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3화. 명존의 제안
*
“아직 뇌명대륙에서 건너온 최근 소식은 듣지 못하셨나 보군요.”
“뇌명대륙이요? 그 자가 거기서 또 사고를 친 것입니까?”
한립이 흠칫 놀라 물었다.
“그냥 사고라고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뇌명대륙에 혈천대륙 못지않은 피바람을 일으켰으니까요.”
명존은 길게 설명하지 않고 들고 있던 옥간을 던져주었다. 한립은 옥간을 끌어와 이마에 대고 의식으로 내용을 확인했다.
잠시 후 그는 난색을 표하며 이마에서 옥간을 뗐다.
“흉마가 각치족까지 건들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네 명의 대승기 강자들을 죽이고 상고진령 세 마리와 전투를 벌인 후에 실종 되었다니요.”
“상고진령과 싸운 후에 돌연 행방이 묘연해져서 아직까지 위치가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노인은 근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무언가 발견을 하신 겁니까?”
한립이 바로 상대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어내고 물었다.
“맞습니다. 대대적인 전투가 끝나고 본 맹의 수사들이 각치족 수사들과 섞여 들어가 흔적을 쫓았는데 희미하게 공간파동이 남아 있었습니다. 누군가 공간을 찢고 이동한 흔적이었습니다. 아쉽게도 여러 가지 방법을 써보았지만 어디로 이동했는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흉마가 아직 살아 있고 공간의 힘을 이용해 잠시 몸을 피했다는 말씀이시군요.”
“아마 그럴 겁니다.”
한립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노인도 안색이 좋지 않았다.
“……명 형께서 걱정하고 계신 바가 무엇입니까? 저를 기다리신 이유가 있을 텐데요.”
“아시면서 물어 보십니다. 흉마가 이미 혈천과 뇌명대륙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언제 풍원대륙에 그 자가 나타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지요. 한 수사는 인족의 대승기 수사이자 풍원대륙의 최상급 존재입니다.
이대로 절세 흉마를 두고 보실 것입니까? 어느 종족이든 별안간 혈제의 제물이 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각치족과 같은 강대 종족도 그 일로 원기가 크게 상했는데 그 자가 풍원대륙의 중소 종족을 노린다면 멸족을 당하게 될 겁니다.”
“하하, 말씀을 좀 이상하게 하십니다. 풍원대륙에는 수많은 종족들이 살아가고 있는데 어찌 하필 인족과 같은 약소 종족을 노리겠습니까? 인족보다 눈에 띄고 원기가 강성한 종족들이 허다한데요.”
이상한 낌새에 한립이 눈을 빛냈다.
“본 맹이 흉마의 혈제 대상을 분석해 보았습니다. 어떤 특정한 목표가 없더군요. 생령들이 밀집한 곳이라면 어디든 혈제를 치렀습니다. 인족이 이전에는 절정의 대승기 수사가 부족해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지 인구수와 그 밀도로는 다른 종족에 밀리지 않습니다. 한 수사야 말로 그 미치광이가 인족을 노리지 않을 거라 어찌 확신하십니까?”
“명 형, 저를 위협하시는 겁니까.”
담담한 홍발 노인의 말에 한립이 동공을 수축했다.
“그저 사실 그대로 말씀 드리는 것뿐입니다. 게다가 흉마와 수사가 전혀 관계가 없다고도 할 수 없고요. 허허, 인족을 찾아 일을 벌일 가능성이 그리 낮지는 않을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이 초상화를 먼저 보시지요.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명존은 말하다 말고 다른 옥간을 꺼내들었다.
파앗!
옥간에서 광채가 번지며 사내와 여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이들은…….”
한립은 정말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역시 알아보시는 군요! 이들의 내력에 대해 제게도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한 명은 알아보겠습니다. 이 여인의 이름은 빙봉으로 인족은 아니지만 저와 확실히 인연이 깊습니다. 저들이 이번 일에 관련이 있단 말입니까? 저 사내는 또 누구입니까?”
“사내의 정체는 저도 모릅니다. 풍원대륙 출신으로 추정되고 본 맹 수사가 뒤를 쫓아본 결과 전투 중에 날개가 여섯 개 달린 거대 지네로 변한다더군요. 대승기 수사 중에서도 꽤 실력이 있는 편에 속했습니다.
그와 빙봉이라는 수사가 흉마의 심기를 건들여 뜻밖에도 혈천대륙에서 뇌명대륙까지 추격을 당한 것으로 보고되었습니다. 심지어 흉마가 각치족을 찾아 화풀이를 한 것도 그들 때문일 거라는 분석도 있고요.”
“날개가 여섯 개 달린 지네요? 그들이 흉마에게 추격을 당하고 있다고요.”
한립이 놀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혹시, 사내도 누군지 알아보시겠습니까?”
“제 추측이 맞다면 아는 인물인 듯합니다. 이런 모습이 되었을 줄은 몰랐군요.”
“그렇다면 흉마가 쫓는 이들이 다 한 형과 인연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인족에 화가 미칠 가능성이 얼마나 높은지 아시겠지요?”
“흠, 그 말씀은 조금 과장이 있긴 하지만 확실히 제가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군요. 저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아직 뇌명대륙에 있는 것입니까?”
“그들도 흉마가 실종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종적을 감췄습니다. 수사께서 그들을 알고 계신다니 어디로 향했을지 짐작이 가시는지요?”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그들을 알기는 하나 만나보지 못한지 오랜 세월이 지났으니까요.”
한립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풍원대륙으로 와서 수사를 찾을 가능성은 없겠습니까?”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만일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골치가 아프군요. 더 고민을 해보기 전에, 명 형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흉마가 선계의 선인일 가능성이 얼마나 크다고 보십니까?”
한립이 탄식을 하다 돌연 반문했다.
“제 판단을 물어 보시는 거면 거의 확실하다고 봅니다.”
명존이 미미하게 표정이 달라졌다가 솔직한 답을 들려주었다.
“어째서입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자가 펼치는 신통들은 선계의 비술과 공법입니다. 제 선조 중에 선인의 후인이 있어 관련 내용 일부가 전해 내려오기에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랬군요, 그 자가 진선이라는 점은 이제 의심할 수 없겠습니다. 그다지 좋은 소식은 아니고요. 그나저나 수사가 저를 불러들여 이런 말씀을 하는 이유가 따로 있을 테지요? 저 홀로 선인과 싸우라고 부른 것은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물론이지요. 제가 어찌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하겠습니까! 저는 그저 풍원대륙 전체의 안위를 생각해서 여러 수사들이 함께 싸우자는 제안을 드리는 겁니다. 선계와 오랜 세월 연계가 끊겼던 영계에 갑자가 선인이 강림했는데 그의 목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만일 대륙 간 전송진을 이용해 우리 대륙으로와 살생을 일삼는다면 우리 같은 최정상의 수사들이 합심해야만 쫓아내거나 무력화 시킬 수 있을 겁니다. 임기응변식으로 대응하다가는 각개 격파를 당할 테고요.”
명존은 엄숙하게 제안했다.
“연합을 하자는 말씀이군요. 혈천대륙에서도 혈도종문들이 힘을 모았지만 상대의 감당할 수 없는 힘에 격파당한 것으로 압니다.”
“혈천대륙에서는 그 자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나머지 겨우 대승기 수사 열댓 명이 매복을 했다고 합니다. 그 중에 진정한 강자는 서넛 밖에 되지 않았고요. 그러니 실패할 수밖에요!
제가 연합을 제의했으니 풍원대륙에서 손에 꼽히는 강자들과 본 맹에서 소환 가능한 강대한 진령들을 불러 모아 단 한 번의 전투로 흉마를 쓰러트릴 겁니다. 아무리 강한 선인이라도 신통 대부분이 봉인당한 채로 무사할 수는 없을 거예요.”
“저 말고 동급 수사들이 몇 명이나 이 일을 수락했습니까?”
“수사를 제외하고 이미 절반이 넘는 수가 동의했습니다. 그 진선이 풍원대륙에 발을 들이는 순간, 연합에 참가하겠다고요. 나머지 수사들도 연락이 닿기만 하면 이해관계를 조정해 수락을 하도록 설득하겠습니다. 솔직히 어느 강자가 자신의 대륙에서 선인이 날뛰는 것을 두고 보겠습니까?”
“명 형께서 자신하시니 저도 일단은 연합 제안을 수락하겠습니다. 하지만 귀 맹이 충분한 수의 강자들을 모집하지 못하면 제가 외면해도 탓하지 마십시오.”
한립이 고민하다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허! 안심하셔도 됩니다. 충분한 인원이 모이지 않으면 저부터도 나서지 않을 테니까요. 이 전신부(傳訊符)를 지니고 계십시오. 진선의 소식이 들어오면 즉시 부적을 통해 전달하겠습니다.”
명존은 한립의 결정에 기뻐하며 웃음을 흘렸다. 한립은 그가 날려 보낸 은색 부적을 잘 받아 품속에 넣어두었다.
한립은 몇 가지 일을 더 상의하고 석조 건물을 나섰다.
쿠쿵!
잠시 후 전송진이 펼쳐진 대청 밖에 검은 선박이 날아올랐다. 뱃머리에 선 한립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부군, 명 수사가 무슨 이야기를 하던가요?”
뒤쪽에서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궁완이 다가와 그를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소. 선실로 돌아가 천천히 설명해 주리다.”
한립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데리고 선실로 내려갔다.
* * *
몇 달 후.
어느 신비한 공간 안에 흉측하게 생긴 거대 짐승 세 마리가 자금색 사슬을 물어뜯으며 불안한 눈빛으로 사슬에 감겨 있는 흑포 청년을 바라보았다.
청년은 마치 갇힌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에는 두려움이 아닌 조소가 어려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흑포 청년이 감정이 담기지 않은 냉랭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투항하면 죽이지 않고 영복(靈僕)으로 삼아주겠다. 그리고 진선계로 돌아갈 때 함께 데리고 가주지. 그렇지 않고 법칙사슬이 정식으로 반서를 일으키면 너희도 나와 같이 법칙의 힘에 목숨을 잃게 될 것이야.”
“법칙사슬의 반서는 분명 진선의 선인인 당신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우리도 같이 죽을 거란 말입니까!”
사슴 머리에 곰의 몸을 지닌 괴수가 믿기지 않는지 소리쳤다.
“하하, 어떤 멍청한 것이 너희에게 법칙사슬을 격발하는 방법을 일러주었는지 모르겠지만 감히 그걸로 내게 대항하려 들다니 우습구나. 만일 내가 공간비술로 너희를 끌어들이지 않았으면 바깥에서 공격할 수 있었겠지. 그러나 지금은 말이다, 너희도 이 공간에 들어온 이상 법칙의 힘에 의한 반서를 피할 수 없다. 그게 얼마나 강력한 위력적일지 너희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느냐.
위력 대부분이 내게 집중되어도 남은 여력만으로 너희를 재로 만들기에 충분할 것이다. 너희도 슬슬 체내의 진원이 법칙사슬에 잠식당하고 있는 것을 느꼈겠지? 선인의 육체를 지닌 나야 선가 비술과 여러 보물까지 있으니 반서를 당해도 한 동안 요양하는 정도겠지만, 너희는 과연 어떻게 될까?”
사내가 웃음을 흘리며 멸시하듯 그들을 쳐다보았다.
“헛소리! 금룡왕 대인께서 친히 전수해 주신 방법에 어찌 착오가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겨우 단약 한 알로 우리를 현혹시킬 생각 마시지요. 당신이 말이 사실이라면 반서가 일어나 우리가 죽길 기다리면 되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습니까!”
사슴 머리 괴수가 포효하듯 외쳤다. 다른 두 짐승도 난색을 표하고 상대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도 중요하게 수행해야할 일이 없었다면 너희와 말을 섞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됐고, 본 선이 일생일대의 기회를 주지. 누구든 먼저 잡는 사람이 임자이다. 내 영복이 되겠다면 선계로 데려가 주는 것 외에 진혼단(眞魂丹) 한 알을 주어 진선의 혼백을 이룰 수 있게 해주겠다. 반나절 내로 결정을 내린 자에게만 기회가 돌아갈 것이니 잘들 생각하라고.”
흑포 청년은 더 이상 시간을 끌기 지겨운 지 또 하나의 조건을 걸었다.
“진혼단?”
다른 두 짐승은 어리둥절해 했지만 한 마리만은 눈빛이 달라졌다. 단약의 유혹에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
“이곳에서 혼백이 소멸하든가 아니면 나의 영복이 되어 영단을 하사받고 같이 선계에 오르던가, 알아서 선택하면 된다. 너희가 각치족과 맺은 맹약과 구속이 있더라도 내가 끊어줄 수 있다는 것을 참고하고. 이제 누군가 대답할 때까지 난 한 마디도 하지 않겠다.”
흑포 청년은 말을 마치고 정말 눈을 감아버렸다. 세 짐승들을 서로 눈치를 살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