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414화 (1,171/2,000)

1414화. 사슴 괴수

*

푸른빛이 스며들자 빙봉의 두 눈이 맑아졌다.

“뭔가 달라진 것이 있는지 확인해 보게.”

“정확히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불필요한 무언가가 사라진 느낌이에요. 정말 고맙습니다, 한 형! 덕분에 골치 아프던 표식을 제거했어요.”

빙봉이 자신의 상태를 살펴보고는 크게 기뻐하며 답했다.

“내 의식의 힘이 상대보다 아주 약간 강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일세. 선인이라 영계의 제약을 받았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나도 어찌할 수 없었을 것이야.”

한립은 온화하게 미소를 지었다. 몸이 굳어 움직이지 못하는 육익도 그것을 보고 내심 경악했다. 그는 육익의 심경 변화를 알아채기라도 한 듯 몸을 돌려 입을 열었다.

“육익, 네가 해줘야할 일이 있다. 일을 마치면 혈계를 풀어주고 자유의 몸으로 되돌아가게 해주지. 지금 나와 너의 의식의 차이면 네가 비승해서 선인이 되기 전까지는 구속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가 수결을 맺어 육익을 향해 손을 뻗었고 동시에 의식의 힘이 뻗어나가 주변에 방음벽을 만들어냈다. 육익은 몸이 가벼워진 것을 느꼈지만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내게 뭘 시킬 생각입니까?”

“아직 구하지 못한 재료들이 있는데 나를 대신해 다른 계면을 돌면서 구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천년 내로 모두 구해오면 조건을 충족한 것으로 하지. 물론 계약금이라고 생각하고 선인이 네게 심어 놓은 혼백 표식도 지워주겠다. 그 외에 이후 인족이 어려움에 처하면 세 번을 나서서 도와준다는 맹세를 해야 한다.”

“그게 답니까?”

한립의 말에 육익은 오히려 놀란 얼굴이었다.

“어차피 너도 대승기 수사가 되어 영총으로 삼기는 불가능하다. 혈계의 힘으로 생사를 좌우할 수 있다고 해서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한립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일단 재료 목록을 살펴보고 인족을 돕겠다고 맹세를 할지 말지 결정하겠습니다.”

육익이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주저 없이 답했다.

“그건 상관없다. 물론 맹세하기 전까지 혈계는 제거해주지 않겠지만.”

한립은 소매 속에서 하얀 옥간을 날려 보냈다. 육익은 옥간을 불러들여 이마에 대고 의식으로 내용을 훑었다.

적힌 것은 열댓 개에 불과했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대승기 경지에 이른 그도 헛웃음이 나오는 종류였다. 진작 멸종이 되거나 아주 희귀해서 어느 것 하나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대충 셈을 해봐도 그것들을 구하기에 천년이라는 기간은 그리 넉넉하지가 않았다.

“욕심이 대단하십니다. 천 년 동안 수련은 하지 말고 재료만 찾아 떠돌아다니라는 겁니까?”

“그래서 싫다는 것인가? 내가 네게 얼마나 많은 영약을 쓰고 심혈을 기울였는지 잊은 것은 아니겠지. 수차례 변이에 성공하고 영성까지 개발하게 만들어 주지 않았으면 지금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을 것 같은가?”

육익의 반응에 한립의 분위기가 서늘해졌다.

“누가 싫다고 했던가요? 하겠습니다. 천년이면 우리 같은 영수 일족에서 그리 긴 시간도 아니고, 자유를 위해서 대가를 치르는 셈 치겠습니다.”

흠칫 놀란 육익이 바로 얼굴을 풀고 대답했다.

“좋다. 너와 나 모두에게 좋은 선택을 했구나. 혼백 표식을 지워줄 테니 즉시 떠나거라. 더 늦으면 살아서 명살의 땅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 나도 보장할 수 없다.”

“알겠습니다. 천년 내로 인근 계면을 샅샅이 뒤져 원하는 재료들을 찾아 들고 가죠.”

육익도 뭔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듯 표정이 묘해졌다. 이에 한립이 미소를 짓고는 그를 향해서 손을 뻗어 의식이 변화한 수정실을 날려 보냈다.

일다경 후, 육익이 허공을 박차고 세 쌍의 날개를 펄럭여 수정빛으로 변해 날아갔다.

“한 형, 늦게 가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거란 말이 사실인가요?”

“물론 사실일세. 이 안의 모든 수사와 보물들은 때가 되면 진법과 함께 순장될 것이야.”

한립은 주변의 상맹 병사들을 보며 조소했다.

“예? 설마 상맹에서…….”

“빙봉 수사도 신속히 이곳을 떠나 인족으로 돌아가게. 이번에 많은 경험을 쌓았으니 대승기에 이르기 전까지는 외출을 삼가는 것이 좋을 것이네.”

빙봉이 깜짝 놀라 입을 떼려는데 한립이 가로막았다.

“알겠어요. 한 형께서는 대비를 하신 듯하니 그러지요. 몸조심하시고요.”

빙봉이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진지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곧장 수결을 맺어 차가운 기운을 내뿜으며 커다란 얼음 봉황으로 변해 하늘을 갈랐다.

머지않아 아주 멀리서 쿵! 하는 소리가 들리고 하얀 빛의 진법이 왜곡되다 못해 터져 그 안에 갇혀 있던 방대한 체구의 짐승이 드러났다.

사슴 머리에 곰의 몸을 하고 노란 갑옷을 입은 거대 짐승은 분노에 차 포효하며 노란 바람으로 변해 진안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이곳을 잘 지키고 있거라. 금방 돌아오겠다.”

한립은 그것을 확인하고 방음벽을 거두며 분부를 내렸다. 그도 푸른 빛줄기로 변해 사슴 머리 거대 짐승을 향해 날아갔다.

속도가 극히 빨라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양록이 변한 거대 짐승은 멀리서 날아드는 눈부신 푸른빛을 보고 흉흉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커다란 짐승의 앞발이 전방을 갈랐다.

쿠쿵.

허공에 파동이 일고 털이 북슬북슬한 거대 손이 푸른 빛줄기를 낚아챘다. 놀랍게도 단번에 공격이 먹힌 것이다.

양록은 크게 기뻐하며 속으로 법결을 발동했고 거대 손은 다섯 손가락에 불끈 힘을 주어 푸른 빛줄기를 으깨려 했다. 하지만 움켜쥐고 있던 거대 손에서 갑자기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푸른 빛줄기는 푸른 교룡으로 변해 몸을 꿈틀거리다 발톱에서 수많은 푸른 검기들을 방출했다. 두꺼운 노란 거대 손은 파고드는 검기들에 의해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크하아앙!

푸른 교룡은 검기가 사라지자 푸른 장포를 입은 청년으로 돌아갔다.

“양록 수사가 맞는 것 같은데 제 추측이 맞습니까?”

한립은 노란 바람 속 괴수를 꿰뚫어 보고 담담히 물었다.

“넌 누구냐? 감히 나를 알아보고도 앞을 막겠다는 것인가.”

“저는 인족 한립이라 하고, 이곳 진안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저도 싸우고 싶지는 않지만 맡은 바 직무가 있어 수사를 그냥 보내드릴 수가 없군요.”

한립은 미소를 머금고 여유롭게 자신을 소개했다.

“한립? 그딴 이름 들어본 적 없다. 일개 대승기 수사가 내 앞을 가로막고 어디서 건방을 떠는 것이냐!”

한립의 말을 도발로 받아들인 양록은 대노해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자 주변의 노란 바람이 그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그는 몸을 동그란 공처럼 둥글게 부풀렸다.

푸확!

거대 짐승은 숨을 가득 뿜어 수많은 노란 알갱이를 만들어냈다. 노란 모래가 바다를 이루어 한립을 향해 몰아쳤다.

한립은 돌연 팔뚝 크기의 노란 호리병박을 불러내 앞으로 던졌다.

호리병박은 뒤집어져 표면에 주술문자들이 반짝였고 바람을 타고 커져 집채만 해졌다.

한립의 손끝이 호리병박을 가리키고 있었다.

우르릉!

거대 호리병박 안에서 투명한 콩알 크기의 자갈들이 흘러나왔다. 한립이 마계에서 얻은 열살금강사(烈煞金罡沙)였다.

자갈들은 굴러 나와 수백 수천 개로 늘어나 투명한 모래의 바다를 이루었다.

“가라.”

한립의 나지막한 명령에 모래들이 하늘을 뒤덮고 출렁였다.

샤샤샤샥!

두 종류의 모래바다가 고공에서 호되게 충돌해 기괴한 마찰음을 냈고, 노란색과 투명한 색의 엄청난 빛을 폭발했다.

노란 모래바다는 쉼 없이 호랑이, 표범, 늑대 등 다양한 요수 형상을 만들어내며 투명한 모래들을 물어뜯고 할퀴었다. 투명한 모래바다는 끝을 알 수 없는 심해처럼 변화무쌍한 노란 모래들을 둘러싸고 갈아 터트려 버렸다.

그러나 승부는 금방 갈렸다.

노란 모래바다가 눈에 띄게 줄어 처음에 절반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노란 바람 속에서 양록이 아연한 얼굴을 하다 퍼뜩 한 걸음을 내디뎠다.

펑!

강렬한 공간파동이 일고 양록의 방대한 몸이 수백 장을 넘어 한립 위에 나타났다. 거대 짐승은 두 손을 교차해 아래쪽으로 태산처럼 떨어져 내렸다.

이에 투명한 두 겹의 하얀 광채가 뻗어 나와 한립을 둘러싸려 했다. 한립은 한쪽 눈썹을 끌어올리며 한 손을 들어 푸른 장검을 불러내 허공을 갈랐다.

쉬익!

기다란 푸른 빛줄기가 쇄도해 우윳빛 광채를 베었다.

쾅!

둔중한 충돌음이 들리고 푸른빛과 하얀빛이 교전하다 푸른 빛줄기가 튕겨 나갔다. 그런데 한립은 놀라기는커녕 피식 웃고 있었다.

자금색 비늘이 돋아난 그의 주먹이 갑자기 두꺼워지더니 고공으로 돌진했다. 양록도 흉흉한 웃음을 흘리고 두 손에 더욱 힘을 실었다.

거대 짐승은 일격으로 한 번에 한립을 으깨버릴 작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작고 힘도 없어 보이는 한립의 주먹이 우윳빛 광채와 부딪힌 순간 은색 문양들이 만들어낸 문양진법들이 겹겹이 나타나 믿기 어려울 정도의 괴력을 내뿜었다.

쿠와아앙!

경천동지할 굉음이 울렸다.

두 겹의 하얀 광채는 거의 한 호흡 만에 찢겨나갔고 두 손바닥은 터져나갔다. 이에 양록은 무시무시한 괴력 때문에 방대한 몸을 떨며 뒤로 밀려나야 했다.

쿵! 쿵! 쿵!

열댓 걸음을 물러나다 간신히 중심을 잡은 짐승은 한립을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그는 대뜸 포효하며 입에서 하얀 바람의 탄환을 쏘았다.

풍탄(風彈)은 순간이동을 하듯 순식간에 한립 지척에 이르렀다.

휘이잉!

풍탄이 몰고 온 바람에 날카로운 파공음이 울렸다.

퍽!

한립의 자금색 손에 풍탄은 아주 멀리 튕겨나가 폭발을 일으켰다. 땅으로 추락한 풍탄의 위력에 주변이 초토화되었다. 그 모습에 양록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때 한립이 수결을 맺어 자금색 빛으로 전신을 뒤덮자 머리에 뿔이 나고 피부에 자금색 비늘이 돋은 삼두육비의 마신(魔神)이 서있었다.

마신은 세 쌍의 눈으로 차갑게 양록을 주시하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우드득! 우득!

마신은 한 걸음씩 이동할 때마다 몸이 커져서 열댓 걸음을 걸은 후에는 양록에 버금가는 방대한 존재로 변했다.

“이것이 제가 육체적으로 가장 강할 때입니다. 바로 진정한 싸움은 지금부터라는 소리죠. 진령인 수사께서 제 공격을 몇 번이나 막을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한립이 변신한 마신이 중얼거리자 한쪽 팔에서 비취색 빛이 반짝이고 암녹색 목검이 등장했다.

웅웅 떨리는 목검에는 법칙의 힘이 감돌고 있었다.

“진마체(眞魔體)에다 현천의 보물!”

오랜 세월을 살아온 양록은 단번에 한립의 변신과 목검의 정체를 알아보고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 * *

콰쾅! 콰콰쾅!

적홍색 불구름 속에서 은색 검빛이 미친 듯이 번뜩이고 있었다.

콰릉!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모든 검빛들이 사라지고 천장 길이의 은색 거검이 나타나 불구름을 베려 했다.

불구름 속에서 기괴한 울음소리가 들리며 온몸에 적홍색 수염이 자란 교룡이 솟구쳐 입에서 뇌화 덩어리를 분출해 은색 거검을 공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검은 빛의 장막을 이루어 괴상한 교룡과 불구름을 반으로 갈라냈다. 이어 은색 거검이 모호하게 사라지고 평범하게 생긴 회색 장포 사내가 나타났다.

얼굴에 땀방울이 가득한 사내는 몸 절반이 잘려나가고 상처부위가 새카맣게 타들어가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그는 간담이 서늘해진 얼굴로 고공에서 움직임 없는 괴상한 교룡을 쳐다보았다.

“화수수(火須獸)……. 세상천지에 정말 저런 화중성수(火中聖獸)가 있었다니! 선인이 선계에서 데려온 것이 분명하겠어. 지금은 괴뢰에 불과해서 영성이 없어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구계멸진대법(九階滅眞大法)을 펼치지 않고서는 승산이 없었을 것이다.”

회색 장포 사내는 회복 비술을 사용해도 나아지지 않는 몸을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쿠르릉!

이때 고공에서 괴상한 교룡이 몸을 부르르 떨고 방대한 육체가 수많은 살점으로 폭발해 사방팔방으로 붉은 불씨를 날렸다.

흠칫 놀란 사내는 기합을 넣고 다시 한번 은색 거검으로 변해 불바다로 뛰어들었다.

장장 일다경이 지나서야 불길이 점점 줄어들다 사라졌다. 회색 장포 사내는 교룡이 있던 곳에 나타나 주위를 살펴보고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잠시 어두운 얼굴로 고민하던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둔광을 일으켰다.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