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0화. 재회 (2)
*
반나절 후, 묵령성주 안 침실.
새하얀 옥으로 만들어진 침상 위에 백의 소녀가 붉은 기운이 감도는 얼굴로 한립의 품에 안겨 자신이 겪어온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남궁완은 한립이 공간접점으로 들어가고 한참 동안 수련의 고비를 이겨내지 못해 수행에 진전이 없었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한립처럼 또 다른 공간접점을 찾아 몰래 영계로 올라가려 했는데 거기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공간폭풍을 만난 거요?”
남궁완이 이야기를 하다 한숨을 푹 쉬자 한립은 그녀의 어깨에 코를 묻고 온화하게 물었다.
“공간폭풍이 아니라, 강력한 존재들이 그 안에서 싸우고 있었어요! 그들이 싸우는 통에 공간통로 내부의 기운이 어지러워져 영계가 아니라 소령천에 흘러들게 된 것이고요.”
남궁완은 다시 생각해도 화가 나는지 입술을 깨물었다.
“누가 감히 공간접점에서 싸운단 말이오? 대승기 수사들이었소?”
“아니요, 예전에 당신이 마주쳤던 진령 라후(羅睺)와 진령 백두충(百頭蟲)이 싸우고 있었어요. 거의 양패구상을 한 상태였는데 서로 마지막 일격을 주고받으며 공간통로가 부서져서 저와 두 진령 시체가 소령천으로 떨어졌죠. 하늘이 도운 건지 저는 큰 부상은 입지 않았고 오히려 엄청난 기연을 얻게 된 셈이었죠.”
“라후! 부인이 말하는 기연은 진령들의 시체를 이르는 것이겠소.”
생각지 못한 전개에 한립도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라후도 그렇고 백두충도 진령 중에서 급이 높은 존재잖아요? 시체에서 건진 정핵이 함유한 막대한 기운만으로도 수련자에게 엄청난 이득이 되고요! 그 역천의 기연 덕에 영기가 희박한 소령천에서 이천년 만에 지금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어요.
그런데 부군은 아무리 영계에 있었다지만 벌써 대승기 경지에 이르다니 사람을 너무 놀라게 하시네요. 수련을 해나갈수록 대승기에 이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느끼게 돼요. 진령 정핵을 지닌 저도 대승기 고비를 넘길 가능성이 높지 않았으니까요.”
남궁완이 턱을 들어 한립을 보며 감탄을 터트렸다.
“나 역시 수많은 준비 끝에 요행히 대승기에 이른 것이오. 화신의 경지로 공간접점에서 빠져나왔을 때는 일이 순조롭게 풀리지 않아 공간폭풍에 휘말려 중상을 입고 심지어 법력도 전부…….”
한립도 천천히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았다. 물론 그중 몇 가지 일들은 애매모호하게 넘어가기도 했다.
남궁완은 한립이 명하의 땅에서 원요를 만나고 나중에 마계에서는 자령과도 만난 이야기를 듣고 묘한 미소를 지었다.
“와아, 원요와 자령도 자신만의 기연을 만났네요! 이러다 언제가 부군이 선계로 비승하면 그 고운 벗들도 아쉬운 마음에 뒤따르는 것 아닌가 모르겠어요.”
“농담 마시오, 완이. 그들을 만난 건 순전히 우연이었소. 선계 비승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이오? 나조차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일에 어찌 다른 이의 가능성을 점칠 수 있겠소. 그보다 어쩌다 소녀륜회공을 과아에게 전수하게 된 거요? 그 어미가 최근 수행이 갑자기 높아진 것도 부인의 도움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한립이 쓴웃음을 지으며 주과아의 일을 물었다. 자령과 원요에 대해서는 남궁완도 잘 알고 있었다.
갑자기 그들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질투를 하거나 골이 나서가 아니라 그를 놀리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과아는 내가 소령천에서 만난 이들 중 소녀륜회공을 전수하기에 적합한 제자였어요. 다만 제가 진령의 정핵을 지니고 있다는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직접 문하로 거두지 못하고 그 모친을 통해 공법을 전수한 것이고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아이가 빠른 시간 내에 소녀륜회공에서 어느 정도 성취를 보였는데, 생각지 못하게 마계로 흘러들어가게 되었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아이의 모친을 기명 제자로 들여 소녀륜회공을 전수했어요. 체질이 적합하지는 않아도 자질이 뛰어난 편이었거든요. 수백 년이 지나 대승기 고비를 넘길 때 아무래도 호법을 설 가까운 인물이 필요하기도 했고요. 진령의 정핵을 이용해 이미 얼마 안 되는 세월 동안 연허기 수준으로 만들어 놓았고 앞으로도 계속 도움을 주면 합체 초기 경지까지는 이를 거라 생각하고 있어요.”
“그랬군. 어찌 되었든, 이제는 내가 있으니 아무것도 걱정할 것 없소! 내가 호법을 서는데 누가 당신의 도겁을 방해하겠소? 영계로 돌아가면 완이의 대승기 도겁 확률을 높여줄 방법들도 준비되어 있소.”
한립은 애정이 듬뿍 담긴 어투로 품안의 완을 얼렀다.
“어머, 부군에게 그런 방법이 있다고요?”
그에게 기대 있던 남궁완이 곧장 허리를 펴고 놀란 눈빛을 보냈다.
“하하하, 당신 부군이 평범한 대승기 수사인 줄 아시오! 이런 말을 하면 내 스스로 얼굴에 금칠하는 꼴이지만, 상고진령과 마주쳐도 누가 이기고 질지는 싸워봐야 알 것이오.”
한립의 유쾌한 웃음소리에 자신감이 묻어났다.
“그렇게 자신이 있으세요? 부군이 과장하는 성품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다면 믿지 못했을 겁니다. 아, 그런데 영계로 통하는 통로가 이미 사라지거나 다른 종족들에게 발견된 것은 아니겠지요?”
남궁완은 무언가를 떠올리고 서둘러 물었다.
“물론 단시일 내로 허물어질 통로는 아니오. 잘 가려두었으니 평범한 진법중사는 위치를 알아내기 어려울 것이요. 완이,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게요?”
한립은 남궁완의 표정을 보고 반문했다.
“소령천에 머물며 교분을 나눈 벗들이 있어요. 고비에 이르러 오랜 세월 수행에 진보가 없는 경우도 많고요. 그들은 물론 소령천의 자질이 뛰어난 후배들도 영계로 가야 희망이 있을 겁니다. 부군, 그들을 데리고 함께 돌아가도 될까요?”
“몇 명을 함께 데려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오. 허나 소령천 인족의 핵심 인물들이 빠져나가면 남은 인족들은 이종족들의 압력에 살아남기 힘들 것이오. 내가 이곳으로 온 통로는 그리 안정적이지 않아 인족 전체를 데리고 나갈 수는 없을 것이오.”
“그걸 저라고 어찌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들도 소령천을 떠날 유일할 기회를 포기하려 들지 않을 거예요.”
남궁완이 가볍게 탄식했다.
“이렇게 하지. 그들에게 대표 몇 명을 정해 사흘 후에 나를 만나러 오게 하면 이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소.”
한립은 턱을 쓸어내리며 홀연히 미소를 지었다.
* * *
사흘 후, 검은 선박 안 대청.
한립은 상석에 앉아 사내 셋과 여인 하나로 이루어진 인족 합체기 수사들을 만나고 있었다. 남궁완이 온화한 표정으로 그의 곁에서 함께 했다.
“한 선배님을 뵙습니다.”
그들은 그에게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일어들 나게. 내 신분과 완이와의 관계는 알고 있을 테지. 자네들이 나를 찾아온 목적도 얼추 들어 이해하고 있네.”
“저희들의 자질은 다른 누구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소령천의 한계 때문에 줄곧 더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이고요. 선배님께서 저희들을 영계로 데려가 주신다면 그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백발 노옹이 고개를 숙이고 다른 이들을 대표해 공손히 말했다.
“그간 완이를 위해 마음 써준 일이 많다고 들었네. 그런 자네들을 영계로 데리고 가는 것은 문제가 아닐세. 그저 그전에 소령천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떠나자마자 인족이 이종족들에게 점령당해 노역 생활을 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않겠나.”
한립의 말에 백발 노옹 등은 내심 흠칫 놀랐다. 그중 남포(藍袍) 미부인이 신중히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무엇이든 선배님의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다른 수사들도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주제넘은 참견을 좀 하겠네. 자네들은 돌아가는 대로 후배들 중에 자질이 뛰어난 이들을 백 명쯤 선발하게. 그들도 자네들과 같이 영계로 데려가 줄 생각이네. 동시에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후로도 내가 따로 사람을 보내 자질이 뛰어난 인족 자제들을 데려가 주리란 사실을 선포하게. 믿고 맡겨도 되겠지?”
“예, 합당하게 처리할 것이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백발 노옹이 곧바로 답했다.
“또 한 가지, 영계로 돌아가기 전에 소령천의 다른 지역들을 다녀와야겠네. 이종족들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줘야 앞으로 가볍게 인족을 침략할 마음을 먹지 못하겠지. 동시에 보물 몇 가지를 남겨 인족에 합체기 강자가 없어도 이족족 침입에 대응할 수 있게 하겠네.”
한립의 말에 인족 강자들은 무척 감사해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이대로만 되면 그들도 소령천 인족들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고 떠날 수 있었다.
네 명의 인족 강자들은 한립에게 소령천에서 철수할 구체적인 일시를 묻고는 대청을 떠났다.
시종일관 미소를 띠고 참견하지 않던 남궁완이 그들이 나간 후에야 빙긋 미소 지었다.
“부군, 자질이 뛰어난 후배들을 선발하는데 꽤나 시간이 걸릴 거예요. 그동안 나와 함께 다른 이종족들을 방문하죠? 늘 폐관수련을 해왔지만 당신보다는 소령천 지리에 익숙하답니다.”
“완이가 그리 말하는데 어찌 따르지 않겠소. 안 그래도 부인과 함께 움직일 참이었소.”
한립도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 * *
이틀 후, 한립은 화석노조에게 꼭두각시들을 데리고 묵령성주를 떠나 소령천의 특수 재료들을 모으도록 명한 뒤 남궁완은 데리고 출발했다.
주과아는 남궁완의 정식 제자가 되어 거대 선박을 지키게 되었다.
보름이 지나, 동글동글한 검은 돌이 가득한 화산들 사이로 상반신은 인간, 하반신은 반투명한 괴이한 생물이 저공비행을 하며 달아나고 있었다.
쿠쿵!
고공에서 금색 거대 손이 등장해 불경소리와 압도적인 힘을 방출하자 하반신이 반투명한 생물은 기겁해 몸을 날렸다.
단번에 몇 백 장 밖에서 나타난 그는 이전보다 배는 빠른 속도로 달아났다. 하지만 서서히 하강하던 금색 거대 손이 어느새 다섯 손가락을 쫙 펴고 반투명한 생령을 내리치고 있었다.
참혹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반투명 생령은 여러 보물들을 방출하고 본래 체질도 특수했지만 금색 거대 손의 강력한 힘 앞에서는 일격에 목숨을 잃었다.
펑!
금색 거대 손이 사라지고 고공에 파동이 일고 한립과 남궁완이 나타났다.
“풍령족(風靈族) 최강자였던 자입니다. 거의 대승기 문턱에 이른 자가 당신의 일격을 버티지 못하다니 정말 할 말이 없네요.”
남궁완은 죽어나간 반투명 생령의 얼굴을 알아보고 크게 놀라워했다.
“이전에 내가 한 말을 믿지 못했던 거요?”
“평범한 대승기 수사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죠. 부군의 수행이면 영계에서도 손에 꼽히는 수사겠어요.”
남궁완은 가볍게 코를 찡긋하며 호기심을 보였다.
“하하, 영계로 돌아가서 직접 보면 알게 될 거요. 자, 이제 출발합시다. 다음번 목표는 거랑족(巨螂族) 일인자인 강근이오.”
한립은 웃음을 흘리며 그녀를 금빛으로 감싸 하늘을 뚫고 날아갔다.
* * *
한 달 후, 만여 마리의 청회색 거대 사마귀들이 회색 보호막으로 물밀 듯이 달려들고 있었다.
회색 보호막 속에는 검은 산봉우리가 떠있었고 그 위에 한립과 남궁완이 나란히 서있었다.
흉악하게 생긴 거대 사마귀 떼 뒤로 체형이 네다섯 배는 큰, 사람의 얼굴이 달린 괴충이 보호막 속의 한립과 남궁완을 주시하고 있었다.
괴충의 몸에서 검은 문신이 빛을 반짝일 때마다 다른 사마귀 요수들이 영향을 받아 핏빛에 휩싸였다.
“한 번에 이렇게 많은 동족을 조종할 수 있고 단시간이지만 그들의 능력을 증폭시키다니 쓸 만한 실력을 지녔구나. 하지만 충해(蟲海)로 나를 휩쓸겠다는 생각이면 통하지 않을 것이다.”
한립의 담담한 목소리가 울리고 천둥소리가 이어졌다.
콰르릉 콰콰쾅!
금색 뇌전 구슬이 떠올라 요란한 폭음을 터트렸다. 삽시간에 무수히 많은 금색 뇌전 실들이 빠져나가 하늘을 뒤덮는 거대 그물을 이루고 몰려든 사마귀 떼를 일망타진했다.
타닥타닥 거리는 소리가 그물 안에서 쉴 새 없이 들려오고 사마귀 떼는 재가 되어 죽어나갔다.
그러나 인면충(人面蟲) 사마귀만은 낮게 쉭쉭 거리다 입에서 검푸른 액체를 뱉어 뇌전 그물에 구멍을 내고 빠져나갔다.
휘익!
등 뒤로 푸른 날개를 펼친 사마귀가 세찬 바람을 일으키며 독문 비술을 사용해 달아나려 했다. 이때 멀리 보호막 속의 한립이 손끝을 튕겼다.
쉭!
인면충 인근 허공에서 푸른 검기가 쏘아져 나와 불가사의한 속도로 거대 괴충의 허리를 잘라냈다. 이어서 검빛이 빙글빙글 돌며 두 동강난 괴충의 시체를 잘게 쪼갰다.
푸른 검빛 속에서 인면충은 원신과 함께 핏빛 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