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393화 (1,150/2,000)
  • 1393화. 공공의 적

    *

    문봉심의 말에 벽영이 뜻밖이라는 얼굴을 했다.

    “문 선자의 말씀이 맞습니다. 죽임을 당한 것은 혈살 수사 본체가 아니라 실은 화신에 불과합니다. 저도 얼마 전에 들은 소식인데 혈살 수사는 의외의 변고를 당해 원기를 크게 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 결전에 화신을 대신 보낸 것이고요. 혈살 수사가 만년 넘게 공을 들여 제련한 화신이 이번 일로 목숨을 잃었으니 돌아가 어찌 그 친구를 봐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화신을 잃는 게 본체가 죽는 것보다야 백배는 낫지 않습니까. 합당한 보상을 해주면 될 겁니다.”

    은갑 사내가 은색 뇌전을 회수하고 바닥에서 일어섰다. 이전보다는 안색이 한결 나아 보였다.

    “알겠습니다. 뇌 형은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제가 도움을 좀 드릴까요?”

    벽영이 아직도 은갑 사내의 어깨를 깨물고 있는 검은 악귀 얼굴들을 보고 온화하게 물었다.

    “아닙니다. 이것들을 당장 떼어낼 수는 없어도 돌아가 천천히 본명진화로 연화시켜보려 합니다. 그저 이번 결전으로 아끼던 보물 몇 가지를 잃은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은갑 사내가 쓴웃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뇌 수사, 결전 상대가 어떤 종류의 신통을 사용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잠자코 있던 한립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다른 신통은 그럭저럭 상대할 만했는데 귀영(鬼影)을 다루는 비술이 골치가 아팠습니다. 귀영은 형태도 그림자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여자에게 깃들어 육체를 순간적으로 허상화 시켜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게 만들었거든요. 여러 비술과 공법으로 허점을 노리다가 안 되겠어서 패배를 인정하고 이곳으로 온 것입니다.”

    은갑 사내가 달갑지 않은 목소리로 말해주었다.

    “귀영……. 과연 명계의 공법은 독특한 부분이 있군요. 처음 보는 괴이한 공법에 뇌 형께서 어찌할 바를 모르신 것도 당연합니다.”

    문심봉이 위로하듯 말했다.

    “승부가 났으니 우리도 더는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겠지요. 돌아가서 며칠 휴식을 취하며 귀물들이 약속을 지키는지 지켜봅시다.”

    벽영이 바둑판을 거두며 이렇게 말하고는 먼저 날아갔다. 다른 이들도 자연히 그 뒤를 쫓아 요새로 향했다.

    * * *

    한 달 후, 은밀하게 숨겨진 호수.

    촤아아앗!

    거울처럼 평평하던 호수 표면이 갈라지고 검은 거대 선박이 튀어나와 하늘 저편으로 사라졌다. 선박 위를 무장한 꼭두각시 병사들이 순찰하고 있었다.

    한립은 금제가 겹겹이 설치된 밀실 속에서 방석에 앉아 은색 옥간을 살펴보고 있었다.

    강자결전이 끝나고 그는 벽영을 따라 상맹의 총단에 위치한 장경각으로 가서 선가 비술 하나를 손에 넣었다.

    원강조(元罡罩)라 불리는 선계 비술로 대략적이 설명만 듣고 골라온 것이었다. 범성신마공과 현천참령검을 지닌 그는 공격형 선가 비술이 아닌 천지원기로 방어를 하는 특수 법결인 원강조를 택했다.

    위력이 어떨지는 짐작할 수 없어도 선가 비술만의 독특한 점이 있을 게 확실했다.

    단 유일하게 성가신 것은…….

    한립이 눈을 빛내고 들고 있는 옥간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우웅!

    금색 주술문자들이 날아올라 허공에 경문을 완성했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주술문자들은 늘어났다 줄어났다 하며 영성을 가진 것처럼 움직였다.

    바로 선계의 금전문이었다.

    그는 경문을 한참을 살피다 고개를 저었다. 대략적인 내용은 알아보겠지만 내용이 난해해서 완전히 이해하려면 시간이 걸릴 듯했다.

    그가 손끝으로 옥간을 가리키자 펑 하고 금색 경문이 소실되었다.

    생각 끝에 한립은 손바닥을 뒤집어 다른 붉은 옥간을 꺼내들었다.

    손끝으로 옥간을 쓰다듬는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천정궁에서 얻은 천정진인의 의발과 보물이었다.

    원래는 간단히 복제나 해서 갖고 있을 요량이었는데 빙백이 감사를 표하며 옥간을 넘겨주었다. 옥간에 기록된 법결은 천정진인이 뇌전을 정련하던 비술이었다.

    벽사신뢰라는 최상급 뇌전의 힘을 지닌 그에게는 아주 안성맞춤의 비술이었고, 원강조보다 훨씬 이해하기 쉬웠다.

    1년 정도 법결을 연구해왔으니 앞으로 반 년 정도만 노력하면 완전히 공법을 익혀 벽사신뢰 정련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립은 붉은 옥간에 의식을 불어넣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같은 시각, 호수 지하의 커다란 전각 안.

    벽영이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고, 그 앞에 상맹 장로 네 명이 앉아 있었다. 그 중에는 강자결전에 참가했던 문심봉도 있었다.

    “혈골문 등 세력이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몰랐네요.”

    “혈골문을 중심으로 몇 개의 거대 종문에서 12명의 대승기 수사가 나섰다고 합니다. 흉마의 이동경로를 파악해 미리 곤마대진(困魔大陣)을 펼쳐 두고 그곳으로 유인해 함께 격살할 예정이고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노부에게도 퇴마전투를 참관해 달라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듣자니, 낙천곡(落天谷) 하대 선생과 만고산(万蠱山) 영운부인에게도 초청장이 갔다고 합니다.”

    벽영은 차분히 이야기했다.

    “무슨 목적인지 정말 모르십니까? 혈도종문들은 줄곧 우리를 경계해 왔습니다! 그러니 흉마와의 전투 중에 본 맹이 어부지리를 노려 세력이라도 넓힐까 걱정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지 않고서야 군 장로가 이미 가있는데 굳이 벽 형께 와달라고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또 다른 녹포(綠袍) 노인이 비꼬듯 말했다.

    “어찌 되었든 혈골문 등 혈도종문들은 명실상부하게 혈천대륙 최대 세력입니다. 정식으로 관전을 요청해왔는데 거절할 명분이 없어요. 목 형, 낙천곡과 만고산에서는 어찌 한답니까?”

    문심봉이 미간을 찌푸리며 녹포 노인을 향해 물었다.

    “하대 선생과 영운부인은 이미 참관을 수락했다고 합니다.”

    녹포 노인이 신속히 답했다.

    “그들이 수락했다면 더더욱 거절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본 맹의 체면이 서지 않을 테니까요. 흠, 전송진을 준비해 며칠 다녀와야겠습니다. 안 그래도 수많은 생령들을 혈제의 제물로 쓴 흉마가 어떤 방법을 지니고 있을지 궁금하던 차였으니까요.”

    백영은 곰곰이 생각하다 결정을 내렸다.

    “벽 형께서 그리 생각하신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조심하셔야 합니다.”

    문심봉이 고개를 끄덕이며 당부했다.

    “하하, 강자결전을 위해 준비해 둔 방법들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아무리 위험한 상황에 처해도 빠져나올 자신이 있으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벽영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고 이에 다른 장로들도 안심했다. 이어 그들은 소세계 이권과 다른 상맹 관련 업무를 논의하다 물러났다.

    대청에는 벽영만이 홀로 남아 어두운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천기쇄가 나타났으니 곤경이 머지않았다는 뜻일 터. 음사십왕과의 강자결전이 그것이라 여겼는데 아니란 말인가? 곤경을 무사히 지난 것인지 아니면 아직 진정한 재난이 도래하지 않은 것이지 알 수가 없구나.”

    벽영이 허공에 있던 시선을 거두고 고민에 빠졌다.

    * * *

    보름 후.

    한립은 돌덩이들이 쌓여 있는 틈에서 오래된 낡은 제단을 발견해 꼭두각시들을 시켜 파내고 있었다.

    그 시각 벽영은 상맹 병사들을 데리고 혈천대륙 끝에 위치한 거대한 성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성에서 머지않은 산맥 안에 육익과 빙봉이 숨어 있었다.

    그들은 산속에 대충 동굴을 파놓고 방석을 깔고 마주 앉아 원기를 회복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육익은 수시로 품에서 약병을 꺼내 무언가를 마신 후 약효를 연화시켰고 빙봉도 아주 피로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적을 피해 오랜 시간 도망 다녔으니 법력은 물론 정신력도 고갈되는 것이 당연했다.

    “육익 수사, 그래서 이제 어쩔 생각입니까? 이렇게 해서 얼마나 버틸 수 있겠어요.”

    눈을 뜬 빙봉이 고요히 물었다.

    “나라고 그 진선 미치광이가 이렇게 열심히 우리를 쫓을 줄 알았더냐! 허나 안심해도 좋다. 영액(靈液)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따라잡히지 않을 테니.”

    육익도 눈을 뜨고 이를 갈며 말했다.

    “누가 그러게 상대를 자극 하라던가요? 그러니까 열이 받아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 것 아니겠어요.”

    “네가 뭘 아느냐. 내가 상대를 흥분하게 만들어 그 틈을 노리지 않았으면 비술을 사용했어도 달아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정 안 되면 혈천대륙을 떠나 풍원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니 걱정 말거라. 흥, 설마 다른 대륙까지 쫓아오기야 하겠느냐?”

    “혈천대륙을 떠나는 것도 지금 상황에서는 괜찮은 선택 같네요. 진선의 신분으로 혈천대륙에 강림한 것을 보면 분명 이곳에서 할 일이 있는 것일 테니까요.”

    빙봉이 일리가 있다고 여겼는지 눈을 반짝였다.

    그들이 반나절 정도 휴식을 취하고 동굴에서 날아올라 길을 재촉하는데, 느닷없이 네 개의 파동이 일고 흐릿한 인영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강력한 기운에 육익과 빙봉은 둔광을 거두고 멈추었다. 각기 다른 복색을 한 대승기 수사들이었다.

    “어째서 우리 앞을 막아선 것입니까? 용건이 있으십니까.”

    육익이 눈을 가늘게 뜨고 소리쳤다.

    “육익 수사시겠군요. 수사의 말씀대로 드릴 말씀이 있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혈홍색 장포를 입은 험악한 얼굴의 사내가 말했다.

    “저를 아십니까? 혈천대륙에서 동급 수사들과 척을 진적은 없는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오해 마십시오. 이번에 저희가 찾아온 것은 수사를 난처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소한 부탁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부탁? 혈천대륙에서는 이런 식으로 도움을 구하나 봅니다. 제가 거절한다면요?”

    안 그래도 오랫동안 추살을 당하느라 화가 쌓여 있던 육인은 네 명의 혈천 대승기 수사들을 보고 흉흉히 눈을 번득였다.

    만족스러운 답을 듣지 못하면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싸울 기세였다.

    어쨌든 그의 둔술이면 선공을 날리고 달아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화를 가라앉히시지요. 육익 수사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현재 누군가에게 추격당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맞습니까?”

    험악한 인상의 사내는 무표정한 얼굴로 반문했다.

    “그래서 어쩌자는 겁니까?”

    말귀를 알아들은 육익이 순식간에 노기를 지우고 답했다.

    “저희가 부탁드릴 일은 수사를 줄곧 쫓던 자를 어딘가로 유인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그 자를 그곳으로만 유인해 주시면 처리는 저희가 하겠습니다. 쌍방에게 이익이 되는 거래지요.”

    “매복해서 그 자를 처리할 생각입니까?”

    “예, 바로 그것입니다. 허나 이번 작전이 성공하려면 두 분의 협조가 꼭 필요합니다.”

    사내의 말에 육익은 물론 가만히 듣고 있던 빙봉도 꽤나 놀랐다.

    “겨우 네 명으로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허허, 진선이 강림했다고 해도 혈천대륙에서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버려야 할 겁니다.”

    “으하하! 좋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속이 다 시원합니다! 제가 도와드리는 것으로 하지요.”

    자신감 있는 사내의 대답에 육익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상대는 육익의 반응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여겼으나 길게 고민하지 않고 소매 속에서 옥간을 불러내 던져주었다.

    “흉마를 유인해야할 장소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곳에 갇히면 절대 돌아올 수 없을 테니 육익 수사께서 실망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제 목숨을 생각해서라도 최선을 다할 것이니 마음 놓으셔도 됩니다.”

    평소의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온 육익이 옥간을 받았다.

    “수사께서 흉마를 유인하는데 성공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저희는 준비할 것이 많아 먼저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흉악한 인상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포권을 해보였다. 파동이 일고 네 인영은 나타났을 때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육익은 흡족한 얼굴로 그 자리에 떠있었다.

    “정말 미끼가 될 생각인가요?”

    “근심거리를 남이 대신 해결해 주겠다는데 미끼쯤이야 돼줄 수도 있지. 위험을 무릅쓰고 줄곧 도망 다니다가 풍원대륙으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대승기 수사 셋을 도륙하는 것을 직접 보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선계 미치광이를 죽일 수 있다고 보는 건가요?”

    “너도 저들이 하는 말을 듣지 않았느냐. 진선이 강림했다고 해도 혈천대륙에서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말아야 할 거라지 않았어? 감히 그런 말을 할 정도면 그에 걸맞은 준비를 해두었겠지. 그저……. 정말 진선을 상대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겠지만! 그들이 미치광이를 처리하든 아니면 양패구상하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육익은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조소했다.

    “선계 미치광이가 매복을 뚫고 나오면 일이 커질 겁니다. 우리가 유인했다는 것을 모를 리 없으니 이전처럼 고양이가 쥐를 쫓듯 여유를 부리지 않을 거라고요. 그 자가 전력으로 달려들면 얼마 버티지 못할 거예요.”

    빙봉은 그래도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 놈이 아무리 진선이어도 대분의 힘을 봉인당한 상태다. 다수의 대승기 수사들이 암습을 가하면 운 나쁘게 죽을 수도 있고 강력한 신통을 발휘해 포위를 뚫고 나오더라도 원기를 크게 상하고 말겠지. 그때가 되면 요양하느라 바쁠 텐데 우리를 쫓을 시간이 있겠느냐? 게다가 이번 일은 어찌 되었든 우리가 추격을 벗어나 달아날 최고의 기회다. 혹시 모를 위험 정도는 감수할 만하지.”

    육익은 냉소했고 빙봉도 설득이 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

    1