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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413화 (1,170/2,000)
  • 1413화. 혼백 봉인

    *

    보름달 위에 서서 싸움을 지켜보던 명존이 안색이 달라져 육익을 향해 말했다.

    “육익 수사, 상대가 진안의 위치를 눈치챘습니다. 한 수사와 운담, 월소 오누이가 진안 수비를 맡고 있지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수사께서 시간을 벌어주셔야겠습니다.”

    “명 형 눈에는 제 상태가 보이지 않으십니까? 무슨 수로 시간을 끌라는 말입니까.”

    “직접 상대해 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현천잔보로 제련한 진법 원반인데 이걸 발동만 하면 상대를 한동안 가둬둘 수 있습니다. 상대가 보물을 뚫고 나오려고 하면 수사는 그 전에 물러나시면 되고요.”

    “그냥 심부름만 하는 정도면 못 할 것은 없습니다. 알았으니 원반을 줘보시지요.”

    육익도 이번 작전이 성공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기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명존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진작 준비해둔 우윳빛 원반을 던져주었다.

    육익이 원반을 끌어와 살피고는 한결 풀어진 얼굴로 명존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빙봉 수사도 육익 수사와 함께 가서 거드는 게 어떻겠나?”

    명존은 빙봉에게도 함께 갈 것을 권했다.

    “알겠습니다. 우리 모두의 목숨이 걸린 일이니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야겠지요.”

    빙봉이 예의바르게 답했다. 명존은 투명하게 반짝이는 검은 깃발을 꺼내 육익과 빙봉 쪽을 가리켰다.

    쿠릉!

    그들 발밑에 파동이 일고 다채로운 빛깔의 빛의 진법이 나타나 웅! 하고 그들을 다른 곳으로 전송시켰다.

    “명존 수사, 다른 쪽은 제가 가보겠습니다. 어차피 한동안 여기서 할 일이 없지 않습니까.”

    명존의 발밑에서 헌구령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홍발 소인을 제거할 자신이 있으십니까? 반대로 상대에게 당하기라도 하면 모든 계획이 어그러집니다.”

    “기운이 요상하기는 했지만 기껏해야 영수의 영수가 화형을 한 것이겠지요. 제 공법이 마침 그런 것들과는 상극이니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제가 안 가면 수사께서 직접 나서기라도 하시려고요? 이곳에서 진법 전체의 힘을 조종해 대국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은 수사뿐입니다!”

    “알겠습니다. 뜻대로 하시지요. 제가 전송해드리면 절대 시간 끌지 마시고 강력한 수법으로 상대를 격살하고 바로 돌아와야 합니다.”

    명존이 잠시 망설이다 고민 끝에 동의했다.

    “하하, 제게 그리 믿음이 없으십니까? 한식경도 지나지 않아 돌아올 테니 걱정 말고 계시지요!”

    헌구령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후, 명존 앞에 파동이 일고 잿빛 장포를 입은 평범하게 생긴 중년인이 나타났다.

    * * *

    한립은 여전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움직임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돌연 눈을 뜨고 어딘가를 응시했다.

    그때 하늘 끝에서 쿠르릉 하는 소리와 파동이 감지되었다.

    진안과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직접적인 영향은 없었지만 상맹 병사들은 모두 정신을 번쩍 차리고 긴장된 기색으로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그러나 한립의 눈에 남색빛이 어른거리자 수천 리 밖의 상황이 또렷하게 보였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우윳빛 거대 빛의 진법이 나타나 있었다.

    멀리까지 요란하게 굉음이 들리는 이유는 그 안에 커다란 검은 그림자가 갇혀 좌충우돌하며 날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빛의 진법 위로 사내와 여인이 나란히 떠있었다. 그들은 은색 장포를 입은 여인과 하얀 장포를 걸치고 얼굴에 금색 문신이 새겨진 사내였다.

    “빙봉? 그렇다면 그 옆이 육익이겠군.”

    한립은 영목신통으로 여인을 확인하고 그 옆의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청년의 얼굴을 보고는 웃는 듯 마는 듯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잠시 상황을 헤아려보다 입술을 달싹였다.

    몇 천리 밖에 있던 빙봉의 귓가에 한립의 전음이 들려왔다. 몇 마디뿐이었지만 여인의 얼굴에 화색이 떠오르기에는 충분했다.

    “무슨 일이지? 누가 전음을 보낸 것인가?”

    육익이 빙봉이 달라짐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한 형이 진안 쪽에 있다고 오라고 하는데 같이 가보겠어요?”

    “진안을 지키는 게 그자라고!”

    육익은 슬쩍 웃으며 답하는 빙봉을 보고 안색이 달라졌다.

    “왜요? 같이 안 가볼 건가요?”

    “……나까지 가면 아래쪽의 건곤원반은 누가 조종한단 말이냐? 가고 싶으면 혼자 가거라.”

    육익은 얼굴을 굳히고 한참 만에 냉랭히 말했다.

    “한 형이 한 말을 그대로 전할게요. 이곳에서 죽고 싶으면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던걸요? 살고 싶으면 같이 가죠. 이곳에 갇힌 진령은 알아서 처리해준대요.”

    “그게 무슨 말이지? 오지 않으면 죽이기라도 하겠단 말인가!”

    “난 분명 그대로 전했어요. 어떻게 해석하든 그건 수사의 맘이겠죠.”

    험악하게 인상을 찡그리는 육익을 향해 빙봉은 웃음을 흘리며 빛줄기로 변해 먼저 날아가 버렸다. 육익은 잠시 고민하다 돌연 허공을 박찼다.

    “어차피 그쪽에서 나를 발견했다면 직접 만나보는 것도 상관없겠지. 어찌 되었든 난 이미 너와 동급 존재다. 내가 두려워할까봐?”

    그의 등 뒤로 파동이 일고 세 쌍의 투명한 날개가 나타나 가볍게 팔락였다.

    쉭!

    수정빛 덩어리가 하늘을 가르며 그 자리를 떴다. 주인을 잃은 거대 진법은 암담하게 빛을 잃고 위력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이에 갇혀 있던 검은 그림자가 뭔가 달라진 것을 느끼고는 더욱 광적으로 발버둥을 치며 괴성을 터트렸다.

    빛의 진법이 번쩍번쩍 불안하게 깜빡거렸다.

    * * *

    “한 형! 여기 계셨군요!”

    빙봉이 둔광을 거두고 제단 상공에 모습을 드러내고 한립을 향해 기쁨을 담아 외쳤다. 금색 기둥 옆의 병사들은 한립의 명대로 여인이 제단으로 다가가는 것을 막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빙봉 수사, 오랜만이군! 수행이 크게 늘었어. 역시 빙봉 일족의 체질은 대단해.”

    “이 정도로 뭘요. 한 형의 수련 속도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인데요! 멀리 있었지만 한 형의 명성은 귀가 따갑게 듣고 있었습니다.”

    빙봉은 활짝 웃으며 서서히 내려와 그의 앞에 섰다.

    “그런 명성은 거절할 수 있었다면 거절했을 걸세. 유명세를 탄 탓에 이곳에 불려와 있는 것 아닌가! 오, 육익도 오는군.”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던 그는 남색빛을 일렁이며 하늘 끝을 쳐다보았다.

    “조심하셔야 해요. 대승기에 이른 육익의 실력이 만만치 않거든요. 특히 둔술로는 진선도 한동안 따돌린 실력자예요.”

    빙봉이 그의 옆으로 걸음을 옮기며 당부했다.

    “그런 둔술이라면 나도 구경해 보고 싶군그래.”

    그 말에 한립도 흥미가 생겼다.

    쉬쉿!

    멀리서 수정빛 덩이가 도착했다. 주변의 병사들이 깜짝 놀라서 움직이려다 한립이 말에 곧 안정을 되찾았다.

    수정빛이 반짝였다! 육익은 물처럼 고요한 얼굴로 제단 상공에 나타나 한립을 내려다보았다.

    “나를 만나려거든 직접 찾아오면 되지. 이곳에서 목숨을 잃게 될 거란 건 무슨 소립니까.”

    “그 말을 믿었으니 빙봉 수사를 따라 온 것이 아닌가?”

    무표정한 육익의 말에 한립이 담담히 반문했다.

    “당신이 직접 진령을 상대하겠다고 하니 대신해서 시간을 끌어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뿐입니다. 어디 소문처럼 실력이 대단한지 구경해 보지요!”

    육익은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이제 보니 내가 널 어쩌지 못할 거라고 아주 확신하는 듯한데. 아직 체내에 내가 심어둔 혈계(血契)의 힘이 남아 있다는 것을 잊은 건가?”

    한립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하, 대승기에 이르기 전에는 혈계의 힘을 두려워해야 했지만 지금은 당신과 난 동급입니다. 혈계의 구속이 아직도 통할 거라 여기십니까?”

    “그런가? 대승기에 이르고 자신감이 넘치는구나. 하지만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다.”

    “아, 그래요? 내가 뭘 잘못 알고 있습니까.”

    육익은 전혀 믿지 않는 얼굴이었다.

    “난 지금도 네 몸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혈계의 힘을 이용해 네 생사를 좌우할 수 있다.”

    한립은 번개처럼 수결을 맺고 두 눈에서 강렬한 남색빛을 뿜어냈다. 마치 두 눈에 남색 태양이 박힌 듯했다.

    그는 가만히 있었는데 갑자기 강대한 의식이 몰아쳤다. 흠칫 놀란 육익은 한립이 이 자리에서 자신에게 손을 쓸 줄 몰랐기에 재빨리 물러나 비술을 써서 반격하려 했다.

    이때 한립의 냉랭한 코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 크지 않은 소리가 육익의 의식을 때려 마치 청천벽력처럼 울렸다.

    육익이 수결을 맺으려 하자 강대한 의식이 그를 덮쳤다.

    “멈춰라.”

    담담한 한립의 목소리에 육익의 정신에 이상이 생긴 듯 기이한 파동이 온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몸이 뻣뻣해지더니 고갯짓도 할 수 없을 만큼 통제력을 잃고 말았다.

    “당신!”

    육익은 그에게 뭔가 말하려다 혀까지 굳어 겁에 질린 얼굴로 꼼짝하지 못했다. 그제야 한립은 차분히 수결을 풀었고 옆에선 빙봉은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

    육익이 한립의 적수가 안 될 거라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제압당할 줄은 몰랐다.

    “한 형, 이게 어찌 된 일이죠?”

    “육익이 혈계의 구속력을 너무 우습게 본 것이지. 동급 수사끼리는 혈계의 힘으로 구속하기 어렵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걸 내게 적용하려 한다면 크나큰 잘못일세.”

    한립은 자신의 의식의 힘이 상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나 이런 일이 가능했다는 말은 삼켰다. 그는 빙봉을 살피다 다시 입을 열었다.

    “육익과 진선에게 쫓기고 있다고 들었는데 어찌 된 일이지?”

    “하아, 그 이야기를 하려면 육익의 협박에 뇌명대륙에서 혈천대륙까지 다녀온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네요. 당시…….”

    빙봉은 한립에게 숨김없이 그간 벌어진 일을 털어놓았다.

    “그렇게 명존의 제안을 받아들여 미끼가 된 것입니다.”

    “진선이 자네와 육익을 영복으로 삼고자 했는데 육익이 상대를 자극해 지금까지 쫓긴 거란 말이군. 그자가 자네들 몸에 무슨 수를 써두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추격이 가능했던 것이고.”

    한립은 이야기를 다 듣고는 턱을 긁적였다.

    “몸을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어떤 표식도 발견하지 못했어요. 아무래도 혼백 자체에 무슨 짓을 해둔 것 같은데 신계 비술이 정말 무서워요.”

    빙봉이 쓴웃음을 지었다.

    “혼백에 심어둔 표식이라. 내가 수사를 도울 수도 있겠어.”

    “정말이요? 명존 수사도 방법이 없다고 했었는데요.”

    “상대도 급히 표식을 심어둔 것일 테니 선계 비술이라고 해도 그리 고명한 것은 아닐 것이야. 의식의 강함을 이용했겠지. 비록 내 의식의 힘이 그에 미치지는 않지만 해결할 방법이 있을 걸세. 나를 믿어보겠다면 시도해 보지.”

    “한 형이 도와주신다면 저야 감사할 따름이지요!”

    “의식을 개방하고 내 의식의 힘에 저항하지 않으면 되네.”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가락을 뻗어 그녀를 가리켰다.

    빙봉이 눈을 감고 편안한 마음으로 한립을 향해 의식을 개방했다. 그러자 한립의 손끝에서 가느다란 수정실이 튀어나가 그녀의 미간으로 쏘아져 들어갔다.

    빙봉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가만히 있었는데 한립의 두 눈에서는 남색빛이 일렁이며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한립은 순간 미간을 찌푸리며 기괴한 수결을 맺었다.

    팟!

    투명하던 수정실이 우윳빛으로 차올라 더욱 격렬하게 떨렸다. 일다경이 흐르자 빙봉의 얼굴에도 차츰 고통스런 기색이 어렸다.

    낮은 신음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번쩍 눈을 뜨자 미간에서 수정실이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물을 끼얹은 듯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한립은 아직도 멍한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푸른 기운을 날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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