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9화. 천외천(天外天)
*
보름이 훌쩍 지나 대륙 전체가 혼란스러워졌다.
풍원대륙에서 환술로는 제일로 추앙받던 세화족(細禾族) 주성이 피의 강으로 변하고 천만 세화족 족인들이 핏물로 변해 사라졌기 때문이다.
성을 지키던 대승기 장로 두 명은 화를 입기 직전에 달아나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고 한다. 이를 시작으로 혈제 흉마에 대한 소문이 풍원대륙에도 퍼지기 시작했다.
세화족 인근 중소 종족들은 겁에 질려 소문의 진상을 알아보려 했다.
그리고 열댓 명의 풍원대륙 강자들은 상맹이 각지에 설치해 둔 전송진을 이용해 밤낮없이 명살의 땅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호오, 이렇게 짙은 흉살의 기운이라니. 이곳이 명살의 땅이구나.”
한립은 끝없이 펼쳐진 암녹색 땅을 보며 중얼거렸다. 견문이 넓은 그도 이렇게 흉살의 기운이 농염한 곳은 처음 보았다.
저계 수련자가 무턱대고 돌아다니다가는 광증을 일으키거나 죽을 수도 있었다.
한립은 위험지대로 이름을 날리는 명살의 땅을 둘러보다 순간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방대한 물체가 날아들며 길고 짧은 굉음이 번갈아 울리고 있었다.
한립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서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멀리서 먼지가 뿌옇게 일며 거대한 지렁이가 꿈틀꿈틀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다. 땅속에서 무언가 거대한 물체가 움직이는 듯했다.
잠시 후 누런 먼지 뒤에서 수십 장 높이의 은색 거인이 펄쩍 뛰어올라 모습을 드러냈다.
청록색 머리카락에 사자의 입과 소의 눈을 지닌 거인은 웃통을 벗고 있었고 허리춤에 푸른 천을 둘러 겨우 중요한 부위만을 가렸다.
근육과 핏줄이 울룩불룩 튀어나온 몸은 은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반짝였고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쿵! 쿵! 땅이 울렸다.
한립이 거인을 보고 놀란 기색을 보일 때, 거인이 성큼성큼 지렁이 먼지를 따라잡아 두 주먹으로 지면을 퍽! 퍽! 내리쳤다.
땅이 울리고 산이 흔들릴 정도의 충격이 전해졌다. 이에 거인을 중심으로 땅이 매몰되고 작은 분지가 형성되었다.
캬악!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노란 거대 짐승이 땅속에서 솟구쳐 필사적으로 명살의 땅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은색 거인은 예상했다는 듯 호탕하게 웃으며 거대한 발로 짐승을 짓밟았다.
쾅!
발길질 한 번에 노란 거대 짐승은 몸을 부르르 떨며 나가떨어졌다. 땅에 떨어진 짐승의 몸 절반이 흙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그제야 한립은 노란 거대 짐승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크기가 매우 큰 노란 거북이었다.
등딱지는 움푹 들어가 있었고 머리에 솟은 뿔은 거인의 은색 발에 밟혀 머리를 등딱지 안으로 숨길 수도 없었다.
은색 거인은 팔을 돌려 은색 주먹 허상들을 미친 듯이 뿜어냈다.
퍼퍼퍼퍽!
은빛이 노란 거북을 뒤덮고 사방팔방에서 강력한 타격을 날렸다. 한눈에 보기에도 대단한 보이는 거대 거북은 주먹 허상 속에서 곤죽이 되어 갔다.
펑!
은색 거인은 부서진 등껍질 틈에서 사람 머리통만한 노란 구슬을 찾아 들어 올렸다. 그는 구슬을 보자마자 입에 넣어 삼켰고 노란 기운이 돌다 사라졌다.
거인은 할 일을 다 마치고 나서야 고개를 돌려 한립을 보았다.
쿵! 쿵!
은색 거인은 한립 쪽으로 걸어오며 천둥소리와 같은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수사께서도 천외천으로 가십니까? 저는 천기족(天忌族) 은강자입니다!”
“천기족의 은 수사셨군요. 저는 인족의 한립이라 합니다.”
한립이 가볍게 숨을 내쉬고 두 손을 모으고 인사했다.
“아! 마계로 가서 명충모를 때려잡았다는 한 수사 아니십니까! 이거 참 반갑습니다.”
그 말에 은색 거인이 수결을 맺고 빠른 속도로 몸을 줄여 한립과 비슷한 체격으로 변해 그 자리에 섰다.
“과찬이십니다, 은 형. 명충모를 죽일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수사의 도움과 기연이 따라주었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 변신하신 모습이 천기족의 명성이 자자한 조화신(造化身)인가 봅니다. 진작 명성은 들어왔는데 직접 보니 역시 남다르군요.”
한립도 미소를 짓고는 예의바르게 상대를 칭찬했다. 천기족은 족인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개개인의 자질이 뛰어나고 수련 속도가 월등히 빨랐다.
거기다 일정 이상 성취를 이뤄 조화신을 펼칠 수 있게 되면 실력이 순식간에 몇 배로 증가했다. 게다가 풍원대륙의 신비한 종족 중 하나로 불려 고계 수사를 만나보기가 극히 어려웠다.
“하하, 겸손하시기도 합니다. 오는 길에 토구수(土龜獸)를 만났는데, 이놈의 내단이 제게 꽤 쓸모가 있어 허겁지겁 쫓다보니 수사와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인연인데 함께 가시지요!”
“은 수사의 제안을 제가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한 형, 이제 보니 성격이 시원시원하니 아주 좋습니다! 가는 길에 혈제 선인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명존 그 늙은이가 보내온 소식은 너무 간결해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저는 명존 수사를 직접 만나 뵈어 들은 바가 있습니다. 궁금하신 것이 있다면 물어보셔도 좋습니다.”
“아, 미리 감사드립니다! 제 벽파차(碧波車)를 타고 같이 출발하시죠.”
은강자는 한립의 대답에 기뻐하며 입에서 비취색 마차를 뿜어냈다. 삼각형 모양의 마차를 네 마리의 은갑 꼭두각시들이 지키고 있었다.
한립은 곧장 몸을 날려 은강자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 * *
반나절 후, 명살의 땅 중심지.
검은 바람을 뚫고 비취색 마차가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휘잉!
돌연 검은 바람이 옅어지며 괴이한 풍경이 펼쳐졌다. 고공에 선이라도 그은 것처럼 흑백으로 천지가 갈린 것이다.
아래쪽은 여전히 검은 바람이 자욱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위쪽은 하얀 빛의 장막이 드리워 그 안에 크고 작은 바위들이 보였다.
그 바위들은 마치 허공에 떠다니는 섬처럼 전당과 누각 등 여러 건물들이 얹어져 있었다.
“저곳이 천외천인가 봅니다. 이름 그대로군요!”
한립이 비차에서 고공을 올려다보고 감탄했다.
“신기하기는 합니다. 듣자니 상고시대 때는 거대 일족의 금지였다던데, 어쩐 일인지 별안간 그 종족이 사라지고 이곳에 검은 흉살의 기운이 들어차면서 생령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고 합니다.”
옆에서 은강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일족이 삽시간에 사라졌다니 저항할 수 없는 천재(天災)를 입었겠군요.”
“하하, 그럴지도 모르지요. 오! 상맹에서 마중을 나오나 봅니다.”
은강자가 위쪽을 가리키자 빛의 장막에서 하얀 선박이 나와 그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둔광이 가시자 선박에서 남색 장포를 입은 사내가 한립과 은강자를 알아보고 서둘러 예를 올렸다.
“인족의 한립 선배님과 천기족의 은강자 선배님이시지요. 저는 명존 대인의 명을 받들어 두 분을 모시러 나왔습니다.”
“나를 아느냐? 명 수사가 우리의 용모를 알려주었나 보군. 알았으니 앞장서거라.”
은강자는 무표정하게 분부를 내렸고 한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 모시겠습니다.”
남색 장포를 입은 사내가 공손히 답하고 선박의 방향을 틀어 먼저 앞으로 나아가자 비취색 마차가 그 뒤를 쫓아갔다.
일다경 후, 비취색 마차는 천외천 속의 드넓은 바위 위에 도착했다.
그 위에는 우윳빛 거대 전당이 세워져 있었고 입구에는 완전무장한 상맹 무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은강자는 마차를 거두고 한립과 함께 거침없이 전당 안으로 들어갔다. 긴 회랑을 지나 천장이 높다란 대청에 이르자 명존이 그들을 맞이했다.
“한 수사, 은 형, 두 분이 어떻게 같이 오십니까?”
상석에 앉아 다른 수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명존이 한립과 은강자를 보고 기뻐하며 일어났다.
“으하하, 한 수사와는 명살의 땅 근처에서 우연히 만나서 함께 오게 되었습니다! 명 형은 수천 년 만에 뵙는 데 풍채가 그대로십니다!”
은강자가 웃으며 안부를 나누었고 한립도 미소로 화답했다. 그는 조용히 대청 내의 다른 수사들을 살폈다.
그곳에는 명존 이외에 다섯 명의 수사들이 있었는데 사내 셋에 여인 둘이었다.
각각 우람한 체구에 검은 갑옷을 입은 흉악한 인상의 사내와 금색 용머리가 새겨진 지팡이를 든 노인, 그리고 등에 기괴한 푸른 죽통을 멘 청수한 유생 복장의 젊은 청년이었다.
두 여인은 인상은 다르지만 전부 미인이었다.
한 명은 보름달처럼 뽀얀 얼굴의 노란 도포를 걸친 젊은 여 도사였고, 연두색 궁장 차림의 여인은 머리에 진주와 비취로 치장하고 있었다.
“은강자 수사! 늦게도 도착했습니다. 싸움을 그렇게 좋아하면서 웬일입니까?”
검은 갑옷을 입은 거한이 반질반질한 머리를 문지르며 아는 척을 해왔다.
“하하, 오는 길에 일이 있어 며칠 늦게 도착했습니다. 안 그랬으면 화영 수사보다 빨리 왔을지도 모르지요.”
은강자는 대머리 거한과 친숙한 사이인지 자연스레 답했다.
“은 형의 조화신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만날 기회가 없을까 했는데 신계 신선 덕에 뵙습니다.”
연두색 궁장 여인도 웃으며 말했다.
“오 부인의 본명 신통이야말로 절색이라 할 수 있지요. 제 보잘것없는 신통이야 언급할 것도 없습니다.”
뜻밖에도 은강자는 궁장 여인을 깍듯이 대하며 예의바른 웃음을 지었다. 다른 이들도 은강자와 말을 섞지는 않았지만 그를 대하는 표정이 낯설어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 모인 대승기 수사들은 실력이 출중한 만큼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살아왔고 같은 대륙에 살며 어떻게든 마주치거나 교류할 일이 벌어지고는 했다.
그러나 반대로 한립은 모두에게 신선한 얼굴이었다.
“명 형, 이 분은 누구신지요? 저는 처음 뵙는 것 같군요.”
여도사가 기다리고 있다가 미소를 띠고 소개를 부탁했다.
“하하, 이 분은 인족의 한립 수사십니다! 대승기에 이른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명성은 못 들어본 분은 없을 거라 예상합니다.”
“한립 수사라면 마계에서 명충모를 참살했다는 인족 대승기 수사가 아니십니까?”
명존의 대답에 여 도사도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 혼자서 해낸 일이 아닌데 소문이 과장되었더군요.”
한립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고, 대머리 거한과 궁장 여인도 놀란 눈빛을 보냈다. 명충모가 얼마나 강력한 존재인지는 대승기 수사인 그들도 알음알음 알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명충모는 선인도 제대로 굴복을 시키지 못했던 존재 아닙니까. 수사가 합류하신다고 하니 부담이 많이 줄어든 기분입니다!”
대머리 거한이 신기하다는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한 수사, 대승기에 이른지 얼마 되지 않으셔서 이 중에 낯선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노부가 소개를 해드리겠습니다. 이분은 거수족(巨手族) 화영 수사십니다. 은신술로는 대륙에 따를 자가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요. 이분은 고려족(古黎族) 오령 부인이십니다. 본명 신통인 축융신화(祝融神火)의 위력이 무궁무진해서 바다를 끓게 만들고 산을 녹인다는…….”
명존은 대머리 거한과 궁장 여인을 시작으로 한립에게 대청 안 수사들을 소개해 주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영계의 최강자들이었다.
“명 형, 진선을 상대하는데 인원이 이게 전부는 아니겠지요?”
은강자가 한립과 자리를 잡고 앉아 물었다.
“물론 아닙니다. 금석족(金石族)의 앵 수사, 천선족(天蟬族)의 운담, 월소 수사 및 헌구령 수사도 곧 도착할 예정입니다.”
“운담, 월소 수사!”
“헌구령!”
은강자와 청년 유생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한립을 제외한 다른 이들도 그들의 이름을 듣고 안색이 달라졌다.
“그 피바람을 몰고 다니는 운담과 월소 오누이를 어떻게 설득하신 겁니까?”
청년 유생은 이상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흥, 헌팔령이 벌써 이름을 헌구령으로 갈아치웠습니까? 또 바깥 계면으로 가서 진령을 죽였나 보군요! 제정신이 아닌 자가 실력만 늘어납니다. 저도 그자를 어찌 끌어들이셨는지 궁금합니다.”
은강자도 난색을 표하며 비슷한 질문을 했다.
“특별할 게 있겠습니까. 운담, 월소 수사는 본 맹이 이후 그들을 대신해 세 가지 일을 처리해 주기로 하였습니다. 마침 본 맹에 부탁할 중요한 일이 있었더군요. 헌구령 수사의 경우는, 설득할 것도 없었습니다. 진선의 존재를 언급하자마자 수락하던데요? 허허, 그런 인물에게는 선인과 싸울 기회 자체가 가장 큰 보상이 아니겠습니까.”
명존이 담담히 답했다.
“하아, 그 미치광이의 성격이면 그것도 말이 되겠습니다.”
은강자는 고개를 주억거렸고, 청년 유생은 얼굴색이 수시로 달라지다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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