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399화 (1,156/2,000)

1399화. 재회 (1)

*

은밀하게 숨겨진 산속 동부.

얼음으로 겹겹이 봉쇄된 밀실 안에서 백의 소녀가 은색 수레바퀴에 앉아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소녀는 은색 광채로 얼굴을 가렸지만 그 윤곽만으로도 절색의 미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 *

보름이 훌쩍 지나 인족 구역 경계에 위치한 산맥 위.

쿠쿵!

커다란 검은 선박이 날아들어 인족 구역의 중심부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산맥에 자리를 잡고 있던 중, 저계 수사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소령천에서는 오랫동안 비행법기를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일부 수사들이 검은 선박을 발견한 순간 특수 법기로 후방에 소식을 전했다.

그래서 묵령성주가 눈에 띄게 이동을 해도 인족 영역을 지나는 동안 아무도 그 앞을 막아서거나 신분을 묻지 않았다.

이틀 후.

검은 선박은 거대한 호수를 지나 맑고 푸른 작은 산 위에 멈추었다.

“한 선배님, 이곳이 제 어머니의 동부가 있는 산입니다. 어머니 외에도 친척 몇 분이 살고 있고요!”

소녀가 희색이 만연해 맑은 목소리로 외쳤다. 주과아가 흥분한 얼굴로 선박을 나서 산 어딘가로 날아갔다.

“하하, 녀석 집이 무척 그리웠던 모양이구나. 간다 말도 없이 가버리고 말이야.”

“한 선생님, 과아가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떠돌다 보니 마음이 앞섰다 봅니다.”

누군가 공손히 한립의 말에 답했다.

푸른빛이 반짝이고 뱃머리에 나타난 것은 한립과 화석노조였다.

주과아는 벌써 산중턱의 어느 석벽으로 뛰어들어 자취를 감춘 뒤였다.

아래쪽에서 누군가 법기를 이용해 자신과 선박을 살피며 경계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한립은 미소를 머금고 고공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한식경이 지나서야 주과아가 들어간 석벽에 밝은 빛이 어리고 소박하고 점잖은 분위기의 부인이 나타났다. 언뜻 보아도 주과아와 상당히 닮아 있었다.

“능비선이 선배님을 뵙습니다. 딸아이가 선배님 덕에 목숨을 부지했다고 들었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부인은 고공의 한립과 화석노조를 보고 멀리서 예를 올렸다.

“자네가 주과아의 모친인가? 수행이 나쁘지 않군. 내 이번에 과아를 데려다주러 이곳에 온 것은 물어볼 것이 있어서라네.”

한립은 상대가 연허기 수행을 지닌 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

“알고 있습니다. 누추하지만 제 동부에서 잠시 쉬어가시겠는지요? 좋은 차나 술은 없어도 외부 세계에서 보기 힘든 영과(靈果)가 있습니다.”

“알겠네. 화석, 너는 바깥에서 기다리거라.”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화석 노조를 향해 분부를 내렸다. 이에 화석 노조는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한립이 흐릿하게 고공에서 사라지고 능비선 옆에 파동이 일었다.

“선배님, 이쪽으로 가시지요.”

점잖은 부인은 소리 없이 나타난 한립의 모습에 깜짝 놀랐지만 곧바로 공손한 자태로 길을 안내했다.

석벽이 빛을 발하고 세 사람은 그 안으로 사라졌다. 동시에 인접한 다른 산속에서는 여러 인족 수사들이 대청에 모여 앉아 거울 속에 비친 외부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과아가 아니냐! 저 검은 선박에서 내리다니 그 옆에 있는 사람이 소문으로만 듣던 인족 대승기 수사인가 보구나.”

유생 차림의 중년인이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보다 참고 있던 숨을 내뱉었다.

“실종된 지 오래였던 과아가 돌아온 것도 놀라운데 대승기 수사와 함께 돌아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른 선배님들께 소식을 보내야 할까요?”

옆에 선 젊은 청년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저리 대놓고 거대한 선박이 날아들었는데 우리가 소식을 전하지 않는다고 선배님들이 모르시겠느냐. 됐다, 대승기 선배님께서 과아와 아는 분이라면 우리에게는 다시없을 기회이다. 잠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켜보도록 하자꾸나.”

중년 유생이 잠시 고민하다 결정을 내렸고, 다른 수사들도 고개를 끄덕여 찬성했다. 비슷한 일들이 다른 산속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 * *

능비선은 한립과 청석 복도를 지내 소박하게 장식된 대청에 도착했다. 대청 안 네 모서리에는 누런 향초가 타고 있는 고풍스러운 돌솥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한립이 대청 중간의 나무 탁자에 앉았을 때 부인은 짝! 짝! 손뼉을 쳤다.

대청 쪽문에서 하얀빛이 반짝이고 팔뚝 크기의 새하얀 다람쥐가 놀랍게도 앞발로 커다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영수의 새까만 눈동자가 생동감 있게 반짝였다.

뭔가 비틀비틀하는 것 같으면서도 바닥에 닿은 두 발이 조용하고 민첩하게 탁자로 올라 능숙하게 쟁반을 내려놓았다.

끽끽!

그런데 영수가 맑은 소리로 울며 한립을 올려다보았고 털이 복슬복슬한 꼬리를 흔들어대는 것이 아닌가!

“설아, 무례하게 굴지 말거라. 어서 내려가 돌아가 있으면 나중에 개원단(開元丹)을 줄 것이야.”

그걸 본 능비선이 안색을 굳히고 영수를 혼냈다.

“하하, 설송수(雪松獸)는 영계에서도 보기 드문 데 영특하기까지 하구나. 영성이 완전히 개발되려면 한 걸음밖에 남지 않았어. 만남 김에 내 도움을 주마!”

한립은 개의치 않고 미소를 지었고, 그의 소매 속에서 진한 향기가 나는 단약이 날아갔다.

설송수는 그 냄새를 맡자마자 흥분해서 냉큼 단약을 물어 꿀꺽 삼키고 탁자에서 내려왔다.

잠시 후, 작은 짐승이 낑낑거리더니 새하얀 털이 암홍색으로 물들어갔다. 그리고 설송수의 몸속에서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선배님, 이게…….”

“어머니, 안심하세요! 한 선배님을 만난 건 설아에게 큰 기연이라고요.”

놀란 능비선이 너무 놀라 입을 뗐는데 옆에서 주과아가 빙긋 웃으며 눈짓을 했다.

작은 짐승은 부르르 몸을 떨더니 갑자기 기운이 강성해져 낮게 울었다.

그러다 고개를 든 설송수가 한립을 보고 놀랍게도 감사의 말을 전했다.

“단약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인! 덕분에 천년이란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습니다.”

“하하, 네 지능이 이미 상당한 수준이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 모습에 능비선도 놀라워하다가 설송수를 대신해 감사 인사를 하고 작은 짐승을 물러가게 했다. 설송수는 한립을 향해 절을 하고 아쉬운 눈빛으로 대청에서 물러났다.

“선배님이 어디서 오셨는지는 과아에게 들었습니다. 마계에 떨어져서 선배님을 만나다니 전화위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지 않았으면 평생 딸아이를 다시 만나지 못했을 테고요. 제게 따로 물어보실 것이 있다고 하셨는데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아는 것이라면 결코 숨기지 않겠습니다.”

“과아는 우연히 구하게 되었네. 아이가 내 주의를 끌었기 때문이지. 그런데 원래 원영기 경지였다고 들었는데 벌써 연허기에 이르다니 그간 수사도 기연을 만났다 보군.”

“아, 맞습니다. 원래 원영 후기의 수행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아가 주의를 끌었다 하심은…….”

“과아가 그 이야기까지는 할 시간이 없었나 보군. 좋네, 내가 직접 이야기하지.”

“귀 기울여 듣겠습니다.”

“과아가 익힌 공법아 소녀륜회공이란 것은 알고 있겠지?”

“예, 제가 직접 전수하였는데 어찌 모르겠습니까.”

능비선이 움찔해 주과아를 힐끗 보고 솔직히 답했다.

“허나 과아에게 들으니 자네의 주 공법은 소녀륜회공이 아니었네. 흔히 볼 수 있는 도가 공법인 청기결이라고 했지.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소녀륜회공을 누구에게 전해 받았는가 하는 것이야?”

한립은 평온히 질문했다.

“선배님께서 물어보시려는 것이 그것이라면 정말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과아가 익힌 소녀륜회공은 다른 선배님께서 알려주신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과아가 일정 성취를 이루고 그 선배님께서 동의하시기 전에는 절대 다른 사람에게 그분의 존함을 전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능비선은 정말 곤혹스러웠다.

“그런 사정이라면 상관없네. 나는 공법을 전수해준 이가 사내인지 아니면 여인인지 알고 싶은 것이니까. 이름은 몰라도 이건 말해 줄 수 있겠지? 공법을 전수해준 이가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우린 아주 가까운 사이이고 절대 적이 아니니 걱정할 것 없네. 그녀를 만나보고 싶을 뿐이네.”

한립이 미소를 짓고는 인자하게 말했다.

“……소녀륜회공을 전수해주신 분은, 여인이 맞습니다. 친분이 있으시다니 예외적으로 제가 연락을 취해드릴 수는 있습니다. 그 선배님께서 만나기를 원하시는지 알아봐드리지요. 한 선배님께서는 대승기 수사시고 과아를 구해 주신 은인이시니 그 선배님께도 크게 실례가 되지는 않을 듯합니다. 하지만 거절한다는 답이 오면 저도 어찌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능비선이 잠시 고민하다 방안을 제시했다.

“물론일세. 내 이름과 신분을 알려주기만 하면 되네. 결과가 어떻든 자네의 공은 잊지 않지.”

한립의 얼굴에 웃음이 어렸다.

“공은요, 딸아이를 살려주신 은인이신데 그것에 비하면 보답이 너무 약소해 민망할 지경입니다. 바로 소식을 보낼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시지요.”

부인은 소매 속에서 옥패 형태의 법기를 꺼내 손끝으로 무어라 글자를 적었다.

펑!

법력을 불어넣자 옥패가 분쇄되어 분말로 흩어졌다.

그 시각, 얼음으로 봉인된 밀실 안.

“음?”

은색 수레바퀴 위에 앉아 있던 백의 소녀가 눈을 떴다. 그녀의 고운 손에 빛이 모여들어 하얀색으로 글자를 이루었다.

내용을 살핀 소녀는 손을 털어내고 손끝으로 허공에 글자를 적자 하얀 문자들이 허공에 스며들어 사라졌다.

파앗!

동시에 밀실 안에서 눈부신 빛줄기가 튀어나가 어딘가로 급히 날아갔다.

* * *

한립 옆에서 조용히 소식을 기다리던 부인의 소매 속에서 웅! 진동이 일더니 또 다른 옥패가 날아올라 표면에 하얀 글자를 띄웠다.

능비선은 그것을 보고 활짝 핀 얼굴로 한립을 보았다.

“한 선배님, 선배님께서 내일 아침 일찍 만나 뵙자고 답을 주셨습니다.”

그 말에 한립의 눈에 숨기기 어려운 격정이 스쳤다. 그는 감사를 표하고 소령천에 대한 다른 정황을 묻기 시작했다.

대략적인 사항은 주과아에게 들었지만 최근 정보와 더 구체적인 내용들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반시진이 지나자 한립은 능비선의 동부를 떠나 묵령성주로 돌아갔다. 거대한 검은 선박은 고공에 떠서 움직임이 없었다.

이때 인근 산에는 인족 고계 수사들이 속속들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감히 다가가지 못하고 아주 멀리서만 검은 선박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몇몇 영민한 이들은 한립이 젊은 부인 동부에서 빠져나오자 바로 문하의 제자를 보내 대승기 수사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했다.

능비선은 동족 고계 수사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고 숨길 일도 아니라서 한립의 내력을 솔직히 알려주었다.

이렇게 하룻밤 사이 인족 고계 수사들은 한립이 영계에서 온 인족 대승기 수사란 사실을 알고 극도로 흥분해 앞 다투어 선박에 탄 동족 선배에게 인사를 올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그들이 선박에 접근할 때마다 무형의 금제가 앞을 막아서서 아무도 다가가지 못했다.

* * *

이튿날 아침, 하늘 끝에서 영기의 빛이 비추고 눈부신 빛줄기가 날아들었다.

‘드디어!’

뱃머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한립은 바로 수결을 맺어 선박이 방출한 무형의 금제를 치우고 일어났다.

선박 위에 둔광이 가시고 인족 남녀 몇 명이 나타났다.

나머지는 거리를 두고 멈추었는데 하늘에서 내려온 절색의 백의 소녀만이 표표히 내려와 한립에게 다가갔다.

한립도 오직 백의 소녀만을 보고 있었다. 그의 지척에 이른 백의 소녀가 반짝이는 눈빛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부군, 드디어 찾아오셨네요! 꼭 와주실 거라 믿었지만 그리움에 고통스러운 날이 이리 길 줄은 몰랐습니다.”

“완이!”

한립은 단 두 글자를 내뱉고 말을 잊지 못했다.

그저 손을 뻗어 아름다운 소녀의 비단결 같은 뺨을 보물처럼 쓰다듬었을 뿐이었다. 그 침묵 안에 모든 말이 담겨 있었다.

백의 소녀는 바로 한립이 오랜 세월 찾아 헤맨 그의 반려 남궁완이자 소령천 인족에서 명성이 자자한 ‘월 선자’였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인족 수사들 사이에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남궁완은 소령천에서 일인자였고 절세의 자태를 지녀 헤아릴 수 없는 소년과 사내들의 마음속에 여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녀가 외부 계면에서 온 사내를 이렇듯 친밀하게 대하자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고 심지어 몇몇은 질투 어린 시선까지 보냈다.

남궁완을 따라 거대 선박 근처에 이른 다른 인족 강자들도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나 백의 소녀는 그런 시선들은 신경 쓰지 않고 거침없이 한립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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