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6화. 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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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후, 무애해의 원합도 청원궁 앞.
광활한 광장에 검은 선박이 서서히 하강하자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만여 명의 인요족 수사들이 청석 바닥에 엎드려 한립의 귀환을 환영했다.
검은 선박 앞에 인영이 어른거리고 한립과 남궁완이 나란히 나타났다. 그 뒤로는 화석노조, 주과아 등 다른 수사들이 서있었다.
“노조를 뵙습니다!”
만여 명의 수사들이 인사를 올리자 광장이 쩌렁쩌렁 울렸다.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별다른 말없이 청원궁 대문으로 걸어갔다.
그 뒤를 따르던 남궁완은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내심 깜짝 놀랐다. 이전에 한립이 인족에 기반을 잡아 놓았다는 이야기를 하기는 했는데 이 정도 규모일 줄은 예상치 못했다.
청원궁 앞에는 직전 제자인 해대소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제자, 스승님을 뵙습니다! 무사히 궁으로 돌아오신 것을 감축드립니다!”
“그래, 이쪽은 네 사모인 남궁완이다. 인사를 올리거라.”
“월천이 사모님을 뵙습니다! 사부님 드디어 사모님을 모시고 오셨군요!”
해대소가 크게 기뻐하며 남궁완을 향해 대례를 올렸다.
“일어나게. 자네가 해월천 수사로군. 스승님께 이야기는 들었네. 과연 인재일세.”
남궁완은 해월천을 향해 미소를 머금었다.
“칭찬 감사드립니다!”
그 말에 해대소가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흥, 겉만 번드르르하지 인재랄 것도 없소. 기령자의 3할 정도라도 수련에 힘을 쏟았으면 수행이 그리 낮지는 않을 것이다.”
한립이 대뜸 정색하고 해대소를 나무랐다.
“휴우, 저도 평소에 얼마나 열심히 수련하는데요. 대사형이 수련 광인 겁니다.”
스승에 말에 해대소가 얼른 웃음을 거두고 들릴 듯 말 듯 투덜거렸다. 이에 남궁완이 스승과 제자를 보며 빙긋 웃음 지었다.
한립은 그가 불퉁대는 소리를 들었지만 뭐라 대꾸하기도 귀찮아 그냥 눈을 한번 부릅떠주고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광장의 수많은 제자들은 그제야 일사분란하게 몸을 일으키고 물러났다. 청원궁은 새로운 여주인이 생겼다는 소식으로 한동안 떠들썩해졌다.
한립은 청원궁 대전의 상석에 앉아 사람을 시켜 소령천 수사들의 거처를 안배하고는 해대소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네 은월 사고는 어찌 보이지 않는 것이냐?”
“은월 사고께서는 스승님께서 출발하시고 얼마 되지 않아 폐관수련에 들어가셨습니다. 수련의 중요한 고비여서 바로 출관하여 스승님을 맞이하지 못하셨습니다.”
해대소는 남궁완의 눈치를 살피며 어찌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답했다.
“은월 동생이 아직 폐관중이라니 아쉽네요. 모여서 인계 때 이야기를 나누며 회포를 풀려 했는데요. 그래도 궁 안에 있으니 금방 만날 수 있겠죠. 월천, 은월 사고가 출관하는 대로 내게 알려주게.”
남궁완은 미소를 지으며 분부를 내렸다.
“예, 사모님! 명심하겠습니다!”
해대소는 진지한 모습을 보이려 혀를 깨물며 답했다. 하지만 데굴데굴 굴러가는 눈동자만 보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였다.
‘저걸 그냥!’
한립이 그것을 보고 어이가 없어 눈을 흘겼다.
해대소가 물러가자 한립은 남궁완을 데리고 청원궁의 모든 전당과 누각을 안내해 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마음에 들어 할 편전을 골라 평소에 수련할 수 있는 장소로 삼게 했다.
남궁완은 청원궁의 장경각과 만보당에 소장되어 있는 기이한 비술경전들과 열 법기, 재료, 단약 등의 보물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한립의 인생에는 기연이 넘쳐났고, 또 다수의 동급 수사를 상대하면서 얻은 수확이 상당했다. 그 소장품의 규모는 영계의 어느 수사와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자원이 부족한 소령천에 오랫동안 갇혀 있던 남궁완은 상상도 못할 정도였다.
한립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공들여 몇 가지 방어 보물과 단약들을 골라주고 아예 장서각과 만보당 금제 영패를 내주어 언제든 원하는 것을 가져갈 수 있게 했다.
남궁완은 무척 기뻐하며 거절하지 않고 보물과 금제 영패를 받았다.
이후 한립은 청원궁의 집사들을 불러 중요 업무를 보고 받고, 사람을 시켜 빙봉의 행방을 알아보게 했다.
모든 일을 처리한 한립은 남궁완을 데리고 원합도와 무애해를 유람했다. 그들은 한 달 동안 평범한 부부처럼 꼭 붙어서 소중한 추억을 쌓았다.
그러나 그들은 유람한 후 청원궁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따로따로 폐관에 들어갔고, 섬의 모든 업무는 이전처럼 해대소가 처리했다.
* * *
금제로 겹겹이 보호를 받고 있는 밀실 안.
한립은 가부좌를 틀고 눈앞에 세 가지 물건을 띄웠다. 금빛으로 찬란하게 반짝이는 책장과 은색과 붉은색 옥간들이었다.
이번 출타를 통해 얻은 선계 비술은 ‘오장단원공(五藏鍛元功)’, ‘원강조(元罡罩)’와 뇌전의 힘을 정련할 수 있는 비술이었다.
가장 먼저 그의 손끝이 향한 것은 금색 책장이었다. 책장은 곧장 그의 소매 속으로 날아들어 사라졌다.
금궐옥서에 기록된 오장단원공은 굉장히 현묘했지만 수련시간이 매우 오래 걸렸다. 한시가 급한 지금으로서는 다음 기회를 노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원강조와 정련 비술이었다. 한립은 기운을 날려 은색 옥간도 거둬들였다.
선계 비술인 원강조도 금전문으로 되어 있어서 난해하고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구결을 해석하는 것만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비술을 익히는 것은 더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남은 것은 뇌전의 힘을 정련하는 비술이 담긴 옥간이었다.
그는 붉은 옥간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 비술은 오는 도중 거의 연구를 해놨고 앞으로 한 달 정도면 깨우칠 수 있을 듯했다.
벽사신뢰를 지니고 있어 정련도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가 익히고 있는 제뢰술(祭雷術)보다 효과가 커서 앞으로 만나게 될 적을 깜짝 놀라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립은 마음을 정하고 옥간을 끌어와 이마에 가져다 댔다. 잠시 후 그는 두 눈을 감고 조각상이 된 듯 꼼짝하지 않았다.
* * *
쿠르릉 콰콰쾅! 콰콰쾅!
두 달 후, 옥간은 보이지 않고 한립 주위로 금빛 뇌전들이 생겨나 금색 뇌전구슬로 합쳐져 끝없이 커졌다. 뇌전구슬은 순식간에 거의 수레바퀴 크기로 커져 있었다.
팟!
한립은 양손으로 수결을 맺으며 입에서 은색 화염 한 줄기를 내뿜었다. 화염은 뇌전구슬을 휘감고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바다 속의 뇌전구슬은 천둥소리를 내며 빙글빙글 회전했고 금색 주술문자가 반짝였다. 뇌전 구슬 안에서 자금색 빛이 어른거려 신비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짐작케 했다.
* * *
그 시각, 뇌명대륙 작은 산속.
진령 양록은 여전히 눈을 감고 손바닥 크기의 녹색 병 옆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돌연 작은 병이 진동하며 녹색 빛을 일으키는 동시에 땅속에 공간 파동이 일었다. 양록은 번쩍 눈을 뜨고는 바로 몸을 일으켜 허리를 굽혔다.
“주인님의 출관을 감축드립니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병 입구에서 금빛이 반짝이고 모호한 인영이 서서히 떠올라 검은 장포를 걸친 쇠약한 청년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래, 아주 잘하고 있었다. 이제 부상을 완전히 회복했으니 떠나자꾸나.”
“예, 주인님!”
양록은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고, 마량은 녹색 병을 거두고 입에서 흑백의 진법 원반을 분출했다. 팔각형의 원반에는 흑백의 기괴한 주술문자가 가득 새겨져 있었다.
청년이 원반을 던지자 허공에 흑백의 기운이 피어오르고 처음에는 고대 거울로 변했다가 나중에는 둘둘 말려있는 족자로 변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다른 물건으로 모습이 변했다.
흑포 청년은 천천히 손을 뻗어 손끝으로 그것을 찔렀다.
푹!
손끝이 닿자 흑백의 기운이 주먹 크기의 수정구슬로 응결되었다. 이에 청년은 주문을 외며 핏빛 법결을 수정구슬 속으로 연달아 던져 넣었다.
파앗!
수정구슬 표면에 핏빛이 반짝이고 혈홍색 악귀 얼굴이 어려 청년을 향해 흉흉한 미소를 짓다가 고개를 돌려 낮게 포효했다.
하지만 악귀 얼굴은 곧바로 펑! 하고 터져 산산이 부서졌다.
“빨리도 달아났구나. 또 다른 대륙으로 건너갔어! 그렇지 않고서야 내 기념신마(寄念神魔)가 겨우 이 정도 반응을 보일 리 없지. 저쪽이면 풍원대륙 방향인가?”
흑포 청년은 코웃음을 치며 악귀 얼굴이 터지기 전 고개를 돌린 방향을 가늠했다.
“풍원대륙 방향이 확실합니다.”
악귀 얼굴의 작태에 놀라던 양록이 바로 답했다.
“그래, 알겠다. 혈제도 이만하면 거의 되었고 이제 본격적으로 일을 해야겠지. 혈천, 뇌명 두 대륙에서 비술을 펼쳐 수색을 해보았으나 배신자의 혼백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제 풍원대륙으로 건너갈 차례다.”
흑포 청년이 턱을 쓸어내리며 눈을 빛냈다.
진선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훅! 하고 숨을 들이마셔 수정구슬이 변한 흑백 기운을 흡수하고 명을 내렸다.
“가장 가까이 있는 대륙 간 전송진으로 가자꾸나! 풍원대륙으로 넘어갈 것이다.”
“예, 주인님!”
그들은 둔광을 일으켜 금빛과 하얀 빛줄기로 변해 땅속을 뚫고 나와 산을 떠났다.
* * *
풍원대륙, 외진 산골짜기 상공.
육익은 자신과 비슷한 수행을 지닌 대승기 노인 넷을 마주 보았다. 그 옆에는 백의를 걸친 빙봉이 서있었다.
육익이 그녀를 데리고 조용히 풍원대륙으로 돌아온 후, 그들은 눈에 띄지 않는 곳을 찾아 진원을 조금이나마 회복했다.
그 후로 반년이 흘렀고, 그 무렵 낯선 대승기 수사들이 그를 찾아온 것이다. 육익은 빠르게 반응해 달아났지만 결국 이곳에서 가로막히고 말았다.
의식을 퍼트려 보니 눈앞에 나타난 대승기 수사들 외에 사방팔방으로 각종 금제의 파동이 넘실거렸다. 상대가 미리 제자들을 시켜 거대 진법을 미리 깔아놓고 육익이 달아나는 것을 차단한 것이다.
“누구시기에 이런 외진 곳에 결계까지 쳐놓고 저를 찾아온 것입니까?”
육익의 눈빛이 흉흉하게 번득였다.
“허허, 놀라실 것 없습니다. 악의는 없고 수사와 옆의 선자를 잠시 모시고 가서 상의할 일이 있어서 찾아온 것입니다.”
동그란 얼굴의 노인이 미소를 띠고 답했다.
“제가 싫다면요?”
육익의 눈꼬리가 매섭게 올라갔다.
“아마 그건 수사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겁니다.”
“하하하! 겨우 당신들 넷과 이까짓 진법으로 나를 막겠다. 당신들을 모조리 죽이면 이런 진법을 깨는 것은 순식간일 텐데?”
동그란 얼굴의 수사 말에 육익은 얼굴을 굳히고 광소를 터트렸다.
“오, 그렇습니까? 육익 수사, 저까지 더하면 어떻습니까?”
또 다른 노쇠한 목소리가 고공에서 울렸다.
“누구지?”
흠칫 놀란 육익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백여 장 고공에 언제부터인지 홍발 노인이 떠있었다. 신비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노인은 기운이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당신은…….”
“저는 명존이라 합니다. 두 분을 본 맹으로 모시고 싶은데요?”
육익을 살핀 명존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명존……. 혁련상맹의 그 명존?”
깜짝 놀란 육익이 중얼거렸다. 혁련상맹의 명성은 그도 들어본 바가 있었다.
“허허, 노부의 이름을 알고계시군요. 저희가 이렇게 찾아온 것은 전부 다른 대륙에서 난리를 피운 혈제 흉마 때문이니 다른 걱정은 하실 것 없습니다.”
“그 흉마가 벌써 풍원대륙으로 넘어왔단 말입니까!”
“그것이……. 아직은 그런 조짐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흉마의 풍원대륙 출몰은 예견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육익 수사도 그렇게 생각하시니 그런 반응을 보이신 걸 테고요.”
“명 수사께서 직접 나섰으니 거절할 수 없겠군요. 좋습니다, 같이 가시지요. 허나 제가 진원을 회복하던 중이라…….”
육익은 대승기 노조들을 훑고는 조건을 제시했다.
“허허, 다른 건 몰라도 본 맹에 요상에 도움이 되는 단약은 많이 있습니다. 저를 따라가시면 진원을 조속히 회복하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선자가 빙봉 수사겠군?”
명존은 통쾌하게 조건에 응하고 고개를 돌려 빙봉을 보았다.
“예, 그렇습니다. 선배님께서 어찌 제 이름을 알고 계시는지요.”
빙봉은 움찔하며 홍발 노인을 향해 예를 취했다.
“그리 어려워할 것 없네. 얼마 전 인족의 한 수사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으니 말이야. 선자를 만나면 잘 챙겨주라 하시더군.”
명존은 무척 인자하게 그녀를 대했다.
“한 형이……. 알겠습니다. 저도 선배님을 따라 귀 맹에 잠시 신세를 지겠습니다.”
잠깐이지만 희색을 드러낸 빙봉이 공손히 답했다. 옆에 있던 육익은 한립의 이름을 듣고 난색을 표했다.
“자, 그럼 출발하시지요. 가는 동안 자세한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명존은 미소를 지으며 한 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그러자 고공에 강렬한 파동이 일고 청동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선박이 떠올랐다.
이제 와서 돌이킬 수도 없었기에 육익과 빙봉은 대승기 수사들을 따라 선박에 올랐다.
우웅!
커다란 선박은 푸른 빛덩이로 변해 하늘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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