噬靈眞焰)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하하, 절대 잘못 본 것이 아닐 겁니다. 서령진화라는 이름도 썩 잘 어울리는군요. 다른 화염을 잘 잡아먹는 화염이 아닙니까.”

한립과 청년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을 때 파동이 일고 적홍색 소인이 나타나 인근의 머리 잘린 시체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저 놈이 이렇게 쉽게 죽어버리다니, 그럼 내 본명주는 어느 세월에 다시 되찾는단 말인가!”

“화 수사, 본명주를 되찾고 싶으면 아무래도 여기 한 수사에게 부탁을 해보시지요. 하계에서도 이만한 신통을 부리는 데 앞으로 비승해 선계에 이르면 수사의 본명주를 찾아오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가 아니겠습니까.”

“마광 수사,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나더러 저 자를 주인으로 섬기란 말입니까?”

“하하, 안 그러면 선계로 돌아갈 다른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나야 안 되겠다 싶으면 그냥 천외마역(天外魔域)으로 돌아가 자유롭게 살면 그만입니다. 허나 수사는 선령기 없이 버티다가는 수행이 크게 떨어질 텐데요.

거기다 한 형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으면 수행이 억압된 수사가 살아서 이곳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내가 도울 거라는 허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난 이미 상대와 천마계약을 해서요. 사실 한 수사와 잘만 이야기를 나누면 오히려 더 좋은 쪽으로…….”

마광은 말을 하다 나중에는 전음으로 속닥였다.

“……그게 사실입니까?”

적홍색 소인은 혼란스런 얼굴을 하다가 신기한 눈빛으로 한립을 훑었다. 한립은 눈을 가늘게 뜨고 살폈지만 무슨 말이 오간 것인지 묻지 않았다.

“해야 할 말은 다 했습니다. 믿고 안 믿고는 수사의 결정이고요.”

청년이 입을 비죽이며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

“좋습니다, 한 번 더 수사를 믿어보지요. 한 수사라고 했나요? 한동안 당신의 영복이 되어드리겠습니다. 단, 선계로 비승할 때는 반드시 나를 데리고 가주어야 하고, 선계에 가면 내가 본명주를 찾는 것을 도와줘야 합니다. 그 대신 수만 년 간 시키는 일은 다 하겠습니다. 영복 계약은 천마계약을 할 때와 같이 하지요.”

“화수사도 따로 금제를 거는 것에 동의한다면 저야 물론 환영입니다.”

붉게 눈을 빛낸 적홍색 소인의 말에 한립이 미소를 지었다.

마광은 일이 잘 풀리자 입에서 먹처럼 새까만 기운을 뿜었다. 그러자 시커먼 두루마리가 나타나 서서히 떨어졌다.

“계약 내용은 알아서 적어 넣었습니다. 읽어보시고 문제가 없다면 정혈을 이용해 자신의 이름을 쓰시고 의식 한 줄기를 깃들이시면 됩니다.”

청년이 말을 마치고 먼저 피를 한 모금 뱉어 두루마리 위에 기괴한 문자를 적었다. 그가 수결을 맺어 미간에서 뿜어낸 핏빛 한 줄기도 두루마리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검은 두루마리를 끌어당긴 한립이 수차례 내용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적힌 내용은 구두로 나눈 약속과 엇비슷했고 어떻게 보면 그에게 더 유리하게 적혀 있었다.

말이 계약이지 서로 잘 지내보자는 협약 같았다. 그는 손끝을 베어 피를 내 검은 두루마리에 떨어트렸다. 핏방울에 푸른빛 한 줄기도 어른거렸다.

핏방울은 ‘한립’이라는 고대 문자로 변해 기록되었고, 한립은 두루마리를 화수자에게 던져주었다. 화수자도 계약 내용을 살펴보더니 이름을 적은 후 의식 한 줄기를 남겼다.

스륵!

검은 두루마리가 푸른 연기로 변해 사라졌다. 이렇게 천마계약도 무사히 성사된 것이다.

“다 되었으면 두 분은 저를 따라 인족으로 가시지요. 앞으로 도움 받을 일이 많을 것입니다.”

한립이 미소를 지으며 마광과 화수자를 바라보았다.

“하하, 우리 둘은 이제 수사가 어디를 가든 따라다닐 겁니다.”

검은 피부 청년이 웃음 지었다.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일만 처리하고 출발합시다.”

“마지막 일이요? 혹시 줄곧 아래쪽에 숨어 우리의 말을 엿듣고 있는 자를 말하는 겁니까.”

한립의 말에 화수자가 눈을 부릅떴다.

웅!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래쪽 허공 어딘가에 오색 빛의 진법이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한립 아래쪽 저공에 파동이 일고 하얀 빛줄기가 빛의 진법을 향해 쏜살같이 달아났다.

천외마두인 마광도 진작부터 눈치를 채고 있었는지 차분히 한 손을 들어 허공을 내리쳤다.

쾅!

빛의 진법은 괴이한 힘에 갈라져 터져나갔고, 갈 곳을 잃은 하얀 빛줄기가 멈추고 등장한 것은 또 다른 명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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