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397화 (1,154/2,000)

1397화. 녹령족(綠靈族)

*

검은 거대 선박이 적홍색 바위 위에 내려서자 문득 주변이 어두워졌다. 한립이 수결을 맺자 선박의 검은 보호막이 퍼져 바닷물을 밀어내고 주변을 보호했다.

“한 선배님!”

“한 수사.”

화석 노조와 인면교가 다가와 인사를 했다.

“이곳입니까?”

선박에서 내린 한립은 적홍색 바위로 다가갔다.

“예, 저와 도 선배님이 여러 번 확인했으니 맞을 겁니다. 게다가 희미하게 공간파동이 흘러나오는 것을 감지했고요.”

“화석 수사의 말대로입니다. 이곳이 한 형께서 찾으시는 곳이 맞을 거라 확신합니다.”

화석 노조와 도교가 자신 있게 답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도 형. 이제 제가 직접 살펴보겠습니다. 과아야, 이리 오거라.”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선박에 남아 있던 주과아를 불러들였다. 이에 주과아가 서둘러 날아올라 그의 곁에 섰다.

“과아는 나를 따라 이곳이 소령천 입구가 맞는지 들어가 보고 문제가 없다면 화석이 선박과 괴뢰들을 데리고 따라 들어오는 것으로 하겠다.”

“예, 선배님!”

“존명!”

한립의 명에 주과아와 화석노조가 당차게 답했다.

도교는 무턱대고 들어가 보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했지만 한립의 실력을 보았기에 굳이 말리지 않았다.

한립은 금빛으로 주과아까지 감싸 적홍색 바위로 뛰어들었다.

평범해 보이던 바위 표면이 왜곡되자 그들의 신형이 쑥 들어가 사라졌다.

바깥에 남은 화석노조와 도교는 조용히 결과를 기다렸다.

한립은 주과아를 데리고 적홍색 바위 속으로 진입한 순간 둔광이 응결되고 금제에 갇힌 것처럼 움직임이 뻣뻣해졌다.

동시에 외부에서 느껴지던 미약한 공간파동이 더없이 강렬해져 일곱 빛깔 광채를 일으키고 있었다.

의식으로 광채를 훑은 한립은 기합을 넣어 몸을 부풀려 금털 거원으로 변했다.

변신을 마친 한립은 다시 자유를 되찾고 거대한 손으로 주과아를 쥔 채 광채 속으로 들어갔다.

파아앗!

광채 속에서 거원이 기이하게 사라졌다.

* * *

또 다른 계면, 울창한 숲속.

쿠쾅쾅쾅!

거대한 소나무에 무수히 많은 금색 구멍이 생기고 나무 기둥이 폭발하며 거대한 구덩이가 생겨났다.

구덩이의 회전하는 일곱 빛깔 광채 속에서 두 명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한립과 주과아였다.

한립은 주변을 살피고 미간을 좁혔다.

“이곳의 영기는 영계에 비해 옅구나. 과아야, 이곳이 소령천이 맞느냐?”

“영기 농도는 비슷하지만 잠시 살펴보아야 확신할 수 있을 듯합니다.”

주변 풍경을 살피던 주과아가 들뜬 얼굴로 답했다. 소녀는 손수건 형태의 법기를 꺼내 신속히 몇 군데를 건드렸다.

팟!

지도 위에 하얀빛과 함께 지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제 비술이 통합니다! 이곳은 소령천이 확실해요. 위치를 보면……. 소령천 녹해(綠海)에 도착한 듯합니다!”

만면에 희색이 가득해진 주과아가 지도를 확인하고 말했다.

“소령천만 확실하다면 되었다.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화석을 데리고 넘어오겠다. 예상보다 통로를 통과하기가 어려워서 화석 홀로 넘어오지 못할 것이야.”

한립이 분부를 내리고 일곱 빛깔 광채 속으로 몸을 날렸다.

일다경 후, 구덩이 속에서 파동이 요동치고 검은 선박이 서서히 떠올랐다.

선박은 구덩이를 빠져나와 원래의 크기로 돌아갔고 그 위에 한립과 화석노조가 서있었다.

도교 부녀는 통로 반대편에서 한립과 인사를 나누고 제 갈 길을 간 후였다. 주과아가 활짝 웃으며 선박으로 날아올랐다.

“자, 이제 녹해가 어디인지 이야기해 보거라. 네가 살던 곳이 어디인지도. 소령천에 왔으니 네 어미와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

“예, 선배님! 녹해는 녹령족(綠靈族)들이 거주하는 곳입니다. 녹령족은 소령천에서 가장 강력한 이종족 세력으로 소령천 인족과는 적대 관계이고요. 제가 살던 곳은 당연히 인족들이 모여 사는 구역으로 녹해와는 아주 먼 곳에 있습니다.”

“녹령족? 혹시 반투명한 날개를 지니고 있고 피부가 청록색인 이종족을 말하는 것이더냐?”

“엇, 어찌 아셨습니까?”

“그렇게 생긴 이종족들이 이곳으로 몰려오고 있다. 묵령성주가 넘어오면서 계면 파동을 크게 일으켜 녹령족들이 눈치를 챈 모양이구나.”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주과아를 보고 한립이 담담히 대답해주었다.

“그랬군요! 조심하셔야 합니다, 선배님. 녹령족은 소령천의 영기가 희박한 탓에 대승기 수사는 보유하고 있지 못하지만 진령과 비슷한 고수조령(古樹祖靈)과 소통해 대승기 못지않은 위력을 발휘합니다.”

“고수조령? 흥미롭긴 하다만 이곳에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 녹령족이 주제를 알고 현명하게 행동한다면 그냥 두겠지만 감히 날 방해한다면 쓴맛을 보여줄 것이다. 이곳 통로도 다른 이들이 알게 할 수 없으니 금제로 가려둬야겠다.”

주과아의 말에 한립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는 소매를 털어 여러 진법 깃발들을 날렸다.

깃발들이 다채로운 빛을 뿜으며 허공으로 스며들었고 오색 주술문자들이 떠올라 일곱 빛깔 광채 주변에 흐릿하게 빛의 장막을 이루었다.

펑!

한립의 손짓에 빛의 장막마저 보이지 않게 되었고 희미하게 새어 나오던 공간 파동이 완전히 단절되었다.

이어 그는 중얼중얼 주술을 외고는 소매 속에서 녹색 기운을 뿜어 커다란 주술문자를 만들었다.

파아앗!

녹색 문자가 흩어지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폭발한 거대 소나무가 다시 원상복구 되고 구덩이도 사라져 이전과 같은 풍경으로 돌아가 있었다. 한립은 의식으로 꼼꼼하게 확인하고는 갑자기 다른 곳으로 손바닥을 펼쳤다.

쾅!

십여 리 밖의 작은 산이 괴력에 무너져 내려 평지가 되었고 그곳을 중심으로 거대한 손바닥 자국이 깊이 남았다.

“가지.”

그제야 한립은 선박을 조종해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 * *

한식경 후, 눈부신 빛줄기 몇 개가 날아들어 평지가 된 산을 돌아보았다.

둔광이 가시고 나타난 것은 투명한 날개를 지닌 세 명의 이종족 남녀였다.

전부 키가 크고 마른 이들은 피부는 물론 머리카락까지 녹색이었다. 두 사내와 여인이 바닥에 남은 거대한 손바닥 자국을 보고 표정이 심각해졌다.

“족영 수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강력한 실력을 가진 자의 소행입니다. 적어도 우리 셋은 이런 짓을 할 수 없을 테니까요.”

키 큰 녹령족 사내의 물음에 여인이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

“우리 보다 훨씬 강자란 뜻이군요.”

얼굴이 길쭉한 사내가 냉랭히 말했다.

“손바닥 자국의 형태로 보아 인족 수사가 남긴 듯합니다. 인족에서 최근에 이런 강자가 나왔단 말입니까?”

여인은 의혹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인족 최강자는 천문산(天門山) 철균산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도 수행에서 우리를 조금 앞설 뿐이고요. 정말 새로운 인족 강자가 나타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키 큰 녹령족 사내가 나지막하게 답했다.

“조그만 소령천 안에서 그런 일이 있었으면 벌써 소문이 퍼졌을 겁니다. 게다가 인족 강자가 갑자기 녹령족 지역인 녹해에 나타난 것도 이상하고요.”

길쭉한 얼굴의 사내가 냉랭히 의문을 제기했다.

“그건 저도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손바닥 자국을 남겨 놓은 사람을 직접 만나봐야 진상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직접 만나본다고요? 그 인족인이 손바닥 자국을 남겨 놓고 간 의도를 몰라서 하는 말씀이십니까?”

여인의 말에 키 큰 사내가 생각에 잠겼다.

“겁먹고 물러나게 하려던 것이겠지요! 우리 녹해를 무엇으로 보는 것인지! 아무리 인족 대승기 수사라도 해명은 하고 가야할 겁니다.”

길쭉한 얼굴의 사내가 흉흉히 외쳤다.

“물론입니다. 이 일이 바깥으로 퍼지면 다른 종족들도 녹해를 자기들 정원마냥 드나들려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처음에 느껴지던 공간 파동은 또 어찌된 일일까요. 공간 비술을 사용해 이곳으로 이동하기라도 한 걸까요?”

여인이 천천히 의문점들을 짚었다.

“저도 분명 공간파동을 감지했는데 지금은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자가 떠나기 전에 흔적을 지운 것 같아요.”

“어떻게 이곳으로 진입했는지는 잡아다 물어보면 자연히 알게 될 일입니다. 허허, 녹령족 영역 깊숙이 침입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잘된 일 아닙니까? 바깥에서 저런 강자를 마주쳤으면 고수조령을 순조롭게 소환해 낼 수 없었을 테니까요.”

길쭉한 얼굴 사내의 말에 키 큰 사내가 웃음을 흘렸다.

“그건 사실입니다. 그럼 곧바로 추격에 들어가시죠. 다른 족인들은 녹해의 힘을 빌려도 그자를 막아낼 수 없을 겁니다.”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세 둔광이 거대 선박이 사라진 방향으로 날아갔다.

* * *

천여 명의 녹령족들이 쫓아오며 각종 법기를 이용해 선박에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선박의 마정괴뢰들이 빛기둥과 뇌화로 반격을 가해 녹령족들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듯했지만, 사실 녹령족 중 최고로 수행이 높은 이가 연허기 경지에 이렀을 뿐이라 모든 공격이 선박의 검은 보호막에 막혀 사라졌다.

반대로 꼭두각시들의 공격은 허공에 나타난 녹색 이파리 허상들이 막고 있었다.

별안간 거의 절반가량의 녹령족들이 한곳으로 모여 이상하게 생긴 진형을 이루고 주문을 외웠다.

쿠쿵!

아래쪽 수풀에서 녹색 기운이 뻗어 나와 녹령족 위로 거대한 이파리 허상을 만들고 순간이동을 해 선박 위에 나타났다.

당장이라도 검은 선박이 녹색 이파리 허상에 뒤덮일 것 같았다. 이때 거대 선박에서 푸른 거대 손이 날아올라 거대 이파리를 낚아챘다.

츠츠츳!

거대 이파리 허상은 벗어나려 꿈틀거렸지만 푸른 거대 손의 힘이 너무 셌다. 진형을 이룬 수백 명의 녹령족인들이 깜짝 놀라 주술소리가 급격히 빨라졌다.

녹령족인들의 법력이 밀려들어 흐릿하던 거대 이파리 허상이 또렷해졌다.

마치 생명을 얻은 것처럼 강력한 기운을 내뿜는 거대 이파리 허상은 이번에야말로 거대 손에서 벗어나려는 듯했다.

“잔재주를 부리는구나.”

담담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리고 푸른 거대 손이 더욱 힘껏 이파리를 쥐었다.

펑!

녹색 거대 이파리는 그대로 짓이겨졌고 수백 명의 녹령족인들이 법력의 반서를 당해 피를 토해냈다. 수행이 떨어지는 자들은 그대로 고공에서 추락하기도 했다.

그때 뱃머리에 한립이 나타났다.

“살려 보내주려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구나. 내 직접 저승길로 보내주마.”

그는 두 손을 교차해 금색 뇌전구슬을 방출했다.

콰르릉!

금빛이 요란하게 반짝이고 천둥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뇌전 구슬은 누각 크기로 커져 모든 것을 소멸시킬 것 같은 강력한 기운을 내뿜었다.

인근의 녹령족인들이 대경실색해 ‘퇴각!’ 등의 명을 외쳤고, 동시에 모든 녹령족인들이 뒤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립이 직접 나섰으니 그들이 달아나게 둘 턱이 없었다. 냉랭한 시선으로 지켜보던 그는 손가락을 튕겨 거대한 뇌전 구슬에 법결을 던져 넣었다.

콰르릉 콰쾅! 콰릉!

뇌전 구슬이 갈라지며 무수히 많은 금색 뇌전들이 사방팔방으로 튀어 나갔다.

녹령족들은 폭음 속에서 재가 되어 사라졌다. 이에 천여 명에 이르던 이족인들은 이제 수십 명밖에 남지 않았다.

살아남은 이들은 혼비백산해서 거대 선박 위의 적이 그들의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달아났다.

한립은 냉랭히 그들을 쳐다볼 뿐 쫓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가 선박을 다시 출발시키려는데 뒤쪽 하늘에서 세 줄기의 빛이 날아왔다.

둔광이 걷히고 나타난 것은 여인 하나와 사내 둘로 이뤄진 녹령족 강자들이었다. 그들은 녹령족 정예병들이 대부분 처참하게 패한 것을 보고 놀라고 분노했다.

적을 막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녹해의 힘의 보조를 받았는데도 잠깐 사이에 이렇게 많은 사상자가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들이 정예병들을 쫓아오기까지 일다경이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