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398화 (1,155/2,000)

1398화. 고수조령(古樹祖靈)

*

“대승기! 정말 인족에 대승기 수사가!”

녹령족 수사들은 한립을 훑고 놀라 소리쳤다. 그러나 한립은 그들이 겨우 합체 중후기 수행을 지닌 것을 보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인족에 대승기 수사가 나온 줄은 몰랐습니다. 선배님의 존성대명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선배님의 수행에 후배들을 상대로 이렇게 무참하게 손을 쓰신 것은 너무 하신 거 아닌가 생각합니다.”

녹령족 수사 한 명이 길게 숨을 내쉬고는 분노를 드러냈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내 앞을 가로막은 이들에게 약간의 훈계도 하지 않는다면 다른 동급 수사들에게 비웃음을 살 일이지! 내 이름은 너희들이 알 것 없다.”

“당신은 외부 계면에서 온 수사시군요!”

한립의 말에서 키 큰 사내가 무언가를 깨닫고 안색이 달라졌다.

“그렇다면 어쩔 텐가?”

“당신이 정말 외부 계면에서 온 것이라면 소령천의 앞날을 위해 잠시 녹해에 남아 주셔야겠습니다.”

얼굴이 긴 사내가 서늘하게 눈을 번득였다.

“겨우 합체기 수사 셋이 오만하기 짝이 없구나. 고수조령(古樹祖靈)을 깃들이는 것만으로 그게 가능할 성싶으냐?”

한립은 웃는 듯 마는 듯 태연히 물었다.

“고수조령에 대해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우연히 이곳에 들어온 것은 아니시군요.”

키 큰 사내가 동공을 수축하며 묻는 말에 한립은 답하지 않았다.

“지금은 떠들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어서 고수조령을 소환하지요! 일족의 앞날을 위해 저자를 반드시 붙잡아야 합니다. 3대1이니 우리에게 승산이 있어요.”

녹령족 여인이 안색을 굳히고 소리치자 두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이전에 전투에서 경험한 고수조령의 위력을 숭배했다. 이에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자신한 것이다.

촤악!

그들은 동시에 왼팔 소매를 찢어냈다. 그러자 팔뚝에 고목(古木)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팔에 새겨진 고목들은 각각 모양이 달라서 잎이 푸르고 울창한 나무도 있었고, 삐죽하게 은색 검처럼 솟은 나무, 다채로운 빛깔에 꽃이 맺힌 나무도 있었다.

“조령현신(祖靈現身)!”

세 명의 녹령족은 동일한 수결을 맺고 나지막이 주문을 외자 그들의 팔뚝에서 푸른 기운이 번지며 작은 나무 허상이 떠올랐다.

아래쪽 울창한 수풀에서 천지원기가 피어올라 무수히 많은 녹색 실들이 작은 나무 허상들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나무 허상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을 찌를 듯 거대한 크기로 변해 우뚝 솟았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이 거목 줄기에 흐릿하게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 눈, 코, 입이 사라진 녹령족 여인과 사내들을 닮아 있었다.

“이게 고수조령이라고? 과연 정순한 나무 속성 영기가 물씬 느껴지는구나!”

거목들이 발산하는 기운에 한립은 이채를 띠었다. 이때 거목들이 휘어지며 세 마리의 거인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각각 녹색 머리를 산발하고 푸른 나무 갑옷을 걸친 거인, 호리호리한 신체에 등 뒤로 아름다운 광채 날개가 달린 녹색 거검을 쥔 거인, 마지막으로 가시가 가득 박힌 은색 갑옷을 입고 은색 망치를 든 거인의 모습을 했다.

변신을 마친 거인 중 산발 거인이 먼저 소리쳤다.

“이제라도 얌전히 우리의 뜻을 따라 준다면 해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며칠간 이곳에 남아 계면의 출입구를 알려주고 떠나면 됩니다. 고수조령이 깃든 채로 일단 싸우기 시작하면 우리도 힘을 조절할 수 없어 당신을 죽일지도 모르니까 말입니다.”

“황당한 소리로구나! 겨우 외부의 힘을 깃들인 것만으로 진정한 대승기 경지에 이르렀다고 여기는 게냐? 내 보기에 별것 아닌 것 같다만, 이런 빙의 비술은 흔치 않으니 너희를 잡아다 연구해보면 좋겠구나.”

한립은 가소롭다는 듯 그들을 흥미롭게 훑었다.

“괜한 소리 말고 공격하시지요. 인족과 우리 녹령족은 어차피 적대관계입니다. 아무리 대승기 수사라도 우리를 저리 우습게 보는데 고수조령의 무서움을 보여주어야지 않겠습니까!”

호리호리한 거인이 분노해 소리쳤다. 그 말을 끝으로 세 거인은 성큼 한 걸음 내딛어 묵령성주로 다가섰다.

뱃머리에 선 한립은 허공을 쿵쿵 밟으며 걸어오는 거인들을 보고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콰릉!

그의 소매 속에서 은색 빛줄기가 튀어나와 무표정한 청년 도사로 변했다.

“해 형의 공법이 마침 고수조령과 상극이니 저들을 맡기겠습니다. 저 중 한 명만 생포해 주시면 됩니다.”

“나무 속성 술법의 강자! 알겠습니다.”

해 도인이 세 거인을 살피고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걸음 내딛었다.

쿠릉!

해 도인은 수많은 은색 뇌전을 몸에 두르고 앞으로 튀어나가 커다란 황금 게로 변했다.

거대 게의 두 집게발이 허공을 찌르고 입에서는 은색 뇌전기둥이 뻗어나가 호리호리한 거인 코앞으로 이동했다.

키 큰 거인과 산발 거인 머리 위로는 파동이 일고 은색 뇌전을 두른 집게발 허상이 위세를 드러냈다.

그 모습에 고수조령이 변한 세 거인들은 깜짝 놀랐다.

상대가 소환한 존재가 그들이 가장 상대하기 꺼리는 뇌전 속성 신통을 부리는데다 싸움을 시작하자마자 강력한 공격을 동시에 쏟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키 큰 거인은 양손의 은색 쌍망치를 휘둘러 수많은 망치 허상들을 날렸다. 그리고 산발 거인은 두 손으로 수결을 맺어 푸른 나무 갑옷에서 거대한 덩굴들을 불러내 그물을 쳤다.

호리호리한 거인은 이미 은색 뇌전기둥이 지척에 이른 터라 심각한 얼굴로 재빨리 들고 있던 녹색 거검을 휘둘렀다. 검 표면이 왜곡되며 녹색 거대 방패로 변해 그 앞을 막았다.

복잡한 문양이 가득 새겨진 방패였다.

세 거인들 주위로 경천동지할 폭음이 연달아 들리고 은색 뇌전이 펑펑 터지며 뇌전 빛을 반짝였다.

콰르릉!

이때 거대 황금 게가 기합을 넣고 등딱지 뒤로 은색 뇌전 문자들을 날려 거대한 뇌전 진법을 만들었다.

뇌전 진법이 빙글빙글 회전하다 천둥소리를 남기고 허공에서 사라졌다. 잠시 후, 세 거인 위에 격렬한 파동이 일고 거대 뇌전 진법이 떠올랐다.

황금 게도 몸을 날려 소리 없이 그 안으로 스며들었다.

거대한 뇌전 진법이 서서히 하강하고 있었다. 아래쪽의 세 거인이 괴성을 질러대며 기운을 폭발적으로 날렸지만 뇌전 진법에 닿자마자 강력한 힘에 갈가리 찢겨나갔다.

콰르릉! 콰콰쾅!

뇌전 진법이 뇌운(雷雲)으로 변해 세 거인을 완전히 파묻자 그 안에서 천둥소리와 거인들의 고통스런 비명이 들려왔다. 이에 한립은 미소를 짓고는 주저 없이 몸을 돌렸다.

마계의 삼대 시조들도 경계하던 해 도인의 신통을 겨우 대승기 수사를 흉내 내는 세 이종족들이 오래 버틸 리 없었다. 게다가 양자 간의 공법은 본래 상극이었다.

역시 일다경이 지나기 전에 해 도인이 덤덤한 얼굴로 선박에 올랐다. 대청에서 묵묵히 법결을 읽으며 깨달음을 구하던 한립이 고개를 들었다.

“전부 죽인 것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한 형의 말씀대로 한 명은 살려두었습니다.”

해 도인은 소매 속에서 은색 병을 꺼내 날려 보냈다. 한립이 그것을 끌어와 의식으로 내부를 살피니 손가락 크기의 원영이 보였다. 얼굴이 길쭉한 녹령족 사내의 원영이었다.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병을 저물탁 속에 넣어두었다. 그때 묵령성주가 다시 웅, 진동을 하고 앞으로 쏘아져 나가고 있었다.

이제 그 누구도 감히 그 앞을 막아서지 못했다.

녹령족 3대 강자를 인족 대승기 수사가 해치웠다는 소식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그 소식에 인근의 이종족들은 대경실색해 분분히 수하들을 풀어 소식의 진위를 알아보려 했다.

얼마 후 소령천 전체가 이 일로 들썩였다. 그러나 묵령성주는 진작 녹령족 영역을 벗어나 반대편에 위치한 인족 구역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 * *

며칠 뒤, 인족 영역의 거대한 산봉우리 위.

고풍스러운 석전 안에서 인족의 강자 몇 명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내 셋과 여인 셋으로 이루어진 인족 수사들은 전부 합체기 수행을 지니고 있었고 표정들이 무척 진지했다.

“확실한 것입니까? 정말 우리 인족의 대승기 수사가 녹령족 늙은이들을 고수조령과 같이 멸했다는 소리예요?”

까무잡잡한 중년 거한이 우렁차게 외쳤다.

“우리 쪽 아이들이 녹해 깊숙이까지 진입하지는 못했지만 다른 종족들의 반응으로 보아 확실합니다. 녹령족들은 서둘러 녹해로 동족들을 불러 모아 완전히 숲을 봉쇄하려는 눈치고요.”

백발노인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하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소령천에서는 대승기 수사가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일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테고요.”

남색 장포를 걸친 미부인이 눈썹을 찌푸렸다.

“저도 이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월 선자를 잊으신 것은 아니겠지요? 그 짧은 시간에 연허기에서 합체기에 이른 엄청난 자질을 떠올리면 아주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이번에는 매섭게 생긴 사내가 말했다.

“월 수사의 자질이야 말할 것도 없지요. 2천 년 만에 인족 최강자로 떠올랐고 심지어 녹령족 고수조령과 싸워서도 밀리지 않았으니까요! 그래도 열악한 소령천에서 정말 대승기에 이를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남포 미부인은 ‘월 선자’라는 말에 안색이 미세하게 달라졌지만 여전히 회의적인 표정이었다.

“월 선자의 역천의 재능이면 희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사나운 인상의 사내는 거침없이 반박했다.

“월 선자가 대승기에 이를 수만 있다면 소령천 인족의 크나큰 복일 것입니다. 문제는 적어도 수백 년은 지나야 도전해볼 수 있을 거란 점이지요. 요즘 아주 중요한 비술을 익히느라 바쁘다던데 이번 논의에 참석할 수는 없나 봅니다.”

백발노인이 평온히 화제를 돌렸다.

“철 수사,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월 선자에게는 폐관수련 중인 곳으로 소식을 보내 놓았습니다. 아마 곧 대답이 있을 것입니다.”

이제껏 말이 없던 마른 사내가 돌연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이런 중요한 일을 월 선자와 상의 없이 결정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었거든요. 그런데 대승기 수사는 대체 어디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일까요?”

백발노인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수사들의 의견을 구했다.

“어디겠습니까. 십중팔구 외부 계면에서 온 대승기 수사겠지요!”

남포 미부인은 당연하다는 듯 눈썹을 끌어올렸다.

“그럴 가능성이 가장 클 겁니다. 인족 대승기 수사라면 영계에서 온 것일 테고요! 소령천에 침입할 수 있었으면 그 통로를 통해 다시 돌아갈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에게는 영계로 돌아갈 다시없을 기회겠죠.”

까무잡잡한 거한이 눈을 빛냈다.

“영계로 가야만 대승기에 진입할 희망에 생길 테니 무조건 이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다른 강대 종족들이 다른 계면으로 통하는 출구를 찾기는 했지만 그곳의 계면 압력이 너무 강해 탄식만 하다가 말았지 않습니까. 이번 인족 대승기 수사는 스스로 외부계면에서 이곳으로 들어온 것일 테니 소령족 인족에게 큰 기연이 되어 줄지도 모릅니다.”

사납게 생긴 사내도 눈빛이 뜨거워졌다.

“흠……. 우리는 영계에 관해 아는 바가 많지 않습니다. 그 대승기 수사가 정말 영계에서 왔는지 혹은 정말 인족 수사인지도 아직은 모른다는 게지요. 그가 동족의 정을 개의치 않거나 아니면 악의를 가지고 찾아왔을 경우를 대비해야 합니다.”

그때 백발노인은 신중하게 제안했다.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고수조령이 깃든 녹령족 강자 셋을 죽였다면 실력이 대단할 텐데 아무래도 월 선자가 출관을 해주어야겠습니다. 인족에서 대승기 수사에 가장 가까운 것이 월 선자니까요.”

사납게 생긴 사내가 동의했다.

“당장 출관하는 것은 어려울 겁니다. 지금은…….”

마른 사내가 미간을 좁히며 무어라 말하고 있는데 대전 밖에도 맑은 울음소리가 들리고 은빛이 날아들었다.

은빛은 허공을 선회해 작은 비검으로 바뀌어 그들 사이의 돌 탁자 위로 떨어졌다. 검 위에는 하얀 옥간이 꽂혀 있었다. 그걸 본 수사들의 표정이 제각각 달라졌다.

백발노인이 옥간을 검에서 떼어내자 검이 부르르 몸을 떨더니 다시 은빛으로 변해 대전 밖으로 사라졌다.

노인은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하얀 옥간을 이마에 가져다 댔다.

잠시 후, 그가 밝은 얼굴로 눈을 떴다.

“과연 월 선자의 비검전서였습니다. 그자가 인족 영역에 모습을 드러내면 직접 만나보겠다고 약조하였습니다.”

“잘 됐습니다. 월 수사가 나서주면 우리야 훨씬 마음이 편하지요.”

마른 사내도 기뻐했고 다른 이들의 표정도 풀어졌다. 그들은 잠시 다른 사항들을 논의하다 석전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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