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415화 (1,172/2,000)

1415화. 진선의 몸

*

“화수자, 실패했다고?”

마량은 낮게 중얼거리며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내 몸의 혼백금제를 풀어 주지 않아 본 실력의 1할밖에 발휘하지 못하는데 어쩌란 말입니까.”

가느다란 목소리가 허공에서 울렸다. 달걀 크기의 화염 구슬들이 소리 없이 나타나 적홍색 소인의 모습으로 응결했다.

“흥, 내가 왜 하계에서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 선계로 돌아가기 전까지 금제를 풀 생각은 꿈도 꾸지 말거라. 잠시 동안 의식을 찾은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라고. 물론 바로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겠지만! 네 불멸체인 껍데기만으로도 하계에서 부리기에는 충분하다.”

마량이 코웃음을 치며 입에서 금빛을 분출했다. 이에 적홍색 소인은 금빛 속에서 냉랭하던 표정이 차차 옅어지고 멍한 얼굴로 돌아갔다.

마량은 금색 부적을 몇 장 날려 더욱 꼼꼼하게 소인을 봉인했다. 이어서 그가 꺼낸 남색 옥함에서 하얀 기운이 흘러나와 소인을 삼켰다.

옥함을 넣어둔 마량은 고개를 들어 고공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고공에서는 아직 격렬히 싸우고는 있었지만 여덟 마리 혈룡들이나 네 마리 핏빛 거인 모두 완전히 밀리고 있었다.

은강자를 비롯한 대승기 강자들과 흑예수 네 마리가 강력한 신통을 발휘해 그들을 피의 강 언저리까지 밀어붙여 피의 강에서 흘러드는 강대한 진원의 힘으로 겨우 버티는 중이었다.

마량은 피의 강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살피다 지척에 떠있는 손바닥 크기의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빛의 장막 위에 삼두육비의 거대 마물이 한 손에는 암녹색 거검을 다른 손에는 거대 짐승의 절반뿐인 몸뚱이를 쥐고 있었다.

“진마체, 현천의 보물? 진안을 지키는 자들이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구나. 양쪽 다 실패하다니. 보아하니 한 번 더 봉인을 풀 수밖에 없겠어. 어차피 목표도 찾았으니 괜히 시간 끌 것 없겠지.”

마량은 손바닥을 뒤집어 금빛 찬란한 부적을 꺼내 들었다.

부적에는 쌀알 크기의 금색 문자들이 반짝거렸고 크기가 늘었다 줄었다 하며 손가락 사이에서 살랑살랑 움직여 마치 영성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

마량은 결연한 얼굴로 금색 부적을 털어냈다.

쉭!

부적이 금색 빛줄기로 변해 마량을 위아래로 휘감자 마량은 두 손으로 수결을 맺고 이해하기 어려운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흑백의 두 기운이 그의 몸에서 반짝이고 흑포 청년은 공포스런 기운을 발산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강대해지는 기운과 숨 막히는 압력에 허공이 웅웅 진동했다.

영계에서는 근본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강력한 기운이었다.

피의 강 밖에서 은색 베틀 북 백 개를 움직여 핏빛 교룡을 만신창이로 만든 은강자가 득의양양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안색이 급변해 서둘러 눈에 기이한 빛을 일렁이며 피의 강 중간을 바라보았다. 다른 대승기 강자들도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는 존재를 감지하고 같은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보름달 모양 원반 위에서 모든 상황을 통제하던 명존만이 당황하는 기색 없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눈에 숨겨진 것은 약간의 흥분과 기대감이었다.

펑!

빛의 진법이 불현듯 나타났다 사라지고 헌구령이라 불리는 회색 장포 사내가 창백한 얼굴로 돌아왔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상대는 처리한 것입니까?”

명존은 고개를 돌려 그의 몸 절반이 날아간 것을 보고는 놀라 물었다.

“아니요, 상대가 전설로만 듣던 화중성수였습니다! 영성을 잃은 괴뢰상태여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참입니다. 허나 이미 없앴으니 저쪽 진안은 걱정할 것 없습니다.”

헌구령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화중성수! 선계에서 온 자라더니 그런 강대한 영수를 다 데리고 다니는군요. 설마 구계멸진대법을 사용한 것은 아니겠지요?”

“설마 진선을 격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날려버리고 왔겠습니까. 그걸 썼다면 이렇게 낭패를 당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명존의 물음에 헌구령이 얼굴 근육을 꿈틀거렸다.

“그럼 됐습니다. 진선이 봉인을 풀고 전성기 힘을 회복하는 중입니다. 곧 수사가 나서야 하니 수원단(水源丹)을 복용해 부상을 좀 회복하시지요.”

명존이 얼굴을 풀며 남색 단약을 날려 보냈다.

“고맙습니다. 수원단이라면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겁니다!”

헌구령은 거절하지 않고 남색 단약을 받자마자 입에 넣었다. 그는 단약을 삼키고는 허공에 가부좌를 틀고 요상에 들어갔다.

파앗!

그의 새까맣게 타들어간 상처 부위에 남색 빛이 어리고 핏빛 실들이 빠르게 튀어나와 근육과 살을 채워나갔다.

명존은 다시 고개를 돌려 멀리 피의 강을 살폈다.

피의 강에서는 핏물들이 요동쳐 거대한 파랑을 만들고 있었다. 혈교들과 핏빛 거인들도 이에 자극을 받아 실력이 대폭 상승해 흑예수들과 대승기 강자들을 무리 없이 상대했다.

피의 강 중앙에서 풍기는 기운은 어떤 강자라도 오금이 저릴 만큼 무시무시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콰릉!

고공에 천둥소리가 울리고 일곱 빛깔 구름이 양의미진진(兩儀微塵陣) 금제를 무시하고 떠올라 세력을 넓혀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명살의 땅 전체가 일곱 빛깔로 물들고 있었다.

일곱 빛깔 구름은 퍼져나가며 안에서 수시로 자금색 뇌전빛을 번득였다. 피의 강 속에서는 아직도 마량이 수결을 맺은 채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왜곡된 허공에 자금색 주술문자들이 떠올라 8개의 자금색 사슬로 변해 마량의 몸을 칭칭 감으려 들었다.

쿠쿵!

이때 마량을 휘감고 있던 금색 부적의 힘이 폭발해 무수히 많은 금색 빛의 실들을 날려 자금색 사슬들을 일망타진했다.

맑은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마량의 두개골이 열리고 금색 소인이 떠올라 무표정하게 금실에 감싸인 자금색 사슬을 가리켰다.

휘휘휙!

자금색 사슬들은 여덟 가닥의 금빛으로 변해 마량의 두개골 속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금색 소인도 바로 그 뒤를 쫓아 두개골 안으로 들어갔다.

웅!

마량이 발산하던 무서운 기운이 삽시간에 사라지고 천천히 눈을 뜬 그의 얼굴에는 서늘한 미소만이 어려 있었다.

하늘에서 요란하게 천둥소리를 내던 일곱 빛깔 구름과 자금색 뇌전들도 흐릿하게 소실되었다. 이에 고공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 모습을 되찾고 고요하기만 했다.

은강자 등 대승기 강자들은 피의 강 속에서 정확히 마량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지는 못했지만 강력한 기운이 사라진 것에 안심했고, 서둘러 보물과 신통을 이용해 맞은 편 상대를 더욱 맹렬히 공격했다.

바로 이때, 피의 강 속의 마량이 팔을 들어 올려 바깥쪽을 가리켰다.

콰콰쾅!

그가 노호성을 터트리자 8마리 혈룡과 4마리 핏빛 거인의 몸에 하얀 균열이 생겼다. 핏빛이 번득인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하늘에 핏빛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혈룡과 거인들을 상대하던 대승기 수사들은 너무 갑작스런 일에 피하기에 급급했다. 네 마리 흑예수들도 당장 몸을 틀어 검은 안개로 변해 사라졌다.

그러나 핏빛 장대비가 쏟아진 범위가 워낙 넓었기에 대머리 거한과 진주와 비취로 머리를 장식한 궁장 여인은 핏물에 공격을 당하고 말았다.

이에 대머리 거한은 주변을 맴돌고 있던 은색 은반에 법력을 마구 불어넣었다. 원반들이 여러 층의 은색 보호막으로 변해 그를 보호했고, 거한은 잿빛의 검은 그림자로 변신했다.

녹색 궁장 여인이 두 손으로 수결을 맺자 머리에 꽂힌 진주와 비취 장신구들은 수십 점의 방어 보물로 변해 빼곡이 방어 금제를 만들었고, 여인의 녹색 궁장에서 푸른 주술문자들이 흘러나와 진법을 형성해 전신을 보호했다.

대승기 강자들답게 쏟아져 내리는 검붉은 핏물에 담긴 엄청난 위력을 느끼고 최강의 방어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핏물이 후드득 두 대승기 강자를 향해 쏟아졌다.

치이익! 치익! 치이익!

그러나 놀랍게도 검붉은 장대비는 온갖 방어용 보물과 보호막을 뚫고 그대로 대승기 강자들의 법력 보호막까지 도달했다.

핏물에 뚫린 보호막에 푸른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의 참혹한 비명소리가 울렸다.

대머리 거한과 녹색 궁장 여인이 각각 핏빛 장대비를 뚫고 나왔는데 그들을 본 다른 수사들은 깜짝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다.

대머리 거한은 얼굴 반쪽이 녹아내려 잿빛의 뼈만 남았고, 궁장 여인은 얼굴은 멀쩡한 대신 팔 한쪽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이 핏물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무서운 능력을 지녔단 말입니까!”

오령 부인이 깜짝 놀라 소리쳤고 다른 수사들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전설로만 듣던 혈도공법을 초절정으로 익히면 얻을 수 있다는 혈원(血源)의 힘 같습니다. 단 한 방울로도 산을 뚫는다고 하더군요.”

은강자 등 수사들 위로 파동이 일고 명존이 나타나 덤덤히 말해주었다.

“혈원의 힘? 으하하하, 어찌 겨우 이 정도 위력을 혈원의 힘에 비할 수 있겠느냐! 이건 그냥 내가 예전에 모아둔 피를 정련한 것뿐이다. 진짜 혈원의 힘은 이것과 비교할 수도 없다.”

피의 강 속에서 누군가 반짝였다. 핏물이 양쪽으로 갈라지고 나타난 것은 마량이었다.

“당신은 선계에서 오신 분입니까?”

명존은 동공을 수축한 채 아주 천천히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 머나먼 옛날 진선의 몸이 되었지. 중요한 임무를 받지 않았다면 이런 조그만 실락계면에 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중요한 임무요? 저희 영계와 관련 일이라면 무엇인지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싫은데? 너희 같은 개미 새끼들을 먼저 죽인 다음 볼 일을 처리할 것이다. 이제 본 선이 너희를 전부 저승길로 보내주마!”

마량은 대승기 수사들의 반응은 신경 쓰지 않고 바로 한 손을 들어올렸다. 엄지와 중지를 구부리고 나머지 손가락을 펼쳐 난초 모양의 수결을 맺고 있었다.

쿠쿵.

마량의 몸에서 금색과 남색 두 종류의 주술문자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전신이 금빛 광채로 뒤덮이고 남색빛이 반짝이며 허공이 남색 화염과 금색 광채로 물들어갔다.

금색 광채 한 겹, 남색 화염 한 겹이 반복적으로 쌓여 순식간에 마량의 몸을 겹겹이 둘러쌌다. 그것이 너무 빨리 진행돼 멀리서 지켜보는 대승기 수사들의 눈이 다 어지러웠다.

대승기 강자들은 긴장된 기색으로 경계심을 키웠고, 명존은 눈빛이 서늘해졌다.

바로 이때, 마량이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 황금색으로 물든 몸으로 앞으로 나섰다.

휘이잉!

바람소리를 내며 거대해진 마량은 천장 높이의 거인이 되어 있었고 피부에 금색 문양이 가득해 주변으로 금빛과 법칙의 힘을 발산하는 중이었다.

양의미진진의 법칙의 힘이 금방 혼란해져 얼마 버티지 못하고 흩어질 것 같았다.

“영역! 말도 안되게 이곳에서 영역의 힘을 펼치고 있습니다. 계면의 압력에 제약당할 텐데 어찌 저럴 수 있단 말입니까!”

오령 부인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다른 수사들도 마량이 변신 후 펼친 신통을 알아보았기에 당황한 마음이 가득했다.

전성기 진선이나 쓸만한 술법을 펼친다는 것은 계면의 압력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하나같이 오만하고 실력에 자부심이 있는 이들이었지만 온전한 진선을 상대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하, 이게 무슨 영역이라고! 이 몸이 진정한 영역이 무엇인지 보여주기 전에 너희들이 해보고 싶은 게 있으면 얼른 펼쳐 보거라. 내가 공격을 시작하면 너희에게 차례가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금색 거인이 두 눈에서 남색 화염을 이글이글 불태우며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거인이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자 금색 빛기둥이 손끝을 빠져나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음 순간, 허공이 부들부들 떨리고 금색 광채가 터져 하늘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그 아래로 땅이 갈라지며 화산처럼 금색 용암을 뿜어내 천지가 전부 황금빛 세상이 되고 말았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마량의 능력에 은강자 등은 심장이 철렁했다.

“모두 두려워하실 것 없습니다. 어째서 계면 압력에서 벗어나 영역을 펼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결코 오래 지속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러지 않았으면 진작 실력을 발휘했겠지 왜 괴뢰들을 데리고 그리 오래 시간을 끌었겠습니까.”

명존은 난색을 표하면서도 모두의 사기를 끌어 올리려 힘차게 소리쳤다. 오령 부인 등 몇몇은 일리가 있다고 여겼지만 망설이는 이들도 있었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