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411화 (1,168/2,000)
  • 1411화. 헌구령

    *

    “그럼 운담, 월소 오누이와 그 인족 녀석에게 진안의 현천의 보물을 지키게 한 것은 왜 그런 겁니까? 내 알기로 양의멸진대진도 사실 선계 진법 중 하나로 진안을 누가 지키고 있을 필요는 없을 텐데요. 진선이 쳐들어가면 진법이 붕괴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모호한 인영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허허, 그것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리 안배한 것입니다. 진안을 지킨다 생각하고 그 안에 가만히 있으면 그 덕에 그들이 목숨을 보전할지도 모를 일 아닙니까.”

    명존은 웃음을 흘리며 애매하게 답을 하지 않았다.

    “됐습니다. 어차피 본 맹의 그림자인 제가 그런 추잡한 계략까지 알 필요 없지요. 그저 진선을 제압하고 진혼단을 얻으면 한 알은 제 것입니다. 그게 있어야 구겁멸진대진을 대성해 선계로 비승할 기회가 생기니 말입니다. 하아, 이번 일이 성공하더라도 본 맹이 치르는 대가가 적지 않겠습니다.”

    “진혼단을 찾는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성공만 한다면 대가를 얼마를 치르든 상관없습니다. 연계가 끊긴 하계로 강림해 전력을 발휘하는 선인이 얼마나 많은 보물을 지니고 있을지 오히려 기대가 되는군요!”

    “수사의 말이 맞기를 바랍니다. 다들 출발했으니 저도 가보겠습니다. 명존 수사, 진선의 공격에 처음부터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마세요! 적당한 시기에 이를 때까지 버티지 못하면 저도 나서지 않을 것이니까요.”

    낮게 키득거린 인영은 몸을 돌려 허공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시종일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그대로 사라졌다.

    “……그 말을 그대로 돌려주지. 마지막 일격이 통하지 않으면 당신도 화를 피할 수 없을 것이야.”

    명존은 상대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중얼거렸다.

    * * *

    한립은 병사의 안내를 받아 천외천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양의멸진대진 속으로 내려갔다.

    명존이 설명한 대로 그곳은 삼만 육천 개가 넘는 진법 깃발과 원반들 그리고 만여 개의 극품 영석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진법의 두 진안은 남과 북에 위치해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한립은 한식경을 날아가서야 그가 맡은 진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금색 기둥 8개가 웅장하게 솟아 가운데 있는 거대한 제단을 둘러싸고 있었다. 병사들이 그 주위를 지키고 서 있었고 기둥에서는 여러 금제의 파동이 느껴졌다.

    우윳빛 제단은 삼각형 형태로 빛의 장막에 가려져 있었지만 안에서 무언가 반짝거리는 것이 보였다.

    “선배님, 이것이 진안 영패입니다. 이곳에 배치된 병사들은 전부 마음껏 부리셔도 됩니다. 그리고 제단은 적에게 들킬 것을 염려해 미리 은닉 금제가 발동된 상태입니다.”

    길 안내를 맡은 병사가 두 손으로 은색 영패를 바쳤다.

    “물론 그래야겠지.”

    한립은 손짓을 해 쉭! 하고 영패를 끌어왔다.

    “양해 감사드립니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병사는 뒷걸음질 쳐 물러나 둔광을 일으켜 사라졌다.

    은색 영패는 은빛으로 찬란하게 빛날 뿐 아니라 새겨진 작은 주술문자들이 아주 현묘해서 보기만 해도 머리가 띵한 기분이 들었다.

    한립은 영패를 살펴보다 다시 넣어두고 제단 쪽으로 걸어갔다.

    “대인을 뵙습니다!”

    인근에 배치된 천여 명의 병사들이 그를 향해 허리를 굽혀 예를 취했다.

    “일어들 나거라. 이제부터 이곳의 책임자는 나다. 누구든 명에 따르지 않는 자는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죽일 것이다! 계속 주변을 경계하도록.”

    병사들은 대부분 화신 연허기 경지에 합체기 수사도 여덟 명 정도 있었다. 합체기 수사들은 각각 금색 기둥을 하나씩 맡아서 지키고 있는 듯했다.

    “예!”

    병사들은 흠칫 놀라 큰소리로 답하고 원위치로 복귀해 경계를 섰다. 한립은 형체가 없는 사람처럼 병사들을 훅 지나쳐 우윳빛 제단 아래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건 선계의 양의미진진(兩儀微塵陣) 같습니다.”

    그의 의식 속에서 갑자기 해 도인이 말을 걸어왔다.

    “양의미진진? 양의멸진대진이 아니란 뜻입니까?”

    그 말에 한립이 의식으로 반문했다.

    “아닙니다. 양의멸진대진도 선계의 진법이기는 하지만 기능이 단순해서 적을 사살하는 데만 쓰이고 위력도 양의미진진의 1, 2할밖에는 되지 못합니다.”

    “그럼 양의미진진은 어떤 기능이 있습니까?”

    “적을 가두고, 약화시키고, 자폭할 수 있습니다. 어떤 기능을 사용해도 평범한 선인들은 골치 아파할 만한데, 특히 마지막 자폭 기능의 위력은 진안에 위치한 보물 혹은 생령이 강렬할수록 증폭되어 고계 선인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생령을 제물로 바쳐 자폭하는 기능이 있다고요?”

    덤덤한 해 도인의 말에 한립은 흠칫 놀랐다.

    “그렇습니다. 보통은 강력한 보물이나 진귀한 재료를 진안에 두고 제물로 사용하지만 강력한 생령도 가능합니다. 일반적으로 제물을 바치는 기능이 작동되면 진안을 중심으로 반경 백리 내의 모든 제물이 진법의 힘에 의해 재가 될 것입니다.”

    “이제야 명존이 왜 나와 운담, 월소에게 진안을 떠나지 말고 잘 지켜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는지 알겠습니다.”

    한립은 겉보기에는 무표정했지만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양의멸진대진과 양의미진진 모두 하계에서 펼치기 쉽지 않습니다. 진안 주변만 살펴보았지만 제가 아는 양의미진진과 약간 차이가 있기는 합니다.”

    “하계의 재료가 한정적일 테니 당연히 그러겠지요. 아마 부족한 재료는 다른 대체품으로 간신히 선계의 진법을 펼친 것일 겁니다. 그렇다면 기능과 위력은 원래 것에 못 미치겠군요. 또 다른 점이 있습니까?”

    “저는 전문적으로 전투를 하던 위선뢰이지 진법괴리가 아닙니다. 이게 어떤 선계 진법인지 알아보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해 도인은 담담히 대답했다.

    “그렇다면 일이 성가시게 되었습니다. 저도 진선을 제압하고 싶지만 절대 제물이 되어 그 자와 동귀어진 할 생각은 없어서 말입니다.”

    “수사께서 이곳에 남아 스스로 목숨을 보전하고 싶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한립의 목소리가 싸늘해지자 해 도인이 한마디 덧붙였다.

    “어떤 방법입니까?”

    “제가 진안의 진법을 조작해 수사가 있는 위치를 배제할 수 있습니다.”

    “확실한 것입니까?”

    한립이 머뭇거리며 묻자 해 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렇게 해보죠.”

    “이 방법을 쓰려면 서금충왕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만이 아무 기척 없이 이 일을 해낼 수 있을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금동, 해 형의 분부에 따라 일을 좀 해야겠다. 한 치의 오차 없이 처리해야 할 것이야.”

    한립은 과감히 결정을 내리고 속전속결로 빠르게 움직였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가 가만히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말이다.

    금색 기둥 근처에서 미세한 파동이 일고 쌀알 크기의 금색 딱정벌레가 나타나 기둥 표면을 사각사각 긁어 흔적도 없이 문양을 고쳐나갔다.

    금색 딱정벌레는 의식으로 해 도인의 명을 받고 있었다.

    * * *

    명살의 땅의 또 다른 고공.

    은강자를 비롯한 대승기 강자들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 다들 한 마디도 하지 않아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팟.

    돌연 파동이 일고 명존이 소리 없이 나타나 그들과 합류했다.

    “명 형! 어찌 홀로 오시는 겁니까?”

    오령 부인이 즉시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다른 세 분은 양의멸진대진의 진안을 지키기 위해 가셨습니다. 진안이 안전해야 진법도 무너지지 않겠지요. 그래야 우리도 진안을 신경 쓰지 않고 전력으로 선인과 싸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명존은 태연하게 답했다.

    “뭐라고요? 한 수사와 그 오누이가 빠지면 전력이 급감하는데 문제가 없겠습니까? 아니, 헌구령 수사는 또 왜 안 보이는 것이고요!”

    은강자가 인상을 찡그렸다.

    “선계의 진법인 양의멸진대진이야 말로 선인을 상대하기 위한 핵심입니다. 진안을 지킬 사람이 꼭 필요하단 뜻이지요. 그리고 헌구령 수사에 대해서는 더더욱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이미 이곳에 와계시니까요.”

    명존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또 다른 사내의 말소리가 허공에서 들려왔다.

    “크큭, 다들 제가 싸움을 앞두고 무서워 달아나기라도 했을까봐 그러십니까? 여기 있는 모두가 겁을 먹고 물러서도 선인을 향해 달려들 마음에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어디 선인을 죽일 기회가 쉽게 오던가요?”

    “이 말투하며 목소리는 헌 수사가 맞네요. 여기까지 오셨는데 나머지 수사들과 인사라도 나누시지 그러셨어요.”

    오령 부인이 얼굴을 풀고 두리번거렸다. 다른 이들도 또 한 명의 대승기 강자가 도착한 것에 한시름 놓았다.

    “뭐, 혼자 다니는 게 습관이 된지라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요. 인사는 됐고, 다들 때가 되면 제가 나설 거라는 것만 알아두시면 됩니다.”

    헌구령의 등장에 다들 할 말을 잃고 시선을 주고받았다. 또한 이 많은 강자들 사이에서 들키지 않는 상대의 은신술에 놀라워했다.

    * * *

    명살의 땅 변두리.

    멀리 하늘 끝에서 푸른빛이 날아들어 명살의 땅으로 진입했다. 둔광이 가시고 나타난 것은 유리 선박이었다.

    그 위에 창백한 낯빛의 육익과 빙봉이 타고 있었다.

    “큰일 날 뻔했구나! 미치광이가 힘만 넘쳐서는 법력을 그렇게 탕진하고도 이전보다 더 쌩쌩해져서 돌아오다니. 하아,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조금 기다렸다 거리를 좁히고 안으로 들어가자.”

    육익은 뒤쪽을 경계하며 두려운 기색을 드러냈다.

    “상맹에서 내준 단약과 부적을 전부 쓴 것은 물론이고 약간 회복했던 본원의 힘도 소모했어요. 이번에 상맹이 저 미치광이를 잡지 못하면 우리는 죽은 목숨일 겁니다.”

    빙봉이 어두운 얼굴로 답했다.

    “명존, 그 늙은이가 대륙의 내로라하는 강자들은 죄다 불렀다고 하지 않았나? 그중에 내 옛 주인도 있겠지. 그런 자가 합류했으면 실패하지는 않을 게야.”

    “그렇게 한 형에게 믿음이 깊은지 몰랐네요.”

    육익의 말에 빙봉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흥, 안 그랬으면 명존에게 그런 조건을 걸었을 리도 없겠지. 나도 천 년 간 수행만 대성하면 영계에서 더는 두려워할 자가 없을 것이다!”

    “그래요? 내가 볼 때 한 형의 역천의 자질이면 그 천 년 간 더 상상도 못할 경지에 이르고 만년 내로는 선계 비승도 가능할 것 같은데요?”

    “선계 비승! 으하하하, 선계 비승을 쉽게도 말하는구나. 영계의 대승기 수사가 수백은 되는데 근 십만 년간 선계 비승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았다. 내 옛 주인이 아무리 역천의 자질을 타고났어도 어림도 없는 소리지.”

    빙봉이 비꼬는 소리에 육익은 광소를 터트렸다.

    “하지만 난 그래도 한 형이 선계에 이를 수 있다고 믿어요. 이번에 우리 둘 다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이걸로 내기를 하는 건 어때요?”

    “무슨 내기를 말하는 거지?”

    “한 형이 만 년 내로 선계로 비승해 진선의 몸이 되느냐 마느냐로 내기해요.”

    빙봉은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내뱉었다.

    “무엇을 걸고?”

    육익이 재미있다는 듯 냉랭히 물었다.

    “내게 줄곧 쌍수 반려가 될 것을 요구했잖아요. 내가 진다면 청혼을 수락하겠어요. 하지만 한 형이 만년 내로 비승에 성공하면 앞으로는 내가 어딜 가든 피해 다니겠다고 약속해요. 나와 어떤 다툼도 벌이지 않고요. 물론 그 만 년 동안은 나를 귀찮게 해서도 안 되겠죠.”

    빙봉은 거침없이 조건을 제시했다.

    “수사야말로 내 옛 주인에게 믿음이 상당하구만!”

    육익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왜요? 내기에 질 것 같나요? 그렇게 자신 없으면 하지마세요. 그냥 얌전히 기다리다 한 형에게 잡혀 영총이나 되던가요.”

    “그까짓 내기 못할 게 무엇이냐. 다만 조건을 바꿔야겠다. 너도 내기에서 지면 그 대가를 치러야겠지? 만 년 동안 그 자가 비승하지 못하면 너를 처가 아니라 시첩으로 맞을 것이다. 이후 무슨 명령이든 내 말을 따라야겠지. 그래도 내기를 하겠다면 심마를 걸고 맹세해야 한다.”

    “시첩? 심마를 건 맹세? 어디 한번 해보죠!”

    빙봉은 그의 모욕적인 요구에도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그 모습에 육익은 내심 깜짝 놀랐지만 자신이 질 확률은 희박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그들은 각자 정혈을 내뱉어 비술로 심마를 건 맹세를 했다. 내기를 마친 육익과 빙봉은 각자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무언가를 감지한 육익이 뒤쪽을 쳐다보았다.

    거의 동시에 하늘 끝이 어둑해지고 세찬 파도가 밀려오듯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왔어요! 어서 달아나요!”

    빙봉의 외침에 육익이 붉은 단약을 하나 삼키고는 수결을 맺었다. 그러자 유리 선박이 웅! 소리를 내며 출발해 명살의 땅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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