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2화. 실종
*
한 달 후, 각치족 개령성(盖靈城).
붉은 피로 이어진 강이 성을 채웠다.
무수히 많은 각치족 족인들이 피의 강에서 발버둥치고 울부짖었지만 족인들의 피와 살이 녹아 강으로 녹아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피의 강 위로 쇠약하게 생긴 청년이 무표정하게 떠있었다. 그 옆으로 각치족 고계 수사의 시체가 백 여구는 떠다니고 있었는데 사지가 멀쩡한 시체들은 전부 두개골이 강제로 열려 안이 텅 비어 있었다.
콰릉!
돌연 하늘 끝에서 벼락 소리가 들리고 녹색 구름이 날아들었다. 쇠약한 청년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녹색 구름은 피의 강 인근에서 응결해 거인으로 변했는데 머리에 뿔이 달리고 녹색 피부에는 눈이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천마안(千魔眼)을 지닌 녹색 거인은 손에 금빛 찬란한 보탑을 들고 있었다.
“누구냐! 감히 개령성에서 혈제를 지내? 본 족이 네 놈의 육체를 갈기갈기 찢어내고 혼백을 뽑아 영원한 고통을 줄 것이 두렵지도 않더냐! 성을 지키던 천상 수사는 어디로 갔기에 이런 일이 벌어지게 둔 것이야.”
천여 개의 눈으로 사방팔방을 훑은 거인이 격노해 포효했다.
“천상? 스스로 원영을 터트리려던 이 녀석을 말하는 것인가?”
쇠약한 청년이 두개골이 열린 시체 중 하나를 가리켰다.
“말도 안 돼! 천상 수사의 실력에 개령성의 진법이 보조했는데도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아쉬워할 것 없다. 내가 찾고 있는 두 놈을 내놓지 않으면 너도 그 뒤를 따르게 될 테니까.”
“무슨 말이지?”
“이렇게 생긴 녀석들을 본 적이 있나?”
쇠약한 청년이 소매 속에서 손가락을 튕기자 두루마리가 날아올라 활짝 펴졌다. 그 안에는 육익과 빙봉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각치족 인물도 아닌 것 같은데 노부가 어찌 알겠느냐! 저들과 무슨 관계인 줄은 모르겠으나 다짜고짜 본 족에서 그들을 찾는 것은 무슨 경우냔 말이다.”
녹색 거인이 웅웅 소리쳤다.
“그 대답, 아주 만족스럽지 못한데. 지금은 네가 질문할 때가 아니라 내가 묻는 것에나 답하면 된다. 3일의 시간을 주지. 이들을 찾아내지 못하면 너희 각치족 성을 하나씩 돌며 혈제를 치를 것이야.”
청년은 화를 내는 기색도 없이 차분히 두루마리를 회수했다.
“본 족에서 계속 혈제를 치르겠다고? 으하하! 그렇게 우스운 소리는 노부가 평생 처음 듣는 구나. 본 좌가 여기서 답을 주지. 본 족은 그 딴 놈들을 데리고 있지 않지만 데리고 있다하더라도 네 놈 뜻대로 내주지 않을 것이다.”
녹색 거인의 천여 개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흠, 굳이 고생길을 가겠다면 너도 남아 혈제의 일부분이 되거라.”
쇠약한 청년의 입 꼬리에 비웃음이 걸렸다.
쿠쿵!
청년이 손을 쓰기도 전에 피의 강이 열댓 개의 핏빛 물줄기를 뻗어 녹색 거인을 덮쳤다.
그러나 녹색 거인도 가만히 서서 당하고 있지는 않았다. 들고 있던 금색 보탑이 날아올라 천배로 불어났고, 천여 개의 마안들이 눈을 부릅뜨고 녹색 빛의 실을 발사해 물줄기들을 꿰뚫었다.
쿠콰콰쾅!
피의 강 위로 녹색 기운이 퍼지며 굉음이 연신 하늘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이런 격렬한 충돌은 오래가지 못했다.
쿠왕!
경천동지할 폭음이 들리고 녹색 안개가 정체 모를 힘에 흩어졌을 때 녹색 거인은 파편이 되어 부서져 보이지 않았다.
결국 청년은 손에 녹색 구슬을 쥐었고 그 안의 녹색 소인은 겁에 질려 어떻게든 구슬을 뚫고 달아나려고 난동을 부렸다.
그러나 청년은 흉흉한 웃음을 흘리며 거침없이 구슬 속으로 손가락을 뻗어 소인의 머리를 잡아챘다. 이에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던 소인은 축 늘어져 움직임이 없어졌다.
일다경이 지나 침음하던 청년은 금빛으로 변해 피의 강 속으로 잠겨들었다.
웅웅!
핏물이 격랑을 일으켜 둥둥 떠다니던 각치족 수사들의 잘려나간 시체 잔해를 집어 삼켰다.
* * *
각치족 남녀가 개령성을 떠나 또 다른 거대 성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가고 있었다.
“이 방법이 정말 통할 줄은 몰랐네요. 그 미치광이가 정말 개령성에 도착하자마자 다짜고짜 성 안의 생령들로 혈제를 치렀잖아요. 심지어 성을 지키던 각치족 대승기 수사까지 원영을 뽑아 처치하고요.”
각치족 여인은 작게 탄식했다.
“흥, 그 놈이 우리가 빙의 신통을 쓴 것을 모를 줄 아느냐. 어차피 혈제에 미쳐있고 방자하기 짝이 없기에 구실이 생긴 김에 생령들을 도륙하는 것이겠지. 선인의 실력에 평범한 대승기 수사가 상대가 안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각치족 사내가 냉소했다.
“수사가 이렇게 현묘한 혼백 빙의 비술을 익혔을 줄은 몰랐네요. 이로써 잠시 상대의 추격을 피할 수 있게 되었고요. 진작 이 방법을 썼으면 궁지에 몰릴 일도 없었잖아요.”
“네가 뭘 아느냐! 이런 수법은 평범한 의식 빙의나 원영 탈사와는 다르다. 혼백을 완전히 다른 수사의 육체에 깃들이는 술법으로 극도로 위험하다.
나도 7, 8할 밖에는 성공할 확신이 없었고, 일단 펼치면 본체가 깊은 수면에 빠져들어 빙의된 몸이 옮기고 다녀야 하지. 당연히 본체의 대부분 신통도 사용할 수 없고 말이야. 막다른 골목에 몰리지 않았다면 결코 쓰지 않았을 방법이다.
상대의 감시를 피할 수 있었던 건, 이것도 선계 비술이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그래도 이게 성공해서 준비해 놓은 다음 방법은 쓸 필요가 없겠구나.”
여인의 물음에 각치족 사내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대화 내용으로 보아 그들은 육익과 빙봉이었다. 그들은 무슨 비술을 펼친 것인지 혼백을 두 명의 각치족 수사에게 빙의시켜 마량의 추격을 따돌리고 있었다.
“선계 비술이요? 어떻게 그런 술법을 익힌 거죠?”
“만황을 떠돌다 우연히 들어간 이종족 동부에서 금궐옥서 한 장을 찾아냈거든. 그 속에 엄청난 선가 비술이 기록되어 있었지. 아쉽게도 선인의 몸이 되어야 완벽하게 펼칠 수 있고 혼백빙의 수법은 그 일부에 불과하지. 이마저도 반나절 밖에는 유지할 수 없으니 시간이 되면 강제로 본체로 혼백이 돌아가게 될 것이다.”
“안타까울 것 없어요. 선가 비술로 잠시나마 상대의 이목을 가린 것만으로도 의외의 수확이니까요. 이 틈에 다른 각치족 성에 진입할 수 있으면 일단 작전은 성공이네요. 뇌명대륙에서 각치족의 지위로 보아 개령성에서 혈제를 치른 그 놈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대대적으로 맞붙겠죠!
그들이 미치광이를 붙들고 조금만 시간을 끌어주면 또 다른 대륙 간 전송진을 찾아 풍원대륙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이전처럼 그 자가 바로 따라붙지만 않으면 그 후로는 추적을 따돌릴 수 있을 테고요. 정 안 되면 한 형을 찾아가는 것도 방법이고요. 명충모를 참살한 역천의 신통을 지녔으니 우리 몸에 심어진 혼백 표식을 지워줄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요.”
“한립을 찾아가라고? 헛소리! 미치광이 손에 죽더라도 절대 그를 내 발로 찾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빙봉의 말에 육익이 대노해 소리쳤다.
“진선 미치광이가 벼르고 있을 텐데, 잡히면 그냥 죽는 걸로 끝날 줄 아나보죠?”
빙봉은 그의 반응에 움츠러드는 기색 없이 냉랭히 비꼬았다.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다. 풍원대륙에 돌아가기만 하면 미치광이를 영영 떨쳐버릴 수 있을 지도 모르니까.”
빠르게 평정을 회복한 육익이 말했다.
“좋아요, 수사의 말대로 그때그때 상황을 보아서 결정해요. 서두르죠! 느낌에 빙의가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 같으니까요.”
빙봉은 더 이상 한립을 언급하지 않고 재촉했다. 그들은 푸른 빛덩이로 변해 하늘을 질주했다.
* * *
보름 후.
또 다른 각치족 거대성에 나타난 쇠약한 청년이 생령들을 이용해 피의 강을 이루고 혈제를 이루려는데 이미 매복하고 있던 각치족 대승기 노조 여섯이 나타났다.
각치족은 거대성 하나가 혈제로 전멸을 당하고 대승기 노조가 둘이나 당한 상황에서 좌시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한 번에 강력한 대승기 노조 여섯을 보낸 것이다.
그들은 등장하자마자 미리 펼쳐둔 강력한 금제를 발동시켰다.
강림 진선은 이번에도 신비한 부적으로 몸을 구속하는 법칙 사슬을 풀지 않고 여섯 대승기 노조들과 놀라운 격전을 펼쳤다.
이번에 나선 각치족 대승기 수사들은 각각이 영계의 최강자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마량은 비록 법력이 제한이 되었지만 강림 진선에 여러 선가비술과 선계의 비술을 다뤄 자연히 두려울 것이 없었다.
양측은 기세등등하게 맞붙어 가면 갈수록 치열한 전투를 펼쳤다.
이 전투는 반나절을 지속되다 각치족 대승기 수사 네 명이 죽고 나머지가 중상을 입고 달아나며 끝을 맺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각치족 대승기 수사들이 현천잔보 여러 개를 자폭시켜 마량도 부상을 입고 말았다.
격분한 마량은 미친 듯이 각치족 영역을 돌아다니며 연달아 세 곳의 거대성을 멸하고 혈제를 치렀다.
이렇게 되자, 더는 각치족 고위층도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상고계약의 힘을 빌려 그들이 오랜 세월 봉양하던 상고진령 제룡(蹄龍), 태작(泰雀), 양록(陽鹿)을 단번에 소환해 마량을 상대로 영계에서 다시없을 엄청난 전투를 치렀다.
이 전투는 며칠간 지속되었고 그 탓에 주변 백만 리가 초토화 되었다.
3일째 되는 날, 격전의 파동이 가라앉을 무렵 주변의 각치족인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세 마리 상고진령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마량도 사라져 있었다. 각치족은 각종 비술을 사용해 상고진령들과 연락을 취해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제야 절세의 흉마가 혈천대륙에서 저지른 일련의 일들이 뇌명대륙으로 전해졌다.
마량이라는 흉마의 행방은 묘연해졌지만 뇌명대륙 각 종족들은 흉마의 ‘흉’ 자만 듣고도 대번에 안색이 달라지고는 했다.
육익과 빙봉은 마량의 실종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주저 없이 원래 계획을 실행했다.
그들은 한 달 뒤에 또 다른 거대 종족을 찾아가 대가를 치르고 풍원대륙으로 돌아가는 대륙 간 전송진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 * *
그 시각, 한립은 남궁완 등을 데리고 빛에 휩싸여 풍원대륙 어딘가의 거대 진법 위에 나타났다.
진법을 지키던 수십 명의 병사들은 놀란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대장으로 보이는 병사가 한립의 모습을 확인하고 공손히 예를 올렸다.
“한 선배님을 뵙습니다. 총 집사 대인께서 인근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명조 수사가 말인가? 그렇다면 만나봐야겠군. 길을 안내하게. 완이, 그대는 먼저 여독을 풀고 계시오.”
한립이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남궁완에게 고개를 돌렸다.
“잘 다녀오세요. 저는 여기서 잠시 쉬고 있죠 뭐.”
남궁완은 맑은 눈을 반짝이며 일행을 이끌고 대청 한쪽으로 가서 가부좌를 틀었다.
그 모습에 한립은 바로 대장 병사를 따라 대청을 나서 울창한 숲으로 가려진 어느 석조 건물로 향했다.
그가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문이 스스로 열리고 안에서 노쇠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수사, 드디어 돌아오셨습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노부가 이곳에서 수사를 기다린지 오래입니다.”
“사양하지 않고 들어가겠습니다.”
한립이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건물 안에는 누런 나무 탁자와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홍발(紅髮) 노인이 의자에 앉아 손에 든 하얀 옥간을 만지작거리는 중이었다.
“이리로 앉으시죠. 벽영 수사에게 수사에 대해 귀띔한 일로 저를 책망하시지는 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명존이 고개를 들고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별 일 아닌 것을요. 게다가 벽영 수사가 목숨을 잃어 더는 따질 사람도 없고 말입니다.”
그는 노인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벽영 그 친구가 저보다 먼저 죽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혈천대륙 쪽은 상맹이 입은 타격이 커서 세력이 상당히 위축된 모양이더군요.”
명존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력이 줄기는 했지만 여러 장로들이 공동으로 의사결정을 하고 있어 혼란스런 상황은 많이 정리되었습니다. 저도 장도들의 도움으로 풍원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요.”
“다행입니다. 한 수사, 그런데 흉마에 대한 소식은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귀 맹의 장로들에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흉마가 명충모에 버금가는 역천의 존재라는 점에서는 거론할 여지가 없더군요.”
진지한 얼굴로 본론을 꺼내는 명존을 보고 한립도 표정이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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