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2화. 흑예수(黑猊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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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색이 핏빛으로 바뀌고 피의 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콰르릉 콰콰쾅!
피의 강 속에는 8마리의 오조(五爪) 혈룡(血龍)이 꿈틀거리며 금색 뇌전을 뿜고 있었다. 피의 강도 유리 선박을 쫓아 명살의 땅으로 들어갔다.
선박과 피의 강 둘 다 믿기 어려운 속도로 날아갔지만 그 거리는 미세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일다경 후, 유리 선박에 탄 육익과 빙봉은 육안으로도 뒤따르는 피의 강을 볼 수 있었다.
“명존 수사가 준 피풍부(避風符)가 남았나?”
“딱 한 장요.”
“그럼 뭐 하는 거야, 어서 쓰지 않고!”
육익이 소리치자 빙봉이 즉시 소매를 펄럭여 은빛 찬란한 부적을 날렸다.
파앗!
유리선박 표면에 은색 주술문자가 달라붙어 그 안으로 스며들었다.
쿠쿵!
폭음을 낸 선박은 흐릿하게 변해 이전보다 배의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또 저 수법이군. 겨우 실락계면(失落界面) 주제에 선계에서 있을 법한 피풍부가 있어?”
피의 강 속에서 마량이 냉소했다.
“상고 선인의 유적에서 찾은 부적일 겁니다. 지금 수사들은 선계 부적을 제련할 능력이 안 되니까요.”
“그렇다고 해도 성가신 것은 마찬가지다. 저 부적만 아니었어도 한 달 전에 저것들을 잡았을 텐데!”
마량도 슬슬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었다.
“선계 부적이 있다고 해도 그 수량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저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고요.”
“그랬으면 좋겠기는 한데……. 양록, 이곳이 매복하기에 썩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
마량은 의식으로 주변 지형을 읽고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미심쩍은 것이라도 있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음산한 기운이 아주 짙어서 의식을 퍼트리는데 제약이 있는 곳이다. 함정을 파기에 아주 안성맞춤인 곳이 아니더냐.”
깜짝 놀란 양록의 물음에 마량이 섬뜩하게 눈을 빛냈다.
대번에 안색이 달라진 양록도 열심히 주위를 살폈지만 검은 바람이 자욱하게 불어서 맨눈은 물론이고 의식으로도 아주 멀리까지는 살펴볼 수가 없었다.
“그리 걱정할 것 없다. 대륙 강자들이 모여서 달려들 것은 이미 예상하고 있지 않았더냐! 이참에 깨끗이 정리하면 더는 영계에서 귀찮게 달라붙는 것들이 사라지겠지.”
“그래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주인님. 제가 알기로 영계에서 혁련상맹의 세력은 만만치가 않습니다. 어떤 방법을 준비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하하, 하계의 조잡한 방법이 내게 위협이 될 리가 없지! 그들이 법칙사슬을 이용하는 법을 알고 있다고 해도 이번에는 무용지물일 게다”
양록의 충고에도 마량은 느긋하게 웃음 지었다. 이때 피의 강은 유리 선박을 따라 명살의 땅 깊숙한 곳에 이르렀다.
그런데 느닷없이 선박이 흐릿하게 사라져 보이지 않았고, 마량은 소매를 펄럭여 피의 강을 멈춰 세웠다. 양록도 전신에 기운을 일으켜 두꺼운 노란 갑옷을 입었다.
콰릉!
바로 그 순간,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치고 천지가 뒤집히며 사방에서 새까만 흉살기들이 빼곡히 깃발을 품고 날아들었다.
깃발 하나하나가 거목처럼 두꺼워져서 피의 강을 가두려 들었다. 동시에 하늘에 푸른 보름달이 떠오르고 그 위로 십여 명의 수사들이 나타났다.
명존, 은강자를 비롯한 풍원대륙 대승기 강자들이었다. 그리고 사라졌던 육익과 빙봉이 창백한 얼굴로 그들 옆에 서있었다.
마량은 표정도 바뀌지 않고 손바닥으로 허공을 쳤다.
쾅!
피의 강이 출렁이더니 핏빛 거대 손이 솟아올라 거대 깃발들을 때렸다. 백여 개의 깃발들이 강렬한 빛을 머금어 그 앞에 거대한 오색 빛의 거울을 만들어냈다.
핏빛 거대 손은 거울을 때리며 안으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동시에 명살의 땅에서 핏빛 거대 손이 나타나 아무도 없는 지면을 내리쳤다.
주변 산이 요동치고 땅이 무너져 내려 거대한 구멍이 생겨났다.
“엇, 공간이동! 이 진법은 설마…….”
마량의 표정이 살짝 달라졌다.
웅웅웅웅!
주변의 거대 깃발들이 거세게 진동하며 오색 빛의 거울들을 계속해서 만들어 내고 있었다.
거기다 피의 강 주변으로 반짝이는 기운이 몰려들어 사람과 괴수, 건물과 같은 허상들이 어른거렸다. 쳐다보기만 해도 정신을 잃고 쓰러질 것 같은 혼란스러운 허상들이었다.
이에 안색을 굳힌 마량이 한 손으로 수결을 맺고 등 뒤로 흑백 기운을 물씬 뿜어 흑백 고대 거울을 응결했다.
손바닥 크기의 거울이 점점 커져 표면에 흑백의 태극문양을 만들어 흑백 빛기둥을 분출했다.
츠츠츳!
허공을 찢는 소리가 들리고 피의 강 주변의 오색 빛 거울들이 흑백 빛기둥에 꿰뚫려 깨져나갔다.
대승기 수사들은 그것을 보고 안색이 달라졌다.
“명 형, 양의멸진대진을 그렇게 추켜세우더니 위력이 이게 답니까! 상대가 대충 일격만 가했는데 파훼되지 않았습니까.”
대머리 거한이 서둘러 명존에게 따졌다.
“대충 일격을 가했다고요? 제 짐작이 맞다면 저 흑백 거울은 현천의 보물에 버금가는 보물일 겁니다. 허나 겨우 이 정도로 진법을 파훼했다고 생각하시면 큰 오산입니다.”
명존은 피의 강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답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대머리 거한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했고 다른 이들도 의심스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명존의 말대로 아래쪽에서 뭔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흑백 빛줄기에 오색 빛의 거울이 전부 깨져나가자 피의 강 주변에 아주 작은 하얀 주술문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드문드문 나타나던 주술문자들이 곧 쏟아져 내렸다. 법칙의 힘이 피의 강을 둘러싸고 있었다.
“흠?”
피의 강에서 마량도 온몸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끼고 서둘러 체내의 법력을 확인했다. 놀랍게도 법력의 3할이 굳어 움직여지지 않았고, 옆의 있던 양록은 더욱 심했다.
법칙의 힘이 내려앉자 몸이 태산에 깔린 것처럼 무거워져 법력 대부분을 쓸 수가 없었다.
“내게도 제약을 가하다니 선계의 진법이라 이건가? 하계에서 이런 진법을 펼치고 너희들이 재주가 없지는 않구나. 허나 진법이 완전하지 않으니 어쩌나?”
마량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미친 사람처럼 웃어젖혔다. 그의 입에서 비취색이 가득한 우산이 빠져나왔다.
쇄액!
우산이 피의 강 위쪽으로 쇄도해 거대하게 변하며 활짝 펴졌다. 그러자 비취색 우산에서 녹색 빛 장막이 흘러나와 피의 강을 보호했다. 이에 강력한 법칙의 힘이 녹색 빛의 장막에 대부분 힘을 잃고 말았다.
피의 강 속에서 꼼짝 못하던 양록은 드디어 몸이 가벼워지면서 법력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었다. 마량 역시 완전히 자유를 되찾아 타고 있던 혈룡을 맹렬히 밟았다.
크아앙! 크아아앙!
용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피의 강 속에 웅크리고 있던 8마리 혈룡들이 꼬리를 힘껏 내리치고 튀어나가 은색 뇌전을 잔뜩 터트리며 보름달 위의 강자들을 향해 날아갔다.
“공격합시다! 상대는 선계 진법의 힘을 약화시키면서 피의 강을 이용해 우리를 상대하고 있습니다. 이대로는 얼마 버티지 못할 거예요. 저는 진령들을 소환해 보조하겠습니다.”
명존이 크게 외쳐 출격을 알리고 자홍색 영패를 꺼내 던졌다.
콰릉!
영패가 머리통만한 자홍색 주술로 변했다.
쿠쿵! 쿵! 쿵! 쿵!
폭음이 울리며 피의 강 주변에서 파동이 일고 새까만 괴수들이 엎드려 있는 검은 탑이 나타났다. 괴수들은 용의 머리에 사자의 몸을 하고 눈을 감고 있었다.
“흑예수(黑猊獸) 네 마리! 하하하! 명 형, 저희까지 속이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흑예수 네 마리가 보조하면 당연히 승산이 있지요!”
은강자는 검은 짐승들의 정체를 알아보고 탄성을 터트렸다. 오령 부인과 다른 강자들도 희색을 드러냈다.
흑예수는 강력한 진령들 중 천룡, 진봉 다음으로 상위에 속하는 진령이었다. 그런 진령이 네 마리나 된다니 사기가 높아질 만했다.
대승기 강자들은 네 마리의 흑예수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검은 괴풍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비술을 펼치거나 보물을 꺼내 날아드는 혈룡들을 상대하러 나섰다.
쿠콰쾅! 쿠릉! 퍼펑!
일순간 고공에 각양각색의 빛과 핏빛 안개, 그리고 폭음이 난무했다. 하지만 네 마리의 흑예수들이 탑에서 뛰어내려 피의 강으로 접근하자 마량은 음산하게 웃었다.
피의 강에 음풍(陰風)이 불고 물결이 출렁거리더니 거산 크기의 핏빛 거인 네 명을 응결해냈다. 전신을 혈홍색 갑옷으로 가린 거인들은 흑예수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후웅!
주먹이 닿지도 않았는데 피비린내가 진동하듯 엄청난 기운이 몰아쳤다. 그러나 흑예수들은 빠르게 핏빛 기운을 피하고 순간이동을 해 핏빛 거인 뒤로 가서 날카로운 앞발을 휘둘러 거인의 목을 잘랐다.
네 거인의 목이 앞 다투어 데구루루 굴러떨어졌다. 흑예수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날렵하게 몸을 비틀어 피의 강 속으로 뛰어들려 했다.
“멈춰라.”
그때 냉랭한 마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흑예수들은 머리가 웅! 하고 울려서 잠시 몸을 가누지 못했다.
푸푸푸푹!
진령들 뒤에서 핏빛 촉수 십여 가닥이 기척도 없이 나타나 번개처럼 흑예수들을 공격했다.
크하하학!
짐승들이 나지막하게 포효하자 그들을 둘러싼 검은 기운이 대부분 흩어지고 촉수들이 변한 핏빛 화염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핏빛 화염 속에서 분노한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울렸다.
검은 돌풍이 일어 핏빛 화염을 날려 보낸 자리에는 이전보다 몇 배는 커진 검은 흑예수들이 떠있었다.
그때 목이 잘렸던 핏빛 거인들이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왔고 아까와 달리 등에서 핏빛 촉수들을 내뿜어 움직이고 있었다.
흑예수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동시에 입을 쩍 벌려 새까만 바람의 칼날들을 비처럼 쏟아냈다.
스스스슷!
바람의 칼날들은 깜빡깜빡 거리며 기이한 모습을 보였지만 핏빛 거인의 몸에 닿는 순간 그대로 녹아들고 말았다.
네 마리 검은 짐승들이 그 바람의 칼날들을 바짝 쫓아 뛰어들어 앞발을 날리고 있었다.
검은 발톱이 섬뜩한 빛을 내고 발톱 허상들이 날카롭게 허공을 갈랐다.
핏빛 거인들은 두 손을 펼쳐 핏빛 기운을 불러내고 등 뒤의 촉수들을 마구 내리쳐 핏빛 보호막을 만들었다. 또한 몸이 잘리고 찢겨도 피의 강이 출렁여 그들을 적셔주면 원래대로 돌아갔다.
이에 네 마리 흑예수들과 거인은 대치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주인님, 저도 돕겠습니다! 흑예수가 상대하기 까다롭기는 하지만 제가 그들의 약점을 압니다.”
양록이 충성스럽게 말했다.
“됐다. 저 혈령들은 제련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투경험을 쌓아야 한다. 너는 따로 해야 할 일도 있고.”
“무엇이든 분부만 내려주십시오!”
양록은 무슨 일인가 뜨끔했지만 공손히 답했다.
“암암리에 살펴보니 이 진법에는 진안이 두 곳이 있다. 네가 가서 그중 한 곳을 뚫거라. 진안만 파훼하면 진법 금제에 저항할 필요 없이 강력한 신통을 발휘해 저 녀석들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존명! 그런데 또 다른 진안은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양록이 출발하려다 망설이며 물었다.
“너는 시키는 일이나 잘하면 된다.”
“예! 지금 바로 가보겠습니다!”
순간 마량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양록이 가슴이 서늘해져 고개를 조아렸다.
“잠깐, 네게 줄 것이 있다.”
마량은 고공에 손을 뻗자 피의 강을 보호하던 거대 우산의 녹색 빛이 갈라져 그의 손에 들어왔다. 손바닥 크기의 작은 우산이었다.
또한 마량의 미간에서는 작은 수정구슬이 빠져나왔다.
“받거라! 의념주(意念珠)를 가져가면 너는 진안의 위치를 알 수 있고 나는 언제든 네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청돈산(靑沌傘) 분신은 진법금제를 막아주지만 시간에 제약이 있으니 신속히 일을 처리하고 돌아와야 할 것이다.”
“주인님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양록은 두 물건을 받고 공손히 답했다.
그는 우산을 던져 푸른 기운으로 몸을 보호하고 구슬에 의식을 주입해 빙글 돌아 진령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양록이 피의 강을 떠나 사라지자 마량은 소매 속에서 적홍색 옥함을 꺼내 들었다.
펑!
뚜껑이 열리자 금색 부적으로 봉인이 된 적홍색 소인이 나타났다.
팔뚝 절반 크기에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소인은 얼굴에 악귀 가면을 쓰고 있었고, 전신에 붉은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마량은 수결을 맺고 소인을 향해 은색 법결을 쏘아 보냈다.
팟!
홍발(紅髮) 소인의 몸에 은색 법결이 스며들자 몸에서 금색 부적들이 떨어져 내리고 악귀 가면 속으로 드러난 눈이 서서히 떠졌다.
마량은 미간에서 또 다른 작은 구슬을 뿜어 소인의 체내에 흡수시켰다.
“가서 나머지 진안을 없애라! 누구든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죽여도 좋다.”
그의 명에 홍발 소인이 눈을 번득이고 붉은 빛줄기로 변해 양록과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외부의 법칙의 힘에 전혀 구속되지 않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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