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395화 (1,152/2,000)
  • 1395화. 압도

    *

    네 명의 대승기 수사들은 몸에서 광채를 일으켜 기운의 파동을 몰아내고 부서진 고대 거울을 바라보았다.

    “관천경이 깨지다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이 보물은 옥형이 제련한 것이니 어찌된 것인지 아시겠지요?”

    안색이 시시각각 달라지던 영운부인이 입을 열었다.

    “이 정도 거리에서 관천경이 영향을 받아 부서질 정도면 저쪽에 큰일이 벌어진 것이 틀림없습니다.”

    매부리코 노인은 깨진 고대 거울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대답했다.

    관천경은 막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얻은 보물로 아주 먼 곳에서 다른 장소를 관찰할 수 있는 귀한 물건이었다. 그게 망가졌으니 속이 쓰릴 만도했다.

    “관천경이 훼손되기 전에 본 모습은 황풍도가 감당할 수 없는 위력에 뚫리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벽영 수사의 예감대로 무서운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대선생이 미간을 찌푸렸다.

    “황풍도는 현천의 보물이고 거기다 천지이진과 이를 보조하는 대승기 수사가 12명입니다. 도대체 흉마의 신통이 어떠하기에 통제가 안 된단 말입니까.”

    영운부인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에 벽영의 얼굴은 더욱 굳어갔고 그 자리에서 침묵을 지켰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요. 일단은 소명 수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물어봐야겠어요.”

    매부리코 노인은 얼굴을 풀고 소매 속에서 새하얀 옥으로 만들어진 진법 원반을 꺼내 들었다.

    파앗!

    손끝으로 원반 위를 몇 군데 짚자 옅은 은색 문자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러고 원반을 지켜보며 대답을 기다리는데 일다경이 지나도록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노인의 안색이 차차 어두워져 갔다.

    “보아하니 정말 일이 터졌나 봅니다. 소명 수사와 연락이 닿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대비를 해야겠지요. 그쪽의 수사들이 흉마의 손에 당했으면 그 다음은 우리 차례입니다! 벽영 수사가 느꼈던 불길한 예감이 이제 보니 십중팔구 흉마 때문이었던 듯싶습니다.”

    하대선생이 길게 한숨을 토해내며 신중히 말했다.

    “벽영 수사,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먼저 가시렵니까?”

    매부리코 노인이 고개를 돌려 벽영에게 물었다.

    “남겠습니다! 고민스럽지만 저 흉마가 정말 제 운명의 재난이라면 지금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닐 겁니다. 차라리 지금 함께 대항하는 것이 승산이 높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벽영이 서늘하게 눈을 빛내며 결심했다.

    “좋습니다. 이곳에는 대승기 수사가 우리 넷뿐이지만 성 안의 십만 제자와 거대 진법이 있습니다. 흉마도 이번 전투를 치르면 절대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매부리코 노인이 손뼉을 짝! 쳐서 주의를 모았다.

    하대선생과 영운부인도 지금은 달아나거나 물러설 때가 아니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지금 흩어졌다가는 강자에게 각개 격파를 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그들이 피하지 않는 이유에는 자신의 실력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

    같은 대승기 수사라도 그들은 매복하고 있던 열두 명의 대승기 수사와는 급이 달랐다. 이곳에 모인 넷이 힘을 합친다면 그들을 멸살할 수도 있었다.

    그들은 분분히 대청을 떠나 제자와 수하들을 불러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같은 시각, 사막이 있는 곳은 금색 화염의 세계로 변해 있었다.

    천장 높이의 금색 화염산들이 치솟아 거대한 진법을 잘게 부수고 수시로 금색 불 구름을 토해냈다.

    화염 산 아래에는 새까맣게 탄 유골들이 굴러다녔고 고공의 빛의 진법이 변한 거대 거울은 남색 얼음으로 봉인되어 전혀 움직이지 못했다.

    수많은 금색 화염산 중심에 비슷한 크기의 금색 거인이 우뚝 서있었다. 거인의 전신에는 금색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생김새가 흑포 청년과 똑같았다.

    그저 한쪽 눈에서는 금색 불길이 이글거리고 다른 눈에서는 남색 한기가 번득인다는 것만이 달랐다.

    거인은 한 손을 뻗어 혈홍색 거대 두꺼비를 꽉 쥐고 있었다. 두꺼비의 몸 절반은 이미 뜯겨져 나가 있었고 기운이 극도로 쇠약해져 거의 숨만 붙어 있었다.

    거인은 손을 핏빛 두꺼비 머리에 대고 금빛을 내뿜어 추혼술을 펼치고 있었다.

    “원신을 봉쇄해 침입을 막다니 재주가 없지는 않구나! 허나 이것만으로도 정보는 충분하다. 혈도종문들과 혁련상맹 등 혈천대륙 최강자들이 모여 있다 이거지? 이참에 일망타진하면 한동안 귀찮게 굴지는 않겠어.”

    콰르릉!

    웅웅 말을 마친 금색 거인 위로 천둥소리가 울렸다. 허공에서 자금색 뇌전들이 나타나 사슬로 변해 그의 몸을 감고 사라졌다.

    금색 거인은 화염을 일으켜 핏빛 두꺼비를 재로 만들고 흑포 청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쿨럭!

    청년은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그 즉시 금색 피를 토해냈다. 그리고 금색 화염 산들도 환상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흑포 청년은 자신의 뒤통수를 때려 금색 부적을 불러내 손에 쥐었다.

    “변신을 해서 영역을 방출하는 것도 이리 힘들어서야! 이전의 혈제로 큰 수확을 얻었고 사조께서 주신 금품체신선부(金品替身仙符)가 있어서 다행이군. 안 그랬으면 변신하는 순간 계면의 힘에 눌려 터져나갔을 것이야. 부적으로 아직 두 번은 영역을 펼칠 수 있을 테니 저 개미 새끼들을 완전히 소탕할 수 있겠어.

    흐흐, 저들이 몰살당하는 걸 보고도 내 앞을 가로막을 자는 없겠지. 그런데 그 버러지 같은 한 쌍이 빨리도 달아났단 말이야. 변신을 하자마자 사라져? 내가 심어둔 진혼종자(鎭魂種子)를 지니고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으냐!”

    흑포 청년이 금색 부적을 만지작거리며 얼굴이 험악하게 굳었다.

    * * *

    반나절 후.

    벽영 등 대승기 수사들이 머물던 성에서 꼬박 하루 동안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그 전투의 여파로 성을 중심으로 수만리가 하룻밤 사이에 재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며칠이 후에 혈천대륙에는 놀라운 소식이 퍼졌다.

    혈골문을 중심으로 한 거대 종문의 대승기 강자들이 흉마를 상대로 한 전투에서 거의 전멸했다는 소식이었다.

    유일하게 탈출한 만고산 영운부인은 중상을 입어 돌아오자마자 모든 금제진법을 발동하고 만 년 간 만고산을 봉쇄하고 세상사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이에 혈천대륙 전체가 술렁이고 다른 강대 세력들과 나머지 대승기 강자들은 침묵을 지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몇몇 국가와 인근의 작은 종문들이 혈제를 당했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 * *

    그때 한립은 전송진을 이용해 혈천대륙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섬으로 이동해 있었다. 그는 주과아와 화석노조와 함께 묵령성주를 타고 더 깊은 바다로 나아갔다.

    바다 속에는 해양 요수들이 가득했고, 대승기 강자들도 피해 갈만한 강력한 요수들도 있었다.

    그러나 묵령성주는 무장한 꼭두각시들을 가득 태우고 있었기에 앞길을 막는 대부분 요수들은 살아 돌아가지 못했다. 가끔 강력한 해양 요수가 있으면 한립이 직접 실력을 발휘해 격퇴시켰다.

    반년의 시간이 쏜살처럼 지나갔다. 거대 선박은 여전히 더 깊은 해역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콰르릉!

    순풍에 돛을 단 듯 빠르게 이동하던 선박의 전방에서 귀청을 울리는 폭음이 들리고 강렬한 파동이 전해졌다.

    뱃머리에서 꼭두각시들을 부려 배를 조종하던 화석노조는 강력한 파동을 감지하자마자 빛줄기로 변해 선실로 쏘아져 들어갔다.

    잠시 후, 한립은 화석노조와 주과아를 데리고 차분히 갑판으로 걸어 나왔다.

    “대승기 강자가 앞쪽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다고? 파동의 세기로 보아 그런 듯싶구나. 묵령성주로 다가가 무슨 상황인지 알아보자꾸나.”

    눈을 가늘게 뜨고 먼 바다를 살피던 한립이 명을 내렸다.

    “예, 한 선배님!”

    화석노조는 묵령성주의 방향을 틀어 몇 배는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전방의 폭음이 커지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작은 섬이 보였는데 그 위에서 빛덩이들이 반짝이며 무시무시한 파동이 퍼지고 있었다.

    섬은 진작 난장판이 되어 울퉁불퉁하게 파여 있었다.

    한립은 뱃머리에 서서 전방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방대한 육체를 지닌 해양 요수 세 마리가 은색 교룡 한 마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해마 요수, 녹색 거대 거북, 커다란 남색 문어로 이루어진 무리가 뇌화를 뿜거나 몸통박치기를 하거나 아니면 여러 다리를 흔들어 은색 교룡에게 맹공을 가하는 중이었다.

    대승기에 가까운 실력을 지닌 거대 요수들은 이미 상처투성이였다.

    녹색 거북의 등딱지는 금이 가 그 안에서 꿀렁꿀렁 녹색 피가 새어 나왔고, 거대 문어의 다리는 몇 개나 잘려나가 있었다.

    그나마 해마를 닮은 요수는 몸이 멀쩡했는데 허리에 금색 고리가 조이고 있어 다른 요수들보다 행동이 느렸다.

    그러나 세 요수의 공격을 받고 있는 은색 교룡의 상태는 더욱 처참했다. 꼬리와 한쪽 발이 보이지 않았고 은색 비늘도 열에 아홉은 벗겨져 나간 채로 두 눈에서 수시로 피를 쏟았다.

    그럼에도 교룡은 발광하듯 움직이며 은색 뇌전을 방출해 간신히 세 거대 요수의 공격을 막아냈다.

    한립의 시선이 은색 교룡의 복부로 향했다. 보라색 작은 짐승이 몸을 둥글게 말고 교룡의 은색 비늘 하나를 붙들고 죽은 듯이 버티고 있었다.

    한립은 보라색 작은 짐승을 보고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

    거대한 비행 보물이 기운을 숨기지도 않고 날아들었지만 그들은 격렬한 싸움에 침입자가 있음을 알고도 신경 쓸 여력이 없어 보였다.

    은색 교룡의 신통은 대단했지만 1대3으로 싸우며 크게 밀리고 있었다.

    “그만.”

    그때 한립이 탄 거대 선박이 전장으로 뛰어들었고 그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전방의 짐승들에겐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요수들은 몸을 부르르 떨며 약속이라도 한 듯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승기를 잡고 있던 세 해양 요수들은 대노하며 한립을 노려보았다.

    그들의 엄청난 기운이 뭉쳐져 묵령성주에 거산이 떨어지는 것 같은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한립은 코웃음을 치고 한 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등 뒤로 삼두육비 법상이 나타나 눈을 뜨자 세 요수들의 영기의 압력에 몇 배에 달하는 힘이 퍼져나갔다.

    쿠쿵! 쿵! 쿵!

    압력에 밀린 해양 요수들이 한참을 튕겨나가 몸을 가누었다.

    “정체가 무엇입니까. 어째서 남의 일에 간섭이냔 말입니다. 우리가 진해궁(鎭海宮) 장로들인 줄은 알고 이러십니까? 본궁과 척을 지면 법력이 아무리 넘쳐나도 이곳 해역에서 마음대로 운신하기 어렵게 될 겁니다.”

    해마 요수가 눈을 번득이다 사람의 말을 내뱉었다. 협박을 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진해궁? 들어본 적 없다. 썩 꺼지지 않겠다면 강력한 해양 요수를 만남 김에 껍질을 벗기고 뼈를 뽑아다 연기 재료로 써버리겠다.”

    한립은 무표정한 얼굴로 냉랭히 말했다.

    해양 요수들은 화가 났지만 조금 전 그가 방출한 영기의 압력에도 이기지 못하고 밀려났기에 결국 의기소침한 얼굴로 물속으로 가라앉아 사라졌다.

    “저는 도교라 합니다! 도와주신 은혜에 감사 올립니다.”

    은색 교룡이 빙글 돌아 창백한 얼굴의 은색 장포 사내로 변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보라색 장삼을 걸친 아이가 서있었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성격의 사내였지만 한립의 실력을 보고는 방자하게 굴지 않았다.

    “도교. 과연 제가 제대로 보았습니다! 수사셨군요.”

    “저도 수사의 얼굴이 낯이 익다하였습니다. 어디서 뵌 적이 있는지요?”

    은색 교룡이 변한 은색 장포의 사내가 그 말을 듣고 한립을 자세히 살피더니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그 정도로 강한 자를 만나보고 인상이 흐릿하다는 게 이상했다.

    “아버지, 그 사람입니다! 제가 나쁜 사람들에게 잡혀갔을 때 경매회에서 만난 어머니와 기운이 비슷한 오라버니요!”

    옆에 선 여자아이가 코끝을 찡긋거리더니 은색 장포 사내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사내는 운성 경매회에서 만났던 대승기 인면교(人面蛟)였고 여자아이는 그의 직계 후손이자 당시 경매품이었던 작은 짐승이었다.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