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6화. 인장의 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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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금색 거인은 눈을 감고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체내의 기운을 조정하는 듯했다.
금색 영역의 범위가 빠르게 확산되어 명존과 다른 수사들도 서둘러 뒤쪽으로 물러나 피해야 했다.
침묵하던 은강자가 눈을 데구루루 굴리다 돌연 명존을 향해 입을 열었다.
“지금 상대의 실력이면 우리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겁니다. 까딱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고요. 이제 명 형이 준비한 다른 방법을 선보일 때입니다. 때가 된 것 같은데요! 양의멸진진 말고 아무 대비도 되어 있지 않다고는 하지 않으시겠지요.”
“안심하십시오! 상대가 진정한 선인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나 노부도 좌시하고 있지만은 않을 테니까요. 영역을 상대할만한 두 가지 방책이 마련되어 있으니 죽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거두시지요.”
명존이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수결을 맺었다.
스스스스슷!
그의 소매에서 검은 수정 구슬들이 날아올라 마치 검은 거대 꽃처럼 피어났다. 거대 꽃들은 거대한 빛의 진법을 형성하고 확산되어 은강자 등 대승기 수사들을 보호했다.
금색 영역이 발산하는 금색 광채가 검은빛의 진법에 가로막혀 그쪽으로는 더 이상 퍼지지 않았다.
검은 주술문자를 쏟아내는 빛의 진법에서 희미하게 불경소리가 울려 듣는 이들의 몸과 마음을 나른하게 만들었다.
“본 계에서 불문 최강의 방어 보물이라는 극악범하계(極樂梵河界)가 아닙니까! 이게 수사의 수중에 있을 줄이야!”
궁장 여인이 검은빛의 진법 모양을 보고 기뻐했다.
“하하, 우연히 그렇게 되었습니다. 상대의 영역과 비교하면 위력이 떨어지기는 해도 한동안 수사들을 지키기에는 충분할 겁니다. 그래도 안 되면 아직 남겨둔 수도 있습니다.”
명존은 웃음을 흘리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알겠습니다. 수사께서 대책이 있으시다니 노부도 계속해서 협조하지요. 저 선인을 이곳에서 죽일 수만 있다면 이 정도 위험은 감수하겠습니다.”
얼굴 절반이 훼손된 대머리 거한이 결심이 섰는지 남은 얼굴을 흉흉하게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저도 일단은 남겠습니다, 허나 우리 쪽이 확실히 이길 수 없다고 판단되면 이곳에 남아 목숨을 버리지는 않을 겁니다.”
오령 부인도 냉랭히 생각을 밝혔다. 은강자와 나머지 수사들은 아직 아무 말도 없었다. 영역의 위력을 시험해 보고 결단을 내릴 생각이 분명했다.
명존도 그런 대승기 강자들의 마음을 알았기에 입술을 달싹여 그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저도 선인을 대적하지 못할 것 같으면 수사들을 붙들고 같이 죽을 마음은 없습니다. 허나 헌구령 수사의 존재를 잊지 마시지요. 헌 형이 선인을 격살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그 말에 수사들의 마음이 움직였다. 진령을 아홉 마리나 사살했다는 명성과 그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 은신술이면 헌구령에게 기대를 걸어볼 만도 했다.
그 순간 맞은편 금색 거인이 드디어 눈을 떴다. 체내의 법력을 선령력으로 전환해 진정한 선계 비술을 후환 없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하계의 버리지 같은 것들이 내가 영역으로 공격하려 한다고 여긴다면 큰코다칠 것이다.’
선인에게 영역은 직접 공격하는 방법으로도 쓰이지만 그보다는 공격을 보조하는 용도에 더 적합했다. 그도 영역을 이용해 대승기 수사들을 공격할 마음은 없었다.
마량은 검은빛의 진법을 보고 냉소를 흘리며 한 손을 아래쪽 피의 강을 향해 뻗었다.
우르릉!
피의 강물이 한곳으로 모여 네모난 거대 인장을 만들어냈다. 표면에 핏빛 화염이 요동치고 네 면에 수많은 사람, 곤충, 어류, 짐승의 문양이 각인된 인장이었다.
문양들은 아주 정교했고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꿈틀 움직여 보는 사람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다.
그가 오랜 세월 천신만고 끝에 수많은 혈제를 치러 완성한 만령혈새(万靈血璽)였다.
이런 만령혈새를 하계 수사들에게 쓰는 것이 과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진원의 힘도 소모해야 할 테지만 속전속결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
마량이 변한 금색 거인은 체내의 선령력 대부분을 인장으로 주입했다.
쿠르르릉!
굉음이 울리고 핏빛 인장이 갑자기 사라졌다.
검은빛의 진법이 둘러싼 곳에 격렬한 파동이 일고 핏빛 안개에 둘러싸인 거산 크기의 핏빛 물체가 나타났다.
핏빛 속에서 사람, 곤충, 어류, 짐승 등의 허상이 살아 움직이며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인장은 아주 서서히 떨어졌는데 주변 허공이 왜곡되고 있었다.
그 아래에 위치한 검은빛의 진법도 안에서 여든한 개의 수정 구슬이 폭죽 터지듯 터지고 있었다.
검은빛의 진법이 소멸하자 그 안에서 공격을 준비 중이던 명존과 수사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갑시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둔광을 일으켜 튀어나갔다.
하지만 얼마가지 못해 허공이 쿵! 울려댔고, 방원 백 리에 압도적인 괴력이 강림해 공기가 강철로 변한 것처럼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둔광이 걷히고 강제로 모습을 드러낸 대승기 강자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휘이잉!
고공의 핏빛 거대 인장에서 역겨운 피비린내가 흘러나오자 대승기 수사들의 가슴이 답답해졌고 기묘한 냄새에 머리가 띵했다.
이에 대승기 수사들은 깜짝 놀라 그곳을 벗어날 생각도 못하고 분분히 보호막을 만들어 핏빛 기운을 차단했다.
“다들 뭐하시는 겁니까! 무엇이든 아껴둔 신통이 있다면 이제 보여주십시오. 지금 달아나려 해봤자 각개 격파를 당할 뿐이란 것을 명심하세요.”
명존은 믿고 있던 극악범하계가 무참히 깨져나가자 표정이 어두워져 평정을 회복하고 소리쳤다.
그는 자신이 먼저 입에서 새하얀 옥으로 만들어진 족자를 뿜어냈고 두 손으로 재빨리 수결을 맺어 허공을 짚었다.
팟!
족자는 서서히 펴지며 은색 주술문자들을 흘려보냈다. 주술문자들이 거대한 은색 그물로 변해 즉시 고공의 핏빛 인장을 향해 돌진했다.
쿠콰쾅!
충돌음과 은빛이 터져 나왔다. 은색 그물은 파도처럼 출렁였지만 바로 찢겨나가지 않고 거대 인장의 기세를 약화시켰다.
“은균천서(銀鈞天書)! 현천의 보물이 아닙니까!”
은광자가 그것을 보고 놀란 기색을 보였다. 이에 그 역시 이를 악물고 술법을 펼쳤다.
그는 은색 광채에 휩싸여 녹색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트린 은색 거인으로 변했다. 언덕 크기로 커진 거인은 핏빛 인장을 향해 수많은 거대 주먹 허상을 날렸다.
퍼퍼퍼퍽!
주먹 허상 하나하나가 천둥소리를 내며 엄청난 괴력을 드러냈다. 그리고 주문을 외던 오령 부인도 등 뒤로 돼지머리에 원숭이의 몸을 지닌 괴물 허상을 불러냈다.
괴물이 길게 포효하며 입을 쩍 벌렸다.
이에 하늘이 순간 어두워지고 느닷없이 핏빛 인장 위로 새빨간 짐승의 입이 나타나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핏빛 인장을 그대로 삼키려는 듯했다!
그때 녹색 궁장 여인도 만만치 않은 기세를 터트리며 거대 도끼 허상을 불러내 핏빛 인장을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찍었다.
대머리 거한과 다른 대승기 강자들 또한 각종 신통을 부리며 인장을 막았다.
수십 개의 비도를 날리거나, 거대 손을 만들거나 아니면 법상을 방출해 공격하는 식이었다. 수많은 공격들이 순식간에 핏빛 인장으로 떨어졌다.
“멈춰라.”
수사들의 쉼 없는 공격에도 마량은 냉소를 흘리며 핏빛 인장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인장은 부르르 몸을 떨었고 인장 표면에 핏빛 안개가 무럭무럭 솟아올라 모든 공격을 휩쓸었다.
그때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졌다.
은색 그물, 주먹 허상, 천장 도끼, 커다란 짐승의 입이 핏빛 안개의 물결에 닿은 순간 동작을 멈춘 것이다.
다른 보물이나 공격은 아예 소리 없이 먼지가 되어 사라졌고, 대승기 수사들이 방출한 법상들은 균열이 생겨 터져나갔다.
‘이런!’
무시무시한 핏빛 안개의 위력에 명존은 마른 침을 삼키고 입에서 정혈 한 모금을 토해내 하얀 족자에 흡수시켰다.
파아앗!
열댓 개의 커다란 은색 주술문자들이 흘러나와 각각 은색 빛의 진법으로 변했다. 빛의 진법은 겹쳐져 은색 빛의 탑을 이루고 산만하게 커져갔다.
쿵! 소리와 함께 탑 꼭대기가 하강하던 핏빛 인장에 닿아 흔들거렸다.
쿠쿵!
잠시 버티던 탑의 꼭대기 층이 핏빛 인장에서 흘러나온 핏빛 안개에 눌려 움푹 들어갔다.
허물어진 탑의 꼭대기 층은 흐릿하게 변했다가 완전히 사라졌다. 핏빛 인장이 누르고 탑이 한 층씩 무너져 사라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은색 탑은 곧 무너질 테지만 확실히 핏빛 인장의 하강 속도는 크게 늦추었다.
오령 부인은 안색이 창백해져 곁의 은광자와 시선을 마주치고 두 손으로 다시 한번 수결을 맺었다.
쉭!
등 뒤의 검은 법상이 그녀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여인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검은빛을 발산했고 법상과 똑같은 모습으로 변해갔다.
돼지 머리에 원숭이의 몸을 한 방대한 괴수는 뼈로 만든 회백색 갑옷을 걸치고 두 손에는 누런 거검을 들고 있었다.
크아앙!
괴수가 들고 있던 두 자루의 누런 거검을 휘두르자 초승달 모양의 노란 검기가 튀어 나갔다.
핑! 핑!
은강자가 변한 은색 거인도 맑게 포효하며 입에서 은색 뇌화를 빼곡하게 뿜어냈다.
“가라.”
은강자의 명에 뇌화들이 미친 듯이 쏘아져 나갔고, 커다란 오조(五爪) 금룡(金龍)은 마량이 변한 금색 거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노옹이 용머리가 장식된 금색 지팡이를 던져 벌어진 일이었다. 대승기 수사들이 만들어낸 거대 도끼 허상과, 푸른 실들, 수레바퀴 크기의 거대 악귀 얼굴들도 앞 다투어 공격에 합류했다.
“다들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금색 거인은 고함을 치며 가슴이 터질 듯 숨을 들이마셨다. 훅! 하고 내쉬는 숨에 금색 주술문자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와 굉장한 소리를 냈다.
쿠르릉!
주술문자들이 금빛 바람의 벽을 형성해 금색 거인 앞을 막아섰다.
노란 검기, 은색 뇌화, 오조 금룡이 바람의 벽에 휩쓸려 맥없이 소멸되었고 뒤따르던 거대 도끼, 푸른 실, 악귀 얼굴 등은 접근도 하지 못하고 무형의 힘에 밀려나 주위를 맴돌았다.
이제 모든 대승기 수사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네 분 모두 계속 손을 놓고 계실 겁니까? 이건 계약 위반입니다!”
명존이 서늘히 고개를 돌려 허공을 보았다.
“계약 위반이라니요? 명 형이야말로 우리 형제에게 이번에 상대할 것이 선인이라고 귀띔해주셨습니까?”
파동이 일자 비슷한 생김새를 가진 흑갑(黑甲) 청년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자가 냉랭히 답했다.
몸에서 풍기는 기운이 마량이 변신한 후 갑자기 사라진 흑예수 네 마리와 똑같았다. 그들은 진령이 사람의 모습으로 변한 것이었다.
“본 맹이 네 분과 계약을 맺을 때 선인과 마주치면 도망쳐도 된다는 조항은 넣지 않았습니다. 그 계약을 위해 본 맹에서 막대한 대가를 치른 것은 기억하실 테지요! 만일 계약을 위반하면 반서를 당해 수사들의 수행이 크게 떨어진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흥, 수행이 떨어지는 것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백배 낫습니다.”
“목숨을 잃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하, 본 좌가 그런 요구를 할 사람은 아니지요. 이렇게 하시죠. 네 분이 본명 진화(眞火)로 전력을 다해 한 번만 공격해주시면 계약을 이행한 것으로 알고 본 계에서 떠나게 해드리겠습니다.”
명존이 순간 딱딱하게 굳어있던 얼굴을 풀고 돌연 전음으로 제안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이런 상황에 거짓말을 할 리가요! 원하신다면 심마를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맹세는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딱 한 번만 공격하고 결과가 어찌 되든 우리 형제는 떠날 것이니까요.”
명존의 말에 나이 많은 청년이 다른 흑갑 청년들에게 시선을 보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잠시 후에 제가 신호를 보내면 그때 나서주시면 됩니다!”
그들이 전음으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마량이 변한 금색 거인은 다시 한번 주문을 외우고 금색 정혈을 뱉어 거대 핏빛 인장 속으로 쏘아 보냈다.
쿠르르릉!
정혈을 머금은 인장에서 핏빛 안개가 꿀렁꿀렁 쏟아져 나와 무수히 많은 핏빛 실로 변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다들 조심하십시오!”
명존이 화들짝 놀라 서둘러 은색 족자를 가리켰다.
족자가 은색 빛의 장막으로 변해 그와 옆에 있던 오령 부인, 은강자 그리고 녹색 궁장 여인을 보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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