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8화. 명살(鳴煞)의 땅
*
“마음껏 비술을 펼치셔도 됩니다. 제가 책임지고 호법을 서겠습니다!”
“좋다. 적당한 곳을 찾아 바로 시행하자꾸나.”
양록의 충성스런 답변에 마량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둔광을 일으켜 산맥으로 진입했다.
몇 시진 후, 산맥의 거대 산봉우리.
흑포 청년 앞에 핏빛 악귀 얼굴이 어른거리는 흑백 수정구슬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마량이 손가락을 들어 구슬을 가리키자 악귀 얼굴이 어느 한 방향을 고집스레 노려보며 핏빛 구슬을 뿜었다. 구슬은 소리 없이 청년의 미간으로 스며들었다.
“과연 그 녀석들이 이곳에 와있었어. 흠? 방향이 혁련상맹이 있는 곳과 비슷한데. 설마 그곳에 숨어든 건가.”
마량은 뜻밖이라는 얼굴이었다.
“상맹이 주인님을 해치려 계략을 꾸몄다면 그들을 비호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잘 되었구나. 성가신 것들을 같이 해결하면 되겠어.”
마량은 수정구슬이 변한 흑백 기운을 뱃속으로 흡수하고는 자신의 머리를 내리쳤다.
푹!
금빛 속에서 오색 광채를 내뿜는 소인이 떠올랐다. 마량과 똑같은 생긴 소인은 유리처럼 투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작은 손이 허공을 가리켜 금색 부적을 뿜어냈다.
소인은 숙연한 얼굴로 수결을 맺고 손가락을 움직여 금색 부적에 법결을 던져 넣었다. 그러자 부적이 진동하며 안에서 회백색 그림자가 빠져나왔다.
회백색 그림자는 준수하게 생긴 청년의 허상으로 감정이 담기지 않은 얼굴로 허공에 떠있었다.
“가라.”
소인이 낮게 기합을 넣자 오색 기운이 미친 듯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말에 청년 허상이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쏜살같이 튀어 나가다가 흑백의 빛의 실에 묶여 끌려왔다.
“하하하! 드디어 찾았다! 이제 곧 선계로 돌아갈 수 있겠어!”
소인은 크게 기뻐하며 웃음을 터트렸고 수결을 변화해 금색 부적과 청년 허상을 없앴다.
마량이 금색 부적으로 하계로 내려온 목표를 감응한 순간, 영족의 금지(禁地) 안에서는 부적 사슬로 속박된 준수한 청년이 정신을 잃었다.
돌연 그의 미간에 금색 문양이 번득 나타나고 눈꺼풀 아래 눈알이 움직였다.
펑!
준수한 청년 앞에 파동이 일고 백색 장포 소인이 불쑥 나타나 긴장된 얼굴로 상대를 살폈다.
한참 후에도 달라진 점을 찾지 못하자 백색 장포 소인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수결을 맺고 주문을 외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얀 빛줄기가 빠르게 날아들어 얼음 산봉우리 앞에서 소인과 마주했다.
“무슨 일입니까?”
둔광이 가시고 백색 장포 노인이 소인을 향해 물었다.
“조금 전 이상이 있어 금제를 검사해 보았는데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외부에 문제가 있는 것이냐?”
“바깥에도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제가 줄곧 입구에 있었는걸요.”
소인의 물음에 백색 장포 노인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그럼 조금 전 그것은 뭐였단 말인가. 분명 내게 완전히 봉인당해 의식도 움직일 수 없을 터인데…….”
“이상한 일이기는 합니다.”
“최근 무언가 큰일이 발생한 적은 없었고?”
“큰일이요? 없습니다. 마족이 물러가고 인족의 세력이 강성해진 것 외에는 아주 평화롭습니다.”
백포 노인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답했다.
영왕의 실력은 대단했지만 영계에서 극도로 몸을 사리고 있었고, 혁련상맹은 평소 그와 왕래가 없었기에 선인의 일에 대해 따로 알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착각이었는지도 모르겠구나. 다시 한번 금제를 점검하도록 하거라.”
소인은 조금 편안해진 얼굴로 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이곳을 지키는 병사들의 수를 증원하겠습니다.”
백색 장포 노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소인은 펑! 하고 터져 얼음 산봉우리 속으로 사라졌다.
백포 노인도 주변을 살피다 빛줄기로 변해 왔던 곳으로 돌아갔다.
* * *
혁련상맹 대청 안.
“혈제 흉마가 벌써 풍원대륙에 이르러 본 맹을 향해 접근하고 있단 말인가! 그것도 보름이면 도착할 것이라고?”
의자에 앉아 있던 명존이 벌떡 일어나 중년 사내를 향해 말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갑돈족 제일의 태상장로가 이미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저희 쪽에서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그 흉수의 인상착의가 혈제 흉마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어째서 그 소식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인가!”
“대인, 혈제 흉마의 이동 속도가 괴이할 정도로 빠릅니다. 상대가 모처의 전송진을 사용할 때 본 맹 제자가 그 얼굴을 알아보지 않았으면 지금까지도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흉마가 본 맹을 향해 오고 있다는 소식의 진위는 확인해 보았고?”
“사실인 듯합니다. 그자가 이동하는 경로에 본 맹을 제외하면 마땅히 큰 세력이 없습니다. 설마 본 맹이 강자들을 모아 대적하려는 계획을 알아차린 것일까요?”
“아마 그럴 것이네. 목숨을 잃었다는 갑돈족 제일 태상장로 쪽에서 정보가 새어나갔을 것이야.”
명존의 이마에 주름이 깊어졌다.
“이제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흉마가 이리로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강자들을 모으기에 보름은 너무 부족한 시간입니다!”
중년 사내는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무엇을 그리 걱정하는 겐가? 적을 대적할 힘이 없으면 물러서면 그만인 것을. 그리하면 강자들이 모일 시간은 벌 수 있을 걸세.”
“물러선다는 말씀은…….”
“우리는 다른 세력들과는 기반이 다르네! 수많은 족인들이 고정된 영토에서 살아가는 거대 종족에 비해 유동적이지. 우리가 숨어든다면 흉마라고 본 맹을 색출해낼 방도가 있겠는가?”
“정말 좋은 생각이십니다! 제가 바로 철수 계획을 진행하겠습니다!”
“서두를 것 없네. 본 맹의 인원을 철수하는 것 외에 신속히 각 종족의 강자들에게 소식을 보내 전부 명살(鳴煞)의 땅에 있는 천외천(天外天)에 결집할 수 있게 안배해 주게. 흉살기가 농염한 그곳이라면 본 맹이 오랜 세월 봉양한 상고 진령들을 소환하기에도 적합할 것이야.”
명존은 차분하게 명을 내렸다.
“흉마를 대적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기는 합니다만, 그자가 그곳으로 오겠습니까?”
중년인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걱정 말게. 육익과 빙봉 수사를 본 맹으로 청한 것이 바로 이때를 위함이 아니겠는가?”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중년 사내가 물러가고 명존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 * *
인족, 원합도, 청원궁.
한립이 자금색 뇌전 덩어리를 들고 방석에 앉아 있었다. 주먹 크기의 뇌전구슬은 빛이 반짝이는데 신기하게도 아주 조용했다.
그는 신중하게 자금색 뇌전구슬을 살피다 손목을 털어냈다.
쿵!
뇌전 구슬이 날아올라 폭발했다. 자금색 뇌전들이 신기하게도 허공에 회백색 구멍을 뚫어 공간파동이 넘실거렸다.
“직접 허공을 부수고, 정순하기로는 벽사신뢰의 본래 위력을 훨씬 넘어서는구나.”
한립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 그의 품에서 웅웅 진동이 들려오더니 푸른 부적이 날아올라 글자들을 만들어냈다. 한립은 내용을 확인하고는 표정이 미미하게 달라졌다.
“진선이 풍원대륙에 발을 디뎠다면 갈 수밖에 없겠지. 인족에 영향을 미치기 전에 영계에서 쫓아내거나 제압하는 것이 상책일 테니.”
생각에 잠겨 있던 한립이 손끝으로 푸른 문자들을 가리키고 무어라 적었다.
파앗!
푸른 문자들은 흐릿하게 다른 글귀로 바뀌어 그대로 사라졌다.
* * *
반 시진 후, 청원궁 대전 안.
한립이 자리에 앉아 수사들에게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 옆에는 남궁완이 평온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해대소와 공어족 족장의 손녀인 남약 등 여러 명의 제자들이 서있었다.
폐관 수련 중이던 은월도 자리에 앉아 차분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번 원행은 굉장히 위험할 것으로 예상된다! 목숨을 부지할 자신은 있지만 몇 가지 일들을 당부해 놓는 것이 좋겠지.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궁 안의 모든 일들은 완이가 처리하고 월천과 다른 집사들이 보조를 한다.
은월은 수련이 중요한 고비에 이르렀으니 폐관수련에 집중하면 될 것이고. 내게 일이 생겨 한동안 청원궁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면 너희들이 공동으로 이 부적을 발동해 안에 적어 놓은 분부대로 따르면 된다.”
한립은 손바닥을 뒤집어 자금색 부적을 꺼냈다. 뇌전이 번득이는 신기한 부적이었다.
쉬익!
부적은 대전의 대들보로 날아가 깊게 박혔다. 원래부터 부적 문양이 새겨져 있던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웠다. 이에 제자들은 아무런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고 남궁완과 은월은 시선을 마주치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튿날 아침, 한립은 홀로 원합도를 떠나 천연성 방향으로 날아갔다. 이 같은 일이 풍원대륙 몇몇 종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한 종족의 수장이자 기둥인 대승기 강자들이 소식을 전해 듣고 고민을 하다 대부분 명살의 땅에 위치한 천외천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자신의 실력을 자신하는 몇몇 수사들은 아주 신이 나서 떠나기도 했다. 솔직히 살아있는 선인과 싸워보는 것은 일생에 다시없을 기회였다.
운이 좋다면 선인을 죽이고 그가 지닌 보물이나 공법을 통해 역천의 기연을 얻을 수도 있었다.
* * *
십여 일 후, 혁련상맹 총단이 위치한 지하세계 상공.
두 인물이 고공에 떠서 인적이 뚝 끊긴 바닥을 내려다보며 난색을 표하고 있었다. 강대한 의식으로 지하세계를 수차례 훑었지만 날벌레 한 마리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수사는 물론 짐승들까지 생령이라는 생령은 증발이라도 한 듯 사라져 있었다.
지하세계에 펼쳐진 강력한 진법들도 누군가 제거해 두었고 상맹 곳곳에 보관되어 있었던 보물은 물론 영석 하나까지 모조리 가져간 후였다.
“주인님, 상맹 녀석들이 미리 정보를 입수하고 철수했나 봅니다.”
양록도 상당히 놀라워했다. 혁련상맹처럼 명성이 자자한 세력이 이렇게 신속히 철수를 결정하고 실행에 옮긴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멍청한 놈들은 아니구나. 적수가 안 될 것을 알고 달아난 것이야. 됐다, 그들은 달아나게 두고 그 성가신 두 녀석이나 찾아보자! 혼백에 표식을 심어 두어 어차피 손바닥 안에 있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말이야. 하하, 그들을 쫓다 다른 수확도 건지면 더 좋겠고!”
“주인님의 말씀은…….”
양록이 무언가를 눈치 채고 말끝을 흐렸다.
“지난번에도 그 녀석을 미끼삼아 계략을 꾸민 것이었지. 이번에도 누군가가 똑같은 짓을 반복하려하는 것 같구나.”
“알아들었습니다. 주인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래, 가자! 어린 녀석들이 다른 건 별 볼 일 없는데 둔술은 상당하단 말이야. 허나 소모한 진원을 짧은 시간 내로 완전히 회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절대 빠져나갈 수 없다!”
고개를 조아리는 양록을 보고 마량이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그 시각, 육익과 빙봉은 아주 멀리 떨어진 혁련상맹의 또 다른 거점에서 명존의 당부를 듣고 있었다.
“……이풍신주(離風神舟)와 여러 부적들이 있으면 아무리 진선이라도 두 분을 바로 따라잡지는 못할 겁니다. 본 맹의 요구사항은 아주 간단합니다. 그자를 데리고 시간을 끌다 정확히 세 달 후에 명살의 땅 천외천으로 유인해 주시기만 하면 성공입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뭐가 성공이란 말입니까? 허나 수사가 약속한 것만 잊지 않으신다면 최선을 다해보지요.”
그는 마량을 유인해낼 자신이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미끼 역할을 맡지는 않았을 것이다.
“허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한 수사와는 제가 잘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천년 내로는 수사를 찾아가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다 드리지요. 본 좌의 체면을 생각해 그 정도 부탁은 들어줄 것입니다. 그리고 빙봉 수사가 요구한 물건은 현재 지니고 있지 않으니 이 일이 끝나는 대로 모아서 전해드리지요.”
명존은 빙긋 웃으며 장담했다.
“감사합니다.”
“알겠습니다. 달리하실 말씀이 없으면 저희는 이만 출발하지요. 상대의 속도면 하루 이틀 내로 여기로 찾아들 겁니다.”
빙봉은 쓴웃음을 지으며 짤막하게 답했고 육익도 얼굴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바로 출발하시지요. 저희 역시 그 즉시 거점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 것입니다.”
명존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를 따라 일어섰다.
반 시진 후, 하늘에서 쿵! 하고 진동이 들리고 푸르스름한 마차가 쏘아져 나갔다. 이어서 백여 개의 빛줄기가 날아올라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이틀 후, 일곱 빛깔 구름이 나타나 잠시 그곳에 머물다가 굵직한 뇌전기둥을 뿜었다.
콰르릉!
뇌전 빛이 가시고 거점은 재가 되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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