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8화. 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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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 저 자가 영역으로 공격하려 합니다. 어서 피하세요!”
명존은 괴이한 상황에 깜짝 놀라 소리치고는 남색 잔영을 남기며 튀어나갔다.
흑예수들은 진작 검은 빛구슬로 변해 달아나는 중이었고 헌구령도 이를 악물고 몸을 돌려 흐릿한 그림자로 변했다.
그의 외침에 가슴이 서늘해진 은강자와 오령부인도 머뭇거리지 않고 줄행랑을 쳤다. 은색 거대 손과 거대 낭아봉이 사라지고 은색 거인은 육중한 몸으로 떨어져 내려 지면으로 숨어들었다.
돼지머리에 원숭이의 몸을 한 괴물도 등 뒤로 두 쌍의 박쥐 날개를 펼치고 하얀 괴풍으로 변해 사라졌다.
‘아, 안 돼!’
가부좌를 틀고 있던 궁장여인도 화들짝 놀라 술법을 거두고 달아나려는데 한 발 늦고 말았다.
고공에서 핏빛 인장이 희미하게 남아 있던 남색 얼음을 박살내고 번개처럼 떨어져 내린 것이다.
궁장 여인은 주변 공기의 엄청난 압력에 기겁하고는 지니고 있는 모든 방어용 보물들을 뿜어내 겹겹이 보호막을 쳤다.
쿠앙!
그러나 핏빛이 번뜩였다 사라지자 그곳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인장의 무서운 위력에 보물은 물론 궁장 여인까지 소멸하고 만 것이다.
“어딜 가려느냐!”
금색 거인이 코웃음을 치며 손을 움직였다.
쿠쿵!
천지를 뒤덮은 금빛들이 거대한 파도를 이루어 달아나던 명존과 오령부인을 일시에 집어 삼켰다. 동시에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헌구령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비틀거리며 튕겨 나왔다.
“죽어라!”
금색 거인은 세 사람이 비술을 쓸 틈도 주지 않고 살기등등하게 외쳤다.
세 수사와 네 명의 진령 곁으로 금빛이 반짝이고 자금색 문양이 덕지덕지 붙은 거대 손이 여러 개 등장해 그들을 움켜쥐었다.
거대 손에 붙들린 수사와 진령들은 법칙의 힘에 몸은 물론이고 법력도 움직일 수 없었다.
쿵! 쿵! 쿠쿵! 쿵!
수사들과 진령들이 혼비백산하고 있을 때, 선홍색 안개가 피어올라 일곱 개의 핏빛 인장으로 변하더니 그들을 깔아뭉갰다.
이에 대승기 수사 일곱이 재가 되어 사라졌다.
* * *
그 시각, 지하 깊은 곳의 은색 거인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 여덟 개의 지하 화사에 둘러싸여 있었다.
어쩐 일인지 꼼짝 못하던 거인은 화산들이 뿜어낸 은색 용암에 잠겨 참혹한 비명을 남기고 사라졌다.
금색 거인은 눈에 거슬리던 대승기 수사들을 싹 정리하자 흡족하게 웃다가, 문득 무언가를 감지하고는 어딘가로 고개를 돌렸다.
“누가 숨어 있는 것이냐! 썩 나오지 못할까!”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금색 거대 손이 허공을 찢고 팔뚝 크기의 금색 소인을 붙잡았다.
금색 소인은 코와 입도 없이 눈만 반짝였는데 금색 거대 손에 잡히고도 당황하지 않고 싸늘하게 금색 거인을 마주 보았다.
“서금선(噬金仙)!”
소인의 모습을 확인한 금색 거인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쉭! 쉭!
금색 소인의 두 눈이 차갑게 빛나자 서늘한 수정빛이 쏘아져 나와 그를 붙들고 있던 거대 손의 손가락을 부수고 빠져나왔다.
소인은 금색 빛줄기로 변해 하늘을 가르고 날아갔다.
“하계에 이 정도로 수행을 쌓은 서금선이 있다고? 굴복시켜 선계로 돌아가면 큰 도움이 될 것이야!”
마량은 뜻밖의 발견에 기뻐하며 달아나는 금색 빛줄기를 가리켰다.
사방팔방에서 금빛들이 모여 금색 거대 손 여러 개가 나타나 동시에 법칙의 힘을 뿜었다.
휘휘휘휙휙!
금색 빛줄기 속에서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리고 무형의 검기들이 튀어나와 주변의 거대 손들을 마구 갈랐다.
하지만 검기가 아무리 거대 손들을 부셔도 거대 손들은 끊임없이 나타났고 자연히 금색 빛줄기도 법칙의 힘에 영향을 받아 점점 속도가 느려졌다.
쿠르릉!
지면에서 금색 화산이 금빛을 발산했다. 금빛 속에서 수십 명의 커다란 금갑 병사들이 튀어나와 금색 빛줄기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서금충왕은 쉽게 이곳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멀리서 마량이 변한 거인이 그것을 보고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러나 풍기는 기운이 이전보다 훨씬 약했고 체내의 선령력도 상당히 소모해 처음 봉인이 풀렸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 * *
“이 정도면 되었겠지.”
제단 아래에서 푸른 고대 거울을 띄워놓고 그것을 들여다보던 한립이 묘한 얼굴로 자문했다.
거울에는 서금충왕이 거대한 금색 딱정벌레로 변해 수정빛들을 쏴 금색 갑사들을 상대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서금충왕이 지금 저곳에 나타난 것은 모두 한립의 명령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둬야 그가 상황을 장악해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 * *
“이제 움직여야겠군. 최후의 수단까지 쓰게 될 줄이야. 이번 일로 풍원대륙의 원기가 크게 상하겠지만 영계 전체를 위해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음을…….”
천외천의 어느 어두운 대전 속.
거대 진법 한가운데 누군가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은색 진법 원반에 법력을 불어넣자 밝은 빛이 얼굴을 비추었다.
그는 목숨을 잃은 명존과 똑같이 생긴 노인이었다.
* * *
또 다른 진안 수비를 맡은 은담과 월소 오누이는 눈을 감고 앉아있다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갑자기 천지원기가 움직이고 여덟 개의 기둥과 거대 제단이 엄청난 법칙 파동을 내뿜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 명에 달하는 상맹 병사들도 이상을 깨닫고 겁에 질려 웅성거렸다.
“어찌 이곳 천지원기가 이리 날뛰는 것이야!”
운담이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양의멸진진에 문제라도 생긴 걸까요?”
월소도 긴장을 하며 물었다.
“아무래도 이상해……. 이런, 법칙의 힘이 어찌 우리를 향해 모여들고 있다! 우리를 겨냥한 거야! 피해!”
숨 가쁘게 외친 운담의 말에 월소도 소스라치게 놀라 즉시 소매를 펄럭였다. 오누이 앞에 세 쌍의 은색 날개가 달린 새카만 비차가 떠올랐다.
그런데 운담과 월소가 비차에 오르기 전, 제단과 여덟 기둥이 진동을 하고 오색 빛기둥을 하늘 높이 쏘아 올렸다.
콰릉!
마른하늘에 벼락이 치고 법칙 파동이 응결해 커다란 빛의 진법을 형성했다.
웅웅!
빛의 진법이 진동하며 오색 빛깔의 소용돌이로 변해 아름다운 핏빛의 광채를 진안으로 분출했다. 핏빛은 빛의 장막의 형태를 띠고 뒤집혀진 사발처럼 운담, 월소 그리고 상맹 병사들을 가두었다.
동시에 법칙의 힘이 핏빛 장막 내부를 태우기 시작했다.
이에 온몸에 소름이 끼친 운담과 월소는 법력 대부분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 깨닫고 얼굴을 굳혔다.
“늦었다. 지하로 간다!”
운담은 월소를 잡아끌어 함께 비차에 오르고는 검은빛으로 변해 땅속으로 파고들려 했다.
펑!
그러나 검은빛은 바닥에서 푸른빛과 충돌해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열을 받은 운담이 기다란 금색 창을 불러내 힘껏 바닥을 찔렀다.
콰쾅!
충돌의 여파에 금색 빛이 퍼지고 파랑이 일면서 주변 상맹 병사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하지만 금색 창을 거둔 운담이 본 것은 여전히 멀쩡하게 빛나는 푸른빛의 장막이었다.
“오라버니의 영광과(靈光戈)가 통하지 않는다고요? 대체 얼마나 단단하기에!”
월소가 놀라 소리를 높였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우리가 명존 그 늙은이에게 당한 것이다! 빌어먹을 진안은 무슨, 이곳은 우리를 위해 전문적으로 파놓은 함정이란 말이다!”
운담이 위쪽의 핏빛 장막과 아래쪽의 푸른 장막을 번갈아 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아, 아니 대체 왜요! 우리를 여기에 가둬서 그자가 무슨 득을 본다고요. 게다가 이 금제가 아무리 대단해도 우리를 영원히 가둬둘 수는 없을 겁니다.”
“이 금제는 그저 우리를 잠시 떠나지 못하게 붙잡아 두는 역할일 게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짓을 꾸몄는지는…….”
누이의 물음에 운담이 돌연 금창으로 제단을 찔렀다.
콰쾅!
이에 제단을 가리고 있던 보호막이 산산조각 나 날아가고 그 자리에 커다란 구덩이가 파였다.
“이건…….”
월소는 텅 빈 구덩이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처음부터 현천의 보물 따위는 없었던 거야! 명존 그 늙은이가 우리 형제를 현천의 보물을 대신해 제물로 쓸 셈인 게다!”
“감히 그런 짓을! 어찌 되었든 당장 이곳을 떠나야겠어요.”
“두려워할 것 없다. 명존이 정확히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는 몰라도 나도 단단히 채비를 해왔으니까!”
말을 마친 운담이 입에서 검은 구슬을 뱉었다. 그는 구슬을 단단히 쥐고 힘껏 핏빛 빛의 장막을 향해 내던졌다.
그와 동시에 핏빛 보호 장막이 이상한 파동을 내뿜어 가까이 있던 상맹 병사들이 핏빛 안개로 터져나갔다.
검은 구슬은 핏빛 장막에 닿기도 전에 그 파동에 휩쓸려 검은 연기로 사라졌다.
“말도 안 돼!”
운담은 얼굴에 핏기가 가시며 더는 평정을 유지하지 못했다.
이에 월소가 대경실색하며 수십 개의 보물들을 날려 보냈지만 하나같이 멀리가지 못해 폭발했고 상맹 병사들을 핏빛 안개로 만든 엄청난 파동이 오누이를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운담과 월소는 서로의 눈빛에서 절망감을 읽었다.
두 사람은 운용할 수 있는 보물과 비술을 전부 펼쳐 겹겹이 보호막을 만들어내고는 핏빛 파동에 잠식되었다.
* * *
멀리 떨어진 또 다른 진안.
한립은 노란 보호막 속에서 본격적으로 발동하기 시작한 거대 빛의 진법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보호막 밖의 상맹 병사들은 핏빛 안개로 변해 빛의 진법에 흡수되는 중이었다.
펑!
희생양이 사라지자 핏빛 파동과 장막이 걷히고 고공의 빛의 진법도 함께 사라졌다.
* * *
금색 소인은 금갑 병사들에 제압당해 주변 허공에서 튀어나온 자금색 빛의 실에 묶여 있었다.
“하하, 내 영역 안에서 제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도망갈 수 있을 줄 알았더냐.”
마량이 변한 금색 거인은 소인을 잡자 기분이 좋은지 표표히 날아들었다. 바로 그때 아래쪽에 파동이 일고 명살의 땅 전역에 걸쳐 펼쳐진 초대형 빛의 진법이 지하에서 솟아올랐다.
그 한가운데에는 마침 금색 거인이 있었다.
“이건 또 뭐야!”
깜짝 놀란 마량이 의식으로 빛의 진법을 훑고는 표정이 달라졌다. 그 순간 빛의 진법에서 수정 실이 소리 없이 쏘아져 나와 하늘을 꿰뚫었다.
마량은 수정 실을 보고 곧장 둔광을 일으켜 달아나려 했다.
콰쾅! 쿠르르릉!
수정 실은 순식간에 작열하는 하얀 빛기둥으로 변해 폭발했고 하얀 광풍과 굉음이 주변 만 리를 휩쓸었다.
금갑 병사들이 하얀빛에 흩어지고 자유를 되찾은 금색 소인은 거대 꼭두각시 본체로 돌아가 둥글게 몸을 말고 금색 구슬로 변했다.
마량이 변한 거인도 얼마 달아나지 못하고 겁먹은 얼굴로 흰 빛에 매몰되었다.
* * *
쨍강!
한립의 고대 거울이 깨지기 직전, 거울은 온통 하얀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신중하게 명살의 땅 중심부를 살피고는 멀리서 엄청난 소음이 들리고 희미하게 하얀빛이 반짝이는 것을 확인했다.
그곳에서 전해지는 파동을 감지한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양의미진진의 위력이 이 정도라니!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으면 휘말려 죽었을 것이 아닌가.”
“진정한 양의미진진이었으면 그랬을 테지만, 이런 개조된 진법으로는 원래 위력의 1할밖에는 낼 수 없습니다. 한 형의 실력이면 목숨은 부지했을지 모릅니다.”
한숨을 내쉬는 한립의 귓가에 해 도인의 목소리가 울리더니 은색 뇌전빛이 반짝이고 해 도인의 신형이 나타났다.
“제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면 진선이 살아남을 확률은 더욱 높겠습니다.”
한립이 고개를 돌리며 진지하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수사의 판단에 저 진선이 살아남는다면 어떤 상태일 듯싶습니까?”
“다른 건 몰라도 현재 진선의 몸은 유지하기 어려울 겁니다. 십중팔구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봉인을 깬 반서의 힘까지 수습해야겠지요. 어떤 비술로 계면의 법칙의 힘에 저항했는지 몰라도 중상을 피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 말은, 제가 건너가 봐도 되겠다는 뜻이겠지요.”
“그건 한 형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상대가 진혼단을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높고, 수사가 진혼단을 얻을 수 있다면 비승의 겁을 쉽게 치를 수 있으리란 것도 사실이지요.”
침묵하던 해 도인이 사실대로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가보기는 해야겠습니다. 상대가 최악의 상태에 몰려 있으니 제압하진 못해도 안전히 탈출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한립은 웃음을 흘리며 은색 뇌전을 방출했다.
콰릉!
그의 발밑에 천둥소리가 들리고 은색 뇌전진법이 떠올라 한립과 해 도인을 뇌전으로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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