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6화. 진해궁(鎭海宮)
*
“녀석이 사람을 잘 알아보는구나.”
한립은 아이와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뭐라고요?”
인면교는 당시 연허기 수사였던 한립을 떠올리고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저도 이곳에서 도 수사와 마주칠 줄은 예상치 못했습니다. 일면식뿐이지만 어찌 보면 인연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수사의 신분에 어찌 이런 일을 당하신 겁니까? 진해궁과 은원이 있다하더라도 세 해양 요수들은 대승기 경지에 이르지 못해 귀하의 상대가 되지 못했을 텐데요.”
한립이 미소를 거두고 진지하게 물었다.
“평소였으면 안중에도 두지 않았을 진해궁 장로들입니다. 강적에게 암습을 당해 달아나던 중이라 강력한 신통을 발휘할 수 없어 본명신통과 육체의 힘으로 상대하던 중이었지요.”
도교가 탄식을 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셨군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몸 상태가 어떤지 봐드려도 되겠습니까?”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의외의 말을 건넸다.
“그건…….”
그 말에 인면교가 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하하, 실례가 되는 말이란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허나 수사께서는 천천히 요양을 하시면 되겠지만 따님은 얼마 버티지 못할까 걱정이 되어 그럽니다.”
한립은 도교가 아니라 여자아이를 보고 있었다.
“딸아이의 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보신 겁니까? 달아나다가 적에게 독문비술로 당한 것입니다! 제가 대부분의 위력을 막아냈지만 아직 일부가 남아 있지요. 한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보셨으니 딸아이를 치유할 방법도 있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인면교는 이런저런 고민을 미뤄두고 서둘러 답했다.
“수사께서 직접 치료를 해보신 적은 없습니까?”
“그자의 독문비술은 제 신통과는 상극입니다. 제가 손을 쓰면 딸아이의 상태는 더욱 악화만 되었겠지요. 수사께서 도와주시겠다면 평생 그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따님의 몸을 치유하는 것은 제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심지어 수사가 원래의 대승기 신통을 회복할 수 있게끔 도와드릴 수도 있고요. 그 대신 한 가지 조건을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어떤 요구든 말씀만 하시지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 심각하게 여기실 것 없습니다. 수사께서 저를 도와 심해에서 어떤 장소를 찾아주시기만 하면 되니까요.”
엄숙한 도교의 표정에 한립이 웃음을 흘렸다.
“정말 그게 다입니까?”
“하하, 그럼 무슨 조건인 줄 아셨습니까?”
“아닙니다. 제가 괜한 걱정을 했습니다. 제가 전성기 때였어도 수사를 어찌하지 못했을 텐데, 굳이 중상을 입은 저를 상대로 속임수를 쓸 리 없으실 테지요! 좋습니다. 그게 조건이라면 받아들이겠습니다.”
“마음을 정하셨으면 따님을 데리고 배에 오르시지요. 바로 술법을 펼쳐 두 분을 회복시켜 드리겠습니다.”
인면교는 방대한 크기의 검은 선박을 보고 망설임 없이 아이와 함께 날아올랐다.
묵령성주는 한립이 분부에 따라 원래 경로로 돌아가 하늘을 뚫고 날아갔다.
* * *
이튿날, 선실의 대청.
인면교는 무척 감동한 얼굴로 한립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여자아이는 한결 좋아진 안색으로 그 뒤에 서있었다.
화석노조와 주과아도 손을 모으고 한립 뒤에 서있었다.
“수사의 실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저와 딸아이가 회복되려면 적어도 몇 달은 걸릴 거라 여겼는데, 한 형께서 하루 밤 사이에 치유해주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지금이라면 진해궁에서 다시 장로들을 보내오더라도 오는 족족 잡아 죽일 수도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솜씨입니다. 헌데 진해궁이 어떤 곳인지 이야기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제게는 별것 아니지만 합체 경지의 수사들에게는 대항할 수 없는 세력이겠지요.”
“진해궁은 해양의 거대 세력입니다. 대궁주(大宮主)외에 대승기 궁주가 둘이 더 있고 백여 명의 강력한 해양 요수들이 장로진을 이루어 수많은 해양요수들을 이끌고 있습니다.”
“오, 진해궁 세력이 꽤 큰 것 같은데 수행이 떨어진 수사를 궁주가 쫓지는 않았습니까?”
“제가 진해궁과는 원한이 있지만 다른 해역의 또 다른 대형 세력인 청교전(靑蛟殿)과는 관계가 좋습니다. 제가 적의 손에서 탈출하며 구조 신호를 방출해 청교전의 벗들이 적시에 진해공을 공격해 주었지요. 그들이 다른 두 대승기 궁주들을 막아 주어서 지금까지 달아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허나 청교전으로 향하는 해로는 진해궁 해수들이 완전히 막고 있어 어쩔 수 없이 이쪽으로 달아났던 것이고요.”
인면교는 담담히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런 사정이 있으셨군요. 청교전이란 곳은 청교족의 강자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까?”
“맞습니다! 청교전의 두 전주(殿主)가 청교족의 대승기 수사이자 저와는 생사를 함께하는 벗이지요. 청교전에는 대승기 수사가 둘 뿐이지만 실력이 진해궁 궁주 셋보다 뛰어납니다. 그래서 쌍방의 세력이 엇비슷한 것이고요. 그렇지, 운성에서 뵈었을 때만 해도 연허기 경지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얼마 안 되는 세월 동안 대승기 수사가 되셨습니다! 이렇게 빠른 수행 속도는 처음 들어봅니다. 수사와 같은 뛰어난 자질은 상고시대 고인들 중에서도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도교는 아직도 한립이 대승기 수사가 된 것이 놀라웠다.
“그간 여러 기연을 만나 그렇게 되었습니다. 수행의 근본이 단단하기로는 어디 도 형만 하겠습니까.”
한립은 겸손히 대답했다.
“너무 겸손한 말씀이십니다! 아, 해역에서 찾을 곳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이곳 해역 전체를 속속들이 알지는 못해도 특이한 장소라면 전부 가보았습니다.”
“좌표를 토대로 심해의 어떤 장소를 찾고 있는데 정확한 위치는……. 화석, 네가 도 수사께 세세히 설명해 드리거라. 화석은 물 속성 영수 출신으로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룬 녀석입니다. 그와 대화를 나누시는 것이 수사께서 알아듣기 더 쉬울 것입니다.”
한립은 고개를 돌려 화석노조를 불렀다.
“예! 도 선배님, 저희가 상고제단에서 얻은 좌표를 근거로 위치를 찾는 중인데…….”
화석이 공손히 답하고 앞으로 나서 설명을 시작했다.
* * *
두 달 후, 산호 바위로 가득한 해역 위에 검은 거대 선박이 멈추었다. 수천 마리의 중, 고계 꼭두각시들이 인근 해역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심해 깊은 곳에는 더 많은 마정괴뢰들이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화석노조와 도교도 꼭두각시들 틈에서 의식을 이용해 탐색을 하고 있었다.
한립은 갑판 위에 앉아 눈을 감고 명상을 하고 있는데 주과아가 그 옆에 서서 수시로 바다 쪽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왜 그리 조급해하는 것이냐? 도 수사와 화석이 가능성이 높은 곳이라고 고른 장소이니 곧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이번에도 찾지 못할까 걱정이 되어 그럽니다. 지난번 두 곳도 두 선배님들께서 가능성이 있다고 하셨는데 아무것도 찾지 못했으니까요.”
주과아가 혀를 쏙 내밀며 불퉁거렸다.
“해역이 이리 넓고 지형이 복잡한데 의심이 가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닐 것이다. 허나 이번에는 왠지 예감이 좋구나.”
한립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예에? 선배님의 실력에 그런 예감이 들었다면 거의 확실한 것 아닙니까.”
“물론 그 전에 불청객들을 쫓아야 할 테지만.”
그는 눈을 뜨고는 기뻐하는 주과아가 아닌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 *
그 시각, 아주 멀리 떨어진 해역에서 기이하게 생긴 해양 요수들이 빼곡하게 몰려들고 있었다.
크기가 산처럼 큰 것부터 사람만한 해양 요수까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그 수가 많았다.
맨 앞에 선 청록색 거대 거북 위에 옥관을 쓰고 길게 수염을 기른 사내가 서서 묵령성주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거대 거북 뒤로는 거대 해마와 남색 문어가 뒤따르고 있었다.
“감히 본 궁의 일에 훼방을 놓아? 아주 사는 게 귀찮은가 보구나. 만수대진(万獸大陣)을 준비하라! 육지에서 와서 멋모르고 날뛰는 대승기 수사를 가둬 본때를 보여주겠다.”
긴 수염 사내의 명이 떨어졌다. 그러자 뒤쪽에서 호각 소리가 들리고 해양 요수 대군이 이동해 현묘한 진법을 세우기 시작했다.
해양 요수 대군은 자연히 근처를 순찰 돌던 꼭두각시 병사들의 눈에 띄었고 기세등등하게 맞붙었다.
“멈춰라! 주인님께서 이곳에 볼일이 있으셔서 다른 이들의 침입을 금하셨다. 멈추지 않는다면 죽일 것이다.”
열댓 마리 괴뢰들이 해수 대군의 앞을 막고 은색 갑옷을 입은 대장 괴뢰가 소리쳤다.
“겨우 꼭두각시들이 어딜 나서. 죽고 싶으냐!”
거대 거북 위에 탄 긴 수염 사내가 얼굴을 굳혔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뒤쪽에서 강력한 기운을 지닌 해양 요수 열댓 마리가 포효했다.
콰르릉!
뇌화 덩어리가 해양 요수의 입에서 빠져나와 폭발했다. 폭발에 휘말린 꼭두각시들이 산산조각 나 떨어져 내렸다.
긴 수염 사내가 코웃음을 치고는 다시 손을 저어 요수 대군을 출발시키려 했다.
파앗!
그런데 그때 돌연 허공에서 파동이 일고 수정 실이 튀어나와 순식간에 긴 수염 사내를 휘감았다.
긴 수염 사내는 깜짝 놀랐지만 차분하게 입에서 보라색 방패를 불러냈고 동시에 한 손으로 수결을 맺어 남색 물의 보호막을 일으켜 그 안으로 숨어들었다.
폭! 폭!
거대 방패와 물 보호막이 수정 실에 종잇장처럼 뚫려 나갔다. 수정 실은 전광석화처럼 긴 수염 사내의 허리를 휘감아 잘라냈다.
펑!
긴 수염 사내의 절단된 몸이 거품처럼 터져나가 불투명한 물방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때 금색 실이 사라지고 허공에 팔뚝 크기의 금색 소인이 등장했다.
소인은 손끝에서 무형의 검기를 방출해 물방울 중 하나를 갈랐다. 그 안에는 긴 수염 사내와 똑같이 생긴 소인이 들어있었다.
보물을 여러 개 불러내 몸을 보호하고 있었지만 날카로운 검기에는 통하지 않았고 긴 수염 사내의 원영은 참혹한 비명을 지르다 소멸되었다.
긴 수염 사내를 태우고 있던 거대 거북과 휘하의 요수 대군이 반응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제야 상황을 파악한 요수 대군은 놀라면서도 분노했다.
열댓 마리의 강력한 요수들이 포효하자 바다에 거대한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영기의 빛들이 비처럼 금색 소인에게로 쏟아져 내렸다.
눈빛이 서늘해진 금색 소인이 흐릿하게 변했다.
하늘이 소인의 허상으로 뒤덮이더니 무수히 많은 무형의 검기가 영기의 빛들을 없애고 해양 요수 대군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대승기 수사도 막지 못했던 무형의 검기들을 평범한 해양 요수들이 이겨낼 리 없었다.
요수들은 대부분 산산조각 나 바닷물을 붉게 물들이며 둥둥 떠올랐다.
그 모습에 나머지 요수들이 겁을 먹고 비명을 지르며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늘을 뒤덮은 소인 허상이 한곳으로 모여 금색 소인으로 돌아가 달아나는 요수들을 서늘하게 훑었다.
소인의 손짓에 긴 수염 사내가 죽은 곳에서 저물탁 하나가 날아들었다.
소인은 힐끔 저물탁을 확인하고는 흐릿하게 종적을 감추었다.
* * *
같은 시각, 묵령성주 위.
한립은 남색 빛을 거두고 중얼거렸다.
“이제 불청객들을 쫓아 보냈고, 조용히 좋은 소식만 기다리면 되는 것인가.”
뒤에 서있던 주과아가 그의 말을 들었지만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라 눈만 깜빡거렸다.
반나절 후.
하늘이 어두워질 무렵 바다 속에서 부적이 날아올랐다. 한립이 눈을 번쩍 뜨고 그것을 끌어왔다.
펑!
부적은 붉은 불길로 폭발해 품고 있던 정보를 한립에게 전달했다.
“선배님, 혹시…….”
“그래, 입구로 추정되는 곳을 찾았다는구나. 가자!”
주과아의 물음에 한립이 몸을 일으키며 웃음을 터트렸다. 묵령성주는 검은 보호막으로 둘러싸여 천천히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다채로운 해저 생물들이 가득한 곳에 수백 마리의 꼭두각시들이 모여 적홍색 바위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화석 노조와 도교가 꼭두각시들 앞에 서서 바위를 가리키며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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